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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구를 보면 보인다

  • 등록일
    2008/04/03 15:37
  • 수정일
    2017/10/11 10:52

 

이효리 위자료 청구 소송사건?

LG 트윈스의 개막전에서 ‘이효리 시구 소동’을 둘러싼 한판 해프닝이 벌어졌다고 한다. 내용인즉 이렇다. 지난 4월1일 LG 트윈스의 잠실 홈 개막전에서 이효리 씨가 LG 구단에 시구를 요청했으나, 구단 쪽에서 이효리 씨가 업계 라이벌인 삼성 및 두산의 광고 모델로 활동 중이어서 거절했다는 보도가 발단이었다. 그러자 이 씨 소속 매니지먼트사에서 “기사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며 소송 의사를 밝혔고, 이에 LG구단이 보도자료를 통해 “이 씨의 시구요청은 없었다”는 내용을 확인해 주며 대략 일단락되는 분위기다.

 

[사진] 1981년 현대건설 사장시절 사원체육대회에서 투구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모습.

 


한국의 시구문화는 천박하다

개막전이나 포스트시즌 시구를 하고 싶다면 인물이 빼어난 여자 연예인이거나, 정치인이어야 한다. 그냥 정치인도 안된다. 최소한 대통령이나 시장 혹은 주무부처 장관정도는 돼야 명함을 내밀 수 있다.

프로야구 원년이었던 1982년의 ‘역사적인’ 개막전 시구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맡았다.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이 95년 시즌 개막전과 94-95년 한국시리즈 1차전 시구자로 나서며 ‘대통령 투수’의 계보를 이었다. 가장 최근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3년 올스타전 시구자로 나섰다.

그렇다면 대통령 끗발 다음으론 또 누가 시구를 했을까. 살펴보니 염보현, 김용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이름이 눈에 띤다. 이밖에도 이원경 전 체육부 장관(1983)을 시작으로 각종 ‘체육부-체육청-문화체육부-체육청소년부-문화관광부 장관 시리즈가 줄을 잇는다(1989, 1990, 1991, 1992, 1994, 1998, 1999, 2000, 2001).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 지난 3월29일 인천 문학구장에서 열린 개막전에서 시구를 할 예정이었으나, 사전에 정보가 유출돼 취소했다. 대통령이 시구를 할 때면 당연히 경호문제가 불거진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시구를 했던 1982년 서울운동장은 스탠드는 시구 뒤 일시에 푹 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나선 올스타전에서는 경호원에게 심판복장을 입혀 루상에 세워뒀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사진] 멋진 투구로 '홍드로'란 별명을 얻은 탤런트 홍수아 씨(왼쪽) 2008년 시즌 워싱턴 홈경기 개막전 시구를 던지고 있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오른쪽)

'홍드로' '윤실링’ ‘샌디 신혜’

 

여자연예인은 뭐 일일이 언급하기도 버겁다. 최근 들어 가장 유명한 사례는 탄탄한 기본기를 선보이며 ‘홍드로’라는 별명을 얻은 홍수아 씨. 이 외에도 ‘샌디 신혜’ 박신혜, ‘윤실링’ 윤정희 등 ‘개념파 시구그룹’과 서인영, 옥주현, 이효리 등 ‘무개념파 시구그룹’ 등으로 나뉜다고 한다. 여기에서 ‘개념파’는 최소한의 형식을 갖춘 와인드업과 야구모자, 운동화 등 복장상태가 양호한 그룹이며, ‘무개념파’는 뾰족구두와 파티복장, 농구수준의 송구능력 등으로 상징된다고 하니, 우리나라 네티즌들 참 무섭다.

애초 프로야구가 ‘우민화 정책의 일환’이었다느니, ‘대기업의 홍보상품’이라느니 하는 비판이 없었던 바는 아니지만, 이쯤 되면 ‘3S 정책’이 그라운드에서 그야말로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을게다. 이러니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줘야 한다’는 식의 해설자 멘트를 들을 때마다 욕지기가 치밀 수밖에. 한국 프로야구의 경우 정치인이 시구에 큰 몫을 하고 있으니, ‘3S 2P(Political 'Propaganda)정책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무튼 한국의 시구문화, 참으로 천박하지 않은가.

 

야구팀 구단주 출신 대통령 조지 부시

메이저리그도 ‘정치인의 시구문화’에서는 별반 다를 게 없나보다. 1910년 윌리엄 태프트(익숙한 이름 아닌가. 맞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등장하는 태프트가 바로 이 태프드다) 대통령의 워싱턴 세네터스와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 개막전 시구를 시작으로, 거의 모든 대통령이 수도인 워싱턴 연고지 팀의 개막전이나 올스타전에 시구자로 나섰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1933년을 시작으로 무려 8차례나 시구를 던져댔으며, 해리 트루먼의 개막전 시구경력은 무려 16번이라고 한다.

로널드 레이건은 젊은 시절에 아예 시카고 컵스의 라디오 중계자로 일한 경험이 있으며, 현 대통령인 조지 W 부시는 더 나아가 텍사스 레인저스의 구단주 출신이다.

 

이럴 때 ‘자본의 천국’인 미국, 그 중에서도 ‘자본주의 스포츠의 아성’인 메이저리그의 예를 들고 싶진 않으나, 뭐 미국에서야 야구가 일종의 ‘민속놀이’와도 같을 테니, 그렇다고 치자.

메이저리그 경기를 오직 TV중계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시구장면을 볼 기회는 사실 그리 많지 않지만, 지난해 포스트시즌에서 본 보스톤 레드삭스의 시구문화는 조금 부럽기도 했다.

레드삭스의 ‘레전드’라 할 수 있는 ‘최후의 트리플 크라운(타율-타점-홈런 수위) 수상자’ 칼 야스트젬스키(Carl Yastrzemski)가 월드시리즈 1차전 시구자로 나서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 것을 비롯해,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86년만의 우승을 일궈냈던 2004년 당시 소속 선수들(이제는 다른 팀 소속이지만)인 케빈 밀라(Kevin Millar)와 빌 뮬러(Bill Mueller)가 각각 ALCS 6차전과 7차전 시구를 맡았다. 특히 밀라는 2004년 ALCS 4차전 9회말 선두타자로 나와 뉴욕 양키스의 마무리 투수 리베라를 상대로 볼넷을 얻어내면서 대역전의 바탕을 마련해 ‘3패 뒤 4연승’ 신화의 시작점이 됐던 선수인 만큼, 팬들의 박수가 남달랐다. 여기까지 보면 사실 한국보다야 좀 낫지만, 사실 뭐 크게 거시기하진 않다.

 

이런 시구를 보고 싶다

2007년 보스톤 레드삭스와 LA 에인절스의 ALDS 2차전.

보스톤은 선발투수 마쓰자카의 난조로 5회까지 뒤지며 어려운 경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힘겹게 찾아온 5회말 원아웃 1-3루 상황에서 타석에 나선 선수는 ‘간판타자’ 매니 라미레즈. 하지만 라미레즈가 친 타구는 1루쪽 파울지역에 떠올랐다. 아웃카운트 하나를 헌납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파울볼이 그라운드와 관중석 사이 절묘한 지점으로 낙하하는 순간, 흰 티셔츠를 입은 한 소년팬이 상대 포수 마티스의 글러브 바로 위 지점에서 이 공을 낚아채 버렸다. 아웃카운트가 순식간에 ‘파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라운드는 돌연 떠들썩해졌고, 이 분위기를 틈타 레드삭스는 5회말 동점을 만든 뒤 더 나아가 승리를 기록했다.

보스톤 레드삭스는 이 시리즈를 승리로 이끈 뒤, 이 ‘흰 티셔츠 소년’에게 ALCS 1차전 시구자를 부탁했다. 이 소년은 ‘Fan of the Year'라는 별명과 함께, 생에 다시는 경험하기 힘든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 시구자‘의 영예도 안았다. 이런 게 팬서비스 아닌가.


[사진] 2007년 보스톤 레드삭스와 LA 에인절스가 맞붙은 ALDS 2차전에서 매니 라미레즈의 파울볼을 한 보스톤 팬이 낚아채는 장면. 득점찬스를 날려버릴 뻔했던 보스톤은 이 상황 직후 동점을 만들며 경기 분위기를 180도 뒤집는데 성공했다.

 

 

 

 

이 해 월드시리즈 2차전. 시구자가 과연 누구일까 궁금해 하는 수만 관중 사이로 앤드류 매든이란 이름의 남자 꼬마아이가 레드삭스 모자를 눌러쓴 채 넓은 그라운드로 나섰다. 장내 아나운서는 13살 어린이 매든이 3주 전 심장이식 수술을 받았다고 알리며, 그에게 재활의 힘을 주기 위해 시구자로 초청했다고 밝혔다. 장내에는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아마도 이 꼬마아이에게는 사람들로 꽉 들어찬 팬웨이파크에서의 시구가 좋은 경험이 되었을 것이고, 혹 (진심으로 그러지 않았기를 바라지만) 수술회복 절차가 비극적으로 끝났다 하더라도, 레드삭스의 팬으로서 생에 잊지 못할 추억을 안은 채 이를 맞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진] 2007년 월드시리즈 2차전 시구자로 나선 앤드류 매든. 시구를 도와주는 사람은 역시 레드삭스의 레전드였던 드와잇 에반스.

 

지난해 한국 프로야구 포스트 시즌, 두산과 SK의 10월25일 경기에서는 빈볼시비로 양 팀 선수 모두가 뛰어나와 몸싸움을 벌인 이른바 ‘벤치클리어링 상황’이 발생했다. 개인적으로야 빈볼도 경기의 일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날 가장 거슬렸던 것은 해설자의 발언이었다.

"팬들이 지켜보고 있고,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줘야 할 프로야구가 이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류였는데, 과연 우리나라 프로야구가 '팬과 어린이의 꿈과 희망'을 운운할 자격이 있나 모르겠다.

변하지 않는 관전환경에, 편의시설이라곤 돈벌이 매점밖에 없는 구장도 구장이지만, 프로야구가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을 위해서 한 게 뭐 있나 궁금해졌다. 한국 프로야구, 이정도면 ‘파렴치’ 수준 아닌가.

메이저리그 각 구단이 오프시즌이나 시즌 중에 벌이는 지역사회 공헌활동 역시, 빈약한 공공 사회보장을 은폐하기 위한 기업의 기부문화에 기인한 것이라는 비판이 있을지언정,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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