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위기관리능력'은 없다

  • 등록일
    2008/05/19 21:38
  • 수정일
    2008/05/19 21:38

 

박찬호와 민족주의

 

 

[사진] 옛 LA 시절, 에인절스와의 인터리그 경기에서 '태권도' 실력을 선보이며 이단옆차기를 작렬했던 대한의 열혈건아, 박찬호
 

박찬호가 등판하는 날, 한국 야구해설계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다. 자국 출신의 선수를 응원하는 것이야 뭐라 할 문제가 아니지만, ‘갖다 붙이기’는 도를 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그 자체로도 ‘레전드급’ 활약을 보였던 게리 쉐필드는 한국인에게 ‘박찬호 도우미’로 더 잘 알려져 있고, 불세출의 포수로 역사에 남을 마이크 피아자는 ‘수비능력이 떨어져 박찬호에게 도움이 안된다’는 검증되지 않은 이유로 한국인의 미움을 사고 있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같은 ‘괴담’ 수준의 정의를 야구중계를 업으로 삼은 일부 해설자들의 입을 통해서도 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박찬호에게 붙여진 미검증된 수식어 중 대표적인 것은 ‘위기관리능력이 뛰어는 투수’라는 칭호다. 주자가 득점권에 진루하거나, 첫타자 포볼이 나올 때면 모든 해설자들의 입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위기관리능력이 뛰어난 투수’라는 문장이 튀어나온다. 그런데, 이 ‘위기관리능력’이란게 과연 뭘까.

 

'위기관리능력',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위기관리능력’이란 개념은 정식화된 ‘스탯(Status)’ 항목이 아니기 때문에, 계산가능한 공식이나 지표가 없다. 굳이 풀자면 ‘투수가 실점 상황에서 실점을 면하는 투구 및 경기운영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혹자는 이를 ‘투수의 운빨’로 해석하기도 한다. 오늘의 의뢰인 박찬호를 중심으로 ‘위기관리능력의 실체’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이 포스트의 주제다.

현재 쓰이는 야구통계를 기초로 ‘위기관리능력’을 가늠해 본다면, 어떤 방법이 가능할까. 생각하기에 따라 [DIPSera-ERA 비교법]이나 [OOPS-ERA 비교법] 등 여러 가지의 방법이 나올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ERC-ERA 비교법]을 사용해본다.

 

ERC - ERA 비교법

 

ERA란 아마도 투수의 능력을 가늠하기 위해 쓰이는 스탯 중에 가장 고전적인 수치일 것이다. ‘방어율’로 해석되는 ERA(Earned Run Average)를 구하는 계산식은 아래와 같다.

 

** ERA = (자책점 × 9) ÷ 투구이닝

 

즉 ERA는 ‘투수가 자신이 투구한 이닝동안 실제로 실점한 점수를 9이닝 완투상황에 따른 실점으로 환산한 숫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수치는 현대에 들어 ‘투구 외적인 요소’가 너무 많이 작용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즉 투수가 투구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 - 예컨대 수비에 따른 땅볼의 안타여부, 외야플라이의 수비범위 등 - 이 수치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운빨’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보정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세이버매트리션의 대부라 불리는 빌 제임스가 세운 ERC 개념이다.

 

** ERC = {(CER × 9) ÷ 투구이닝}- 0.56

** CER(Estimated Component Earned Runs) = {[(안타 - 홈런)×1.255 + 홈런×4]×0.89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0.56}×{사구 + 안타 + 볼넷} ÷ 상대타석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사실은 많이 복잡하지만), 결국 ERC는 기존의 방어율 공식에서 투수가 허용한 자책점 대신 안타, 볼넷, 홈런을 몇 가지 보정을 거쳐 만든 방어율이라 할 수 있다. 즉 ‘투수가 자신의 통제영역에서 허용한 안타나 볼넷 등을 기초로 계산한 가상의 자책점 방어율’인 셈이다.

예를 들어 어떤 투수가 한 이닝 동안 6타자를 맞아 안타 2개와 볼넷 하나를 허용하고도 실점을 면한 경우, ER(실제 자책점)은 0.00이 되지만, CER(허용한 안타와 볼넷으로 계산한 가상의 자책점)은 1.40이 되는 셈이다. 반면 같은 상황에서 실책성 안타(실책으로 기록되진 않지만, 야수가 처리할 수 있었던) 등이 겹치며 2점을 허용한 경우 ER은 2.00이 된다.

 

이 ERC 수치를 바꿔 말하면 ‘허용했어도 투수가 억울할 것 없는 점수’라고 했을 때, 이를 ERA와 비교하면 ‘위기관리능력’(혹은 ‘운빨’)을 가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ERA 〉ERC'인 경우에는 어쩌면 투수의 위기관리능력이 떨어진다고 해석할 수 있고, 반대로 ‘ERA〈 ERC'인 경우에는 위기관리능력이 뛰어나 내줘야 할 점수를 내주지 않았다고 볼 여지가 없지 않다는 것이다.(확정하지 않고 돌려 말하려니 어렵다 ;;)

 

무엇이 무엇을 '관리'하는 걸까

 

자 다시 오늘의 의뢰인 박찬호에게로 돌아와 보자.

박찬호가 2008년 시즌 들어 5.19. 현재 기록하고 있는 ERA는 2.17이다. 반면 같은 기간 그의 ERC는 4.05로, 무려 1.86의 ERC%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467명의 메이저리그 투수 중 27위에 이르는 높은 수치다.

그렇다면 통산성적은 어떨까. 박찬호의 2000년부터 2008년까지 9년간의 통산 ERA와 ERC 성적은 아래와 같다.

 

Year   Team           W   L     ERA     ERC   ERC%

----------------------------------------------------

2000  Dodgers         18  10    3.27   3.54   1.08

2001  Dodgers         15  11    3.50   3.16   0.90

2002  Rangers          9   8    5.75   5.77   1.00

2003  Rangers          1   3    7.58   8.56   1.13

2004  Rangers          4   7    5.46   5.97   1.09

2005  Rangers-Padres  12   8    5.74   5.53   0.96

2006  Padres           7   7    4.81   4.70   0.98

2007  Mets             0   1   15.75  10.88   0.69

2008  Dodgers          1   0    2.17   4.05   1.86

 

안타깝게도 데뷔해인 1994년부터 1999년까지의 ERC를 구할 수가 없어 2000년 이후로의 통계만 비교했지만, 인용할 여지는 있다.

 

‘위기관리능력’이란 것이 실존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한 투수로부터 ‘꾸준한 경향’이 드러나야 한다. 하지만 위 박찬호의 경우, 2008년 특출나게 높고 2007년 특별하게 낮은 ERC%를 기록하고 있을 뿐, 대체로 1점대 안팎의 ERC%를 보이고 있다. ERC%가 ‘1’인 경우 ‘위기관리능력이 뛰어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경우(즉 줄 점수는 주고, 안줄 점수는 안준 경우)’라 볼 수 있으므로, ‘박찬호가 위기관리능력이 뛰어난 투수다’는 정의는 정확치 않은 셈이다. 적어도 위 비교법에 따르면 말이다.

 

'클러치'도 구라다

 

[사진] 보스톤 레드삭스의 데이빗 오티즈. '클러치 능력', 정말 그런걸 갖고 있는거니.. 

 


투수의 ‘위기관리능력’처럼 오용되는 ‘편견’ 중 대표적인 것은 바로 타자의 ‘클러치 능력’이다.

‘클러치 히터’란 ‘득점기회에서 강한 면모를 보이는 타자’를 이른다. 통상 클러치 능력을 가늠하는 스탯으로는 RISP(Runners In Scoring Position, 득점권 주자 상황)에서의 득점타율과 Base Loaded(주자 만루상황)에서의 득점타율이 사용된다.

Men On(누상에 주자가 있는 상황)과 Late&Close(7회 이후에 1점 리드하고 있거나 동점이거나 지고 있는 경우에 동점 주자가 나가 있는 상황)에서의 타율(혹은 득점타율)도 클러치 능력과 관련된 수치로 거론되긴 하나, 앞선 두 개의 스탯이 주로 사용되는 듯하다.

클러치 능력이 뛰어난 타자로 거론되는 대표적인 선수는 보스톤의 데이빗 오티즈이며, 반대로 (특히 큰 경기에서의) 클러치 능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대표적인 선수는 뉴욕 양키스의 알렉스 로드리게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선수의 관련 스탯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련 데이터를 분석한 대부분의 세이버매트리션들은 ‘클러치 능력’을 ‘근거 없는 스탯’으로 평가하고 있다(이 영역은 ‘또 다른 방대한 주제’여서 자세히 서술치는 않으나, 좋은 주제인 만큼 다음 기회에 써보려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