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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다, 스크루볼

  • 등록일
    2008/06/18 01:45
  • 수정일
    2008/06/18 01:45

최근 한국 프로야구의 화제 중 하나는 ‘너클볼(Knuckle Ball)’이라는 구종의 등장이었다.
LG 트윈스의 옥스프링 투수와 우리 히어로즈의 마일영 투수가 선보인 너클볼은 각종 스포츠 관련 매체에 ‘마구’라는 제목을 쏟아냈고, 마일영 선수는 포털 검색어 순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특히 마일영 투수의 경우 ‘4회까지는 호투하다 5회만 되면 갑자기 무너진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 ‘마사회’를 떨쳐버릴 것으로 기대 받고 있다.

물론 ‘경기당 많아야 10개 이내의 너클볼을 던지는 이 두 투수를 말 그대로의 ‘너클볼러’라고 부르긴 어렵다. 또 프로야구 원년의 스타 박철순 투수도 간혹 너클볼을 던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이들 모두가 너클볼을 ‘주무기’로 삼은 것은 아니다.

 

[사진] 너클볼 하나로 벌어먹고 사는 팀 웨이크필드.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리는 독특한 그립을 창시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경우 현존하는 너클볼러는 팀 웨이크필드(Tim Wakefield, 보스톤 레드삭스)와 R.A. 디키(Dickey, 시애틀 매리너스)가 유이한 존재다. 디키의 경우 통산 너클볼 구사율이 63.7%로, 70.7마일의 평균 너클볼 구속을 보이고 있다. 정통 너클볼러의 계보를 이으며 자신만의 그립을 개발하기도 한 웨이크필드의 경우 통산 점유율이 83.2%에 이를 정도로 너클볼을 즐겨 사용하고 있고, 평균 구속 역시 67.2마일로 ‘느릴수록 위력적인 공’인 너클볼의 효과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 야구팬의 경우 옥스프링이나 마일영이 아니더라도 메이저리그를 통해 너클볼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너클볼과 달리 ‘사라진 구종’이 있으니, 바로 스크루볼(Screw Ball)이다.

 

메이저리그에서는 1997년 페르난도 발렌주엘라(Fernando Valenzuela)의 은퇴를 끝으로 스크루볼의 계보가 끊겼으며, 그 앞서서도 크리스티 매튜슨(Christy Mathewson), 칼 허벨(Carl Hubbell), 마이크 마샬(Mike Marshall) 등 스크루볼을 구사했던 투수는 한손으로도 꼽을 수 있을 만큼 귀했다. 한국의 경우 프로야구 원년에 박철순 투수가 간혹 스크루볼을 구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통상 ‘변화구’는 팔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공에 회전을 준다. 이런 변화구는 공의 진행방향으로 더 꺾이게 된다. 우투수가 우타자를 상대로 슬라이더를 던질 경우, 공이 직구의 궤적에서 더 타자의 바깥쪽으로 빠져나가게 되므로, 타자의 배트는 공을 따라가게 된다. 이렇게 헛스윙이나 빗맞은 타구를 유도해 내는 식이다. 우투수에게 좌타자가 유리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것이다. 좌타자의 경우 배트가 따라 나가는 것이 아니라, 공을 마중 나가듯이 스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변화구에 대응하기가 보다 쉽다.

 

하지만 스크루볼은 팔의 진행방향과 반대로 회전을 준다. 이러기 위해서는 손목과 팔꿈치를 비정상적으로 비틀어야 한다. 투구를 마친 뒤에는 여느 투구와는 반대로 손바닥이 타자 쪽을 향하고, 손등은 투수 쪽을 향하게 된다. 따라서 스크루볼은 익히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남용할 경우 투수의 팔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구질로 분류된다. 투수에게 있어 스크루볼이란 효과만점이지만, 빠져들면 스스로를 망치게 되는 마약과도 같은 존재다.

 

[사진] 스크루볼의 그립과 투구법. 손목과 팔꿈치를 기형적으로 뒤틀기 때문에 부상의 원인이 된다.  출처: www.ehow.com

 

1980년 시즌 종반 LA 다저스 소속으로 로스터 확장 덕분에 메이저리그에 진입한 발렌주엘라는 1981년 사이영상과 신인왕, 탈산진왕과 월드시리즈 우승반지까지 한꺼번에 손에 넣으며 기염을 토했다. 그가 이처럼 눈부신 활약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위력적인 스크루볼 덕분이었다. 발렌주엘라는 무려 60-70%에 이르는 스크루볼 점유율을 보이며 타자들을 돌려세웠다. 하지만 발렌주엘라는 스크루볼이 가진 어두운 면, 부상에 시달리며 1988년 이후 사실상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1997년 쓸쓸히 은퇴했다. 그리고 그 뒤, 스크루볼은 메이저리그에서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11년이 지난 2008년 6월3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홈구장인 시티즌뱅크파크에서는 원정팀인 신신내티 레즈의 구원투수 다니엘 헤레라(Daniel Herrera)가 7회 마운드에 올랐다. 바야흐로 스크루볼의 재림이었다.

 

이날 헤레라는 16개의 공을 던지며 무안타 1볼넷 2삼진 무실점으로 필리스 타선을 틀어막았다. 이어 6월11일 홈구장에서 열린 세인트루이스와의 경기에서 6회부터 구원으로 나선 헤레라는 2이닝동안 47개의 공을 던지며 홈런 1개를 포함한 4안타를 허용하고, 1-3루에 주자를 남겨놓은 채 다음 투수에게 공을 넘겼다. 이 두 경기에 걸쳐 헤레라가 던진 투구수는 총 63개며, 이 중 20여개가 스크루볼인 것으로 보인다.

 

MLB.com이 제공하는 Game Day 기록에 따르면, 헤레라의 스크루볼은 비슷한 구속의 체인지업 등으로 분류돼 있다. 두 공은 비슷한 점이 없지 않지만, 헤레라의 경우 공을 뿌리는 순간의 손목 위치와 회전을 주는 방식 등은 스크루볼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공의 궤적을 보면 보다 잘 알 수 있다. 아래 그림은 헤레라가 던진 4개 구종에 대한 평균궤적을 위에서 내려다본 형태로 나타낸 것이다.

 

[그림출처] http://www.hardballtimes.com

 

그림의 왼쪽 시작점이 투수의 릴리즈 포인트다. 헤레라는 좌완투수이기 때문에, 당연히 왼편에서 투구의 궤적이 시작된다. 슬라이더(보라색)는 포수의 시점에서 볼 때 왼편으로 공이 흐르는 반면, 스크루볼(붉은색)은 마치 슬라이더가 거울에 비친 것처럼 정반대의 궤적을 드러낸다. 그래서 좌투수인 헤레라는 대부분의 스크루볼을 (당연히도) 우타자를 상대했을 때 구사했다. 이럴 경우 우타자는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공을 따라가듯이 배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결과가 좋진 않았다. 우타자를 상대로 구사된 스크루볼 중, 스트라이크존 아래쪽으로 낮게 구사된 공은 범타나 헛스윙을 유도한 반면, 높게 제구된 공은 각각 안타와 2루타, 홈런으로 이어졌다.

야구팬에게 있어 다니엘 헤레라의 등장은 참으로 반갑고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수준 높은 리그의 실전에서 쓰이는 스크루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투구 하나 하나가 데이터화되고 분석되는 현대야구에서 스크루볼러의 등장은 발렌주엘라의 그것과는 또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사진] Cincinnati Reds 산하 트리플A 구단인 Louisville Bats 홈페이지에 소개된 Daniel Herrera의 프로파일

 

헤레라는 1984년 생으로, 이제 막 메이저리그에 자신을 선보였던 풋풋한 신인이다. 헤레라는 단 두차례의 메이저리그 등판 이후 6월14일자로 다시 트리플A로 강등됐다. 앞으로 그가 어떤 성장을 거치며 성공적인 투수로 자리를 잡을지, 아니면 수많은 다른 유망주들처럼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고 퇴출될 것인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11년 만에 부활한 스크루볼을 무기로 빅리그에서 당당하게 살아남아 야구를 보는 이의 즐거움을 한층 더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반갑다, 스크루볼.


** 이 포스팅과 관련된 THT의 기사를 보시려면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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