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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와 패싸움, 그리고 빈볼

  • 등록일
    2008/10/14 15:27
  • 수정일
    2008/10/14 15:27

 

지난 10월13일 LA에서 열린 미 프로야구 NLCS 3차전에서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빈볼과 이에 대한 LA 다저스의 보복성 빈볼로 벤치 클리어링 상황(양팀의 모든 선수가 그라운드로 뛰어나와 몸싸움을 벌이는 상황)이 벌어졌다.


통상 이런 사태는 복잡한 과거사가 있기 마련이지만,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NLCS 2차전 경기에서 필리스의 투수 브렛 마이어스는 상대편인 다저스의 주포 매니 라미레즈의 몸을 (일부러) 맞췄다. 이어 다음날 열린 NLCS 3차전에서도 러셀 마틴 등 다저스의 주축선수들이 필리스 투수진의 빈볼에 시달렸다. 이에 다저스의 투수 구로다 히로키는 필리스의 쉐인 빅토리노의 머리로 날아가는 위협구로 보복했고, 가까스로 공을 피한 빅토리노가 구로다에 항의하자 양팀의 모든 선수가 그라운드로 돌격하게 된 것.

 

[사진] NLCS 3차전에서 벌어진 LA 다저스와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벤치 클리어링 사태. 리그 사무국은 양팀 주동자(?) 7명에게 벌금형을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빈볼을 맞을 뻔 했던 빅토리노의 행동이었다. 빅토리노는 다저스의 마틴 포수에게 항의하며 “내 몸을 맞추는 것은 이해하지만 머리를 겨눈 것은 잘못된 것 아니냐”는 몸짓을 연신 반복했다. 즉 보복구가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고, ‘웬만한’ 보복구는 감수할 생각이 있었다는 게다. 즉 ‘이런 상황이면 상대방 투수가 나에게 보복구를 던질만도 하다’는 것을 뜻한다.

 

야구는 존중의 게임이다. 자기 팀이나 팀동료가 상대방으로부터 부당한 위협이나 모욕을 받을 경우, 어떠한 형태로든 보복이 뒤따른다. 최근 들어서는 이같은 상황을 억제하는 것이 심판들의 추세이지만, 오랜 기간 동안 야구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코란’이 준수되도록 스스로를 철저히 통제해 왔다. 즉 아무 상황에서나 빈볼이 날아드는 것이 아니며, 서로 납득할 만한 상황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저스와 필리스 사이에 벌어진 ‘고의로 타자를 맞추는 행위’도 그 중 하나다. 통산 171승을 거두고 은퇴한 뒤, 지금은 TV 야구해설자로 일하고 있는 릭 서트클리프는 이같은 보복행위로 팀동료의 신뢰를 한몸에 받았던 케이스다. 그는 동료 타자가 빈볼에 맞으면 다가가 ‘누구에게 보복구를 던졌으면 좋겠느냐’를 물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사진] NLCS 3차전에서 상대투수 구로다 히로키에게 빈볼을 맞을 뻔한 필리스의 타자 빅토리노가 '왜 머리를 겨누느냐'는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이밖에도 홈런을 친 뒤 베이스를 천천히 뽐내며 도는 행위 △크게 앞서고 있는 경기 후반에 도루와 번트를 하는 행위 △투수와 포수의 사인을 훔쳐보는 행위 △상대방을 언론인터뷰 등을 통해 비난하는 행위 등도 ‘빈볼’의 주요 대상이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오마 비스켈은 자서전에서 클리블랜드 시절 동료이던 투수 호세 메사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이후 다른 팀 소속으로 다시 만나 세 차례 연속 공을 몸에 맞기도 했다.

이같은 보복행위는 오랜 기간 야구계의 불문율로 통해왔다. 이는 ‘신사적이지 못한 행동에는 반드시 응징이 따른다’는 공자님 말씀의 실현 이외에도, 팀동료의 안전을 지키는 수단이었다. 1976년 7월27일, 당시 볼티모어의 타자 레지 잭슨은 뉴욕 양키스의 덕 엘리스가 던진 공에 머리를 맞아 들것에 실려 나갔다. 잭슨이 훗날 “내가 야구를 하면서 가장 무서웠던 순간”이라고 설명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코드가 발동됐다. 볼티모어의 짐 팔머 투수는 곧바로 양키스의 선두타자 미키 리버스의 등짝을 공으로 후려갈겼다.

 

야구 역사상 가장 위협적인 투수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돈 드라이스데일은 더 확실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보복방식은 단순하다. 바로 '2 for 1'이다. 우리 선수 한명이 다치면, 상대팀 선수 두 명이 죽는 거다” 드라이스데일은 심지어 보복대상의 이름이 적힌 명단을 모자 속에 넣어놓고, 임무를 완수할 때마다 하나씩 지워나갔다고 한다.

 

[사진] '보복투수'의 대명사 돈 드라이스데일. "동료 한명이 맞으면, 상대편 두명을 조진다"는 철칙의 사나이. 저 모자 속에 살생부가 있단 말인가...

 

빈볼에 얽힌 법원의 판결을 보자.
2001년 미국 대학야구에서 벌어진 빈볼사건에서 캘리포니아 대법원은 “몸에 공을 맞는다는 것은 야구선수로써 피할 수 없는 고유의 위험이다. 투수가 의도적으로 타자의 몸을 향해 공을 던지는 행위는 오래 된 전통이며, 이를 지칭하기 위해 brushback, beanball, chin music과 같은 용어까지 있을 정도다”라면서 “Citrus 대학의 투수가 의도적으로 Avila 선수의 몸을 향해 공을 던졌다 하더라도, 야구계의 정상적인 규범을 위반했다고 볼 수는 없으며, 타석에 들어선 야구선수도 투수의 공이 자신의 몸을 가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판시했다. 법원도 ‘빈볼의 실체’를 인정한 셈.

 

물론 이같은 상황이 야구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심한 케이스는 바로 아이스하키다. 하키는 선수들의 몸싸움을 용인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부추긴다. 팀의 보직 중에 격투 상황시에 앞장서 적을 제압하는 ‘행동대장’이라고 불리는 선수가 따로 있기도 하다. 원칙에 반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선수들이 직접 용의자를 엄벌하도록 하는 시스템이 하키경기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4년에는 밴쿠버의 행동대장 토드 베르투치가 상대방인 콜로라도의 스티브 무어를 뒤에서 가격해 목뼈가 부러지는 사건이 벌어졌으며, 이와 관련된 형사소송이 제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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