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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로야구 단체행동史

  • 등록일
    2008/10/22 20:52
  • 수정일
    2008/10/22 20:52

 

‘대도’ 김일권과 ‘불고기 화형식 사건’

 

프로야구 출범 이듬해인 1983년, 당시 ‘6개 중 가장 열악한 구단’으로 꼽히던 해태 타이거즈가 시즌 통산 55승44패1무(승률 .556)로 리그 1위를 차지한다. 30승19패1무라는 준수한 전반기 성적으로 일찌감치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한 타이거즈는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후반기 우승팀인 MBC 청룡을 맞게 된다. ‘청룡의 우세’를 점친 많은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타이거즈는 4승1패 낙승을 거두며 ‘용호상박’이란 호들갑이 무색케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4년 4월10일. 잠실에서 MBC와의 경기를 마친 타이거즈 선수들이 속속 인근 한식당으로 들어선다. 지난해 우승을 치하하고, 올 한해도 잘 해보자는 의미로 해태 타이거즈 박건배 구단주가 ‘쏘기로’ 한 불고기 파티였지만, 선수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고 한다. 구단주 훈시와 건배 등 요식행위가 끝났지만, 선수들 그 누구도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당황하는 박건배 구단주의 신음소리와 김응룡 감독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불고기는 점점 숯처럼 타들어갔고, 식당은 잿빛 연기로 뒤덮혔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단체행동’으로 기록된 ‘불고기 화형식 사건’이었다.

 

이날 사건은 우승에도 불구하고 숙소 등급이 더 낮아지는가 하면, 그나마 있던 성과보너스 등이 사라진데 대한 불만에서 벌어졌다. 고참급 몇몇 선수들의 면밀한 각본에 의한 것이란 보도가 있었지만, 고참 중 누구도 주동자를 자처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평소 직선적인 성격으로 가는 곳마다 권위적인 조직문화에 반발해왔던 ‘도루왕’ 김일권이 찍혔다. 김일권은 이후 신인 이순철이 외야를 책임질 수 있게 된 1988년 곧바로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 됐다.

 

[사진] 1983년 도루왕 타이틀을 거뭐진 김일권(오른쪽에서 두번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빠른 발'만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는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단체행동 주동 혐의자'란 이름도 갖고 있다. 사진출처-한국야구위원회

 


한국 최초의 ‘선수회’ 결성 시도

 

최동원.

이 석자는 한국 야구사에 영원히 남을 이름이다. 온몸의 힘을 다 쥐어짜내는 듯한 역동적인 투구동작과, 그 투구폼의 마지막과 함께 오른손을 빠져나가던 강속구로 한국야구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우완 파이어볼러’였기 때문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최동원은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선수회’ 결성을 주도하고, 실제 실행에 옮겼으며, 이로 인해 가해진 ‘징벌성 트레이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988년 9월, 7개 프로야구단 소속 선수 140여명이 대전 유성온천 관광호텔에 모인다. 이들의 목적은 바로 ‘프로야구선수협의회’의 발족. 이날 발족총회에서 선수들은 최동원을 2년 임기의 회장으로 추대하고, 부회장으로 이광은(MBC), 서정환(해태), 계형철(OB) 선수를 각각 선출했다. 선수협의회는 △선수 복지 증진 △회원 친목도모 △경조사와 회원의 이익을 위한 공동 참여 등의 ‘소박한 목표’를 갖고 시작됐지만, 구단주들에게는 당연히 눈엣 가시였다.

 

선수협의회가 ‘노동조합’으로 발전할 것을 우려한 각 구단주들은 곧바로 강경진압에 나섰다. 각 구단은 “선수회 가입 선수와는 절대로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선포하는 한편, ‘이렇게 소속팀을 잃는 선수는 어느 구단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내용의 담합을 맺었다. 당시 선수회 소속 선수들이 대부분 팀의 주축선수였던 점을 감안하면 말 그대로 ‘초강경 조치’였다. 평생 운동만 해온 선수들은 ‘스타선수도 내치겠다는데, 우리라고...’ 하는 우려 속에 주춤거리기 시작했고, 결국 선수회는 발족 한 달여만인 10월 사싱상 와해됐다.

 

당시 롯데 자이언츠에서 끝까지 선수회 활동을 주장했던 김용철과 최동원은 결국 삼성 라이온즈의 장효조, 김시진 선수와 트레이드 된다. 네 선수 모두 해당 팀 안에서 투타를 대표하던 선수였다는 점에서 충격이었지만, 구단주들은 ‘재발방지’를 위해서라도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입장이 강했다.
이에 반발한 최동원이 11월25일 “차라리 은퇴하겠다”며 잠적했고, 팬들이 사나흘에 한번 꼴로 그의 집 앞을 찾아 ‘최동원 선수는 부산을 떠나지 말아주세요’라며 집회를 여는 등 당시 사태는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사진]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선수회' 결성을 주도했던 최동원. 결국 징벌성 트레이드로 롯데를 떠나 삼성에 다다른 그였지만, 롯데 팬들은 그를 '영원한 부산 사나이'로 기억하고 있다. 사진출처-한국야구위원회

 


‘불사조’ 박철순이 진 십자가

 

“너희들은 가만히 있어라. 내가 다 책임진다. 감독님하고 나는 원년부터 산전수전 다 겪은 사이야. 걱정마라. 우리가 멋있게 끝낼테니까”

1994년 9월6일, OB 베어스의 박철순 투수는 16명의 후배들 앞에서 담담히 말을 꺼냈다. 베어스의 ‘정신적 리더’였던 박철순이 내놓은 말이었던 만큼, 듣는 후배들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박철순의 이 말을 시작으로 ‘윤동균 감독 퇴진’을 요구하는 베어스 선수 17명의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틀 전인 9월4일, 베어스는 ‘꼴찌 다툼’을 벌이고 있던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원정경기에서 패했다. 이에 윤동균 감독은 경기 뒤 선수들을 모아놓고 “성의 없는 플레이를 펼친다”면서 “오늘은 매를 들어야겠다”고 협박했다. 주장 김상호 선수 등 고참선수들이 “우리도 최선을 다했지만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았다”며 체벌에 반발하자, 윤 감독은 “이XX들, 야구 안시켜. 내가 책임질테니 모두 돌려보내버려” 호통을 쳤다. 박철순을 비롯한 김형석, 장호연, 김상호, 김상진, 권명철, 이광우 등 고참급 핵심 선수 17명이 숙소인 전주코아호텔에서 미팅을 가진 뒤 집단적으로 팀을 이탈했다. 전주역에서 삼삼오오 흩어진 선수들은 대전역에서 다시 모였고, 다시 열차를 타고 자정께 서울에 도착했다. 잠실운동장 구단사무실 앞에 주차해놓은 승용차를 빼낸 선수들은 5일 양평 플라자콘도 7103호에 집결했고, 다음날 기자들을 불러모아 “윤동균 감독 퇴진”을 요구하는 회견을 열었다. 박철순은 이날 “윤 감독이 옷을 벗으면, 나도 같이 벗겠다”고 선언했다.

 

구단에서는 5일 홍보부의 김종 과장과 정희윤 차장을 급파했다. 피자를 사들고 선수들이 모여있는 플라자콘도를 찾았던 구단이 내놓은 해법은 황당했다. ‘윤 감독 경질불가 및 주동자 5명 은퇴’가 그들의 결론이었다.
선수들은 “그렇다면 계속 싸우겠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결국 몇일간의 줄다리기 끝에 구단과 선수들은 ‘윤동균 감독 교체 및 박철순 김형석 등 5명 은퇴’에 합의했다. 하지만 이번엔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팬들의 반발이 봇물처럼 터져나왔고, 구단은 결국 강영수 선수를 제외한 16명 이탈자 모두를 다시 그라운드에 복귀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김형석 선수가 써내려가던 연속경기출장 기록은 622에서 멈췄다. 시즌 내내 2군에 머무르다 사건 직전 1군으로 승격했던 강영수 선수는 ‘선배’라는 책임감 때문에 이탈에 합류했다가 홀로 방출돼는 비운을 겪었다.

 

[사진] 은퇴식에서 마운드에 입맞춤을 하고 있는 박철순 투수.  척박한 한국 프로야구 현실에서 '질이 다른 투구'를 선보이며 마운드를 호령했던 그는 끝까지 '베어스의 정신적 지주'로 남아 후배들을 위해 앞장섰다. 사진출처-두산베어스 홈페이지

 


‘영원한 회장님’ 송진우와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2000년 1월20일. KBO 이사회는 8개 구단 공동명의의 성명서를 발표한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프로야구 선수협의회와 관련, 참여 선수에게는 강력한 제재를 가할 것’임을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이 날 박용오 KBO 총재는 “이러면 프로야구 안하겠다”는 돌출발언까지 내놨다. 이같은 구단의 움직임은 19일과 20일 이틀에 걸쳐 진행된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입회 서명운동’ 때문이었다. ‘협의회는 곧 노조, 노조는 곧 구단 망하는 지름길’로 생각하는 야구 관계자들임을 보면 별 새삼스런 반응도 아니었다. 
선수협의회는 1월22일 새벽1시20분 발기인 75명으로 창립총회를 강행했고, 이날 오전 8시 KBO는 선수협 참가 선수 전원 방출을 결의했다.

 

하지만 송진우와 양준혁, 강병규, 김재현, 최태원, 마해영, 심정수 등이 주축이 됐던 선수협의회 사태는 88년 있었던 ‘선수회 결성 시도’ 때와는 양상이 다르게 진행됐다. 구단의 반응은 비슷했지만, 이를 둘러싼 여건이 달랐기 때문이다.

구단의 대응은 구태의연했다. 재계약 불가방침과 선수협의회 소속 선수영입 불가 담합 등은 판에 박힌 듯 똑같이 발표됐으며, “선수협을 인정받으려면 배후세력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식의 ‘배후설’도 유포시켰다. 연봉지급은 중단됐고, 선수협 가입 확산을 막기 위해 선수들의 휴대전화를 빼앗았다. 선수들을 지방에 격리시키는가 하면, 감독과 코치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려 선수 본인과 가족들까지 접촉하며 선수협의회 탈퇴를 종용했다. 협박과 회유, 감시와 방출이 시시각각 횡행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야구팬들은 ‘팬들의 선물’이란 지원단을 즉각 구성, 선수협 사무국 실무지원에 나서는 한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각종 법적 분쟁에 대한 변호인단을 구성했다. MBC는 ‘정운영의 100분 토론’에서 선수협 문제를 큰 비중으로 다뤘으며, 이날 토론자로 나온 KBO 이상일 사무차장의 ‘노조 비하발언’으로 민주노총이 KBO 항의방문에 나서고 이를 계기로 선수협 지원 태세에 돌입하는 등 사태가 일파만파로 확대됐다. 2000년 2월27일 ‘선수협의회 후원의 밤’이 성황리에 진행되며 승기가 넘어왔다. 결국 KBO는 2000년 3월15일 선수협 소속 선수들의 팀복귀를 승인하고, ‘제도개선위원회 구성을 통한 논의’에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선수협의회가 사단법인화를 추진하고, 선수 권익보호 등을 위한 각종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자 KBO는 2000년 12월20일 8개 구단 선수협의회 집행부 6명을 일시에 방출했다. 뒤이어 현대 주축 선수 13명이 “선수방출 철회하지 않을 경우 시즌을 보이콧 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같은 날 LG 트윈스 선수단 38명이 선수협의회에 전격 가입했다. 가입행렬은 타이거즈(15명), 와이번스(31명), 자이언츠(27명), 이글스(40명), 베어스(30명)으로 확대됐다.

 

하지만 해피 엔딩은 아니었다. 선수협과 KBO, 각 구단은 2001년 1월20일 ‘선수협을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하되 현 집행부 6인이 사퇴한다’는 내용의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어 ‘선수협 반대 기자회견’ 등을 주도하며 'KBO의 황견 의혹'을 받기도 했던 이호성 선수가 1월26일 새 회장에 당선되며 ‘한겨울 밤의 꿈’은 또다시 잿빛으로 사라졌다.

 

[사진] 선수협 출범 당시 대책회의를 하고 있는 집행부. 훗날 한국프로야구에 선수노조가 생긴다면, 반드시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한다. 사진출처-한겨레

 


프로야구도 노동조합이 필요하다

 

이 외에도 크고 작은 프로야구 선수들의 단체행동이 있었지만, ‘승리’라 부를 수 있을만한 경험을 찾기란 쉽지 않다. 여러 실패요인이 있었지만, 핵심적으론 ‘선수들의 약한 고리’를 치고 들어오는 구단과 KBO에 맞설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법적으로 교섭을 요구할 권한도 없고, ‘자영업자’로 분류돼 각종 재계약 등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선수 쪽으로서는 애초 ‘지는 경기’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답은 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가질 수 있는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것 뿐이다.


물론 선수노조 설립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미국과 일본에서도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매이저리그의 선수노조(MLBPA)는 1885년 처음 결성됐지만, 3차례에 걸쳐 해체와 재결성일 반복하며 힘을 잃어오다가, 1966년 전미철강노동조합 출신인 마빈 밀러를 영입하며 가까스로 자리를 잡았다. 이후 5차례의 파업을 통해 지금의 위상을 갖출 수 있게 됐다. 60여년 역사를 가진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85년에야 선수노조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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