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삶의 깊이가 곧 예술의 깊이! "퀸 락 몬트리얼"

이란 음악그룹과 나와는 대학원을 졸업하면서까지도 그다지 끈적끈적한 인연이 없었다!

사회에 나와 여러 후배들과 여러 행사를 준비하거나 겪어보면서 이들이 그 행사들에서 주로 쓰고자 하는 음악이 <>의 것이란 걸 알고서 <프레디 머큐리>란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사실 일부러 찾진 않았는데, 신문에 난 영화정보를 보고서 애들이랑 꼭 같이 가리라 맘 먹고 표를 예약했다.

 

습도가 그다지 높지 않아 찌는 듯하지는 않았지만 뜨거운 햇볕의 열기를 피할 겸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아이들 성화에 못 이겨 엠피쓰리 수리를 위해 삼성동에 들렀다 미사리 쪽으로 차를 몰았다. 강바람이 시원하게 불었지만, 햇볕이 내리쬐는 강둑은 시원함을 만끽할 곳으로는 적당치 않았다. 혼자서 그늘에 앉아있던 아내를 찾아 팔당댐 옆에 배알미 마을에 있는 <할머니매운탕> 집의 시원한 바깥 평상을 찾아 매운탕을 시켰다. 팔당댐 바로 앞 강가에, 느티나무가 넉넉히 커 빛을 막을 천막이 필요 없는 바깥 자리를 갖고 있어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바람을 만끽하며 매운탕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맛도 썩 괜찮은 편이다. 바로 옆 텃밭에서 손수 가꾼 푸성귀로 겉절이나 도토리묵 무침 등을 만들어 내오기 때문에 마치 시골 친척집에서 밥상을 받는 느낌 또한 좋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강변도로를 달려 영화관에 들어섰다.

웬 주차료는 그렇게 비싼지역시 서울 시내 땅값 비싼 곳에서는 영화 한 편 보기도 겁난다. 네 사람이 4만원에 가까운 돈을 냈는데도 주차료가 4천원이라니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아마도 건물 주차료가 장난이 아닌 모양이었다.

 

<>의 음악을 작정을 하고서 공연실황으로 듣긴 처음이었는데

히트곡을 모아 공연해서인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그 뛰어난 음악성과 <프레디머큐리>의 아주 특별한 떨림(바이브레이션)’이 섞인 음색은, 절로 눈을 감게 만들었다. 게다가 반음씩 음계를 옮겨가며 분위기에 변화를 주는 독특한 화음 구성은 영원히 싫증을 내지 않게 할 것 같은, ‘상큼함을 샘솟게 하는 힘으로 느껴졌다.

 

눈을 감고 목소리만을 듣다가 눈을 떠 <프레디머큐리>의 노래 부르는 얼굴을 보노라면...

문득 저 사람이 이 목소리의 주인공 맞아?’하는 물음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뒷골목 3류 건달 같은 인상을 하고선 마치 여성 같은 천상의 떨림을 가진 고음을 하늘에 걸어놓을 땐이건 마치 나의 미의식이 심각하게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옛날 후배들이, 이 사람이 살아있는 전설일 때엔 아마도 잘생긴 남자의 기준이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거 참어찌 저런 얼굴과 구강구조에서 저런 목소리가 나올까? 새삼 세속적인 미 기준을 가진 내 속세스럼움피식하고 바람 빠진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고음에서의 그 독야청청한 떨림은 온데 간데 없고,

강하게 외침(샤우팅)”으로 내지를 땐 영락없는 파워풀 락커였다. 그는 장르를 넘나들며 그 모든 장르의 음악들을 특성대로 소화해 내고 있었다. 옛날 후배들이 왜 <>에 열광했는지를 오늘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 역시 <프레디머큐리>뒤늦은 열성팬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어느 날 <프레디머큐리>가 그 당시 락커들의 천국이었던...

스위스 레만 호수가에 몽트뢰에서 마지막 나날을 보내던 시절을 얘기하는 티브이 프로에서, 그의 열정적인 공연모습을 그대로 살려놓은 동상, 그 곳 사람들의 그에 대한 끈끈한 애정의 기억과 기념의 분위기를 보며 그저 하나의 다큐멘터리 필름 속의 일로만 생각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가 머물던 집 주인 할머니의 기억에 의해 그는 생생하게 살아나는 듯했는데, 그 할머니의 표정과 그 곳을 찾아 그를 기리던 사람들의 얼굴표정들이 더불어 다시금 떠오르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한밤에 <프레디머큐리>가 문득 내 옆에 와 앉는 듯하다.

 

“… 그는 그의 병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어요... 아프다고 투덜대거나 불평하지도 않고, 경건하게 죽음을 맞이했어요!”

 

늘 무언가에 짓눌려서 지내왔던 지난한 나의 삶이 아니던가?!

내 속에 있는 그 무언가를 제대로 쏟아낼 수 없어 방황했던, 그러다 미친 듯이 생활의 굴레를 벗어나려 애썼던 내 헝클어진 삶의 조각들이 갑자기 허공 속으로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조각들 속에서, 날 표현하지 못해 음악에 매달려 보려 했던, 그러나 어느 한 순간도 겉으로는 드러내 본 적이 없는, 혈기왕성하던 젊은 시절의 방황하던 모습내 맘의 손은 문득 집어 들었다. 한참이 지난 일인데아마도 거의 8년쯤 되었을까?! 그때 날마다 밤마다 매달렸던 음악의 촉촉함은 이제 먼 옛일처럼 느껴진다.

 

<이글스(라이브판/1994)> <아마데우스>...!!!

그때 둘을 마치 내 삶의 하나인 양 끌어안고 날마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선율들을 쫓았다. 오늘밤엔 이들 둘에 <>을 더해, 내가 좋아하는 나의 음악가 트리오를 만들어 볼까나?! 어쩌면 이들이 느꼈던 삶의 무게가 이런 작품들의 깊이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삶의 깊이’,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모든 걸걸고서 모든 어려움을 넘어설 때 비로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또렷해진다. 삶의 깊이에서 나온 예술작품은 그가 불어넣은 느낌그대로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이다!

 

아이들에게 이런 음악과 예술의 힘을 넉넉하게, 하지만 또한 애틋하게 알게 해주고 싶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