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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우리 한국사회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사회의 모든 것들이 위아래 두쪽으로 갈려 이젠 가운데에 아무 것도 남지 않을 듯하다!!!
만약 이번 황우석 사태가 어떤 식으로든...
황우석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회 전반의 분위기에 휩쓸려 갔다면... 그 '역사상황'은 생각하기조차도 싫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행이다'라는 혼잣말과 함께 '편안한 숨'을 내쉬는 내 모습에... 도대체 무엇에 이리도 짓눌렸는가?
"한국사회에서 '상식'과 '합리적 이성'은 아직도 사회전반의 '의식'은 아니다!!!"
또한번 정신 차리고 우리네 최근 현대사를 돌아보게 한다!!!
아니 이번 황우석 사태를 통해서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는 '파시즘'과 '파쇼적 체제운영 및 틀', 구석구석 작동하고 있는 '그 아주 나쁜 헤게모니'... 무섭다!!! 해방 뒤 한국전쟁 앞뒤로 있었던 엄청난 학살, 그 작동의 원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 바로 내 몸을 굼실굼실 기어올라 턱턱 숨이 막히게 한다.
파쇼의 작동원리는 늘 '폭압적 국가권력의 사용'과 '이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
이 두 축을 바탕으로 한다. 이번 황우석 사태를 둘러싼 갈등을 살펴보면, 우리사회의 발전수준과 단계를 알아챌 수 있다.
우선 신흥정치세력인 노무현 정권과 그 세력들조차도...
집권과정에서의 원죄와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인식과 의식의 한계로 말미암아 황우석 사태의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었다. 나아가 지금도 그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그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썩어빠진 보수기득권 세력"인 한나라당을 비롯한 극우보수기득권세력들은 "이 최첨단 초후기자본주의 시대"에 그들끼리의 결합을 더욱 튼튼하게 해나갈 수밖에 없다. 이들의 '교모한 이해결합'은 온갖 기득권 세력들의 총집결을 "황우석을 정점"으로 하여 이뤄냈다. 적어도 몇 주전까지 그들에게 "황우석"은 그들의 기득권을 좀더 길게 만들어주고 굳건히 해줄 "왕도"였다!!!
이의 위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상식'과 '합리적 이성'을 99.99% 마비시키고 나라를 "파쇼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좀더 실감나게 말한다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과도 같았다... 그런데 우리 민초들이 흘린 '60년 동안의 피'는 절대로 '헛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현정권의 정치절차적 민주성(사실 이것도 매우 위선적이지만 말이다)은 그나마 "블랙홀의 흡인력"을 약간 떨어뜨리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주 작았다. 국가권력을 오랫동안 장악해 온 "기득권세력"들은 정권이 바뀌어도 뿌리채 바뀌지 않는다.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이 바뀐다고 몸뚱아리를 만들고 있는 '그 옛것'이 바뀔 리 만무하다. 더구나 새로 들어선 정치세력조차도 그런 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깨달을 만한 '의식의 바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니 황우석을 둘러싸고 우리사회는 온통 미쳐버렸다.
여기서 그간 폭압적 국가권력에 의해 강제로 머릿속에 들어간...
'이데올로기'는 우리 민초들로 하여금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나타날 만한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게까지 했다.
우리의 옛 임금들이나 정치세력들은...
그래도 그들의 근본을 백성들에서 찾았다. 적어도 명시적으로는, 숱하게 남아있는 역사기록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뚜렷이 본다. 그런데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훨씬 더 높은 '인권'을 확립했다고 자처하는 '현대사회'의 집권세력들은 과연 그런가? 우리 현대사를 돌아보며 생각해 본다면, 쉽게 "그렇다"라고 답하기 힘들다... 갑자기 "짧은 혼란"에 빠져든다!!!
너무도 뚜렷한 잘못을 보고서도 그것을 벌할 수 없다면...
과연 그 사회가 그것을 보고서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 갈 것인지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사회가 앞으로 어떤 과정으로 발전해 갈지... 짐작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아 보인다. 우리사회의 모든 기득권 세력들의 생각과 의식은 이런 우리네 "전통적인 근본사상"에서 멀어도 한참 멀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앞으로도 이런 근본적인 것을 둘러싼 '싸움'들이 수도 없이 일어날 것임을 알게 해준다!!!"
왜? 도대체 왜 이렇게 힘들어야 만할까?
정치적인 면에서의 민주화 발전에도 우리사회는 전세계적인 흐름에 능동적이고 독립적인 대응과 반작용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의 근본원인은 다름 아닌 한국사회의 기득권구조에 있다. 우리 민초의 힘이 아직 약하기 때문이다. 정치와 경제의 현상적 분리흐름과 이와는 반대로 내적으로는 강력하게 결합된 구조로 치닫는 "신자유주의 논리"에 바탕을 둔 나라운영원리와 체제 및 체계로 인하여 "극단적으로 갈린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과 실제에도...
우리의 머릿속은 지나간 "60년의 흔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만약 이번 문제가 "과학" 분야의 일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또 한번 "엄청난 실망과 좌절"을 맛보아야만 했을 것이 틀림없다. 어쨌든 그런 "파쇼의 미친 흐름"을 막아냈다. 그것도 우리 민초들의 힘으로 말이다. 적절한 지도자도 없이... 물론 꼭 지도세력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번의 열매는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합리적 이성'의 아주 큰 울림(공명)을 겪었고, 만들어냈다.
"오로지 이것만이 우리네 역사를 열어줄 것이 틀림없다!!!"
"기득권 세력들이 틀어쥔 것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들의 '억측'과 '폭압'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만 하는가?"
"보편적 상식과 합리적 이성... 이걸 빨리 되살려 우리 민초들 모두가 '또렷한 정신'을 지녀야 한다!!!"
이것들이 어떻게 되살려지는지...
우리는 이번 황우석 사태를 통해 똑똑히 보고 있지 않는가? 이제 다음으로 어떻게 이런 열매들을 우리사회안에 남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요구해야 한다. 아니 우리 스스로 어떻게 만들어 갈지를 생각하고 실제로 움직여야 한다!!!
[나의 추천 글]
장준하 선생은 우리들의 올바른 자화상입니다!!!
그는 뜨거운 열정을 가진 우리나라 우익 민족주의자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열악한 박정희 시대에...
아무도 얘기하지 못하던 '통일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통일은 우리민족의 절대선'임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으로만 보아도 장준하 선생의 성격은 짐작할 만합니다!!! 그런 뜨거운 가슴 때문에 그는 우리민족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고, 이를 풀고자 그 압제의 서슬퍼런 칼날앞에서도 주저없이 '통일'을 외쳐 '분단체제'를 해체하고자 했습니다!!!
누구든 통일을 외치면 '빨갱이'가 되고...
소리없이 사라질 수 있는 상황속에서도 분단체제를 온몸으로 거부하며 박정희 독재정권에 항거하던 그는 '74 남북공동성명'을 보기전까지는 매판독재정권들이 주장해 온 극우반공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아무도 입에 담을 수 없는 '분단체제의 극복'과 '통일은 우리민족의 절대선'임을 주장하게 되었을까요?
그는 일본신학교 재학중 학도병으로 일군에 들어갔다가...
중국 서주에서 탈출하여, 제비도 날아 넘지 못한다는 험하기로 유명한 파촉령 설원을 넘으며 6천리를 걸어 중경임정에 도착하며...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집니다!!! 이를 통해 그의 불굴의 의지와 열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임정에 도착한 그는 임정의 분열상에 다음과 같이 치를 떱니다!!!
>>> 가능하다면 이곳을 떠나 다시 일군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일군항공대에 들어간다면 중경폭격을 자원, 이 임정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 왜냐고요? 선생님들은 왜놈들한테 받은 서러움을 다 잊으셨단 말입니까? 그 설욕의 뜻이 아직 불타고 있다면 어떻게 임정이 이렇게 네 당, 내 당하고 겨누고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
(인용출처: "비극의 현대지도자", 서중석)
장준하 선생의 격정적이고 과격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사건입니다...
그는 이렇듯 불의를 보면, 절대로 참지 못하고, 자신이 느낀대로 곧바로 행동에 옮기는 전형적인 열혈지사적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역사적 중요성은 크게 두 가지로 얘기됩니다!!!
하나는 "사상계"의 출판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통일운동의 제기'입니다. 그가 벌인 통일운동은 반박정희 운동의 핵심이었고, 이는 박정희 정권에 가장 커다란 위협이었습니다!!!
엊그제 조사에서...
해방 뒤 60년 동안 가장 큰 영향을 준 출판물이 바로 "사상계'라는 조사가 있었습니다!!! 이 "사상계"는 최초에 이교승이란 국회의원과 부산 미국공보원의 지원아래 창간되어 주로 친미적인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이때 주로 들어있던 내용들은 미국의 자유주의와 반공주의 기조가 깔린 책들의 번역물을 많이 실었고, 50년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서구문화'에 대한 갈망을 채워주려는 주 흐름과 편승하여 학생들의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해방 직후엔, 친미극우반공주의자들과 같이 일을 하면서...
역시 초기에는 "사상계"의 내용 역시 그런 기조가 주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승만 정권의 폐해를 목도하면서 생각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함석헌 선생과의 결합은 그런 그에게 더욱 큰 생각의 탈바꿈을 불러왔습니다!!!
이승만 정권 아래서...
한국전쟁을 겪으며 대부분의 진보세력들은 궤멸적 타격을 입고 그 세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특히 조봉암 선생의 국보법에 의한 사형은 분단의 상황을 민초들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우리민족의 염원을 남한에서 긴 시간 동안 없어지게 만듭니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장준하 선생은...
1958년 여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625 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란 이승만의 북진통일운동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함석헌 선생의 글에 고무되어 같은호 권두언에 "거족적 반성이 촉구된다"라는 글로 자신의 깨어난 의식을 만천하에 천명합니다!!!
>>> 우리가 일본에서는 해방이 됐다 할 수 있으나, 참해방은 조금도 된 것 없다. 도리어 전보다 더 참혹한 것은 전에 상전이 하나였던 대신 지금은 둘셋이다... 남한은 북한을 쏘련 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여, 있은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없는 백성이다. 625는 꼭두각시의 노름이었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았어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밖에 될 것 없지 않은가 <<<
(사상계 1958년 8월호, 함석헌 선생의 글)
>>> 우리가 얻은 해방은 한낱 주인을 바꾸어 섬기는 것이요, 형태를 달리한 노예생활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가. 생각하는 방향은 일인이 가르쳐준 바요, 조직된 제도 첨단적인 미국류의 모방이요, 운영방식은 이족을 통치함에 사용한 일제의 방식이니 우리의 문화를 어디서 찾겠는가. 이러고도 해방된 민족이라고 하겠는가? <<<
(사상계 1958년 8월초, 권두언)
이때 직전인 1957년엔...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최남선과 이광수를 위한 특별모임을 "사상계"가 주도하기도 하여 함석헌 선생의 비판을 받기도 할 정도였으니, 바로 다음 해에 나온 위의 글은 엄청난 의식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월혁명은 잃어버린 역사를 다시 되찾고...
분단된 민족의 통합을 위한 첫걸음을 다시금 내딛게 해준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4월혁명 공간은 우리사회가 해방 뒤, 어둠속에 숨죽였던 이성을 드디어 다시 빛속에 드러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 공간에서 장준하 선생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진정한 민족주의자의 길임을 깨닫고 그간 극우반공이데올로기에 매몰되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았습니다. 이는 1960년 6월호 "사상계"에서 "혁명상미성공"(손문이 서거할 때 유언으로 남긴 글의 제목)이란 제목으로, 반혁명세력을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 (해방 3년후 친일파들은) 확고부동한 기성기반을 재형성하는데 성공하여 오히려 이를 건드리는 자가 해를 받게 되어버렸다. 혁명과 그 수습의 주객의 전도로 말미암은 미온적인 정책은 끝내 민족정기를 말살하여 버렸고, 의당히 받았어야 할 그들의 응징은 고사하고 일약 건국공로자의 반열에 서게 되었으니...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인사들은 백안시 당하고 그래도 조국독립을 위하여 남북만주나 중국대륙에서 일생을 바친 혁명선배들의 유가족들은 가두에서 문전걸식을 하게 되는 등 의는 떠나가고 불의만이 성장하여 충천하는 세력으로 이 땅을 뒤덮게 됐다.
누가 다시 애국을 하리오!!!
누가 다시 의에 살리오!!!
누가 자기의 몸을 민족의 흥망을 거는 재단에 불사르리오...!!!
이 사태를 혁명적으로 해결치 못하고 넘어간다면 불원간 앞날에 더욱 처참한 비극이 우리 눈앞에 다다를 수밖에 없는 모든 여건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당연히 4월혁명으로 불러야 하며, 이에 따라 모든 수습책이 혁명적 기틀 위에서 움직여야 한다. <<<
하지만 이런 의식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극단적인 반공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4월 혁명과 함께 중립화 통일방안이 모색되어지면서...
이에 대해 극우반공 지배세력들은 자신들의 기반이 되는 분단체제와 태생적인 도덕적, 정신적 취약성에 대한 위협을 강하게 느낌에 따라 아주 예민한 반응을 보입니다. 즉 이런 상황 아래서 장준하 선생 역시 지배세력과 같은 의식의 기반을 가졌으되, 세상의 변화를 직접 겪으며 서서히 올바른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을 갖게 됩니다. 이는 70년대에 들어서며 일어난 역사적 사건인 ’74 남북공동성명’때까지 이어집니다.
그의 열정적 가슴과 실천적 용기는 박정희 쿠데타 세력의 ‘권력욕에 의한 배신’이 일어나면서 또 한번 극적인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박정희와 숙명적인 라이벌이 되면서 그의 삶은 진정 올바른 의식을 갖추게 됩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장준하 선생은 다른 극우반공지배세력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적 활로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파악하고 지지하였으며, 심지어 미국과의 화해를 위해 만남을 주선해 주시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지지는 곧 극렬한 반대로 바뀌고 맙니다. 쿠데타 세력은 약속한대로 군대에 복귀하지 않고 숨겨두었던 권력에 대한 탐욕을 드러내며, 특히 박정희는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을 체포하여 갈아치우며, 자신의 영구적인 집권음모를 실행해 옮기고, 반공법과 인신구속특례법을 공포하여 혁신계 세력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고, 이를 통해 흐트러진 극우반공체제를 다시금 강화합니다.
이에 장준하 선생은 스스로 “사상계”를 통하여 박정희를 비판함은 물론...
함석헌 선생에게 부탁하여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유명한 글을 같이 실어냅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1962년 3월 소위 ‘정치활동정화법’이란 것을 만들어 권력을 독점해 버리는데, 이 법에 의해 장준하 선생은 ‘부패언론인’으로 지목되어 험난한 박정희 시대를 시작하게 됩니다. 피할 수 없는 숙명의 적대적 관계가 박정희와 시작된 것입니다!!!
박정희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대리인으로 논쟁을 벌였던 김종필과 격렬한 ‘민족주의 논쟁’을 시작합니다.
>>> 요즘 민족주의를 팔아 자기 옹호나 자기 변명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무리들을 경계하여야 한다. (김종필이 주장하는 민족주의는) 귀한 외화를 써가면서 사치한 외국호텔 창가에서 향수에 젖어 흐르는 눈물 같은 것이다.
(자신은 중국 광야에서 광복군으로 일본군과 싸우면서) 춥고 배고프고 발톱이 빠지도록 조국을 찾아 헤매는 가운데 뱃속으로 체험한 민족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김종필 등이 민도가 높아야 민주정치가 가능하다고 하면서 강력한 지도자 운운하는 것은 건방진 수작이다, 민도가 높으면서도 우리처럼 못사는 민족은 온 세계에 없다. <<<
(인용출처: “대한일보” 1963년 11월 6일자, 재인용: “비극의 현대지도자”, 서중석)
박정희 세력이 주장했던 ‘민족주의’는...
식민사관에 입각한 제국주의적 역사인식 아래, 몽매한 대중에게 민주주의는 아직 필요치 않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강력한 전제군주적 통치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파시즘’ 또는 ‘군국주의’ 논리의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김종필이 강연한 내용을 들어보죠!!!
>>> 이씨정권은 사대주의와 퇴폐성의 근원이 된 유교를 국교화하여 이를 국가이념으로 채택하고, 봉건적 신분제로의 유교국가적 관료기구를 완비함으로써 오늘의 후진의 씨를 뿌려 놓았던 것입니다.
이래 오백년, 우리 조상들은 유교만을 지상의 것으로 숭상하였고, 유교는 그가 지니는 매우 비과학적인 관념론으로 우리 조상들로 하여금 무위도식하면서 그저 담론풍발 제사횡담 쓸데없는 비분강개로 장구한 시일을 허송케 함으로써 후세에 민족감상주의를 뿌리박았을 뿐만 아니라, 사화와 무자비한 당쟁은 민족을 분렬시켰으며... (중략)
마침내는 19세기로부터 20세기 초에 긍하는 식민지 분할시대에 신흥 일본의 식민지로 된 것이 결코 우연적인 결과가 아니라는 인과를 우리는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중략)
1945년 이래 16년간 한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시행기였습니다. 즉 내 몸에 배지 않은 보편주의 사상을 그대로 시행해본 것입니다. 결과는 정치는 파쟁으로, 경제는 파탄으로, 사회는 문란으로, 자유는 방종과 무질서로 각각 전락됨으로써… 민족을 신념과 예지로써 이끌어나가야 할 강력한 리더십이 강력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정치 풍토를 특징지우는 것에 강력한 행정부와 영도력의 확립이라는 권력 집중 현상을 들 수 있습니다. <<<
즉 이들은 강력한 독재권력과 일방적 통치방식만이...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그 명분은 ‘우리역사의 열등함과 비굴함’에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이야말로 민족의 자주성 회복과 민주주의 발전을 꾀할 ‘강력한(?) 독재권력’이며 또한 독재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죠!!!
장준하 선생에게 박정희의 집권은...
우리 역사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오욕의 상징이었습니다!!!
5천년 역사를 이룬 조상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의 발전을 얘기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일본제국주의 군대에 있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그에게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죠!!!
박정희와의 대립은 장준하 선생을 정치계의 투사로 내몰았고...
그는 더욱 강렬하게 박정희를 비판하며 올바른 현실인식에 다가갑니다!!!
그는 박정희의 손에 돌아가기 전까지 박정희 정권에서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의 반대투쟁에 중심에 서있었습니다. 한일회담 반대, 삼성밀수사건 폭로, 베트남 파병 반대... 그의 끓어오르는 열정과 행동의지는 67년 ‘옥중당선’이라는 기적을 이뤄내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내의 상황은...
새로운 민주주의 열기의 부활을 꿈꾸듯, 학원과 사회 각계에서 자주화, 자율화 운동, 병영화반대운동이 있었고, 대통령선거에 이은 총선에서는 분열상을 보였던 야당이 예상을 뒤엎고 크게 약진하여 민심이 박정권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부실기업의 증가에 대한 조치로 83 조치를 통해 재벌의 입지를 강화시켜 줌은 물론, 정경유착을 한층 더 부채질하였습니다. 이런 국내상황과 더불어 미국과 중국의 접근으로 인한 동아시아에서의 데탕뜨 분위기는 ‘분단체제’를 권력기반으로 삼아 온 극우반공세력인 박정희 정권에 가장 큰 위협요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 ‘74 남북공동성명’이 생겨났습니다.
‘74 남북공동성명’은 꺼져가는 민족통일에 대한 새로운 불을 지펴 올림은 물론이거니와, 외세의존적, 대결지향적인 분단체제의 극복을 남북이 공동으로 선언함으로써 그간의 남북간에 갈등을 해소시키기 위한 진정한 첫걸음이었다는데 큰 뜻이 있습니다. 이런 ‘74 남북공동성명’의 정국은 장준하 선생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의식과 인식을 ‘완전한 지평’ 위에 올려놓습니다.
이북 출신의 친미반공인사였던 장준하 선생은...
엄청난 탄압으로 궤멸적 상태에 있었던 혁신계 인사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서 박정희 정권과 대립해 오다, ‘74 남북공동성명’과 이를 송두리째 뒤집는, 영구집권음모인 ‘유신쿠데타’를 보면서 ‘올바른 통일운동’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진정한 민족주의자로의 길을 걷게 됩니다. 친미반공주의자였던 그가 완전한 의식의 탈바꿈과 깨달음을 통해 비로소 합리적 이성에 의한 역사와 현실인식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1973년에 썼던 “민족통일전략의 첫단계”의 초고를 살펴보죠!!!
>>> 분단적인 민족관, 국가관에 입각한 교육, 이념, 문화의 제가치관을 통일적인 민족이념과 가치관으로 고친다. 모든 가치를 통일에 두고 분단적인 사고행동을 반민족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유신을 폐기하고 냉전논리에 입각한 모든 제도, 법률, 가치관, 문화질서를 청산한다. <<<
해방 뒤, 남북의 분단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체제화됨을 인식한 장준하 선생은 ‘분단체제’라는 말로 우리민족의 현실을 규정하며, 민족의 통일을 위해 이의 극복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는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라는 말로 그의 통일에 대한 의지를 자주 나타냈으며, 이런 민족통일에 장애가 되어왔으며, 또한 분단체제의 영구화를 통해 독재정권을 영구적으로 실현하려 했던 박정희 유신쿠데타의 즉각적인 폐기를 주장했습니다. 분단체제를 끝까지 유지시키려고 했던 박정희 정권의 검은 속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진정한 민족주의자로 거듭나면서, 해방 뒤 3년 동안의 민족사에 대해서도 완전히 탈바꿈한 시각과 평가를 제시합니다.
>>> 건국준비위원회는 민족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으려는 기민한 대책으로, 몽양을 비롯한 국내항일세력이 항일운동과정에서 획득한 전진적 확신의 표현으로 파악하였고, 송진우 일파가 이에 동조하지 못한 것은 일제 식민지체제에 편입되어 있었던 자주 친일세력으로서 도덕적 파경의 표시로 인식하였다.
또한 김구의 임정에 대해서는 이승만을 필두로 한 세력을 일찍이 극복하지 못했고, 반탁운동을 이승만의 민족분열의 명분으로 연결시켜 주었으며, 새나라 통일조국이 이념을 과감하게 제시하지 못한 점을 한계로 지적하였다. 그리고 백범노선의 실패원인으로 친일민족반역자의 타도, 반이승만 운동으로서의 대중적 역량을 확대하지 못했고, 반이승만 운동의 방법과 시기를 놓친 점 등을 들었다.
그 시기(1970년대) 어떤 전문 연구가도 미처 깨닫지 못한 놀라운 탁견이었다. 그는 몽양과 우사의 합작운동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백범의 통일운동을 가장 순결하고 애국적인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
(인용출처: “비극의 현대지도자”, 서중석, 미발표 원고 “민족통일전략의 첫단계” 발췌)
분단은 우리 민초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 뿐입니다!!!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된 삶을 살며, 기껏 극우반공지배세력이 던져주는 ‘먹이’로 배를 채우며 우리는 우리의 현대사를 우리의 기억 속에서 거의 지워져 알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젊은 세대들은 박정희 신드롬에 붙잡히어 ‘지워버린 현대사’를 완전히 왜곡하는 일까지 일어납니다. 이는 우리의 앞날을 더욱 어둡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진실에 대한 열정과 합리적 이성을 되살려...
잃어버린 우리의 민족현대사를 되찾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사회의 올바른 길을 찾아 민족통일을 이룹시다!!! 암울했던 시대에 진정한 민족주의자였던 장준하 선생을 우리의 올바른 자화상으로 삼고 맘속 깊은 반성과 통찰의 시간을 가져 봅시다!!!
박정희가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지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자손만대에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는 우익의 정통성 측면에서 보더라도 절대로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민족의 반역자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올바른 우익인사가 민족주의에 입각한 통일을 부르짖다가 친일파의 대부가 되면서 민족의 해방을 가로 챈 이승만 극우반동매판세력에 의해 모두 암살되었거나 국가보안법에 의해 비명에 사라졌기 때문에, 사실상 우익의 올바른 정통성은 이승만 정권에서의 조봉암을 거쳐 박정희 정권에서의 장준하 선생을 마지막으로 1975년 우리네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참고로 장준하 선생의 일생을 따라가 보면...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가와 또 우리가 어떤 문제를 우리의 의식 속에 갖고 있는가를 뚜렷하게 알게 됩니다!!! 장준하 선생의 삶을 쫓는 기회는 다음으로 하고 여기서는 박정희를 쫓아가 보고 박정희에 대한 환상을 가지는 것이 왜 문제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이승만은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외세에 의지하여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는 그나마 독립협회에서의 항일운동에 의한 투옥 7년으로 독립투사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1913년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외세에 의지한 독립만이 우리 민족이 살 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미국에 집착합니다!!! 그에 붙여진 외교의 귀신이란 수사는 그가 미국에서 끊임없이 저지른 폭압적 언행을 바탕으로 한 여론조작의 다름 아닙니다!!! 심지어 임정에서 탄핵까지 받았던 인물로 신채호 선생은 아예 이승만과 같은 자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고 선언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이승만은 그나마 젊었을 때의 이력으로 해방에 대한 원죄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일본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전형적인 일본 엘리트 군인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 그가 또다시 불타는 출세욕으로 공산당으로 변신했다가 급기야 4월 혁명을 맞습니다. 그는 드디어 자신의 끓어오르는 권력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4월 혁명을 무참히 총칼로 짓밟고 나라를 암흑 속에 빠뜨립니다!!!
그가 516 쿠데타를 일으키고서 맨 처음 한 짓을 볼까요?
박정희는 먼저 자신의 약점이 밝혀질까 봐 두려워 이런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도록 법적인 근거부터 마련합니다!!! 마치 이승만과 그 하수인인 친일파들이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생각이 다른 사람들 모두를 싹쓸이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듯이 말입니다.
1961년 장준하의 주선으로 군부 쿠데타 세력들은 미국과 화해할 기회를 창경원에서 갖습니다. 여기에는 당시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이 참석하였고, 박정희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다음 날, 박정희는 스스로 최고회의의장의 자리에 오르며, 권력에 대한 불타는 욕심을 숨기지 않고 전면에 드러냅니다!!! 물론 장도영은 체포되었죠!!!
이 날, 박정희는 자신의 집권을 위한 걸림돌을 없애기 위해 반공법과 인신구속특례법을 공포하여 혁신계 인사들을 대거 잡아들이고 이후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한 ‘여론 길들이기’ 작업에 착수합니다!!! 뿐만 아니라 중앙정보부를 설치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이 될 극우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합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왜 박정희는 4월 혁명을 계기로 터져 나온 민족통일에 대한 열망을 무참히 짓밟고 극우반공이데올로기 강화에 이승만 정권보다도 더욱 열을 올렸을까요?
그 자신이 이승만과 견줄 수조차 없는 친일행적의 결함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승만 정권에서 목숨과 자신들의 기득권을 연명해 온 친일파들의 기반을 속내를 역시 잘 읽고 있었고, 국가기구를 이용한 학살정치로 피해의식의 한 형태로 거의 모든 국민들의 무의식 속에, 그네들의 지배이데올로기인 ‘극우반공이데올로기’를 심어놓았기 때문에 이를 더욱 활용하여 자신의 결함을 포장하고 끓어오르기 시작한 통일에 대한 열망(이는 곧바로 민족주의에 대한 논의를 일으키기 때문에 반드시 친일파의 청산문제가 나오지 않을 수 없고, 이렇게 되면 군부에서 주장했던 ‘우국쿠데타’의 명분은 사라지고 말기 때문입니다!!!)을 잠재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민정이양이라는 허울로 국민과 그나마 나름의 민족의식을 갖고 있던 정치세력들을 기만하는 사이, 극우반공체제의 강화를 통하여 공포적 국가주의체제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키자마자 곧바로 나라와 민족은 안중에도 없는, 4월혁명으로 흐트러진 ‘극우반공체제’를 정비하여 강화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이 자행한 만행은 이루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다만 좀더 새롭게 일반국민들, 즉 민초들의 입장에서 박정희 정권의 성격을 실제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박정희의 실체를 알려주는 데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들은 쿠데타를 일으키고서 권력을 잡자 마자...
유족회 사건을 일으킵니다... 즉 억울한 집단학살에 대한 신원회복문제를, 4월 혁명과 이승만의 하야를 통해, 본격적으로 제기하여 활동해 오던 유족들의 집단적 노력을 일거에 짓밟아 버립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우리네 전통적 관념으로는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무덤 훼손까지 저지릅니다. 도대체 이 박정희는 ‘최소한의 사람의 도리’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던 자라고밖에는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죠!!!
한국전쟁을 전후로 해서 일어났던 법의 무시는...
역시 박정희 정권 아래서 수도 없이 일어납니다... 적법한 절차도 따르지 않고 재판을 진행해 자신에게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도 느낄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긴 아미 죽은 사람의 시신을 또 꺼내서 죽이는 짓을 저지르는 자들이 어찌 사람의 도리를 생각하겠습니까?
나라를 구한다고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자들이...
미국과의 더러운 거래로 살아남은,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천인공노할 생체실험을 저지른 일제의 극우세력들과 다시금 손을 맞잡고 나라를 팔아먹습니다. 박정희는 유일한 논리는 ‘잘 살아 보세’였습니다. 잘 살아보자고 그렇게 외쳐대고 노력했던 결과물이 지금도 빚더미에 허덕대는 농촌의 모습입니까? 아마도 재벌들은 박정희의 ‘은공’을 하해와 같이 생각하겠지요!!! 대우의 김우중은 아마도 옛날 박정희 시대를 머릿속에 그리며 김대중 정권 때에 자신의 망가짐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박정희가 가졌던 나라와 국민에 대한 생각을 잠깐 엿보기 위해 제가 썼던 ‘국가보안법의 기원’이란 글의 일부를 다시금 인용해 보죠!!!
>>> 김재규는 1979년 12월 8일 비공개로 진행된 군사법정에서 부산에 계엄이 선포되고 나서(부마사태는 10월 17일 발생하였고, 18일 0시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음) 현지에 다녀와 박정희에게 부산사태의 심각함을 보고하였을 때, 박정희와 차지철이 주고받은 말을 털어 놓았다... (중략)
자신의 부사사태 보고에 대하여 박정희가 "이제부터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명령을 하겠다. 자유당 말에는 최인규라는 사람과 곽영주라는 사람이 발포명령을 하였으니까 총살됐지, 대통령인 내가 발포명령을 하는 데 누가 날 총살하겠느냐"라고 말한 것으로 증언하였다.
그러자 차지철 경호실장은 박정희의 말에 한 술 더 떠서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 문제냐"고 거들었다는 것이다... <<<
(인용출처: "조봉암과 1950년대 <하>", 서중석)
그에게 나라와 겨레, 나아가 나라의 실체인 국민들은 다 죽인다고 해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죠!!!
어쩌면 극우반공이데올로기에 철저하게 찌든 우리 의식의 발전과정에 대한 가장 올바른 자화상이라고 할 만한 장준하 선생의 얘기를 살펴보죠!!!
장준하는 “사상계” 1961년 7월호에서 “긴급을 요하는 혁명과업의 완수와 민주정치에로의 복귀”라는 제목의 권두언에서 “공산당의 전체주의 세력을 분쇄할 수 있는 최대의 사상적 무기는 민주주의적 자유의 선용에 있다”라고 지적합니다. (장준하 선생은 사실상 박정희와 숙명적인 대결적 관계에 있으며 계속적으로 의식이 발전해 갑니다… 결국 70년대에 들어서며 일어난 역사적 사건인 ’74 남북공동성명’을 겪으며 참된 역사인식에 이르게 됩니다… 1973년에 장준하 선생이 쓴 글을 보면, 그는 자신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잘못 인식했던 바들에 대한 바로잡음을 나타납니다… 결국 그는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것이 우리 겨레의 ‘궁극적 선’임을 주장합니다.) 심지어 나라의 발전이라는 대의적 견지에서 박정희의 쿠데타를 나름대로 의미 있다고 지지해 주던 장준하마저 나타낸 박정희의 권력욕에 비판을 가하고 나선 것이죠!!!
결국 극우반공이데올리그의 입장에서 원칙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박정희의 행동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에게는 이승만처럼 그 자신이 곧 극우반공이데올로기였으며, 절대선이었습니다!!! 결국 ‘절대선’은 자신이 키운 분신에 의해 부질없이 사라집니다. 스스로도 자기합치가 되지 않는 논리와 가치기준은 자기 안에서의 분열로 끝을 맺고 만 것입니다.
이런 박정희를 그리워하며 나타난 소위 ‘박정희 신드롬’은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으며, 아직도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음은 우리나라와 겨레의 수치일 뿐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박정희에 견줄만한 아주 뛰어난(?) 독재자들이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프랑코, 대만의 장개석… 그러나 그들은 그네들 나라에서 이미 반면교사로서 있어서는 안될 독재자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박정희처럼 나라를 배반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도 아닐뿐더러, 그들의 집권기간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독재를 보완시켜줄 가장된 ‘애국의지(?)’에 대한 집착으로 오히려 정경유착을 단절시키는 등의 노력을 하게 됩니다. 이럼에도 그들은 그들 나라에서 그들에 받아야 할 비판과 비난을 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모습은 어떻습니까?
겨우 우리역사가 제 정신을 찾은 때가 엊그제여서인지는 모르지만, 나라를 팔아먹던 자가 대통령이 된 것도 모자라서 그를 현대사의 위인으로 추켜 세우고 있습니다. 아마도 박정희는 땅밑에서 코웃음을 치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고요? 그는 역사가 제자리를 찾게 될 그 어느 날을 두려워하여 아예 현대사를 얘기하지도, 연구하지도, 나아가 결국 아예 자손만대에 없어지도록(박정희가 바란 것은 아마도 이것이었지 않을까 합니다.) 하려 했기 때문에 지금에 우리들의 이 우스운 모습(박정희 신드롬)을 보며, “거봐, 내 말이 맞지?”하고 자족하고 있을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나라를 팔았고...
그것도 모자라 국가권력을 장악해서는...
국민을 또 죽이고 또 팔고...
그것도 모자라 아예 영구적인 집권으로 절대선이 되고자 했던...
박-정-희
그는 우리역사의 수치이자...
우리들이 갖고 있는 자기모순과 자기분열의 근원이며...
우리가 극복해야 할 현대사의 불행입니다!!!
우리 정말 정신 차립시다!!!
정통 우익들로부터도 비판 받고 비난 받았던 사람을 ‘민족의 영웅(?)’으로 착각하여 떠받들고 있음은... 우리가 자식들에게 얼굴을 들지 못할 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온 나라가 광복절을 기념하며...
남북축전을 만족스럽게 치뤄내고 있는 때에도, 한편에서는 남쪽 축전참가자들의 언행을 유심히 관찰하며 국보법 위반여부를 따지고 있으니... 이 어찌 온전한 나라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친일파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따져 보았는데...
이를 현대사적인 측면에서 정리해 보아야 만이 이 친일파들이 어떤 과정으로 우리네 현대사에 지독하게도 암울한 어둠을 드리워 놓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광복 60주년을 맞아 남북한은 새로운 화합의 전기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민족화합이라는 대전제 아래 북한은 대단한 결단을 내렸고, 이에 남쪽도 흥에 겨워 민족화합과 통일을 구체적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이런 즈음에 우리는 과거사 청산의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사 청산의 핵심은 친일청산입니다!!! 그렇다면 친일청산을 위한 여러 측면의 준비작업들이 필요합니다. 이는 왜 우리가 친일을 청산해야 하는지를 일반적으로 누구나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추상적 차원에, 친일청산이 머무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한국현대사를 읽다 보면 가장 분통 터지는 때와 장면이 있다!!!
막혔던 역사의 물길이 다시금 굽이치며 원래 흐르던 그 길로 흐르려다... 다시금 막혀 엉뚱한 길로 가버리게 된 "그 장면"을 생각하게끔 하는 신문기사를, 엊그제 읽었다!!!
<역사비평> 통권 62호, 2003년 봄호에 실린 정용욱 교수의 논문을 살펴보자!!!
"1945년 말 1746년 초 신탁통치 파동과 미군정"이란 제목 아래 "미군정의 여론공작을 중심으로"라는 부제를 단 논문이다. 지은이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 논문은 현대사회에서 또하나의 엄청난 권력인 언론의 "어두운 괴력"에 대해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서'를 '신탁통치안'으로 왜곡보도한 경위에 대한 이 논문은 이러한 의미에서 현재적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이 결정서로 인해 시작된 소위 찬/반탁 논쟁은 한국현대사의 흐름을 일거에 바꾸어 놓은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 국내에 반탁운동 열기를 불러일으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삼상회의의 한국 관련 내용을 보도한 <동아일보> 1945년 12우러 27일자 머리기사이다. 삼상회의 결정서가 공식 발표된 것이 서울 시각으로 12월 28일 오후 6시이니, 이 기사는 삼상회의 결정서가 발표되기 하루 전에, 또한 주한미군사령부가 결정서를 입수하기 이틀 전에, 또한 주한미군사령부가 결정서를 입수하기 이틀 전에 발표된 이른바 관측보도이다. 아래 인용문은 그 기사의 원문이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담을 계기로 조선독립 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가고 있었다. 즉 번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받았다고 하는데 삼국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노는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워싱턴 25일발 지급보(至急報).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자)
이 기사는 삼상회의 당시 미/소 양측의 입장과 주장을 정반대로 보도했을 뿐만 아니라 결정서 내용과 전혀 다른 왜곡보도였다. 이 기사는 반탁운동을 격화시키는 도화선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며칠간 삼상회의와 그 결정내용에 대한 국내 신문의 보도태도와 보도방향을 결정했다...<<<
위 표를 살펴보면...
분명히 "오보의 날"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동아일보>의 보도내용은 잘못된 것임을 확실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후 미군정은 해방 뒤 남한 정국을 그들이 바라는 대로 재편하는 작업에 곧바로 착수하여 '임정 해체와 새로운 정당으로의 재편'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추악한 의도까지도 위 표에서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이 격렬한 반탁운동을 주도하면서 권력을 장악하려 들자, 미군정은 "목숨을 위협하는 협박"까지 서슴치 않으며 반탁운동이 그들의 의도아래서 작동하도록 강요하였다.
이후 곧바로 "박헌영-존스톤 기자회견 사건"이 터지면서...
조선공산당은 돌이킬 수 없는 궁지에 몰리게 되는데... 기자회견에 대한 왜곡보도를 의도적으로 이용하고 조작한 미군정은 이를 통해 "국내의 반탁운동을 반소/반공운동으로 각인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정면 대응이 모스크바로부터 나왔는데...
타스통신을 통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과 그 과정에 대한 실제진상 발표'는 미국을 궁지로 몰아넣었으며, 급기야 하지와 맥아더로 하여금 '꿀 먹은 벙어리'가 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역사는 이미 그 왜곡으로 말미암아 돌이킬 수 없는 '큰 물줄기의 뒤바뀜'을 일으키고... 결국 그렇게 왜곡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 역사의 조작사건이 지금도 공공연히 일어날 수 있음을 짐작하게끔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박찬수 한겨레 기자의 예리한 눈이 '신탁통치 조작사건'과 비슷한 사건을 포착하고 있다.
http://www.hani.co.kr/kisa/section-001006000/2005/11/001006000200511041935395.html
외세와 이에 빌붙어 그 더러운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무리들은...
오늘도 이렇듯 끊임없이 그들에게 필요한 온갖 조작들을 서슴치 않고 있다니... 정말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을 모르는 '악한'들이라고 밖엔 달리 할 말이 없다!!!
달과 소녀병사 2
소녀병은 달을 쳐다보았습니다.
웬일인지 그 맑고 고운 달이
소녀병의 눈에는 뿌옇게만 보였습니다.
아직도 눈물이 고여 있었기 때문이지요.
"동무 차 타고 가시라요."
지나가는 차들이 안타까워했지만
소녀병은 웬일인지 화가 나서
손만 내저었답니다.
예쁜 어린 연락병과
소달구지 안에서 눈인사를 하던
부상병 아저씨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지요.
소녀병은 힘껏 눈물을 훔치곤
"빨리 가야지 날이 샐라."
소리내여 말했지만
달은 여전히 뿌옇게만 보였습니다.
달은 소녀병의 눈에서 눈물이 빨리 가시기를
기다리듯 묵묵히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류춘도" 할머니의 회고시 가운데...
어제에 이어서 올린 "달과 소녀병사 2"입니다!!!
"벙어리새"라는 책에 자세히 씌여있는데... 류춘도씨는 김천 가까운 산골이 고향인 분으로, 일본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다 해방이 되어 부산에 정착, 서울여자의료전문학교를 다니던 1950년에 한국전쟁을 맞게 됩니다...!!!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이 인민군에 넘어가게 되고...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전쟁 발발 첫날은 국군, 이틀이 지난 뒤엔 인민군을 치료하다가... 그때의 "의기로운 젊은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민군에 군의관으로 자원합니다...!!!
진주 남강 최전선 야전병원에서 일하게 되는데...
어느날 환자 후송작전을 맡게 됩니다... 달밤에 소달구지 세 대가 미군전투기의 기총공격을 받고 모두... 지은이만 살아남고...!!!
참으로 안타까운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글입니다!!!
얼마전 "벙어리새"라는 책으로...
현대사에 대한 '망각'을 일깨우고자 한, 아니 스스로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같이 했던 넋들을 잊을 수 없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어느 평범한 소녀 의대생...!!! 이 책과 다섯해 앞서 나왔던 시집을 읽어보며... 우리네 일그러진 모습에, 류춘도 할머니처럼, '긴 한숨과 여러 느낌이 섞인 눈물'을 감출 수 없었기에... 한국현대사에 대한 "생각들"을 꺼내어 놓으려 하며, 그 첫걸음으로 그 분의 시 한편을 적어 봅니다!!!
창백한 달빛 아래 하얀 신작로가
북으로 북으로 뻗쳐 있었습니다.
길 양쪽에는 포플러 나무가 시커멓게
열지어 있었구요.
하얀 신작로 위를 어린 소녀병이 이끄는
소달구지 세 대가
자갈을 튀기며 쫓기듯 북으로 북으로 달리고 있었어요.
창백한 달이 이 어린 소녀병을 지켜주듯
구름을 헤치며 따라오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남쪽 하늘에서
'붕' 하는 소리가 나고
비행기 두 대가 날아오고 있었어요.
창백한 달은 소달구지를 감추려고
얼른 구름 속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비행기는 벌써 소달구지를 덮치고 말았지요
두 번 세 번 네 번 먹이를 쫓는 매처럼 덤볐어요
피핏 탕 탕.
달은 '안타깝다, 안타깝다' 하며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소달구지가 뒹굴고 바퀴소리만
철그럭 철그럭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어요
부상병들은 하얀 신작로를 피로 물들이며 모두 죽어갔어요.
창백한 달은 쯔! 쯔! 혀를 차며
'안됐다, 안됐다' 했어요.
잠시 후 소녀병은 눈물을 훔치며
혼자서 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어요.
두 번 세 번 뒤돌아보면서요.
소녀병은 창백한 달을 쳐다보고 말했어요.
"왜 저 비행기는 우리를 쏘지?
우리땅인데!"
창백한 달은
"나도 몰라"라고 말했어요.
* 나는 군의관으로 최전방 야전병원에 근무중이었다. 어느 날 밤 소달구지에 실은 중환자 00명을 거창 후방병원으로 후송하라는 명령을 받고 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린 연락병 한 명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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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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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보편적 상식과 합리적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죠. 그런데 아직도 [황우석교]를 믿는 신도들이 간혹 눈에 띕니다. 필넷 안에서도 여러분 계세요. 그 분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서로 조화할 수 있을지.. 저로선 아주 난감합니다.제가 최근 제 나름으로 소박하게 작성하고 있는 [조선일보 추적]만 보더라도, 그 조선일보를 읽는다는 것 자체가 고역인데, 사람들은 그런 신문을 아무렇지 않게, 아주 자연스럽게 읽거든요.
참으로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이 어차피 권력이라면, 저항권력으로서의 시민권력이 그 물적 시스템을 확보해야 할텐데.. 합리적인 시민권력을 작동시킬 만한 물적 토대는 아직도 미약하게만 느껴지네요. -_-;
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