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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뒤 친일파의 재생산 구조

친일파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따져 보았는데...
이를 현대사적인 측면에서 정리해 보아야 만이 이 친일파들이 어떤 과정으로 우리네 현대사에 지독하게도 암울한 어둠을 드리워 놓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얼마전 반민특위의 마지막 생존 조사관인 정철용씨의 대담기사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지금의 모습’을 여지 없이 보여주었죠! 얼마나 화가 쌓였겠습니까? 그러니 해마다 그맘때면 몸이 아플 수밖에 없죠! 직접 겪어보지 못한 저로서도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니까요!

친일 반동들의 숱한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1948년 반민법이 제정되어 1949년 1월 8일 반민족행위자 처단이 막을 열렸을 때, 한 기록은 이 날의 감격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해줍니다. “반민자죄상기” 그 일부를 먼저 보시죠!

>>>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나 비분에 가슴을 두드리면서 이들 매국도배들의 난무에 유린당하며 또한 조소를 받아오며 오늘이 올 것을 기다리며 참아왔던가! 이 땅의 모든 산천초목이 또는 말없이 흐르는 구름마저 이들에 대한 원한에 불타고 있었으니 비록 군정 3년간의 후덕으로 이들 친일파와 반역자들이 뼈를 깎는 듯한 참회 대신 간교한 변명을 일삼고 대로를 활보하는 양을 주먹을 쳐가며 보았으나, 오늘 모든 요운(妖雲)이 걷혀버린 푸른 하늘 아래 우리 등에 채찍을 내리고 주검의 터전으로 우리를 몰아내던 이들 매국도배를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써 우리 손으로 심판 처단하는 날이 돌아왔다. <<<

이런 감격스러움은 불과 여섯달 채 넘기지 못하고 50여해가 넘게 둥지를 틀고 뿌리를 박아 온 친일극우반동들의 급습에 역사 속에 묻혀버리고 맙니다!

이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대체적인 의견은, 미군정의 방해가 있더라도 해방 직후의 큰 파도를 뒤에 엎고 바로 친일파 척결에 나섰더라면 아마도 우리 민족의 뜻대로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을까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외세가 해방 뒤에 곧바로 군정을 설치하고 군사를 주둔시킨 상황이었으므로 아마도 엄청난 피의 대가가 있었을 테지요!

반민특위의 활동이 한창이던 1949년 4월 즈음에 반민특위 제1조사부장 이병홍씨의 활동 경험담은 반민특위의 앞날을 불안하게 내포하고 있습니다. 50년 이상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자들이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겠지요!

>>> 친일파들은 인간성 이하의 모든 사악한 습성과 기술과 사상을 모조리 갖추고 있으며, 동포를 초개처럼 알고 허언, 회뢰, 고문, 폭행, 테러 등 모든 악덕과 기술을 갖추고 있다. 이들은 경찰에 들어와서는 폭력철학을 고취하고, 관계에 들어와서는 부패한 공기를 양성하고, 경제계에 들어와서는 흉악한 모리로써 공익을 해치고, 정계에 들어가서는 이간중상을 일삼아 정치혼란을 조장하고 있어, 이들이 일소되지 않는 한 우리 민족의 장래에는 언제나 암운이 깃들 것이다. (“반민자의 심정”, “신천지” 1949년 4월호) <<<

이런 친일파의 사악한 처신술은 그들의 논리대로 하자면 탁월한 생존능력이라 말할 수 있지만, 우리민족과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자손만대에 용서치 못할 ‘악의 근원’인 것이죠! 그들은 미군정의 보호 아래 관계, 정계, 문화계, 언론계, 경제계 등 모든 방면에 이미 그들의 새로운 검은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친일파들은 새로 등장한 이승만 정권이ㅡ 강력한 버팀목으로, ‘친일파 처단의 민족주의 논리에 맞서 반공주의’라는 생존이데올로기를 개발하여 확산시켰습니다.

결국 반민특위는 친일경찰을 앞장 세운 이승만 정권의 반격으로 무너져내렸고, 반민법은 유야무야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한 서중석 교수의 평가를 들어보죠!

>>> 반민법을 시행하기에는 친일파들이 국가권력에 너무 강력히 뿌리를 박고 있었다. 반민법이 유야무야된 것은 이 땅에서 친일파를 청산할 기회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폭력을 수반한 친일파의 반공이데올로기 곧 극우반공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세상이 왔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친일파의 재생산 구조가 탄탄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친일파의 재생산은 분단체제와 극우반공이데올로기라는 양대지주에 의해 구조화되었으며, 분단체제와 극우반공이데올로기는 상호 불가분의 일체성을 형성하고 있었다. <<<

친일파는 기본적으로 분단체제에서 자신들의 생존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통일된 민족국가의 수립은 근대민족국가가 추구하는 정체성에 따라 친일파의 처단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이런 진정한 해방을 가로막은 것은 바로 외세였습니다. 해방은 해방이 아니고, 새로운 외세의 점령과 더욱 악화된 민족분열의 서곡이었죠! 이를 재빨리 간파한, 사악한 친일파들은 이를 철저하게 이용하였고, 미국과 이승만 정권에 필요한 이데올로기적 무기들을 제공함은 물론 민족분열과 민중압살을, 앞장 서서 행동에 옮겼습니다.

>>> 미군은 한반도에 상륙한 그날부터 반민족혁명적인 현상유지정책을 써 명사, 유지들을 대우하고, 일제하의 한국인 관리들을 유임시켰던 바, 특히 민족의 증오가 서렸던 친일경찰을 다시 불러들여 중용하였다. 미군정이 친일파를 기반으로 한 것은 일제에 유능하게 충성을 바친 자들은 자신들에게도 그러한 충성을 바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친일파들은 미군정을 등에 업고 민족분열을 획책하였으며, 그것은 분단 지향, 곧 단정운동으로 나타났다.

단정운동이 극우반공이데올로기와 결합된 것은 해방된 해 연말에 일어난 반탁운동을 통해서였다. 해방 직후는 미군정을 제외한다면 남한은 좌익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우익 특히 극우는 그 성질상 친일파, 개량주의자가 많았고, 일제 때의 행적 때문에 해방공간에서 민중에게 영향력을 갖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신탁통치문제는 이것을 변화시키는 지렛대 역할을 하였다. 신탁문제는 민족을 분열시키는 기제로 작동되었고, 반탁운동 이전에는 친일파가 민족 반역자로 규탄과 청산의 대상이 되었는데, 반탁운동이 시작되면서부터 ‘찬탁’세력이 극우세력에 의해 민족반역자, 매국노로 매도되었고 반탁운동을 벌인 친일파들은 애국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친일파는 이광수가 ‘참회록’에서 강조한 것처럼 공산당을 때려잡기 위해서 거론되어서는 안되는 문제가 되었다. 분단체제와 극우반공이데올로기의 결합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확고히 정착되고 공고화되었고, 여기서 친일파는 재생산할 수 있는 확고한 틀을 갖게 되었다. <<<

이런 과정을 거쳐 악의 뿌리가 뽑히기는커녕 잠시 시들었던 그 잎들이 되살아 나고, 미국이란 새로운 외세와 여기에 빌붙은 이승만 정권의 자양분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를 다시금 완전히 손에 쥐게 됩니다!

이들의 현대사적 구조화 과정까지 살펴 보았으니, 분단체제와 반공이데올로기에 뿌리박은 이들 친일파의 역사적 성격을 서중석 교수의 말을 빌려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죠!

>>> 첫째, 친일파는 자신들의 반민족적 행위를 반공이데올로기를 무기로 하여 은폐하였던 바, 그것은 또한 극우반공독재의 영속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친일파는 그 본성상 어떤 독재 권력에도 봉사할 수 있게 되어 있어, 이승만 독재, 박정희 독재에 충실히 복무하였다.

둘째, 친일파의 득세는 민족정기, 국가기강을 무너뜨리고, 사회정의 등 가치관, 윤리관을 극도로 혼란에 빠뜨렸고 이기주의와 부정부패를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자 기본으로 삼게 했다.

셋째, 친일파의 이 같은 성격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에 대한 이념이 없고 민족이나 인간문제가 배제된 근대화지상주의적 경제발전 모델을 만들어내는 데 이바지했다.

넷째,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주체성이 없고 외세의존성이 강한, 특히 친미, 친일 일변도의 외세의존적인 구조를 형성하였다. 문화면에서 해방 이후 제국주의 침략논리나 매판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이 범람한 것도 문화계의 상층 또는 주도층이 친일파라는 것에 조응하는 현상이었다. <<<

지금 대부분의 지배세력들과 사회의 모든 구조는 이들 친일파들을 중심으로 한 독재정권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이름하여 ‘해방 뒤의 친일파 재생산 구조’인 것이죠! 즉 현대 한국사회의 구조가 바로 친일파 재생산 구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시금 한반도 남녘을 여전히 어둠 속에 있게 할 기반을 만든 그들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민족이나 통일을 얘기하거나 행여 얘기할 만한 모든 사람들을 가차없이 학살합니다! 그들의 생존을 박탈할 무기를 입에 담은 사람들은 어떤 성향이나 생각을 지녔건 간에 학살의 대상이 되고 빨갱이가 됩니다!

얼마전에 있었던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 사건’에 대한 기사는 이런 일들의 예일 뿐입니다! 보도연맹사건으로 전국적으로 학살된 사람들은 모두 20만명이 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제주도에서 43으로 무참히 학살된 양민들을 능가하는 숫자죠! 제주도 43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다가 이제야 알려지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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