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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의 기원

온 나라가 광복절을 기념하며...
남북축전을 만족스럽게 치뤄내고 있는 때에도, 한편에서는 남쪽 축전참가자들의 언행을 유심히 관찰하며 국보법 위반여부를 따지고 있으니... 이 어찌 온전한 나라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해방과 함께...
친일파들은 절대절명의 궁지에 몰렸으나, 이승만의 불타는 권력욕과 친미사대주의, 더욱 중요하게는 미국이란 외세와 야합해 백척간두에 섰던 그들의 목숨을 연명함은 물론, 극적인 반전까지 이뤄내 지금까지도 우리네 역사를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이런 '민족분열'을 획책한 친일파와 이승만 정권은...
그들만의 나라를 위해 미국을 등에 업고, 민중들의 터져나오는 통일정부 수립의 열망을 '빨갱이'라는 죄목으로 무차별하게 짓밟고 맙니다!!! (한토마에 올린 "해방후 친일파 재생산 구조" 참고 / 친일청산에 게재) 1948년말부터 전쟁이 완전히 끝나고 정리되는 시기인 1953년까지 무차별적인 민중학살이 일어납니다!!! 이의 법적인 바탕에는 다름 아닌 '국가보안법'이 강력한 그들의 무기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보법의 형성배경을 좀더 구체적으로 따져보는 것은 국보법 철폐를 위해 큰 뜻이 있습니다!!!

이승만은 친일파 지주, 실업가, 관료들이 중심된 한민당을 기반으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만들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인물들은 누구를 막론하건 암살등의 방법을 통해 없애버리고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해 유엔 승인과 함께 단독정부를 1948년 8월 15일 선포합니다!!! 이에 민중들은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온 나라에서 분연히 떨쳐 일어났습니다!!!

신탁통치 반대를 외치며 민족의 진정한 독립을 주장하던 이승만 세력들은 외세를 그대로 등에 업은 채, 남한만의 반쪽정부를 민중들의 의지를 압살한 채 기어이 세우려고 하다 보니, 그 과정에서 엄청난 민중학살까지 저지르게 되는데, 이들 극우친일세력들은 그러한 학살을 합리화하기 위한 법제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에 앞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제주도에서 민중들의 봉기가 있자, 이를 빨갱이들의 불순선동이라고 규정하고 섬이라는 특성을 이용하여 반 이상의 양민을 학살하는, '역사에 길이 남을 만행'을 저지릅니다. 토벌대는 무차별적인 학살로 5만에 가까운 사람들을 학살하는데, 이 과정에서 여순반란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순반란사건은 제주도 43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지원부대로 떠날 예정이던 여수주둔 14연대에서 지창수 상사가 주동이 되어 1948년 10월 19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반란군은 다음날 새벽 여수를 점령하고 순천으로까지 들어가면서 여순지역이 좌익의 세상이 되었다가 3일만에 탈환되는데 이 과정에서 또한 학살이 자행됩니다!!!

여순사건을 처리하면서 이승만 정권은 자신들의 권력에 위협이 될 남한의 좌익세력을 모조리 없애고자 법적인 근거를 마련합니다!!!

이승만은 제헌의회를 윽박질러 일제강점기때 일본제국주의가 독립운동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 써먹던 '치안유지법'을 별다른 수정없이 그대로 '국가보안법'으로, 반민족이고 반민중적인 법성격을 반공으로 치장하여 만듭니다!!! 그야말로 일제때 그들에게 배운 악랄한 수법을 써먹기 위한 법적 근거로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까지 두번에 걸친 개정을 하게 되는데, 이때는 형법이 제정되기 5년전입니다.

결국 무소불위 국가보안법의 지위는 탄생과정에서부터 보장되었던 셈입니다!!! 기본적으로 형법이 제정되기도 전에 급히 만들어짐은 물론 위헌여부의 판정을 아예 거론할 수조차 없는 분위기에서 이뤄졌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세력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없애버리기 위한 초헌법적이며 절대적인 힘을 지닌 법적 무기를 마련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측면에 있어서의 합리성 여부에 대해서는 고려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다 보니, 이 국가보안법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빨갱이로 몰려 모르는 사이에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기에 그야말로 맹목적인 반인륜적 공포학살정치가 강력하게 이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의 분위기를 잘 엿볼 수 있는 1950년 4월 조선일보 사설을 살펴보죠!!!

>>> 정적이나 반대파나 개인감정이 있으면 상배당을 빨갱이로 몰고 고발하여, 빨갱이는 약국의 감초러머 어디에나 이용되지 않는 곳이 없었고, 사람들은 언제 어떠한 모략에 걸릴지 불안하여 안심하고 살기가 어려웠다... <<<

그런데 이 정도는 오히려 전쟁 뒤의 상황과 비교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들 합니다. 그러니 국가보안법을 이용한 그 폐해는 온 나라 구석구석 모든 민초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국보법이 제정공포된 직후인 1949년 "국회속기록"을 살펴보면 국보법 위반 피의자수가 전죄수의 약 8할을 차지한다고 하였고, 이때 법무부장관으로 취임한 권승렬의 말을 빌려보면, 전체 죄수가 약 3만 6천명에 이르렀습니다. 일제때 죄수의 숫자가 남북을 합하여 1만 2천명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아주 엄청난 숫자입니다!!! 또다른 좀더 객관적인 기록인 "국제연합 조선위원단"의 보고에 의하면, 이 국가보안법의 시행에 의해 1949년 한 해 동안만도 118,621인이 검거, 투옥되고 같은 해 9∼10월에 132개 정당, 사회단체가 해체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초기의 제정 국보법에 만족하지 못한 이승만 정권은...
늘어나는 소위 '좌익불순 국보법 위반자'들을 확실히 청소하기 위해 개악을 여러 차례 단행합니다!!!

그 개악내용을 살펴보면...

>>> 맨처음 제정 국가보안법은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 중 수괴와 간부에 대하여 무기, 3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의 벌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개정 국가보안법은 수괴, 간부는 물론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까지 사형이 가능하도록 '법정최고형을 상향조정'하고 그 적용범위를 확대하였다.<제1조>

또 제정 국가보안법은 특별히 심급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일반 형사소송법에 따른 3심제가 보장되고 있었다. 그러나 개정 국가보안법은 이 법에 규정한 죄에 관한 사건의 심판은 단심으로 하고 지방법원 또는 지원의 합의부에서 행한다<제11조>고 하여 '3심제에서 단심제로' 축소하였다.

그리고 개정법에 사상전향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에 대하여 선고유예와 동시에 '보도구금'(사상전향공작을 하는 보도소에 구금하는 것)에 부할 수 있도록 한 규정<제12조 내지 18조>을 신설하였다.

이 개정법은 실제로 시행되기도 전에 국내외의 여론 때문에 재개정되었으나 심급제 부분을 제외하고는 개악내용이 모두 이후 개정법이나 유관 특별법에 살아 남았다. 특히 보도구금제는 후에 법원의 재판을 배제한 사회안전법으로 독립, 발전한다.

이러한 개정 중에서 특히 보도구금제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통계가 있다. 사상전향되었다고 판단하여 석방한 사람이 의무적으로 가입하던 '국민보도연맹'의 맹원수는 1950년 초반에 30만명이 넘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후퇴하는 국군에 의해 사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

(인용원문출처: http://www.yangsimsu.or.kr/boanbub)

오히려 일제때보다 더욱 악랄하게 무차별적인 법의 적용과 집행을 감행했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그 정도는 더욱 잔인해졌습니다.

진보당의 조봉암은 국회의장까지 지낸 우익계 인사였음에도 전쟁을 거치며 일어난 학살의 최대피해자인 '피해대중'(조봉암이 썼던 낱말임 -> 일반민초들의 피해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가리켜 피해대중이라고 조봉암은 불렀고, 이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 정치인의 할 일이라고 그는 생각하였음 / 조봉암은 특히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당한 '피해대중'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하였음) 옹호와 '평화통일'을 주장하다가 또한 국가보안법으로 비명에 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국보법은...
극우반공 독재정권인 이승만 정권에서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이해와 배치되는 모든 세력들을 단죄하는 '전가의 보도'로 쓰여 왔습니다!!! 일제때 일제의 앞잡이로 활약했던 대부분의 친일파들은 이때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여 철저한 반공정권을 만드는데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은 누구든 무자비하게 죽이고 고문하여 이땅을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이며, 피해의식에 찌들어 도대체 사람이 사는 땅이라고 할 수 없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김재규에 대한 비공개 재판에서의 진술은 이들 독재자들과 그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누려온 매판반동세력들의 생각을 단적으로 드러내 줍니다!!!

>>> 김재규는 1979년 12월 8일 비공개로 진행된 군사법정에서 부산에 계엄이 선포되고 나서(부마사태는 10월 17일 발생하였고, 18일 0시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음) 현지에 다녀와 박정희에게 부산사태의 심각함을 보고하였을 때, 박정희와 차지철이 주고받은 말을 털어 놓았다... (중략)

자신의 부사사태 보고에 대하여 박정희가 "이제부터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명령을 하겠다. 자유당 말에는 최인규라는 사람과 곽영주라는 사람이 발포명령을 하였으니까 총살됐지, 대통령인 내가 발포명령을 하는 데 누가 날 총살하겠느냐"라고 말한 것으로 증언하였다.

그러자 차지철 경호실장은 박정희의 말에 한 술 더 떠서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 문제냐"고 거들었다는 것이다... <<<

(인용출처: "조봉암과 1950년대 <하>", 서중석)

국가보안법은 이런 반공극우독재 지배세력의 생각과 민중에 대한 태도를 합법화시켜 주는 '그들만의 법'임을 뚜렷하게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그들은 전쟁때도 아닌 데, 사람의 생명을 어떻게 생각한 것일까요?

극우반공독재정권의 최고 우두머리가, 미국이 그렇게 비난해 마지 않는 크메르루즈의 300만 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들의 행동근거로 미리 입에 올리는 것을 보면, 그들은 반공극우 이데올로기를 오로지 그들의 지배권력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국보법이 그 결과물이라는 것을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죠!!!

"국가보안법은 당장 철폐되어야 합니다!!!"
"노무현 정권이 그들이 진정성과 정체성에 대해 인정받으려고 한다면, 이전 정권과의 확실한 차이를 가지려고 한다면, 국가보안법부터 철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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