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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우리들의 올바른 자화상

[나의 추천 글]

 

장준하 선생은 우리들의 올바른 자화상입니다!!!
그는 뜨거운 열정을 가진 우리나라 우익 민족주의자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열악한 박정희 시대에...
아무도 얘기하지 못하던 '통일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통일은 우리민족의 절대선'임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으로만 보아도 장준하 선생의 성격은 짐작할 만합니다!!! 그런 뜨거운 가슴 때문에 그는 우리민족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고, 이를 풀고자 그 압제의 서슬퍼런 칼날앞에서도 주저없이 '통일'을 외쳐 '분단체제'를 해체하고자 했습니다!!!

누구든 통일을 외치면 '빨갱이'가 되고...
소리없이 사라질 수 있는 상황속에서도 분단체제를 온몸으로 거부하며 박정희 독재정권에 항거하던 그는 '74 남북공동성명'을 보기전까지는 매판독재정권들이 주장해 온 극우반공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아무도 입에 담을 수 없는 '분단체제의 극복'과 '통일은 우리민족의 절대선'임을 주장하게 되었을까요?

그는 일본신학교 재학중 학도병으로 일군에 들어갔다가...
중국 서주에서 탈출하여, 제비도 날아 넘지 못한다는 험하기로 유명한 파촉령 설원을 넘으며 6천리를 걸어 중경임정에 도착하며...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집니다!!! 이를 통해 그의 불굴의 의지와 열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임정에 도착한 그는 임정의 분열상에 다음과 같이 치를 떱니다!!!

>>> 가능하다면 이곳을 떠나 다시 일군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일군항공대에 들어간다면 중경폭격을 자원, 이 임정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 왜냐고요? 선생님들은 왜놈들한테 받은 서러움을 다 잊으셨단 말입니까? 그 설욕의 뜻이 아직 불타고 있다면 어떻게 임정이 이렇게 네 당, 내 당하고 겨누고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

(인용출처: "비극의 현대지도자", 서중석)

장준하 선생의 격정적이고 과격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사건입니다...
그는 이렇듯 불의를 보면, 절대로 참지 못하고, 자신이 느낀대로 곧바로 행동에 옮기는 전형적인 열혈지사적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역사적 중요성은 크게 두 가지로 얘기됩니다!!!
하나는 "사상계"의 출판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통일운동의 제기'입니다. 그가 벌인 통일운동은 반박정희 운동의 핵심이었고, 이는 박정희 정권에 가장 커다란 위협이었습니다!!!

엊그제 조사에서...
해방 뒤 60년 동안 가장 큰 영향을 준 출판물이 바로 "사상계'라는 조사가 있었습니다!!! 이 "사상계"는 최초에 이교승이란 국회의원과 부산 미국공보원의 지원아래 창간되어 주로 친미적인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이때 주로 들어있던 내용들은 미국의 자유주의와 반공주의 기조가 깔린 책들의 번역물을 많이 실었고, 50년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서구문화'에 대한 갈망을 채워주려는 주 흐름과 편승하여 학생들의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해방 직후엔, 친미극우반공주의자들과 같이 일을 하면서...
역시 초기에는 "사상계"의 내용 역시 그런 기조가 주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승만 정권의 폐해를 목도하면서 생각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함석헌 선생과의 결합은 그런 그에게 더욱 큰 생각의 탈바꿈을 불러왔습니다!!!

이승만 정권 아래서...
한국전쟁을 겪으며 대부분의 진보세력들은 궤멸적 타격을 입고 그 세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특히 조봉암 선생의 국보법에 의한 사형은 분단의 상황을 민초들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우리민족의 염원을 남한에서 긴 시간 동안 없어지게 만듭니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장준하 선생은...
1958년 여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625 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란 이승만의 북진통일운동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함석헌 선생의 글에 고무되어 같은호 권두언에 "거족적 반성이 촉구된다"라는 글로 자신의 깨어난 의식을 만천하에 천명합니다!!!

>>> 우리가 일본에서는 해방이 됐다 할 수 있으나, 참해방은 조금도 된 것 없다. 도리어 전보다 더 참혹한 것은 전에 상전이 하나였던 대신 지금은 둘셋이다... 남한은 북한을 쏘련 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여, 있은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없는 백성이다. 625는 꼭두각시의 노름이었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았어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밖에 될 것 없지 않은가 <<<

(사상계 1958년 8월호, 함석헌 선생의 글)

>>> 우리가 얻은 해방은 한낱 주인을 바꾸어 섬기는 것이요, 형태를 달리한 노예생활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가. 생각하는 방향은 일인이 가르쳐준 바요, 조직된 제도 첨단적인 미국류의 모방이요, 운영방식은 이족을 통치함에 사용한 일제의 방식이니 우리의 문화를 어디서 찾겠는가. 이러고도 해방된 민족이라고 하겠는가? <<<

(사상계 1958년 8월초, 권두언)

이때 직전인 1957년엔...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최남선과 이광수를 위한 특별모임을 "사상계"가 주도하기도 하여 함석헌 선생의 비판을 받기도 할 정도였으니, 바로 다음 해에 나온 위의 글은 엄청난 의식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월혁명은 잃어버린 역사를 다시 되찾고...
분단된 민족의 통합을 위한 첫걸음을 다시금 내딛게 해준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4월혁명 공간은 우리사회가 해방 뒤, 어둠속에 숨죽였던 이성을 드디어 다시 빛속에 드러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 공간에서 장준하 선생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진정한 민족주의자의 길임을 깨닫고 그간 극우반공이데올로기에 매몰되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았습니다. 이는 1960년 6월호 "사상계"에서 "혁명상미성공"(손문이 서거할 때 유언으로 남긴 글의 제목)이란 제목으로, 반혁명세력을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 (해방 3년후 친일파들은) 확고부동한 기성기반을 재형성하는데 성공하여 오히려 이를 건드리는 자가 해를 받게 되어버렸다. 혁명과 그 수습의 주객의 전도로 말미암은 미온적인 정책은 끝내 민족정기를 말살하여 버렸고, 의당히 받았어야 할 그들의 응징은 고사하고 일약 건국공로자의 반열에 서게 되었으니...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인사들은 백안시 당하고 그래도 조국독립을 위하여 남북만주나 중국대륙에서 일생을 바친 혁명선배들의 유가족들은 가두에서 문전걸식을 하게 되는 등 의는 떠나가고 불의만이 성장하여 충천하는 세력으로 이 땅을 뒤덮게 됐다.

누가 다시 애국을 하리오!!!
누가 다시 의에 살리오!!!
누가 자기의 몸을 민족의 흥망을 거는 재단에 불사르리오...!!!

이 사태를 혁명적으로 해결치 못하고 넘어간다면 불원간 앞날에 더욱 처참한 비극이 우리 눈앞에 다다를 수밖에 없는 모든 여건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당연히 4월혁명으로 불러야 하며, 이에 따라 모든 수습책이 혁명적 기틀 위에서 움직여야 한다. <<<

하지만 이런 의식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극단적인 반공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4월 혁명과 함께 중립화 통일방안이 모색되어지면서...
이에 대해 극우반공 지배세력들은 자신들의 기반이 되는 분단체제와 태생적인 도덕적, 정신적 취약성에 대한 위협을 강하게 느낌에 따라 아주 예민한 반응을 보입니다. 즉 이런 상황 아래서 장준하 선생 역시 지배세력과 같은 의식의 기반을 가졌으되, 세상의 변화를 직접 겪으며 서서히 올바른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을 갖게 됩니다. 이는 70년대에 들어서며 일어난 역사적 사건인 ’74 남북공동성명’때까지 이어집니다.

그의 열정적 가슴과 실천적 용기는 박정희 쿠데타 세력의 ‘권력욕에 의한 배신’이 일어나면서 또 한번 극적인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박정희와 숙명적인 라이벌이 되면서 그의 삶은 진정 올바른 의식을 갖추게 됩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장준하 선생은 다른 극우반공지배세력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적 활로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파악하고 지지하였으며, 심지어 미국과의 화해를 위해 만남을 주선해 주시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지지는 곧 극렬한 반대로 바뀌고 맙니다. 쿠데타 세력은 약속한대로 군대에 복귀하지 않고 숨겨두었던 권력에 대한 탐욕을 드러내며, 특히 박정희는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을 체포하여 갈아치우며, 자신의 영구적인 집권음모를 실행해 옮기고, 반공법과 인신구속특례법을 공포하여 혁신계 세력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고, 이를 통해 흐트러진 극우반공체제를 다시금 강화합니다.

이에 장준하 선생은 스스로 “사상계”를 통하여 박정희를 비판함은 물론...
함석헌 선생에게 부탁하여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유명한 글을 같이 실어냅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1962년 3월 소위 ‘정치활동정화법’이란 것을 만들어 권력을 독점해 버리는데, 이 법에 의해 장준하 선생은 ‘부패언론인’으로 지목되어 험난한 박정희 시대를 시작하게 됩니다. 피할 수 없는 숙명의 적대적 관계가 박정희와 시작된 것입니다!!!

박정희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대리인으로 논쟁을 벌였던 김종필과 격렬한 ‘민족주의 논쟁’을 시작합니다.

>>> 요즘 민족주의를 팔아 자기 옹호나 자기 변명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무리들을 경계하여야 한다. (김종필이 주장하는 민족주의는) 귀한 외화를 써가면서 사치한 외국호텔 창가에서 향수에 젖어 흐르는 눈물 같은 것이다.

(자신은 중국 광야에서 광복군으로 일본군과 싸우면서) 춥고 배고프고 발톱이 빠지도록 조국을 찾아 헤매는 가운데 뱃속으로 체험한 민족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김종필 등이 민도가 높아야 민주정치가 가능하다고 하면서 강력한 지도자 운운하는 것은 건방진 수작이다, 민도가 높으면서도 우리처럼 못사는 민족은 온 세계에 없다. <<<

(인용출처: “대한일보” 1963년 11월 6일자, 재인용: “비극의 현대지도자”, 서중석)

박정희 세력이 주장했던 ‘민족주의’는...
식민사관에 입각한 제국주의적 역사인식 아래, 몽매한 대중에게 민주주의는 아직 필요치 않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강력한 전제군주적 통치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파시즘’ 또는 ‘군국주의’ 논리의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김종필이 강연한 내용을 들어보죠!!!

>>> 이씨정권은 사대주의와 퇴폐성의 근원이 된 유교를 국교화하여 이를 국가이념으로 채택하고, 봉건적 신분제로의 유교국가적 관료기구를 완비함으로써 오늘의 후진의 씨를 뿌려 놓았던 것입니다.

이래 오백년, 우리 조상들은 유교만을 지상의 것으로 숭상하였고, 유교는 그가 지니는 매우 비과학적인 관념론으로 우리 조상들로 하여금 무위도식하면서 그저 담론풍발 제사횡담 쓸데없는 비분강개로 장구한 시일을 허송케 함으로써 후세에 민족감상주의를 뿌리박았을 뿐만 아니라, 사화와 무자비한 당쟁은 민족을 분렬시켰으며... (중략)

마침내는 19세기로부터 20세기 초에 긍하는 식민지 분할시대에 신흥 일본의 식민지로 된 것이 결코 우연적인 결과가 아니라는 인과를 우리는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중략)

1945년 이래 16년간 한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시행기였습니다. 즉 내 몸에 배지 않은 보편주의 사상을 그대로 시행해본 것입니다. 결과는 정치는 파쟁으로, 경제는 파탄으로, 사회는 문란으로, 자유는 방종과 무질서로 각각 전락됨으로써… 민족을 신념과 예지로써 이끌어나가야 할 강력한 리더십이 강력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정치 풍토를 특징지우는 것에 강력한 행정부와 영도력의 확립이라는 권력 집중 현상을 들 수 있습니다. <<<

즉 이들은 강력한 독재권력과 일방적 통치방식만이...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그 명분은 ‘우리역사의 열등함과 비굴함’에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이야말로 민족의 자주성 회복과 민주주의 발전을 꾀할 ‘강력한(?) 독재권력’이며 또한 독재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죠!!!

장준하 선생에게 박정희의 집권은...
우리 역사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오욕의 상징이었습니다!!!

5천년 역사를 이룬 조상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의 발전을 얘기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일본제국주의 군대에 있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그에게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죠!!!

박정희와의 대립은 장준하 선생을 정치계의 투사로 내몰았고...
그는 더욱 강렬하게 박정희를 비판하며 올바른 현실인식에 다가갑니다!!!

그는 박정희의 손에 돌아가기 전까지 박정희 정권에서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의 반대투쟁에 중심에 서있었습니다. 한일회담 반대, 삼성밀수사건 폭로, 베트남 파병 반대... 그의 끓어오르는 열정과 행동의지는 67년 ‘옥중당선’이라는 기적을 이뤄내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내의 상황은...
새로운 민주주의 열기의 부활을 꿈꾸듯, 학원과 사회 각계에서 자주화, 자율화 운동, 병영화반대운동이 있었고, 대통령선거에 이은 총선에서는 분열상을 보였던 야당이 예상을 뒤엎고 크게 약진하여 민심이 박정권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부실기업의 증가에 대한 조치로 83 조치를 통해 재벌의 입지를 강화시켜 줌은 물론, 정경유착을 한층 더 부채질하였습니다. 이런 국내상황과 더불어 미국과 중국의 접근으로 인한 동아시아에서의 데탕뜨 분위기는 ‘분단체제’를 권력기반으로 삼아 온 극우반공세력인 박정희 정권에 가장 큰 위협요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 ‘74 남북공동성명’이 생겨났습니다.
‘74 남북공동성명’은 꺼져가는 민족통일에 대한 새로운 불을 지펴 올림은 물론이거니와, 외세의존적, 대결지향적인 분단체제의 극복을 남북이 공동으로 선언함으로써 그간의 남북간에 갈등을 해소시키기 위한 진정한 첫걸음이었다는데 큰 뜻이 있습니다. 이런 ‘74 남북공동성명’의 정국은 장준하 선생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의식과 인식을 ‘완전한 지평’ 위에 올려놓습니다.

이북 출신의 친미반공인사였던 장준하 선생은...
엄청난 탄압으로 궤멸적 상태에 있었던 혁신계 인사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서 박정희 정권과 대립해 오다, ‘74 남북공동성명’과 이를 송두리째 뒤집는, 영구집권음모인 ‘유신쿠데타’를 보면서 ‘올바른 통일운동’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진정한 민족주의자로의 길을 걷게 됩니다. 친미반공주의자였던 그가 완전한 의식의 탈바꿈과 깨달음을 통해 비로소 합리적 이성에 의한 역사와 현실인식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1973년에 썼던 “민족통일전략의 첫단계”의 초고를 살펴보죠!!!

>>> 분단적인 민족관, 국가관에 입각한 교육, 이념, 문화의 제가치관을 통일적인 민족이념과 가치관으로 고친다. 모든 가치를 통일에 두고 분단적인 사고행동을 반민족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유신을 폐기하고 냉전논리에 입각한 모든 제도, 법률, 가치관, 문화질서를 청산한다. <<<

해방 뒤, 남북의 분단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체제화됨을 인식한 장준하 선생은 ‘분단체제’라는 말로 우리민족의 현실을 규정하며, 민족의 통일을 위해 이의 극복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는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라는 말로 그의 통일에 대한 의지를 자주 나타냈으며, 이런 민족통일에 장애가 되어왔으며, 또한 분단체제의 영구화를 통해 독재정권을 영구적으로 실현하려 했던 박정희 유신쿠데타의 즉각적인 폐기를 주장했습니다. 분단체제를 끝까지 유지시키려고 했던 박정희 정권의 검은 속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진정한 민족주의자로 거듭나면서, 해방 뒤 3년 동안의 민족사에 대해서도 완전히 탈바꿈한 시각과 평가를 제시합니다.

>>> 건국준비위원회는 민족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으려는 기민한 대책으로, 몽양을 비롯한 국내항일세력이 항일운동과정에서 획득한 전진적 확신의 표현으로 파악하였고, 송진우 일파가 이에 동조하지 못한 것은 일제 식민지체제에 편입되어 있었던 자주 친일세력으로서 도덕적 파경의 표시로 인식하였다.

또한 김구의 임정에 대해서는 이승만을 필두로 한 세력을 일찍이 극복하지 못했고, 반탁운동을 이승만의 민족분열의 명분으로 연결시켜 주었으며, 새나라 통일조국이 이념을 과감하게 제시하지 못한 점을 한계로 지적하였다. 그리고 백범노선의 실패원인으로 친일민족반역자의 타도, 반이승만 운동으로서의 대중적 역량을 확대하지 못했고, 반이승만 운동의 방법과 시기를 놓친 점 등을 들었다.

그 시기(1970년대) 어떤 전문 연구가도 미처 깨닫지 못한 놀라운 탁견이었다. 그는 몽양과 우사의 합작운동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백범의 통일운동을 가장 순결하고 애국적인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

(인용출처: “비극의 현대지도자”, 서중석, 미발표 원고 “민족통일전략의 첫단계” 발췌)

분단은 우리 민초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 뿐입니다!!!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된 삶을 살며, 기껏 극우반공지배세력이 던져주는 ‘먹이’로 배를 채우며 우리는 우리의 현대사를 우리의 기억 속에서 거의 지워져 알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젊은 세대들은 박정희 신드롬에 붙잡히어 ‘지워버린 현대사’를 완전히 왜곡하는 일까지 일어납니다. 이는 우리의 앞날을 더욱 어둡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진실에 대한 열정과 합리적 이성을 되살려...
잃어버린 우리의 민족현대사를 되찾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사회의 올바른 길을 찾아 민족통일을 이룹시다!!! 암울했던 시대에 진정한 민족주의자였던 장준하 선생을 우리의 올바른 자화상으로 삼고 맘속 깊은 반성과 통찰의 시간을 가져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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