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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30
    열정의 착각(2)
    kirehiais
  2. 2009/04/28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했다.(3)
    kirehiais
  3. 2009/04/13
    꾸리꾸리
    kirehiais

열정의 착각

 

어떤 규정이 필요하거나 구분을 지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 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 요즘의 세태다.

 

애당초 타자 화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따위는 발 디딜 틈을 찾을 수 가 없다.

 

아마도 이렇게 얘기하겠지 '효용성과 합리적인 방식'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라고

 

효율적, 실용적, 합리적... 과 같은 단어들이 언제가 부터 전 인류의 마음을 구워삶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의 이상은 달걀 껍데기 깨지듯이 쪼개져 버렸다.

 

 

 

이제는 보편적인 삶에 대한 추구가 원시 박물관의 매머드처럼 옛 위용을 과시할 뿐이고

 

지켜보는 이가 사라지는 시간에 스스로 부여된 권위를 차고 유령처럼 부활해 떠돌아다닐 뿐이다.

 

씁쓸한 건 외마디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는 것

 

그 것이 필요한 이유는 이상으로서 존재했기 때문이 아니라 칼처럼 날카롭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쉬운 것은, 이러한 규정과 구분이 가져올 암울한 미래다.

그것은 모든 연속성에 대한 훼손이며, 철저한 무시의 담론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미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 감정적 상태이며 그 것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이다.

 

그 상태란 열정이다.

 

사람들은 이성적 사고에 머물고 있지 않기를 바라는 것으로서의 열정을 찬양한다.

 

허영에 가득찬 삶을 경멸하면서 열정에 가득찬 삶은 동경한다.

 

분명 허영과 열정은 다른 의미로 쓰이지만 같은 동기에서 출발한다.

 

더군다나 그 판단은 관계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에 어떠한 기준도 잡을 수가 없다.

 

 

 

 

열정의 메커니즘은 그 것이 보여주는 본원적인 '순수함'과 감정적 고조의 근거를 통해 작동하며

아무런 제어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신중한 반성이 요청됨에도 불구하고 '열정, 그 감정적 경험'은 그 것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열정은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들을 낳는가.

 

 

먼저 상당히 무한한 포괄적 범주로서의 열정이다.

다시 말해 기준이 모호하며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삶과 이상에도 적용된다.

즉 '열정'이라는 포장지는 무언 가들이 지니고 있는 내용을 목적하지 않는다.

대신에 자신을 주목하게 하며 더 그럴싸한 포장지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열정 자체는 아무런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의미전달을 계속적으로 방해한다.

 

더욱이 열정자체가 의도라면 문제는 더욱 커진다.

 

내용 없는 수사가 반복되고 사람들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잊게 된다.

 

그리고 그 것은 '권위'로운 집단들에게 특히 강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그 것이 어떤 특별한 동기인것인냥 발견하곤 한다. (더 환장할 노릇은 열정을 가르친다는데 있다.)

 

두 번째로 열정은 그 것을 받아들이는 누군가에게 독단적이고 오만해지기를 바란다.

이 부분은 상당히 난감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열정적 상황은 상당한 몰입을 요구하고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인정받게 됨으로 쉽게 도취되게끔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독단과 오만이라는 배타적 논리의 함정에 쉽사리 빠지게 되는 근거로서의 열정이

몰입과 인정이라는 긍정적 자기실현의 열쇠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하는 역설적인 오류를 낳는 형태 즉, 독단과 오만을 합리화하는 감정적인 당위성의 근거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열정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열정의 메커니즘이 순수함이라는 기재를 계속적으로 유지하는 한 이 문제는 지속되는데

먼저 여기서 말하는 순수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한다.

 

순수란 세상과 괴리되어 있는 어떤 형태(혹은 감정)를 지칭한다.

우리가 흔히 순수하다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대부분 이런 의미를 염두해 두고 있다.

나 또한 이런 순수함이 쓰이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만 확장해보면 순수란 소통의 의지가 없는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그 것이 어떤 순수이던 간에 무결한 형태를 지향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낼수록 일상간의 교통 가능성은 상관없는 행위로 전락한다.

 

그래서 순수란 이상향에 대한 동경의 다름 아니며 다분히 공상적인 현실 에 대한 의지다.

 

이러한 순수가 열정의 바탕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열정의 작동이 개인의 감정상태를 타자와 괴리시키는 방식으로 나가게끔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착각이 일어난다.

 

즉 나의 상태가 모든 것에 앞서는 상황에서 이성적인 판단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아니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착각은 자신이 착각하는지를 알기 전에는 다른 어떤 것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폐쇄적 상태이다.

바로 그 점에서 열정이 지니고 있는 파시즘적 성격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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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했다.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했다. 유영의 말을 빌리자면 청춘의 로망은 자전거이고 우리는 그 로망 하나쯤은 실행하고 살아야한다고 했다. 로망까지는 모르겠지만 한번쯤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하는 것도 괜찮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서쪽 해안을 따라 쭉 뻗은 도로를 타면서 가는 길에는 유채꽃이 여전히 피어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고 떠들고, 한번은 멈춰 서서 멍하니 바다를 보다가 다시 말없이 페달을 밟았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병우는 고등학교 친구둘이랑 제주도 자전거 일주를 떠난다. 육지에서 내려온 많은 관광객들이 하는 그런 자전거 여행을 흉내 내며 시작된 가벼운 하이킹에서 그들은 방학을 맞아 제주도로 내려온 서울 여고생들의 곤란한 일을 해결해 주면서 친하게 되고 편지를 주고받자며 헤어진다.

 

 

 병우는 그 여고생들 중 한명인 미영과 펜팔을 하게 된다. 둘 다 고등학교 3학년이지만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아가던중 병우는 자신이 혹시 미영을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올라갈 성적이 되지 않았던 병우는 왠지 공부의 의욕이 샘솟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때쯤 핸드폰이라는 것이 대중화되기 시작하고 조금씩 피시방도 늘어가기 시작한다. 미영의 편지가 뜸해지던 때도 그쯤이다.

 

 

 쌍코피가 터질 정도로 열심히 공부한 병우였지만 수능시험 결과는 신통치 않다. 그 점수로는 그냥 제주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부모님은 그리 넉넉지도 않은 살림에 서울에 이름도 없는 대학에 들어가서 돈을 낭비하느니 국립이라 학비도 싸고 집에서 다닐 수도 있는 제주대학교에 들어가라며, ‘그래도 서울에서 공부해야 나중에 취직도 잘한다는(물론 병우 자신도  뭔소린지 모르는)’ 병우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수능이 끝나고 친구들이랑 할 일없이 돌아다니며 몰래 술 마시고 노래방가고, 담배란 것도 펴본다. 하지만 병우는 허전한 마음을 지울 수 없어 용기를 내 미영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편지를 쓴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는다.

 

 

 제주대학교에 들어간 병우가 신입생이 되어 정신이 없을 무렵 미영에게 편지가 오고 병우는 전화번호를 저장한다. 하지만 막상 전화를 하려니 어색해서 머뭇거리다 결국 하지 못한다.

 

정신없는 1학기가 지나가고 방학을 맞은 병우는 서울에 있는 '명문대'에 진학한 친구에게서 초대(?)를 받고 태어나서 처음 서울에 올라간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친구 녀석은 정말 많이 변했다. 사투리도 잘 안 쓰고 어설픈 멋은 잔뜩 부리고 다닌다. 기분이 썩 좋진 않지만 마냥 부럽고 신기하기만 하다. 술에 잔뜩 취해 들어간 녀석의 자취방은 퀴퀴한 냄새가 맴도는 반지하이다. 그 것도 다른 방들과 다닥다닥 붙어 있어 무슨 닭장 같기만 한 곳이다. 갑자기 친구가 안쓰럽다. 그렇다고 자신이 낫다고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술이 취하니 이상한 생각이 계속 든다. 미영에게 전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지고 병우는 용기를 내 전화를 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전화를 받지 않는 미영, 아마 시간이 늦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 병우는 다시 전화를 걸진 않는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병우는 세상모르고 자는 친구를 깨우려다 지쳐 그냥 혼자 서울 구경에 나선다. 그리고 명동에서 정신이 나갈 때 쯤 미영에게서 전화가 온다.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 더욱 허둥대는 병우, 하지만 미영이 담담하게 대화를 이끌어 가고, 서울에 올라 왔으면 한번 보자는 미영의 제안을 얼떨결에 받아들인다.

 

 

 감정이 복잡해진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낯설게 다가오는 서울에서 병우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인다. 친구 녀석은 여자는 자빠트리면 땡이라며 도움 안 되는 소리만 늘어놓고 있다.

 

 

“아니 정말 그런 걸까? 난 왜 미영을 보고 싶어 하는 걸까? 어제 왜 전화를 했을까? 술에 취해서? 미영은 왜 나를 보려고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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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리꾸리

 

몇일전에 간만에 올리려던 장문의 글이 한순간의 실수로 날아가 버려

 

한동안 블로그에 올 엄두도 못내고 있다가

 

꾸리꾸리한 날씨덕분에 몇자 적게 된다.

 

 

 

시절이 너무 수상하다 보니 별 시덥잖은 놈들이, 그래도 기자랍시고 날뛰고 국회의원이라고 허세를 부리는 것을 보면 스스로 왜 역사학과에 들어갔는지 한탄하게 된다.

 

한국 역사학계의 점잖음 아니면 인문학을 배웠던 것에 대한 후회

 

뭐 이런 띨빵한 생각들을 곱씹고 있다보면 더욱 그렇다.

 

 

너도나도 다 역사를 이야기하는  '공화국 시민'들 틈바구니 속에서 그냥 기술이나 배우지 왜 이런 '상식'을 전공하려 했는지 참.....씁쓸하다.

 

 

한숨 한번에 비난이 열번, 비난 한번에 무시가 백번, 무시 한번에 멸시와 조롱이 천번이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엄한 혈액형 이야기가 등장하고

 

그래도 재밌다고 낄낄 대다 보면

 

가슴만 뻥뚫린다.

 

 

내가하면 로맨스고 남이하면 불륜이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킨다. 학위가 없으면 헛소리고 있으면 새로운 발상이다.

 

분노에 차있을 수 있다. 화가 날 수 있다. 어떻게 계속 해벌레 웃을 수만 있는가? 

 

 

 

여태껏 일어난 모든 참담함들에 대한 책임은 반성하지 않는 자들에게 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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