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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6/27
    '사회주의 여성'과 연애(1)(7)
    은수
  2. 2007/06/24
    하우스 키퍼 제도(6)
    은수
  3. 2007/06/19
    폭력과 욕망 사이(7)
    은수

'사회주의 여성'과 연애(1)

마감에 맞추어 허겁지겁 쓰기도 했고....여러가지로 부족한 글이지만...

내놓음으로써 비판받고 더 좋은 고민들을 하게 되겠지....^^

분량이 많아서 조금 나누어서 올려볼까 합니다.

지금 올리는 글은 문제제기 및 기존 논의 검토, 허정숙에 대한 소개, 연애스토리이고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들은 섹슈얼리티에 관한 입장들, '사회주의 여성'의 연애가 이야기되는 방식, 범주화와 경계의 문제..

대략 소개하자면 그렇습니다. '계속보기'를 누르세요-

 

 

들어가며

 

   제일 처음 내가 ‘사회주의 여성’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막연한 호기심이었다. 신여성에 대한 책을 읽게 되면서, 이름조차 몰랐던 조선의 ‘사회주의 여성’들을 하나, 둘 알게 되었던 것이다. 최근에 이르러 신여성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많이 진행되고 있지만, 소위 ‘사회주의 여성’으로 분류되는 이들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다. 사회주의가 당시 일제 식민지 시대와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하나의 흐름임에도, 실제로 그것을 실천했다고 불리는 이들, 특히 여성들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가시화되어 있지 않은 ‘사회주의 여성’들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했던 것 같다. 물론 거기에는 그 여성들을 ‘가시화’시킴으로써 내가 현재 얻고자 하는 욕구가 분명히 개입되어 있었던 점을 부인 할 수 없다. 지금까지 허정숙을 비롯한 ‘사회주의 여성’들에 대한 연구 흐름들 정리해보면, 처음에는 남성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주로 곁다리로, 보조적인 역할로 등장하였다. 예를 들어 허정숙이 활동했던 근우회의 경우 남성들이 중심이 되었던 신간회의 여성단체격으로 설명되었다. 이러한 설명 속에서 여성들은 그 자신의 활동보다는 ‘누구누구의 처’로, 예를 들어 주세죽의 경우 독립적인 존재이기보다는 박헌영의 아내로 유명한 식이었다. 물론 이런 점들을 비판하며 ‘여성들’ 자체에 주목한 연구들도 있다. 특히, 허정숙의 경우 그나마 잘 알려진 여성이라 연구들이 비교적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허정숙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는 데 그치거나(서형실 1992,신영숙 2006), 조금 더 깊이 들어간 경우에도 주로 공식적인 활동, 사회주의 단체 활동(송진희 2004)에 초점을 맞춘다.

  내가 많은 ‘사회주의 여성’들, 그 중에서도 허정숙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녀의 ‘화려한’ 연애경력 때문이었다. 허정숙은 ‘조선의 콜론타이’로 불리며, 상대적으로 다른 여성들에 비해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일 뿐만 아니라, 특히 그녀에게 네 명의 남자애인이 있었던 까닭에, 붉은 연애의 실천으로 연애스캔들로 유명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북한으로 간 이후에는 고위급 인사가 되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허정숙은 주목과 비난을 동시에 받는 논란이 되는 인물이었다. 나는 허정숙에 대해 알게 되면서, 허정숙의 연애에 대한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또한 그런 생각들이 당시의 조선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갈등과 마찰이 있었는지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존 연구에서 허정숙의 연애경험은 ‘화려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그 자체로 의미를 갖지 않았다. 그녀의 연애는 “여성운동가로서 그녀에 대한 평가가 그것과(연애경력) 무관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 점을 부각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무시할 필요는 없는” 정도로 언급되거나, “너무 독특해 그의 활동을 여성운동가의 전형적인 활동 모델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서형실 1992: 287), 혹은 “사상적 방황을 반영하는 것”(박석분 1994: 139)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 연애 경험은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에 입각하여(신영숙 2006) “붉은 연애를 실천했던”(최혜실 2006)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고, 이와 같이 모순되는 평가들이 허정숙을 따라다녔다. 

  한편, ‘사회주의 여성’과 연애에 대한 연구 경향은 주로 콜론타이즘과 붉은 연애에 관련된 것이 많았다. 이들은 콜론타이의 『삼대의 사랑』,『붉은 사랑』과 같은 소설로부터 촉발된 논의를 소개하거나(이태숙 2006, 서정자 2004, 김경일 2005 외), 특히 연애사조의 변화와 함께 엘렌 케이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연애사상과 대립되는 지점 속에서 논의하였다. (김경일 2004, 홍창수 2004)

  이렇게 허정숙에 관한 자료를 찾고 그녀의 삶의 단편들을 하나하나 읽게 되면서 나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붉은 연애’를 실천했다고 말해지는 실제 인물들의 삶은 어땠을까? 그것은 ‘자유연애’와는 어떻게 달랐나? 허정숙이 보수적인 담론과 남성적 시선 속에서도 ‘조선의 콜론타이’로 기억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녀를 설명하기 위해 붙은 ‘사회주의’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일까? 김미지(2004)의 글은 ‘여성 사회주의자’와 연애라는 문제를 보다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내가 제기한 의문들에 ‘사회주의의 시대’였기 때문이라는 간단한 답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와 같은 것들이 가능했는지, 다른 여성들과의 공통점 혹은 차이점은 무엇이었는지 잘 드러나 있지 않다.

  나는 특히 관심을 가졌던 허정숙의 삶을 통해 ‘사회주의 여성’과 연애의 문제를 다루어 보고 싶다. 허정숙에게 연애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녀는 세간의 말대로 정말 붉은 연애를 실천한 것인가? 그녀의 연애는 당대에 어떻게 받아들여진 것일까? 허정숙의 연애와 나혜석의 연애는 어떻게 같았고 또 어떻게 달랐기에?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독립투사화' 되어 있는 허정숙이란 여성이 갖고 있었던 균열과 갈등들을 보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다른 남성들과 함께 아무런 의심도 없이 ‘사회주의자’로 분류되는 것에,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자유주의’ 혹은 ‘급진주의’ 여성이 대립되고 있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 과연 연애를 둘러싼 사회적 담론 속에서 ‘사회주의’와 같은 경계는 어떻게 움직이는 것일까? 만약 그렇게 경계를 짓는다면 그것은 누가 경계를 만드는 것인가? 결론적으로 나는 허정숙의 연애를 통해 일반적으로 많이 통용되는 신여성에 대한 범주화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것이다. 그리고 허정숙에게 ‘사회주의’ 여성이라는 이름을 붙일 때 발생하는 정치적 효과가 무엇인지, 범주화의 욕구가 무엇인지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허정숙의 삶의 궤적1)

  허정숙은 1903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 자료에 따라 1902년, 1903년, 1906년, 1908년 등으로 출생연도조차 정확하지는 않은데, 북한으로 간 이후에 40대 중반의 나이가 주는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출생연도를 늦추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송진희 2004:3) 허정숙의 아버지 허헌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사상가들과 항일 운동가들의 재판을 변호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딸을 나라의 인재로 키우겠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고, 이런 덕분에 허정숙은 배화여고보를 졸업 한 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그러나 보수적이었던 아버지가 택한 관서학원은 수녀원 같이 엄격한 규율로 유명한 곳이었고, 그런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허정숙은 3.1 운동 이후 귀국하였다. 그리고 배화여고보 시절 자신의 스승이었던 차미리사의 권유로 당시 기독교 계열의 여성들이 만든 ‘조선여자교육협회’에서 활동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그 자신도 배움의 욕구를 느꼈는지 1921년 중국 상해로 유학을 떠난다.

  중국유학 길에서 그녀는 첫 남편인 임원근을 만난다. 그리고 임원근을 비롯하여 박헌영, 주세죽, 그리고 김단야 등의 활동가들과 만나고 사회주의 서적들을 접하게 된다. 임원근과 허정숙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부친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한다. 1924년 귀국한 허정숙은 임원근과 결혼했으며, 1924년 말 첫 아들 표(일명 경한)를 출산한다. 이후 허정숙은 ‘신사상 연구회’(후의 화요회)를 거쳐 1924년 5월 창립된 ‘조선여성동우회’에 참가하였다. 또한 당시 허정숙은 남편 임원근과 함께 동아일보의 최초의 여기자로 입사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던 와중 일명 신의주 사건으로 1925년 11월 조선공산당이 세상에 폭로되면서 임원근과 함께 검거되고, 허정숙은 곧 풀려났으나 임원근은 감옥에서 형을 살게 된다.

  이 때, 허정숙은 북풍회에서 활동하던 송봉우를 만나게 되고 세간에는 그들의 동거설이 떠돈다. 허정숙에게는 둘째 아들 길한이 있었다. 그녀를 비방하는 여론에 지친 상태에서, 결국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1년 반의 유학을 마치고 1927년 말 귀국한 그녀는 근우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930년에 일어난 경성 제 2차 학생시위에 가담하면서 감옥에 수감된다. 이후 감옥에서 배운 의학지식을 활용해 태양광선 치료소라는 병원을 경영하기도 했다. 송봉우와의 동거는 미국유학을 갔다 온 직후까지 계속되다가, 송봉우가 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된 이후 전향하자 관계를 끊어버린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세 번째로 만난 이가『조선일보』기자이자 사회평론가 신일용이며, 셋째 아들 영한은 이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정숙은 1930년대 중반부터 국내에서 활동하는 것이 어려운 조건이 되자, 훗날 연안파의 거두가 되는 최창익과 함께 중국으로 향한다. 중국에서 조선독립동맥과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 등에서 활동했던 허정숙은 해방 이후 북으로 가서 활동하였으며, 이때에는 이미 최창익과의 연애가 끝난 상태였다. 최창익은 1946년 북에 가서 곧 결혼을 하였는데, 허정숙이 결혼식장에서 축사를 읽어주는 관계였다고 한다. 1957년 최창익이 연안파와 관련된 종파사건으로 숙청되었으나 북에서 허정숙은 줄곧 친김일성계로 있으면서 문화선전부장, 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1991년 아흔 살이 넘은 나이로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허정숙의 연애를 들여다보기

-송봉우와의 연애를 중심으로


연애의 시대

  허정숙의 연애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 전에, 당시 1920-30년대 조선사회의 시대적 배경을 먼저 알 필요가 있다. 이 시기는 ‘연애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연애’가 본격화되고 유행하였다. 사실 연애는 초기에는 ‘love’와 같은 외국단어를 번역하기 위해 계발된 단어였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오면서 ‘연애’라는 단어는 다양한 관계의 사랑 중에 남녀 사이의 사랑만을 번역했다. 이와 함께 오랫동안 우리말에서 ‘생각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었던 단어 ‘사랑’ 역시 남녀 간의 감정으로 의미변화를 겪는다. 그런 면에서 연애는 근대에 이르러 새롭게 등장한 상품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1920년대에서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연애라는 신상품은 등장하자마자 무서운 기세로 팔려나가며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와 같은 언설들을 낳았다. (권보드래 2003) 특히 당시의 다양한 매체의 대중화는 연애를 대중적인 현상으로, 유행으로 만들었다. 1920년대 소위 ‘문화통치’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조선사회에는 신문과 잡지의 창간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교육을 통해 일정한 독자층과 필자 층이 형성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조선의 담론 장에는 신여자, 신여성이라는 용어가 등장했으며, 특히『신여성』을 비롯한 여성잡지는 신여성 담론을 생산하는 장이 되었다. (김수진 2006) 그리고 여기에서 신여성과 연애, 결혼,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공식적인 지면을 통해 논의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허정숙의 연애는 어떻게 알려졌을까? 송봉우와의 연애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조선공산당 내분의 주동자로 지목되다

  허정숙은 1926년 봄 둘째 아들 길한을 출산한 후, 1926년 12월 제 2차 조선공산당 대회에서 허정숙과 송봉우의 교제사실은 매우 민감한 사안이 된다. 당시 조선공산당을 주도했던 화요계는 북풍회를 포섭하려다가 실패하게 된다. 허정숙은 화요계, 송봉우는 북풍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조선공산당에서는 북풍회원인 송봉우가 당의 정보를 얻기 위해 허정숙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고 규정하고, 이 둘을 조선공산당을 내분으로 빠지게 한 반역행위의 장본인으로 지목했다는 점이다. 2차 조선공산당을 주도했던 화요회계의 책임자였던 강달영은 코민테른에 이들의 관계까지도 모두 보고하였다고 한다.2) 더군다나 허정숙의 남편인 임원근은 제 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감옥에 수감 중이었다.

  당시 아버지 허헌은 사위인 임원근을 비롯한 제 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수감된 이들의 변론을 맡고 있었는데, 이 일로 상당한 심적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집에는 온후하든 아버지 허헌을 비롯하여 싸늘하고 떼리케잇트한 공기가 떠도는 것을 엇절길이 업섯다.”3) 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미국으로 떠나는 허정숙

  그리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허정숙은 아버지 허헌과 함께 1926년 5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조선 땅을 떠났을까? 신문기사의 제목처럼 서양 시찰, 세계일주여행을 떠난 것일까? 당시 신문에는 “그동안 세상에 여론이 많고 여러 가지 변동이 많았던 (허정숙) 여사는 모든 것을 다 돌아보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아들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본연히 삼십일에 경성역을 떠나게 되었다고 합니다.”4)라고 보도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당시 세상의 여론이 그녀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음을 추측해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허정숙 스스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말했을까? 당시 그녀가 쓴 글에는 직접적으로 여기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우연한 일기회로 위대한 포부나 아름다운 동경을 가짐도 없이 기계적도 아니오 의식적도 아인 먼 길을 떠난거시였슴다. 더욱이 내가 본국을 떠나던 때는 본국의 사회는 내외의 큰 타격으로 동요상태에 잇섯고 일본에 잇는 우리 사회에는 상애회의 무리한 습격으로 대혼란상태에 잇는 때이엿슴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떠나가는 나의게는 양행의 깃븜이나 외국유람의 즐거움이라는 거슨 업섯슴니다. 그저 돌(석)에 마즌 듯 한 묵어운 머리와 수습할 수 업는 혼탁한 정신을 가지고 여정에 올은 거시엿슴니다.”5)


  물론 이 북미 인상기는 허정숙이 발달된 자본주의인 미국을 시찰하면서 느낀 바들에 대한 비판적 감상들이 대부분이다. (우미영 2004) 여기에서 그녀는 자신이 유학을 간 당시 상황에 대해서도 ‘조선의 동요상태’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명망 있던 여성운동가가 ‘우연한 기회에’ ‘위대한 포부도 없이’ 미국행을 택했다 말하면서 ‘돌에 맞은 듯 한 무거운 머리’라 표현할 정도라는 것은 또 다른 근심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은 아닐까. 그리고 그 근심이란 송봉우와의 연애설로 인해 비롯된 비난의 여론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또, 그녀가 1926년 10월 미국 콜롬비아 대학으로 유학하면서 서울로 보낸 편지6)에서도 “먼 곳으로 오고 보니 무엇이나 답답한 생각뿐입니다. 난마 같이 흐트러진 정신을 수습하려 여기까지 와서 애쓰나 용이히 수습되지 않고 오히려 더 복잡하여집니다.”라고 밝히고 있어, 미국으로 유학을 간 목적이 도피적인 성격이 짙음을 간접적으로 볼 수가 있다.


세상의 주목, 계속되는 논란

  한편, 허정숙이 떠나고 언론에는 허정숙의 남편이었던 임원근이 “옥중기”7)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감옥생활을 회고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여기에서 임원근은 “사랑의 결정체인 귀엽은 아들 『표』를 안아 주고” 싶지만 “모든 것은 환상이엇다.”고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허정숙은 당시 미국으로 떠났고 아들은 조선에 남겨져 이별했기 때문이었다.


만날 때 감정으론 한 평생 이별이란 모를 너니 호사한 건 사람 마암 엇지엇지 하노라다 그대와의 구든 맹서 모도 다 일케 됏네. 만날 때 감정으론 한 평생 이별이란 모를너니 사랑으로 맛낫던 님 사랑 식어 사라지니 낡은 도덕과 거즛 형식 두 사람을 매여둘 힘이 업서 감각 업는 손길가치 스르르 푸너젓네.


  이와 같이 임원근은 자신의 심경을 담은 시를 글 속에 남기기도 했다. 아내가 떠난 임원근의 심경글이 당시 잡지에 실렸다는 것은, 세간에서 허정숙, 임원근, 송봉우의 이야기가 이미 잘 알려진 것이며, 이들에 대한 관심도 지속되었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1년 뒤에 ‘정신상의 모든 실겅키를 청산하고 새사람이 되어 귀국’8) 하였다고 말해지는 허정숙은 송봉우와의 관계를 지속한다.


허정숙씨와 송봉우군과의 관계는 이미 세상이 잘 아는 터이니 이제 새삼스럽게 다시 말할 필요가 업지만은 최근의 새 소식을 드르면 송씨는 아주 공연하게 허씨의 집에 드러가 동거를 한다고 한다. 수박 것 할는 격으로 서로 떠러져 허송세월(許宋歲月)을 하는 것보다는 증거품의 아들까지 있스니.9)


  이 색상자의 성격이 주로 사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재미거리로 이야기하는 성격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10), 이 기사는 그들의 연애에 대한 세상의 곱지 않은 시선이 귀국 후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는 일 없이 세월만 헛되이 보낸다는 뜻의 허송세월(虛送歲月)을 허송세월(許宋歲月, 허씨와 송씨가 달을 센다, 몰래 만난다)라고 바꿔씀으로써 그들이 공공연하게 동거함을 비꼬고 있다. 1925년 11월에 임원근이 체포되었고, 1926년 12월 송봉우와의 스캔들이 터졌고, 그 사이에 1926년 봄 둘째 아들 길한이 태어났으니, 누구의 자식인가를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색상자는 ‘증거품인 아들’까지 낳았다며 이들의 관계를 공식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1) 송진희 2004, 박석분 외 1994, 서형실 1992, 신영숙 2006, 홍정자 1994, 허근욱 1994 참고.

2) 서대숙 1985:82

3) 초사, “현대여류사상가들(3) 붉은 연애의 주인공들”, 『삼천리』, 제17호, 1931년 7월 1일.

4) “허정숙 여사 아버지 허헌을 따라 서양관광, 시찰, 수학여행을 떠남”,『동아일보』1926년 5월 30일.

5) 허정숙, “울 줄 아는 인형의 여자국, 북미 인상기”,『별건곤』제 10호, 1927년 12월 10일.

6) 박석분 1994:139에서 재인용

7) 임원근, “옥중기 (2)”,『삼천리』, 제9호, 1930년 10월 1일.

8) 초사, “현대여류사상가들(3) 붉은 연애의 주인공들”, 『삼천리』 제17호, 1931년 7월 1일.

9) “색상자”, 『신여성』 7권 8호, 1933년 8월

10) 연구공간 수유+너머 근대매체연구팀, 200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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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키퍼 제도

요즈음 글쓰기 위해

1920-30년대 사회주의와 붉은 연애에 대한 자료들을 뒤적이는 중.

 

 

예전에 경성 트로이카를 보면서 궁금했었는데

언제 한번 '하우스 키퍼' 제도에 대해 자세히 연구하고 싶다.

 

 

..

게니아식 사랑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조차 '물 한잔 마시는 것처럼 성을 가볍게 여긴다'고 비난을 받았는데,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는 '하우스 키퍼'제도와 겹치면서 일제가 당시 사회주의 여성 활동가들을 대중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가장 큰 무기가 되었다.

..

하우스 키퍼란 일본에서 심한 탄압을 받았던 공산당이 권력과 감시의 눈을 피하고 속이기 위해서 여성당원으로 하여금 아지트를 관리하게 한 제도 혹은 풍습을 가리킨다. 통상 당 상층 간부에게 젊은 여성당원이 짝지워진다. 그녀는 레포(운동원)나 아지트 유지, 문서의 관리 등을 맡고 세간에서 격리된 생활을 강요받는다. 게다가 당에의 '충성심'을 악용하여 '성적 봉사'까지 강요받는 경우도 있었다.

..

이순금이나 이경선 그리고 박진홍 같은 여성들은 1930년대 초 학생운동을 거쳐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과 당 재건 운동에 투신하고 일제 말까지 운동에 헌신했다. 그런데 이순금과 박진홍은 이재유를 사이에 둔 삼각 관계로 저널리즘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지하 운동에 몸담고 있던 이들 여성활동가들의 사상이나 내면의 성장을 읽을 수 있는 기록은 거의 없다. 이들은 직접글을 쓰지 않았다. 운동선상의 많은 지식인 남성들이 운동을 하면서 글도 쓴데 반해, 여성들은 '하우스 키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

일제의 검거를 피해 지하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이재유는 1933년 이순금과 동거하다가 1934년 1월 이순금이 체호된 후 1934년 8월부터는 박진홍과 검거하면서 일제의 검거를 피했다. 박진홍이 검거된 뒤에 이재유는 유순희와도 동거했다고 한다. 박진홍은 1935년 1월 체포되었고 옥중에서 이재유와의 관계에서 임신한 아기를 출산한 뒤 친정어머니에게 맡겼다. 이런 박진홍의 특별한 처지에 대해 당시 신문은 선정적인 투로 보도했다. 이순금과 박진홍은 감옥에서 마주쳤고 이재유와의 관계 때문에 약간의 갈등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재유가 1936년 12월 체포된 후, 일제의 조사를 받으면서 대중들의 신망을 잃을것을 두려워하여 이순금이나 박진홍과의 연애관계를 부인하자 '연적'관계였던 두 여성은 이재유의 반여성적 태도에 대해서는 함께 비판적 자세를 취했다고 한다. 이순금은 1937년 5월에 박진홍은 7월에 석방되어 나온 뒤, 이재유와의 관계를 청산하고자 노력했다. 이순금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면 박진홍도 이재유와의 관계를 정리할 수 있다는 것, 이순금이 결혼을 하게 되면 이순금의 결혼 지참금을 운동 자금으로 쓸 수 있다는 것, 두 가지 이유로 박진홍은 적극적으로 이순금의 중매에 나섰고 이순금이 약혼까지 했으나 모두 다시 검거되고 만다.

 

-이상경(2004) "1930년대의 신여성과 여성작가의 계보연구"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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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욕망 사이

결코, 쉽지 않은 문제.

고민의 시작은 ** 공장에 내려가 여성노동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부터.

 

여성주의를 접하면서, 책을 읽던가 혹은 교육을 받던가(주로 후자의 영향이겠지만)

그러면서 그 여성노동자들이 가장 스스로가 변화되었고 생각하는 지점은.

"말 한마디도 조심하게 되었다."는 것-

 

별명이 '음란 사이트'였다는 분도 있었다.

"아줌마들끼리 있으면 못할 얘기가 없었는데,

(여성주의를 알고 보니)

내가 하는 말들도 성폭력일수 있고,

때로는 여자가 남자들보다 더 한 것도 있는 것 같다,

(이제는 배웠으니)

말 한마디라도 조심해야겠다."

는 요지.

 

왜 자꾸 그 말이 마음에 걸리는 건지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발전이라 여긴다"는 그 말-

 

처음 들을때는 그저 "아-" 그렇군요, 하고 듣고 넘겼다.

나 역시도 긍정적 변화의 어떤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다시 곱씹어볼수록 걸린다.

 

1)여성주의자와 非여성주의자 사이의 이분법적인 경계만큼이나

단선적이고 진화론적인 여성주의적 인식의 발전경로를 설정하는 건 문제다.

뭐가 발전이지? 그 발전은 여성주의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

그 길은 누가 제시하고 누가 이끌어주는 것?

그런 교과서적인 해답이 있는 것이 여성주의이던가.

이렇게 하면 여성주의 아니고, 저렇게 하면 여성주의적이고?

교육의 문제..

 

2)사오십대의 여성노동자들이 모여 남자들 얘기하고 sex얘기하고 노는게

왜 이제는 함부로 얘기하지 말아야 할 것,  성폭력으로 인식이 되어야 하는 걸까?

이것이야말로 여성을 수동화하고 피해자화하는 것이 아닐까?

여성주의는 도덕적 금욕주의가 아니다.

 

그러면서 결국 고민은 다시 폭력과 욕망 사이로 돌아옴.

 

폭력과 욕망은 얇은 종이 한 장 차이 같다는 극단적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의 욕망이, 다른 사람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 동의와 강제 사이.

 

성폭력을 논의할때, 그것이 곧 욕망을 거세시키는 방식으로 곧잘 연결된다.

자기 욕망을 부인하지 않고, 고통스러움(피해자임)을 입증하지 않고,

성폭력을 문제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맥락성. 주관성. 상대성....

 

그러나 여전히 그 얇은 종이 한 장 차이가, 영원히 뛰어넘지 못할 벽일거라는 생각도 든다.

 

똑같은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을 전복적인 의미로 읽어내느냐, 아니면 폭력으로 읽어내느냐 하는것은

결국 그 사이의 뿌리깊은 권력관계를 고려했을때만이 가능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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