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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7/30
    어떤 궁금증(10)
    은수
  2. 2007/07/11
    역시..(11)
    은수
  3. 2007/07/09
    불가(능)한 상상(10)
    은수
  4. 2007/07/06
    100분 토론(7)
    은수
  5. 2007/07/04
    성폭력의 개념화
    은수

어떤 궁금증

당신의 고양이님의 [어떻게 그는 자전거에 클리토리스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나?] 에 관련된 글.

돕헤드님의 [성폭력 가해를 반성합니다] 에 관련된 글.

 

오랜만에 컴터를 켜고, 블로그에 들러서, 뒤늦게 글을 확인했다.

뭔가...'개운하지 않은' 감정이 남아, 포스팅을 해본다.

 

"성폭력 가해를 반성합니다."

 

글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돕헤드는 무엇을 '성폭력 가해'로 인정하고 '반성'하는 걸까?

나는 궁금했다.

여기에는 어떤 비꼼도 개인적인 원한도 없다.

그냥 정말 궁금하다.

 

나는 원문을 읽지 못했다.

당고의 글에서 그 내용의 일부로 보이는 글을 발견했을 뿐이다.

 

내가 본 그 글에선,

어떤 이유에서 돕헤드가 자신의 자전거에 '클리토리스'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어떤 이유에서 돕헤드가 클리토리스 자전거를 타며 짜릿함을 느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궁금하다.

"저는 지금 너무나 창피하고, 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고, 어떻게 그런 무감각한 글을 쓸 수 있었는지 자신에 대해 매우 화가 납니다."라고 말하는 돕헤드가

한편으로는 "여성의 성기를 소유하려거나 또는 그것을 도구화하거나 또는 대상화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저는 자신합니다."라고 말할때

진짜 속내가 무엇이었는지 말이다.

 

내가 느끼기엔, 돕헤드가 사과한 이유는,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많은 분들께서 성적 수치심을 느꼈고, 몹시 불편했으며, 강하게 분노했고, 어이없고, 많은 짜증을 느꼈고, 성폭력을 받은 느낌이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돕헤드가 

자전거에 이름을 붙일때, 짜릿함을 느낄 때, 그것을 글로 쓸때

어떤 맥락이었는지, 어떤 이유였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정말로 알 수 없는 상황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좀 더 세세하게 알고 싶었다.

모호하고도 어려운 '-되기'라는 단어 속에 어떤 마음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건 내가 만약 내 자전거에 클리토리스란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탈때 짜릿함을 느낀다면

그 감정과는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궁금했다. 

 

하지만 결국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돕헤드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과정이 또다른 '가해'가 될까봐,

더 정확하게 말해서는 자신이 더 심각한 '가해자'가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듣는 것이 '2차 가해'가 될까?

 

그 '불편함'을 기준으로 볼때, 나는 여자이지만, 그 글이 그리 불쾌하고 불편하지는 않았다.

다른 불편함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다만,

사람들의 오고가는 이야기들 속에서

'모든 여자'가 잠재적 피해자처럼, 억압받는 자인것 마냥 여겨지는게 싫었을뿐이다.

나는 사실 에로틱이라는 단어에도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다.

클리토리스는 에로틱한 부위가 아닌가? 물론 내 감정은 하나의 의견일뿐이다. 

생물학적 남성은 그 부위를 에로틱하게 느끼면 안되는가?

그 감정을 비판받아야되는건가, 아니면 그것을 소유물 자전거에 빗대서 비판받아야 되는 건가,

아니면 공개적인 블로그에서 말해서 비판받아야 되는건가.

 

 

그래서 나 역시도 '성폭력이다/아니다'라는 규정보다는, 아니 규정이 있다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이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100% 순결할 수 없으며,

때때로 공모하고 협상하는 자들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성찰과 소통을 시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차적으로는  '불편함'이라는 단어 이외에 언어화할 수 없는 답답함을 지닌 이들의

풀어놓기,가 중요할 것 같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또,

돕헤드에게 느끼는 감정처럼, 반대편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심리도 궁금하다.

특히 그가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남성'이라고 말해지는 이라면 말이다.

그런 이유로 그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성폭력이라는 규정 자체가 매우 다층적인 맥락에 의해 결정되는 거라면

그 맥락 중의 하나는 그가 생물학적 남성이라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가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상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중의 하나는

역시 문제제기한 이들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이야기 구조 속에서 '성폭력'이라는 규정이 생기면서

따라붙는 효과들이다.

(개인적으로, 당고 글은 "이 행위에 여성주의적인 명명이었다고 생각할 만한 맥락이 있는가?"를 차분하고 냉정하게 살피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폭력'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규정함으로써 가져오는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

그것은 대부분 남성/여성이라는 생물학적 대립항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가해자의 사과문 혹은 징계-퇴출.

이것은 '그나마' 잘 해결되는 케이스로 여겨진다.

 

나 역시도 나의 경험들을 되돌아보면서, 후회가 남았다.

당시에는 분노, 좌절, 이런 감정들에 휩싸여 그런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내가 못했던 걸 다른 이들에게 요구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방식으로 소통할 수는 없었을까.

불편함, 이 누군가를 낙인찍는 기준이 아니라

말하게 하고, 듣게 하고, 돌아보게 하고, 대화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들이 자꾸 발목을 잡는다.

그리고 나서 '반성'이라는 단어가 나와도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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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imaginaire님의 [정신질환자가진단표] 에 관련된 글.

 



예상은 했지만 정말 상태 심각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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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상상

 

..다른 누군가의 노동에 기생함으로써 살아가고 세상의 일부인 자신조차 바꾸지 못하면서 세상을 바꾸자고 한다.             

 

..현실 속 철의 노동자들은 단명하게 될 것이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24시간 활동할 수 있는 노동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흔들리지 않고 투쟁하는 자'로서만 규정지으며 이상화하지말고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인정하며 성찰할 때이다.

 

..프리섹스주의자임을 자처하는 남성들은 진정한 프리섹스를 즐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프리섹스주의자라고 말하는 여성들의 욕망은 여전히 남성들의 욕망으로 치환되기 쉽다. 프리섹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여성활동가들은 남성들에게 창녀로 이해되고 프리섹스주의자인 남성활동가들은 섹스 파트너를 선택할 권리를 향유한다.

 

..남성활동가들은 정세분석과 투쟁방침을 말할때는 입에 거품을 물면서 한번의 성관계가 여성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신경하고 무지하며 이해하지 못한다. ...어떠한 조직도 공개토론회 또는 교육의 장에서 섬세하게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나 피임지식 따위를 주제로 교육하고 토론하지 않는다. 

 

..노동운동사에는 노동운동을 이끌어가는 주체가 수많은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갈등, 모순된 욕구와 정체성이 배제되어 있다. 여성노동자들의 일상을 지배하던 계층상승욕구, 생존전략으로서의 결혼에 대한 욕망, 결혼을 가능하게 하는 연애에 대한 욕망은 찾아보기 힘들고, 오로지 투사로서의 정체성만 드러나 있다. 따라서 한국 여성노동운동사와 그 기록에는 여성노동자를 둘러싼 일상의 욕망과 저항자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절실하다.

 

위의 구절들은 조주은의 책, '페미니스트라는 낙인' 중에서 따온 것이다.

 

며칠전에, 정확하게는 지난 토요일에, 아이공에서 하는 섹슈얼 파티에 다녀왔다.

린다 벤글리스와 바바라 해머의 작품에 대한 얘기도 있었지만.

'음담여설'이란 이름에서처럼, 본격적인 화두는 자기 욕망, sex..그런 것들이었다.

사실은 '잘 모르는 사람'들과 '그런' 얘기를 나눈다는것에 대한 부담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편하게 이야기가 되기도 했다.

(다만, 홍대거리에서나 마주친다면 조금은 얼굴이 빨개질 것 같다. *^^*)

그 중에 한 분이 홈에버 파업현장에 갔다오신 분이었는데 그 곳의 긴장감 돌고, 팍팍한 분위기와 달리, 이 곳의 편안하고도 '촉촉한' 분위기가 너무 좋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나도, 그날의 그런 끈적끈적하고도 야시시하면서 촉촉한 분위기가 좋았다.

(물론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주제는 없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튼 그런 고민이 들었다.

왜, 파업현장에서는 '촉촉한' 얘기들을 해서는 안되는 걸까.

노동조합은 촉촉하고 끈적끈적하면 안되는건가.

물론 나도 파업현장이라는게 특히 점거투쟁의 경우,

언제 용역깡패들이, 혹은 공권력이 투입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점거투쟁을 하면서 지난 번 내가 홈에버에 갔을 때도,

집회 이외의 시간들을 활용하여 여러가지 교육들이 진행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단 한꼭지도,

관계의 문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욕망하는 자아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을까.

 

그건 불가능한 상상인가.

아니면 해서는 안될(불가), 상상인가.

 

홈에버만 하더라도 점거농성중인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있다.

 

어떤 여성노동자는 불편한 잠자리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몸을 뒤척일 것이다.

어떤 여성노동자는 공권력이 투입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몸을 뒤척일 것이다.

한편에서는,

어떤 여성노동자는 남편이 애들을 밥 먹여서 제때 학교에 보내고 있는지 걱정으로 몸을 뒤척일 것이고

어떤 여성노동자는 파업이 끝나고 돌아가면 집안일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을 거라고 한숨쉬며 몸을 뒤척일 수 있다.

 

그리고 또 어떤 여성노동자는 sex를 못한지가 벌써 며칠째야, 하면서 끓어오르는 자위욕구를 애써 참으며 몸을 뒤척일 수도 있다.

 

이 모든 상상들이 가능,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어떤 상상들은 정당한 것으로, 어떤 상상들은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는 것일까.

 

어떤 운동도 개개인의 욕망을 억누르는 방식으로는 결코 '확대'할 수 없다.

운동이 희생이 아닌 이상,

누구나 특정한 자기의 욕망을 운동을 통해 실현하고 그것을 통해 어떤 자기 만족감을 얻는다. 

 

더군다나 그것이 성적욕망이라해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분명히 그 욕망을 억누르는 사회적 규제, 각자에게 다르게 구성될 수밖에 없는 객관적 조건들,

그와 같은 연결고리들을 찾을 수 있을텐데.

 

그런데 왜,

여성노동자들과 그녀들이 모인 노동조합과 그녀들이 싸우는 투쟁안에서

그녀들이 원하는 것, 혹은 불편하게 느끼는 것들은 이야기될 수 없는 걸까.

왜 그 모든 것들은 항상 '계급의식'과는 무관한 것으로 읽혀버리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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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분 토론

100분 토론 "한국의 노동운동, 위기인가" 하고 있다.

 

비정규직법 나오면서부터는 완전 난장판이다.

정작 대답해야될 문제에 대해서는 둘 다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말이다.

 

이용득 사회개혁적 조합주의는 하루 걸러 하루로 언론에 나오는 것 같다. 

 

 

노동운동의 위기론에 대해서 노동운동 내부의 패널을 세운건 참신한데

(물론 많은 시청자들은 자기들끼리 물고뜯고 한다고 그 자체를 위기로 보겠지만 말이다.)

결국은 양대노총, 지도부 간의 문제가 되어버리는 거잖아.

 

그리고 또,

100분 토론의 이분법적 구도가 마치 민주노총이 대단히 전투적인 듯한 느낌을 주는 듯하다.

생디칼리즘을 넘어 정치투쟁까지도 하고 있는데, 외부의 공격이 문제다- 뭐 이런 느낌?

 

 

 

뭐 어찌됐든, 제일 코미디 같은 상황은 그거였다.

 

홈에버 투쟁을 하고 있는 여성조합원이 나와서 비정규직 보호법은 보호의 의미가 없고,

오히려 기간제노동자들을 합법적으로 해고하는 수단이 된다는 비판을 했다.

 

 

 

이용득 위원장. 말을 더듬으며.

 

"에버,,,,홈에버인가요?"

 

 

 

 

(한국노총 사업장이 아니라 정말 잘 모르시나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이랜드 사장이 워낙 노사관계에 악명높은 인간이라 들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 그런 부당해고는 없었을거라는, 법 자체는 문제 없다는 의미였다.

 

 

위기는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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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의 개념화

...(기존의 반성폭력 운동은) 성폭력을 법 담론 안의 범죄로 입증해야 했고 성폭력 사건을 '폭력행위', '사실'로 가시화시키는 데 역점을 두면서 여성의 특수한 맥락과 경험을 소홀히 하게 된다. 피해 여성의 다양한 목소리의 의미를 해석하기보다 다음 단계인 치유와 회복, 법적절차에서의 한계와 싸우는데 주력한다. 주관적인 피해자의 관점이라서 성폭력을 주장하는 여성을 신뢰할 수 없다는 남성 중심적 지배담론에 대한 부담 때문에 반성폭력운동 측은 본의 아니게 지배담론의 흐름을 비판하면서도 '폭력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를 가시화시키는데 주력한 것이다. 또한 성폭력 고소에 대한 지배권력 측의 명예훼손, 역고소 등의 반격은 반성폭력운동단체로 하여금 더더욱 성폭력이 성관계가 아닌 '강간/성폭력'임을 입증하게 만들었다. 왜 그것이 여성에게 성폭력일수밖에 없는가를 분석하여 성폭력이 구성된다는 것을 보이기보다, 그 사실(fact)의 존재함을 강조(증명)해야만 했다.

....특히 강간을 성관계로 만들 수 있는 남성권력 앞에서 폭력으로서의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주체를 '투명하게' 만들수밖에 없었다. 남성의 공격으로서의 폭력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폭력의 대상을 무력하게 만들수록 그 효과는 커진다.....따라서 반성폭력 운동이 전제한 여성은 동질적인 피해자 여성이었다.

 

...모든 여성이 잠재적 피해자로 구성된다. 그래서 성적 쾌락을 추구한 여성은 피해자일수 없으며 피해여성은 성적주체일수 없는 이분화된 논리속에 여성들은 갇히게 된다.

 

...성적자기결정권을 주장하는 자유주의 이론에서의 강간에 대한 설명은..여성을 개인으로 간주하여 그녀의 성관계 안할 권리를 부정했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성별권력을 인정하지 않으며 개별적인 인간으로서의 남녀는 자연적인 성 역할을 부여받은 자율적인 존재라고 가정하는 지배담론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법 담론은 강간과 성관계의 구분을 '동의'의 문제로 놓고 몸의 결정권에 의미를 부여하는 듯 하나 여성과 남성의 관계, 특히 섹슈얼리티와 성별 권력의 문제를 간과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동의의 문제로만 판단할 수 없는, 여성의 특수한 맥락적인 요소를 전혀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성폭력/강간은 몰성적인 개인간의 권리 침해의 문제로 환원된다.

 

....여성의 삶의 맥락에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특별히 거부할 필요가 없는 상대방의 성적 요구에 대해 셔성들은 다양한 의미로서 그 행위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다른 계기로 인해 그 관계의 변화가 생겼을 때 그동안 참았던 여러 행위에 성폭력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관계안의 고통을 언어화하는 순간이다. 이처럼 여성들이 성폭력을 말하는 경우는 여성의 맥락에 따라 다르다. 또한 그 의미도 다를 수 있다.

 

....여성들이 성폭력을 문제화하는 것은 자율적이며 관계적인 여성됨, 성적인 통합성, 자존감의 침해를 언어화하는 것이다. 성별화된 관습에 의한 불편한/소통되지 않는/대상화된 느낌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자존감 침해는 없어진 것을 발견할 때의 느낌처럼 즉각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여성에게 부착된/여성이 소유한 섹슈얼리티를 도둑질한 것, 그 결과가 성폭력의 피해가 아니다. 피해란 성별, 나이, 경제적인 요소 등과 어린 시절의 성교육, 성규범, 여성에 대한 가치 등으로 구성되는 주체가 그 행위의 지속여부, 그 남자와의 관계, 그 행위로 인한 수혜여부 등의 현재의 조건을 협상해서 구성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성폭력이 여성들에게 큰 피해/트라우마를 가져준다는 전제는 그렇지 않은 여성들에게 자신의 경험이 성폭력인가 아닌가의 질문을 가져오게 한다. 그것과는 다른 경험을 하는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면서 모든 성폭력 경험자는 피해자화된다...이것은 결국 성폭력의 이미지를 고정시키고 심각한 죽음과 같은 고통과 피해를 강조하면서, 여성의 입장에서 고통의 피해가 없거나 쾌락이 존재하거나 아직도 상대방을 사랑하거나 등등 '성관계 같아 보이는' 성폭력은 성폭력으로 문제화하기에 어렵게 했다....그러나 성폭력을 말하는 여성들은 이렇게 단일한 피해자가 아니며 고통받는 피해자로서만 살아가지 않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떤 행위성(자율성, 선택, 권력, 공모, 협상, 저항 등)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기보다 오히려 성적 위계의 맥락에 다양한 여성의 행위성을 새롭게 위치시키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 여성의 제한된 위치와 조건 안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 자유롭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위치가 어떤 선택도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그렇게 한계적이거나 제한적이지는 않다. 물론 여성 행위성의 인정이나 다양한 맥락의 제시가 여성의 고통을 드러내는데 역효과라고 말할 수 있다. 고통이 적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인정되지 않는, 다양한 방식으로 말해지는 여성의 고통과 그 고통에 대한 그 관계 내의 여성의 저항방식인 공모, 협상 때로는 무시 등의 행위성은 역의 개념이 아니다.

 

...인식주체로서의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며 여성이 그렇게 해석하는 판단의 기준을 드러낼 때, 남성에 의해 재현되는 하나의 여성성이 아닌 여성 주체성의 다양한 고통들이 드러날 것이며 이는 성폭력 개념을 다시 구성할 수 있게 한다.

 

....이 지점에 성폭력 피해 개념의 어려움이 있다. 여성들이 남성들의 요구에 투명하게, 행위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위치하고 있다면 반성폭력 운동은 정말로 쉬울 것이다.

 

 

 변혜정(2004), "성폭력 개념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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