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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8/29
    잘못된 길(2)
    은수
  2. 2007/08/28
    피해자 중심주의, 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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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서부터 말해야할까(6)
    은수

잘못된 길

잘못된 길(Fausse Route)

                                       by 엘리자베스 바댕테르(Elisabeth Badinter)

 

 

잘못된 길.

1990년대 이후의 급진적 여성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 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바댕테르는 남성성의 구성성과 그 과정을 기술한 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하다.

잠깐 딴 소리지만, identity를 '본질'로 번역한 건, 바댕테르의 책을 통째로 오독한거나 다름없다고 본다.

 

<잘못된 길>에서도 계속해서 주장하는 바이지만

바댕테르는 생물학적이고 본질주의적인 남성성/여성성에 철저하게 반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바댕테르는 미국의 급진주의 여성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제기한다.

 

바댕테르에 따르면 이들이 남성지배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 원인을 찾아들어갈때에는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자연스럽고 선천적이며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남성성' 그 자체의 문제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한편 이는, 반대편에서는 '여성성'이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의 다양한 경험을 단일화해버리는 효과,

남성 가해자/여성 피해자라는 구도로 여성들을 피해자로 희생물로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본질론적인 남성성/여성성에 기반한 페미니즘의 분리주의적 경향에 대해서

바댕테르는 본성에 호소하는 자연주의로의 복귀라고 비판하면서

그렇다면 어떻게 변화가능한가, 라고 다시 묻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차이에 기반한 평등'이라는 슬로건 역시

고정되고 대립되는 이원주의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이리가라이와 같은 이론가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특히 바댕테르는 폭력, 강간에 관한 이론과 실천으로 유명한 드워킨, 맥키넌과 같은 페미니스트들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운다.

이들이 모든 종류의 성적 폭력을 강간과 동일시 한다던가, 이성애와 강간을 인과관계처럼 놓는다던가, 성관계에 있어서 '투명한 동의'가 가능한 것처럼 선전한다던가, 반 포르노 운동이 보수적 도덕주의와 결합하는 현상들에 대한 비판들이다.

 

바댕테르의 문제의식은 많은 고민들을 던져준다.

 

지금까지 섹슈얼리티의 문제는 젠더불평등의 문제로 곧바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김은실 선생님의 말대로 모든 여성들이 어느 정도는 젠더 연속선상에서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각기 다른 맥락들을 젠더로만 환원할 수는 없다.

각각의 계급, 국가, 인종 등의 다양한 맥락을 삭제시킨

단수로서의 여성, 여성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성매매/성노동 논쟁은 강제/자발, 폭력/노동의 대립각 속에서 이루어져 왔지만

무엇이 진실이냐, 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나가 정의(definition)가 되었을 때, 경합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묻혀져버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모성에 기반한 여성성, 여성주의를 주장하는 것의 위험성, 딜레마.

 

그러나 바댕테르는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그토록 경계하고, gender의 구성성을 강조하면서도,

자연으로서의 sex, 그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듯하다.

gender와 마찬가지로 sex 역시,

남자, 여자, 성기를 기준으로 단 두 가지의 성이 존재한다는 것,

하늘이 내려주신 엄연한 '사실'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갖가지 정치적 담론 속에서 구성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바댕테르는 생물학,이라는 상수를 어디까지 인정하는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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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중심주의, 성폭력

은수님의 [성폭력의 개념화] 에 관련된 글.
은수님의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하여] 에 관련된 글. 

...성적 자기결정권이 여성에게도 남성과 같은 권리를 부여하자는 주장이라면, 피해자 중심주의는 여성의 누적된 차별을 고려하여 남성과 다른 대우, 즉 ‘우선적’ 고려를 주장한다. 하지만 남성과 같음을 주장하든, 다름을 주장하든 이 두 가지 개념은 다음과 같은 동일한 인식론을 공유하고 있다. 첫째,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고려하는 데에서, 남성과 남성의 차이, 여성과 여성의 차이, 혹은 개인들 사이의 차이보다는 사회적 범주로서의 남녀간의 차이, 즉 젠더를 가장 우선적으로 사고한다. 둘째, 두 개념이 전제하는 인식자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사회적 제 관계로부터 초월적이며, 자신의 신체를 인식 과정에 개입시키지 않는, 시공간의 제약 없이 언제 어디서 대체하더라도 동일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보는 보편자다. 이러한 보편 주체가 인식하는 성폭력 사건의 객관성은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서 성별 권력관계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실’로 존재하게 된다. 셋째, 두 개념이 전제하는 인간은 자유주의(인본주의) 세계관에서 논하는, 사회 제 관계로부터 오염되지 않은, 투명하고 순수한 행위자다. 다시 말해, 모든 사회적 행위를 스스로 책임(‘선택’ ‘동의’ ‘결정’)질 수 있는 독자적인 주체라고 가정한다.


...자유주의 철학은 양성 간의 평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인 동시에 걸림돌인 것이다. 모든 여성은 여성이지만 동시에 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성폭력 반대운동의 딜레마 중 하나는 “여성이기 때문에 성폭력 당한다”라고 하는 젠더 범주가 성폭력 피해를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하지만, 실은 여성주의가 극복해야 할 인식이기도 하는데 있다. 성차별에 저항하기 위해 여성의 공통성을 강조하는 젠더 개념은, 한편으로는 여성을 성별 정체성으로 환원하여 모든 여성을 동질적인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가부장제에 기능적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오랜 세월 동안 객관성이 남성의 경험에 근거했기 때문에 이제는 여성의 경험이 객관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객관성이 사회적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롭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며, 마치 여성주의가 가부장제 세계관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여성주의는 기존 남성의 입장에서 구성된 객관성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객관성을 역사화 ․ 정치화함으로써 부분화 ․ 상대화하자는 것이다. 객관성은 권력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며, 권력관계에 따라 변화 ․ 유동 ․ 이동하는 정치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모든 피해 여성이 동일한 경험을 하며, 피해자의 경험이 그 자체로 객관적인 것 같은 오해를 유발한다.


...가장 큰 문제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오히려 성폭력 사건의 객관성 증명 책임을 피해 여성에게 떠넘긴다는 사실이다. 성폭력 사건의 객관성은 피해 여성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여성들의 목소리를 존중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개인의 경험과 말하기 실천은 기억들 사이의 경합과 선택의 결과이며, 따라서 경험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해석이다. 성폭력 사건의 객관성(‘사실’ ‘진실’)은 여성의 경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특정 사회의 언어체계에 그 책임이 있으며, 이는 성별 권력관계에 의해 구조화된다.


...개인의 몸은 개인이 소유한 자원이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운동하는 행위자다. 그러나 피해자 중심주의가 상정하는 여성의 몸은 피해 당시의 경험이 ‘고스란히’ 기억된 객관적인 그릇, 공간으로서의 몸이며, 여성 경험의 ‘객관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간주된다.

 

-정희진(2006),“성적 자기결정권을 넘어서”에서 발췌

 


 

 

그릇으로서의 여성의 몸, 몸/정신의 이분법을 넘어서,

여성들간의 차이, 젠더로 환원되지 않는 성폭력,

경험과 해석의 간극, 권력과 객관성..

성적 자기결정권이나 피해자 중심주의는

성폭력임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는 동시에

또다른 여성들의 경험과 기억과 맥락을 삭제시킨다.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주의가 넘어야할 인식...

성폭력에 대한 개념화..아 정말로 어렵다..

정의가 불가능한 것에서 나는 명확하게 정리된 답을 찾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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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7

오늘도 비가 온다...

 

 

언제까지 이렇게 비가 올까.

 

 

 

내가..

잘 하고 있는걸까?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다보면

하나, 둘, 생각이 떠오른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

앞으로 또 향해야 할 곳은 어디.

 

이런 생각들 하다보면

결국 그리워지는 건 사람인데.

함께 했던 사람

함께 고민하고 함께 울었던 사람

끝내 상처주었던 사람.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붙잡고

이렇게 곱씹고 있는 나.

참 못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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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말해야할까

돕헤드님의 [민중은 여성이다] 에 관련된 글.

당신의 고양이님의 [여기까지 읽고 나서] 에 관련된 글.

 

 

 

실은 마음이 쭉-불편했다.

navi가 '잘못'이라는 표현을 썼을 때부터.

나비 당고 돕헤드의 글을 읽고 덧글을 읽고

마음은 점점 더 답답하게 조여온다.

 

 

아-, 이건 아닌데, 내 글은 어떤 의미였나.

어디에서부터 말해야할까.

아주 많이 썼던 말들 중의 하나였던 '여성주의적이다' '반여성적이다'와 같은 말들에 대해, 

어느 순간부터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러한 것은 여성주의적이고, 저러한 것은 반여성적이며 성폭력이다, 라는 규정이

점점 더 체크리스트가 들어있는 매뉴얼처럼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폭력이라는 걸 설명할 때마다

"이건 성폭력이야? 이렇게 하면? 남자가 하면 그렇고 여자가 하면 아니고? 넌 기분나빠? 난 아닌데"

말도 안되는 예시를 끝없이 들어가며 닥달해대는 이들의 속내를 알기에 짜증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특정' 경험의 한 '단면'이 모든 성폭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건 아닌가 두려웠다.

연우의 글에 나온 것처럼  "내 경험을 우선시하고 강요하는 것이" 될까봐 말이다.

내 경험과 네 경험은 다를 수있고, 그게 자연스럽다.

모 힙합가수의 콘서트 장에서 그남들이 우스갯소리로 "땀 많이흘렸어요? 아래까지 다 젖었나?"

했을때 난 그 자리에서 희롱당한 것 같아 기분 더러워졌지만

함께 있던 내 친구는 완전 좋다고 소리지르면서 방방 뛰어댔다.

그 애가 '여성주의적'이지 않아서, 혹은 '여성주의 의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내가 '꼴통페미'여서, 너무 많이 '예민하고' '민감해서'가 아니라

우린 어릴때부터 다른 경험과 환경 속에서, 다르게 자라왔기 때문에

다르게 느끼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모든 '여자들'에게 억압적이라는 그 '보편성'에 기대어서만이, 그래서 '反여성적'이라는 말을 써야만이

그나마 나의 불편함을 얘기할 수 있고, 존중받을 수 있다.

그 맥락을 모르는 바 아니다. 아니 너무도 절실하게 이해한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대로 있었다.

그렇게 하지않으면 그 불편함을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

마치 성폭력,을 다수결로 결정할 수 있는 것마냥 생각하는 그 과정에서

또 누군가의 '다른' 경험들은, 목소리들은 삭제되었으니까.

 

제일 처음 돕헤드의 '사과문'과 반성,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나는 왜 자신의 글에 대한 설명이 없을까,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가 자전거에 클리토리스라 이름 붙인 이유와 맥락이 정말로 궁금했다.

그는 창피하다고 했다. 하지만, 왜? 왜?

그는 반성한다고 했다. 하지만, 무엇을? 대체 무엇을?

그런 이야기들은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그는 '피해'에 대해 '사과한다'고만 말했다.

그래서 나는 궁금했고, 동시에 불편했다.

거한이 말했다시피

아무도 그에게 '가해자'라고 하거나, '우리 모두에게 사과하라'고 하거나

'활동중지를 하라' '블로그를 떠나라'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더 심각한 가해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

정확하게 말해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성에 타격을 입을까 두려워' 그렇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편하다는 말이 나오자 동시에 그렇게 끝내버리는건,

제일 처음 문제제기 한 사람에게도, 그 글을 보았던 사람들에게도,

같은 글을 보고도 다른 생각을 했던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돕헤드 자신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다른 많은 이들도 그랬지만, 나 역시도 그런 식의 종결을 바라지 않았기에 글을 썼다.

정말로 무언가 얘기를 한 연후에, '반성'이라는 단어를 써도 늦지는 않을거라고 

그래서 그런 글을 썼다.

그런데 내 글이 이 일을 수수방관하며 지켜보다가 훈수나 두는 것처럼 비춰졌을까

아니면 처음에 문제제기한 이들을 탓한 것처럼 읽혀진건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던 와중에 돕헤드가 새로 쓴 글, '민중은 여성이다'라는 글을 읽었다.

솔직히, 아주 솔직히, 실망스러웠고,화도 난다.

나, 혹은 다른 이들이 궁금했던 건,

"돕헤드는 어떤 정치적 지향을 가진 사람인가?"가 아니다.

내가 돕헤드가 '그가 어떤 사람인가?'가 궁금하다고 썼던건

그가 어떠한 생각 속에서, 어떠한 맥락 속에서 그와 같은 행동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서였다.

그가 생물학적으로 남자, 라는 것만으로 글을 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의문들에 대해, 불편함을 제기한 이들에 대해, 자신의 글에 대해 침묵한채

자신의 세계관이 어떠하고, 자신의 정치적 지향성이 어떠한가만을 길게 쓰고 있었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사람의 언행을 곧 페미니즘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페미니스트'라고 해도 때때로 그/녀는 누군가에게 불쾌감이 되고 성폭력이 될 수 있다.

중요한건 -주의자,-이스트는 그래서는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는, 그럴리 없다는,

그 완전무결한 관념부터 벗어던지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화가나 버렸다. 자전거에 비유하는 그 대목에서.

돕헤드가 만약 정말로 남성집단이라는 괴물, 남성성이라는 동일체로 보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싶었다면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생각을 했고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를 말했어야 되지 않나.

자신의 욕망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소유하려는 다른 남성들의 욕망과 어떻게 다른지,

여성인 내가 만약 내 자전거에 그런 이름을 붙이고 자위 혹은 여자애인과의 섹스를 상상하는 욕망과는 어떻게 같을 수(아니면 다를 수) 있는지 말해야 하는게 아닌가?

그러나 돕헤드는

"나는 민중이고, 여성이며 이 차별과 억압으로 가득찬 이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주체입니다"라고

선언하듯 말하고 있었다.

왜 돕헤드는 민중을 게이가 아닌, 장애인이 아닌, 흑인이 아닌, 비정규직이 아닌 여성이라 생각했을까.

그가 생각하는 민중이, 그가 생각하는 여성(성)이 무엇이길래. 여성이라는 젠더는 어찌하여 획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차를 모는 운전자들을 개별 주체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왜, 어찌하여 민중은, 여성이라고 명명했던 것일까?

나는 자전거 운전자라는 약자, 소수자, 억압받는 자들의 영상들이 '여성'이라는 단일한 집단으로 투영되는 것이 싫다.

그래서 나는 민중은 여성이어서는 안된다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여성,이 그렇게 투명한 주체로 존재하는 건,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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