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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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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 <작은책> 4월호에 실린 글 입니다.

    김용직/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 사무처장

     

     

1997년 8월 말.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청주로 왔다.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에서 함께 활동해 볼 생각이 없냐는 권유와 활동할 수만 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월 15만 원의 활동비를 받으며 본부 활동을 시작했다. 남들이 들으면 뭐라 하겠지만 민주노조 운동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유일한 조직이라는 생각에 망설임도 없었다.

 

민주노총 활동을 하며 모든 것을 다 던져도 아깝지 않을 나날을 보냈다. 이제 막 민주노조 운동의 상쾌한 물을 먹은 젊은 현장 활동가들(청주 공단의 LG화학과 한국네슬레, 정식품이 그 즈음 민주 노조를 건설했다.)과의 학습과 토론, 술자리에서는 현장의 아픔과 고통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고, 민주노조 건설 이후 바뀌어 가는 현장의 무용담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바꾸는 작은 토대를 마련하고 있었다.

 

당시 김재수 사무처장(현 우진교통 대표이사)은 얼치기 학생운동의 물먹은 내게 “현장을 가르치려 들지 마라. 모든 것은 현장에서 나온다. 현장에서 배우고, 현장의 흐름과 활동을 배우라”며 엄격하게 현장 제일주의를 가르쳤다. 이런 가르침에 따라 현장 활동가들과 호흡하며 현장을 조직하고, 토론하고, 연대하고 투쟁해 나갔다. 그때 내가 할 일은 이들과 함께 뒹구는 것뿐이었다.

 

이런 속에 1998년 IMF 경제 위기는 일대 충격이었다. 그 잘나간다는 만도기계 계열사에 정리 해고와 공권력 투입이란 칼바람이 불어닥쳤다. 나는 공권력이 투입된 당시를 너무도 생생히 기억한다. 공장을 사수한다며 20대 초반 여성 조합원까지 쇠파이프를 들고 비닐 한 장을 덮으며 정문을 지켰다. 그들은 “내가 잘못한 게 뭔지를 모르겠다. 그냥 회사가 시키는 대로 일하고, 야근하라면 야근하고, 특근하라면 특근한 죄 밖에 없는데 내가 왜 나가야 하냐”며 공장을 사수했다. 그 새벽 포크레인과 소방차를 대동하고 2,000명이 넘는 전경이 공장을 에워쌌다. 바리케이트와 쇠파이프로 무장(?)한 조합원들은 한 시간도 채 못 돼 강제 해산당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우리는 무너졌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상황을 정리해서 소속 사업장에 속보로 뿌리는 일과 연행된 조합원들을 면회하는 것뿐이었다. 참 많이 답답했다. 게다가 연행 이후 철저히 준비해 오던 2차 집결 투쟁도 무산되었다. 경찰 측은 연행한 조합원들에게 온갖 압박을 가하며 반성문 등으로 자존심을 짓밟고 신원보증인이란 명목으로 가족들을 불러들여 개별적으로 석방했다. 이러한 일을 겪고 난 조합원들은 패배감에 노조를 외면했다. 고용과 쥐꼬리만 한 임금을 위해 사측에 빌붙어야 했다.

 

나를 비롯한 활동가들은 해고된 이들과 함께 천막을 치고, 농성을 벌였다. 공권력 투입 당시 무기력했던 민주노총의 모습에 일부 활동가들은 ‘너희들이 한 게 뭔데?’라는 차가운 눈초리를 보냈다. 불신은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술 한잔하며 서로 욕지거리도 하고, 원망도 하고, 부둥켜안고 울기도 하고, 그렇게 차디찬 농성장 바닥에서 불신을 이겨 나갔다. 그 지겨운 농성과 매일 이어지는 출근 투쟁에 지역의 활동가들이 하나둘씩 함께하면서 서서히 조합원들은 패배감을 씻어 가고 있었다. 지역 차원의 집중 결의대회가 열리고, 자신감을 되찾은 조합원들은 ‘해고자 원직 복직’을 내건 파업을 통해 3년 만에 원직 복직을 이뤄 내며 현장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나는 연대를 조직하는 일을 해 나갔다. 수많은 사업장에서 투쟁이 벌어졌다. 충북이라는 지역에는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이 밀집해 있다.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스스로 살 길을 ‘연대’로 설정하고 함께 싸워 나갔다. 그런 지역 연대는 2004년 우진교통 투쟁에서 최고의 위력을 발휘했다.

 

우진교통의 부도덕한 버스 사업주는 6개월이 넘게 임금을 체불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청주시는 사업주를 비호했다. 이에 맞선 우진교통 노동자들은 어느 날 청주시청을 점거하게 되었다. 청주시청 앞 집회를 마무리하며 여느 때처럼 전경들이 빼곡히 지키고 있는 시청 정문을 조합원들과 함께 밀었다. 그런데 문이 훌러덩 열렸다. 순간 조합원들이 시청 안으로 밀물처럼 밀려들어 갔고 전경들과 각개 전투가 벌어졌다.

 

그렇게 우연찮게 우리는 시청 앞 광장에서 농성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3일 만에 공권력이 투입됐다. 수백 명의 조합원과 연대해 왔던 활동가들이 몽땅 연행돼 충북 도내 곳곳의 경찰서로 분산 수용되었다. 우리들은 만도기계의 경험을 살려 경찰서 안에서 구호를 외치고, 노동가를 부르고, 밥을 달라며 농성을 했다. 석방된 사람들은 곧바로 몇몇 가족들이 남아 있던 시청으로 다시 몰려가 시청 앞 사차선 도로를 점거한 채 연행자 석방 등을 외치며 치열하게 투쟁했다. 구속될 줄로만 알았던 나도 이러한 투쟁 덕분에 풀려나가게 되었다.

 

투쟁이 더욱 치열해지자 조직부장이었던 나를 체포하기 위해 체포조 십여 명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나를 뒤쫓았다. 이에 맞서 나를 지키기 위해 공수대, 해병대 출신 조합원들이 화장실까지 졸졸 쫓아다녔다. 냄새 나는 대변을 십수 명의 조합원들 속에서 봐야 하는 심정이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어차피 구속을 각오한 것’이라며 투쟁의 전면에 나섰다. 십여 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시청 앞 전 차선을 막고 공권력과 전면전을 벌였다. 청주시청과 자본 측은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지 서울에서 악명 높은 전투 경찰 1001부대를 불러 내렸다. 심야에 전면전이 벌어지고, 1001부대 놈들의 무자비한 폭력 속에 중•경상자가 속출했다. 한 조합원은 순간 쇼크로 죽음의 경계를 넘어갔다 오기도 했다. 나를 포함한 지도부 전원에게는 체포영장이 떨어졌다.

 

이 위기를 극복한 게 바로 지역 총파업이었다. 시청 점거 후 연일 공권력과 맨몸뚱이로 접전을 벌이던 지역 활동가들은 총파업만이 유일한 돌파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금속연맹과 청주공단 3사 등의 사업장을 중심으로 지역 총파업을 결의했다. 말로만의 총파업이 아닌 구속을 각오한 총파업이 현장에서 차례로 일어났다. 사상 첫 지역 총파업! 불법 파업이라는 부담감은 치열한 투쟁 속에 함께한 활동가들의 결의로 극복할 수 있었다. 이렇게 총파업과 치열한 한판 승부가 열리기 하루 전, 결국 토호 자본과 지역 권력이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경영권을 노조에게 위임했고, 충북 지역에 첫 노동자 자주 관리 기업이 탄생했다.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 활동가들 전망의 부재! 이런 말들이 오간 지 참 오래됐다. 뾰족한 왕도도 없다. 아니, 당연히 왕도는 없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원칙으로 돌아가면 된다. 핵심은 현장에 있다. 자본의 무한 착취 속에 신음하고 탄압받는 현장 속에서 저항은 시작되고, 서서히 대안으로 자란다. 그 중심에 민주노조 운동이 있다. 민주노조를 살리고 현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일, 현장 활동가들을 끊임없이 양성하고, 그들의 연대와 교류를 확장시키는 일! 그게 바로 내가 할 일이다. 아직도 나에겐 할 일이 있고, 그들은 나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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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8 08:50 2012/03/28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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