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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부...8만원(_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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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송신부와는 인연이 있다. 내가 다니던 성당에 그 분이 부임해 왔다. 88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면 그 옆에 '복사(服事)'라고 시중드는 아이가 있다. 결혼하면 화동(花童)같이. 그걸 송신부 있던 동안 내가 계속 그걸 했으니.

 

그 때는 모를 건 몰라도 알 건 다 알았다. 87년 이후 성당에 왔다갔다하는 대학생들 중 몇 몇의 옷에서 최루탄 냄새가 났으며, 어떤 횽아는 최루탄 파편을 주워와서 이런게 눈알에 박히면 죽는다고 생생하게 학습당한 기억이 있다. 여하간 부산카톨릭회관을 중심으로 광주학살에 관한 비디오가 상영되고, 그 비디오 테입이 성당의 교육관 한 곳에서 은밀하게 상영되었고, 일부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발행한 '빨간책(아마 '그날이 오면'이지?)'을 돌려보았다.

 

마침, 나의 아버지는 그 책을 가지고 계셨는데, 우연치 집에 있는 캐비넷을 뒤지다 그 책을 발견했다. 실로 충격. 그렇게 사람을 일그러뜨린 것도 충격이었지만, 낯익은 이름 석자. 전두환. 그게 충격이었지뭐.

 

당시 내가 다니던 산동네 성당은 복사들이 한 20명 정도되었는데, 송신부의 미사집전에는 '학'을 내둘렀다. 왜냐하면 일단 말수가 적고, 친절하지 않으며,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쉽게 접근이 안되는 인물. 그냥 무서웠다는 것이 공통의견. 통상 미사를 끝내면 복사들에게 '수고했다'라는 말이나 건네는데, 그런 것도 거의 없었다.

 

허나, 그 성당에서는 작은 변화가 감지되었다. 그 이유는 전혀 예상치 못한 자가 본당 회장이나 새로운 직책을 맞게 된 것이다. 가령 돈있고, 다음 차기 본당후보로 내정된 사람이 아닌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밀어주고, 또한 다른 직책에 있는 사람들도 그저 열심히 하고 의지있는 사람을 뽑는 등 그런 식이었다. 있는 사람들의 불만은 컸고, 대립각을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동네사람들은 그러한 송신부의 선택을 존중했고, 호응하였다.

 

소위 성당으로 내려오는 사람, 즉 산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성당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발언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하간, 송신부 덕분에 성당 분위기, 많이 변했다. 그 송신부가 부산지역에서 민주화 운동과 관련 단체들의 수장격을 도맡은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변화는 신자들이 새로운 신부의 전횡(?)을 견디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점과, 송신부가 1992년 다른 성당으로 발령간 이후에도 내가 다니던 성당의 신자들이 가끔씩 송신부의 근황과 안부를 묻기 위해 그 곳까지 달려갔다는 점이다. 좋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렇다고 다 좋았던 것은 아니다. 사실, 송신부도 산동네 성당의 신자들이 가졌던 불만, 특히 너무 뻣뻣하다, 때로는 권위적이다, 등등의 비판 호되게 들었고, 스스로가 많이 고친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깐 보고 싶어 다른 성당까지 찾아갔던 거지. 

 

여하간 그러한 송신부에게 검찰의 사정의 검은 손이 뻗쳤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검찰이, 무슨 똥개집단도 아니고, 8만원 송금의 출처까지....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다. 무슨 한이 그리도 쌓여있는지 인격살인에,  정치적 사살까지 당최, 그들이 왜 그들의 뇌를 냉장해 둔 상태에서 왕왕거리는지 알 수가 없다.

 

 

http://www.nahnews.net/ 여기로 가서 메인 기사를 읽어보시면 되겠습니다.아~ 시부랄 탱탱구리들...신부고 뭐고 일단 밟고 보는 구나. 아고라에도 떳습니다. 아고라 눌러라.

글고, 삽입기능이 바뀌어서 영 불편하네요..쉬프트 누르고 엔터 쒜려서 공간을 넓혀야 하남요?ㅠㅠ 어떻게든 적용하려고 노력은 해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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