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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이를테면 오늘 루이는 이른바 '행복과 미래'를 얻기 위해 물질적인 부에 집착하느라 정작 단 한 순간도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한 채 인생을 소모하는, 돈 귀신에 들린 '멀쩡한' 사람들을 헤아릴 수 없이 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 비판이란 지비체제가 하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안전하다."

 

"그러나 아예 체제 자체를 부인해 버리거나 적대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체제는 개혁을 수용할 수 있어도 변혁은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는 유대교 체제의 문제점을 비판하여 개선을 요구하는게 아니라 완전히 뒤집에 다시 세우려 한다."

 

"신도들이 복음서를 읽으며 의문이나 토론과정을 거쳐 예수에 대해 이해해 가는 쪽보다는 무작정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게 하는 쪽이 신도들의 교회에 대한 복종심을 관리하기에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교회들이 이미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가장한 상점 혹은 기업이라면. 그것은 비판과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부인의 대상일 뿐이다."

 

"예수는 요즘 말로 '계급적 관점'을 가진 셈이다."

 

"하느님은 교회나 기독의 성에 갇힌 존재가 아니다."

 

* 얼마전 말레이시아 법원은 그들의 말로 하느님이라는 뜻의 '알라'를 회교도가 아닌 자신들도 사용할 수 있게끔 해달라는 소송을 내어 승소한 바 있다. 그냥 그렇다고....

 

"예수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예쑤가 무조건적인 용서를 설파했다는 것이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도 갖다대라'는 그의 말(마태 5:39)은 불의와 폭력에 대한 무기력한 순응을 강요하는 활동되어 온 가장 유명한 경구다. 그러나 오늘 좀 더 섬세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의 이 경구가 오히려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아챈다. 사람은 대개 오른손 잡이다. 오른 손은 '바른 손'이며 고대사회에선 더욱 그랬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뺨을 때린다는건 오른 손으로 상대의 왼뺨을 때리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오른뺨을 때리면"이라고 했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때렸다는 말이다.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행위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하찮은 상대를 모욕할 때 사용되곤 했다. 그렇게 모욕당한 사람에게 예수는 '왼뺨도 갖다 대라'고 말한다. '나는 너와 다름없는 존엄한 인간이다. 자, 다시 재대로 때려라'라고 조용히 외치는 것이다.

 

* 사실 일일이 자판을 두드리는 것 또한 고통스럽지만, 김규항의 억지해석에는 몇 마디 적어야 겠다. 나는 예수를 잘 모르나, 멸시를 당했다고 다시 제대로 때리게 하여 존엄성을 찾게 한다는 의미는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때리는 사람이 오른손잡이든 왼손잡이든 간에, 택스트는 전후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 건 성서도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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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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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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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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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위 표와 같이 마태오 복음(공동번역을 본다. 루카복음 이외 마르코, 요한 복음에는 동일한 내용이 없다.)의 5:38부터 5:42까지를 보면 맥락상 "저항의 의미"로 해석되기 어렵다. 특히 루카복음의 내용 중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는 문구에서도 저항의 의미를 내포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저항은 빼앗기는 것을 막고 지키는 것이자 적극적으로는 되찾아 오는 것이다. 그런데 전후 맥락상 이것이 저항하라는 의미인가. 성서에 이 구절의 표제어는 '폭력을 포기하여라'이다.

 

그 다음 표제어는 "원수를 사랑하여라"이다. 5:43, 44에서는 이러한 행동지침을 통해 결과적으로 더 큰 과제를 던진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결국 예수의 말은 '소극적 저항'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포용과 희생, 이타적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일 뿐 이 문맥에서 어떠한 사회구조, 관행에 대해 저항하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바로 예수가 '지배체제에 의해 사형당했다'는 사실이다. 예수와 관련된 모든 해석과 의견들은 예수가 '왜 사형당행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지배체제와 불화하지 않으면서, 아무런 오해와 곤경에 처하지 않으면서, 이쪽에서도 칭찬받고 저쪽에서도 존경받으면서 예수를 좇고 있다 말하는 건 가소로운 일이다."

 

* 조금 설득력이 없는, 예수 하나가 총대메고 사회를 변혁하는데 일조했다는 것엔 동의하지 않는터라, 더구나 그 당시 역사적 맥락 또한 잘 가미되지 않아 해방신학을 대중화, 현대화한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수를 부여잡기 보다는 아예 그만두는 것도 예수를 보다 객관적으로 만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다음 글을 참조.

 

내가 마지막으로 갔던 교회가 바로 소망교회였다. 명박명박 장로 시절의 바로 그 교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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