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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까짓거, 사실 10명 20명씩 조직해내는 것보다 훨씬 쉽다.
블로그 글로 올리기엔 너무 긴 내용이지만, 이건 어쨌든 내 거니까 내 공간에도 하나 두고 싶었다.
제25대 집행부 총노선(안)
초안 작성 : 집행위원회 2007. 03. 17.
발의 : 운영위원회 2007. 03. 19.
지붕 덮은 쇠항아리
“한국의 대학 등록금은 유럽이나 일본 등 대부분의 선진국에 비해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1990~2005년까지 15년간 물가상승률의 2배에 육박하는 등 1990년대 이후 등록금이 급격히 상승한 결과다. … 이는 1990년대 이후 국내 대학이 등록금을 급격히 올렸기 때문이 라고 이 교수는 분석했다. 그는 1990~2005년 15년간 연평균 등록 금 상승률은 국립대 7.3%, 사립대 9.2%로 같은 기간 물가상승률 4.8%의 1.5~1.9배에 이르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국내 대학(사립대학 기준)의 등록금 의존율은 65.3%로 미국 사립대학(20% 수준)의 3배에 이르는 등 OECD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 문화일보, 2007년 3월 15일
“노사관계로드맵은 악소조항으로 가득하다. 그나마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및노사관계조정법에서 노동자를 보호했던 조항들이 모두 파괴되었다. 국제노동기구들이 끊임없이 폐지를 요구했던 필수공익사업장은 더욱 확대되었으며, 노동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파업 역시 대체근로투입 전면 확대로 가로막히게 되었다. 노동자가 부당해고를 받아도 사용자는 처벌을 받기는커녕 돈 500만 원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참세상, 이꽃맘, 2006년 12월 8일
위에 인용된 기사를 각 언론에서 직접 읽어본 사람이 아닐지라도, 그 기사 내용은 실제로 매우 친숙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이 기사들에 실려 있는 모든 한숨과 눈물들, 핏자국과 비명소리들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하고 낯설지 않은 것이 되어 버렸다. 비싼 등록금, 폭압적인 노동정책, 심화되는 빈곤, 그리고 거리를 누비는 진압봉.
한 세대를 풍미했던 한 시는 이렇게 노래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그렇다. 이 땅을 살아가는 건전한 지성을 가진 그 누가 하늘을 보았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정수리를 짓누르는, 우리의 숨통을 옥죄어 오는 저 견고하고 어두컴컴한 쇠항아리 천장을 느끼고 있다. 건물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간단하게 고개를 들어 천장을 확인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억압은 하나의 실재이다.
그 실재를 확인하기 위해 잠시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을 회상해 보자. 국제자본과 한국자본 사이의 이윤 분배 재설정을 위한 한-미 FTA는, 분파를 뛰어넘은 한국 총자본의 전폭적인 지지를 업고 추진되었다. FTA의 이해당사자인 총자본은, 지지광고의 공중파 방송은 허용하면서 반대광고의 방송은 허용치 않는 유아적인 치졸함을 통해 자신의 반동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고, 최근 마지막 협상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소위 ‘아군’이라 할 수 있는 기자들까지 무분별하게 폭행하는 모습을 통해 그 절박함을 보여주었다.
FTA의 초미의 관심사인 자본의 이윤이 형성되는 곳, 살아있는 인간의 노동이 움직이는 현장은 더욱 더 폭력적인 방식으로 재편되고 있다.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불안정 노동의 확산은 빈곤과 자본에의 종속을 심화시키고 있으며, 허울뿐인 법을 통해서나마 보호받던 노동의 권리는 노사관계 로드맵의 통과와 함께 절멸의 포문 앞에 섰다. 비정규직의 노동환경은 이미 87년 이전, 전태일 이전의 수준으로 추락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 대한 노동자들의 주체적인 저항의 역량은 체계적이고 섬세한 자본의 메스로 들어내고 제거되어지고 있다.
사회재생산의 기본 동학을 구성하는 교육, 그 중에서도 특히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의 주요 중간 고리를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고등교육의 현장은 어떠한가? 90년대 이후 급등에 급등을 거듭해 온 등록금이 고등교육을 통한 계급 재생산을 촉진하고 있음은 그 동안 끊임없이 지적되어 왔다. 최근 정부가 2010년까지 관철시키겠다고 공언한 국립대 법인화, 국제 경쟁력 강화라는 미명하에 계속되어 온 학사관리 엄정화, 커리큘럼 수준에서부터 체계적으로 제거되어 온 자유로운 지성의 훈련과정과 수요자──자본──의 입맛에 맞춘 맞춤제작을 목표로 하는 학사과정 등이 캠퍼스를 지배하고 있다.
자본의 위기와 반격
이러한 오늘의 살풍경은 몇몇 지각없는 위정자들이나 양심 없는 재벌들에 의해 조성된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수사 역시 우리에겐 매우 친숙하다. 그러나 과연 신자유주의란 무엇이란 말인가?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삶을 팍팍하게 만드는 모든 것──비정규직, FTA, 성차별, 등록금 인상 등의 현상 형태의 총합인가? 아니면 우리의 삶을 팍팍하게 만드는 저 누군가들이 믿고 있는 잘못된 이데올로기에 불과한가?
최근 소위 진보진영 사이에서 너무 남용된 나머지, 마치 뉴욕이나 워싱턴 상공 어딘가 쯤에 떠 있는 거대괴수 정도로 물신화된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시작된 그 태동부터, 자본의 이윤율 저하와 그에 따른 자본주의 공황에 대한 반격으로서 구성되어 온 하나의 전략이며, 현대 자본주의의 하나의 레짐(Regime)1)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은 총자본의 위기와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전략의 차원에서만 온전히 해명될 수 있다.
자본의 위기란 무엇인가? 당연히도 그것은 이윤율의 저하이다. 그렇다면 자본의 이윤의 원천은 무엇인가? 살아 있는 노동──살아 있는 인간이다. 죽은 노동으로서의 자본은 마치 살아 있는 인간의 피를 빨아 연명하는 흡혈귀와 같이, 지속적으로 인간의 노동을 착취함으로써만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몸에 흐르는 죽은피와 빨아내는 산피가 희석에 희석을 거듭하여 점점 묽어져 갈 때,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보다 많은 사냥감에게서 보다 많은 피를 뽑아내는 것──그리고 그것을 수월케 하기 위해 사냥감을 사육하는 것.
즉 오늘의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략 원칙은 착취의 증대에 있다. 세계 총자본 차원에서 벌어지는 이윤 재분배의 문제는, 전 방위로 확산되는 착취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갈증에 시달리는 자본 내 분파의 2차적인 파이 나누기에 불과하다. 자본 내 분파 사이에도 탐욕스러운 제 살 뜯기가 진행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증대되는 착취를 아랑곳하지 않고 떨어지는 이윤율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 시대 자본의 반격은 살아 있는 노동에 대한 공격,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공격을 그 주요 타격방향으로 한다.
현재 남한 사회를 규정하고 있는 자본주의 레짐 역시 동일한 논리로 작동한다. 비정규직의 확산과 그를 뒷받침하기 위한 국가 수준에서의 파견법 개악 및 노사관계 로드맵 국회통과는 그 한 예이다. 분할과 고립화를 통해 저항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동시에 ‘총자본의 위원회’의 성격을 명확히 드러내는 국가폭력의 지원을 받아 노골적인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을 추구하는 것이 오늘날 비정규직 정세의 본질이다. 남한 자본의 이윤은 FTA 회의장에서 오고가는 몇 가지 문서 쪼가리나 국제수지 그래프, 혹은 한국은행 콜금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현실적인 활동 전체──즉 남한 민중의 삶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FTA, 국제수지, 콜금리 등은 그렇게 뽑아낸 민중의 피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대한 포식자들 사이의 피 튀기는 경쟁일 뿐이다.
기층의 위기, 주체의 위기
따라서 현 시기 총자본의 전략적 기반은 근본적으로 산 노동의 세계를 자신의 이윤 창출을 위해 재구성하고, 산 노동을 보다 영속적이고 심화된 종속 상태에 두는 것에 있다. 즉 다시 말해, 자본의 지배는 민중의 삶의 현장 모든 곳에서 산 노동을 효율적이고 압축적으로 사육하고 도살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현대 자본주의 레짐의 전략은 구체적인 차원에서는 주체의 제거로 나타난다. 이러한 흐름은 두 가지 차원의 목표 추구의 상호 피드백을 통해 강화․재생산된다. 하나는 보다 효율적이고 심화된 착취의 확장, 다른 하나는 가능한 저항의 전면적인 봉쇄. 이 두 흐름은 하나의 동전의 양면이다. 종속화. 살아 있는 노동의 노예화를 통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 자본은 현실적 인간을 현상적 인간으로, 독립변수로서의 인간을 종속변수로서의 인간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자신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심화되는 자본에의 종속화는 사회 전반에 걸쳐 모든 인간을 자본의 이윤을 생산하는 기계로 변화시키며, 오로지 자본의 객체로서만 존재하도록 강제한다.
하나의 사례로서 현재의 비정규직 정세를 보자. 비정규직의 확산은 현재 노동현장에서 매우 효율적으로 대자적 노동계급을, 즉 자본에 대한 저항의 주체를 제거해 나가고 있다. 남한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존재하던 전투적 대공장 노동자 집단은 유연해지는 노동시장 속에서 비정규직화의 위협에, 그리고 비정규직과의 차별화에 점차 해체되어가고 있다. 새로이 확산되어가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조직력의 미비와 용이한 대체 가능성 때문에 아직 유의미한 주체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2) 그리고 국가는 보다 유연한 노동시장 보장과 대체인력 투입의 확대, 현실적 노동자 투쟁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등으로 이를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노동자 운동은 그 폭발력의 원천을 점차 상실해가고 있으며, 그 공백을 관료주의적인 체계 개편으로 이루고자 하는 일각의 흐름은 이러한 흐름을 가속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러한 저항 가능성의 봉쇄의 원인인 동시에 결과로 자리하는 것이 바로 착취의 강화이다. 최근 울산과학대학 투쟁에서도 드러났듯이,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수준은 이미 1970년대를 넘어 19세기 수준으로 떨어졌다.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지는 구조조정은 산업 예비군과 노동자의 순환을 가속하여 전사회적 빈곤화를 초래하고 있으며, 절대적 잉여가치의 수취를 위해 비정규직의 저임금도 만연해 있다. 이러한 흐름은 주체의 저항 기반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무너진 기반에 근거하여 진행되고 있다.
결국 이러한 흐름의 결론은 기층의 위기, 주체의 위기이다. 살아 있는 노동이 위치한 현장으로부터 확산되는 위기는, 자본의 재생산 사이클을 저항의 재생산 사이클에 걸쳐서, 저항의 사이클을 끊어내면서 위치시킨다는 점에서 점차 심화되는 위기이다. 이러한 위기는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투쟁의 무력한 패배로 드러난다. 지금의 한-미 FTA 반대투쟁의 현주소를 보자. 자본에 대해 유의미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유일한 주체인 노동계급의, 기층에 위치한 역량이 파괴된 상황에서, 기초 없는 가두투쟁이 과연 실제 FTA 협상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투쟁의 주체들이 국가의 그토록 야만적인 탄압 앞에 온 몸을 내던졌음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정부와 자본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8차 협상까지 순조롭게 진행하지 않았던가? 이는 학생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FTA나 파견법에 대한 반대는 고사하고, 스스로의 자치를 위협하는 등록금 인상이나 학사 구조조정 등에 어떠한 유의미한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말라 죽어가고 있는 것이 현 학생사회의 현주소가 아닌가?
학생사회의 위기
학생사회에서 진행되는 위기의 현실을 보다 자세히 검토해 보자. 90년대 이후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반복되어 왔던 ‘학생운동의 위기’는 이제 식상할 정도로 곱씹어져 왔다. 90년대 초중반 혹자는 소위 ‘신세대론’을 들고 나와 사람이 변했다는 말을 하기도 했고, 혹자는 문민정부 이후 학생운동의 ‘적’이 명확하지 않게 되어 대중적인 공감을 얻기 어려워졌다는 진단을 내리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자는 민주화 이후 학생운동의 사회운동에 있어서의 소임이 다했다는 말을 하며 학생운동의 종말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은 모두 핵심을 빗겨나간 것이다. 3천 년 전 이집트 파피루스에도 쓰여 있었다는 ‘요새 애들’에 대한 푸념은 말할 가치도 없거니와, 투쟁에 의해 드러난 적이 물러나자 예전에는 적이 명확했다고 말하는 식의 결과론 역시 터무니없다. 사회운동에 있어서의 핵심적인 역할이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으로 이전되었다는 주장은 그럴듯해 보이나, 학생운동의 독자적인 생명력 소실은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핵심적인 문제는 학생운동의 위기가 아닌 학생사회의 위기다.3) 등록금이 없어 휴학하거나 그 휴학하는 친구를 바로 옆에서 보면서도, 그저 원래 그런 것이려니 하며 살아가는 학우들의 조건의 문제다. 자신이 왜 배우며 무엇을 배우는지, 어떻게 배우는지 생각해 볼 기회는 갖지도 못한 채 학점과 취업의 고민에 짓눌리는 것이 운명이려니 생각할 수밖에 없는 조건의 문제다. 재미없는 어른이 되는 것을 거부하지도 못하고 재미없는 어른이 되기 전을 충분히 즐기지도 못한 채, 오로지 재미없는 어른이 되기 위해 젊음의 하루하루를 소비하는 21세기의 젊음의 문제다.
이러한 현상적 위기는 결국 학생들 역시 스스로의 삶을 규정하는 조건들에게 종속화 되어가는 흐름의 결과이다. 학교 밖 사회에서 벌어지는 자본의 구조조정 속에 심화되는 빈곤과 청년실업은 이전 세대 학생들을 규정지었던 ‘유예된 존재’로서의 조건을 파괴하고 예비 노동자로서의 성격을 강화시켰다. 자본이라는 고객을 위해 학교라는 공장에서 교수․강사라는 기계를 통해 생산되는 상품으로 규정된 학생은, 학사관리와 사회적 압력을 통해 분할되고 그 분할의 결과로서 집합적 힘을 잃게 되며, 그 결과로서 다시 강화되는 압력에 대응하지 못하게 된다.
올해 교육투쟁의 핵심적 화두였던 등록금 인상 반대의 경우 1만에 가까운 서명을 받아내며 그 공분의 수준을 짐작케 했다. 비단 관악 뿐 아니라 전국의 대학에서 급등한 등록금은 각 포털 사이트 및 주요 언론에서 근 10년간의 추계까지 꺼내어 보도하게 할 정도로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적 분노에 비해 실제로 이루어지는 대응은 사실 보잘것없는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근래 관악에서 등록금 인상을 실제로 막아낸 사례는 거의 없으며, 타 사립대의 경우 본부 측이 생각했던 것보다 높은 인상률을 발표하고, 그에 대한 투쟁을 통해 결국 본부 측이 원래 생각했던 정도의 타협안으로 마무리되는 악순환을 거의 전혀 끊어내지 못했다.
최근 교육부가 2010년 내로 반드시 관철시키겠다고 발표한 국립대 법인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국립대를 법인화──기업화──하여 수익창출 모델을 적용하고, 학생들을 스스로 비용을 들여 스스로를 생산하는 상품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한 데에 대한 사회적 문제제기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타 사립대의 재단이 벌이고 있는 장사 행각에 대한 사립대 학생들의 공분 역시 들끓고 있는 현실에서, 국립대 법인화가 고등교육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사회적 시각은 거의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에 대해 그 당사자인 학생들이 할 수 있는 바는 무엇이었는가? 실제 자기 대학에서의 국립대 법인화 추진 움직임을 막아낼 힘조차 없는 소수의 학생들이 교육재정 확충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뛰어다니는 것이 과연 교육의 자본주의적 재편을 막아낼 수 있는가? 실제로 관악은 2006년 새 총장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국립대 법인화에 대한 총장 후보들의 입장에 대해 어떠한 코멘트도 대응도 하지 못했다. 그에 따른 결과는 국립대 법인화를 자신 임기 안에 성취하겠다는 신임 이장무 총장의 인터뷰 내용이었다.
이러한 구체적인 투쟁에 있어서의 무력함은 결국 학우대중의 집합적 힘의 부재에 그 원인이 있다. 자신의 현실을 바꿔낼 수 있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아닌, 수요자로서의 자본을 위해 만들어지는 객체로서의 인간으로 사육되는 것이 현 시기 학생 대중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런 객체화․종속화의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는 유의미한 실천은 아직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주체화의 정치와 대중운동
이러한 현실 앞에 우리의 움직임은 어떠해야 하는가? 주체가 있어야 현실을 바꿀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또 현실을 바꾸지 못했기 때문에 주체를 만들지 못하는, 마치 닭과 달걀의 관계와 같은 악순환을 어떻게 끊어낼 것인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해선 진화론의 끄트머리까지 가봐야 한다. 즉 최초의 난생생물은 원생생물로부터 진화했을 것이고, 원생생물은 알에서 나온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에, 닭이 달걀보다 먼저라는 식의 논리가 가능하다.4) 현 시기 우리의 현실을 규정하는 악순환 역시 마찬가지로 정치의 근본, 사회구조의 근본에서부터 풀어나가야 한다. 사회란 무엇인가? 자본이란 무엇인가? 사회란 인간들의 집합체요, 자본이란 인간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맥락을 가진 법적 관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언제나 그렇듯이, 인간적 지배의 고리를 끊어내는 움직임은 인간적 요인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다시 말해, 현 시기 종속화를 통한 자본의 지배를 끊어내는 우리의 운동은 무엇보다도 주체화의 정치로서 자리매김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21세기의 자본이 위기를 타개하는 방식은 산 노동의, 산 인간의 피를 더욱 더 많이, 깊게 빨아들임으로써만 가능하다. 따라서 그들의 지배는 인간이 더 이상 사냥감이기를 거부할 때, 종속화라는 위기 타개 전략의 대전제가 흔들릴 때만 극복될 수 있다. 그것을 위한 저항 세력의 전략은 당연히도 종속화 자체에 대한 타격──즉 주체화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체화에 대해 보다 상세히 언급하기 위해, 기존의 학생운동에서 제기되어 왔던 학생운동 주체에 대한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자. 80년대의 ‘식민지 청년학도’와 ‘예비 노동자’라는 규정에서부터, 90년대 중반 이후 부상한 ‘그저 학생’5)으로서의 정체성은 각 시대 학생운동을 이끈 주요 세력들의 운동을 상당 부분 규정지어 왔다. 심지어 위에서 언급한 ‘신세대론’ 따위의 담론 역시 일종의 학생사회 내 주체에 대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 논의는 사실상 주체 자체의 성격을 명백히 오독함으로써 성립된 논의였다. 각각의 규정과 정체성들 사이의 상이한 부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논의들은 모두 주체를 어떤 주어진 조건, 혹은 현상적 개별자들에게 주어진 조건의 총합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주체라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단순한 조건으로 개념화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정치란 주어진 주체와 주어진 환경을 비교정치론적 함수상자에 집어넣고 결과값을 도출하는 수학적 과정에 불과할 것이다. 즉 기존의 논의들은 환경적 조건의 총합을 주체의 조건 혹은 정체성으로 오독한 것이다.
정치적 주체란 주어진 조건이 아닌, 역동적으로 형성되고 비틀리며 충돌하는 정치의 주요 변수이며 구성적 개념이다. 엄밀히 말하면 실상 그 어느 순간에도 완성되었다고 선언할 수 없는, 모순적이면서도 동적인 생명체인 것이다. 주체화란, 주어진 환경적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적 인간이 조건과 자아 내외간의 충돌을 통해 현실 변혁과 자기 변혁을 변증법적으로 피드백해가는 일련의 과정이다. 따라서 ‘식민지 청년학도’도, ‘예비 노동자’도, ‘그저 학생’도 사실상 정치적 주체를 호명한 것이 아닌 그 주체를 둘러싼 조건을 호명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주체화에 대한 개념이 부재할 때, 대중정치는 오로지 주어진 조건으로서의 대중을 소위 ‘활동가’들이 어떻게 ‘대표’할 것이냐는 식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공론(空論)으로 빠져든다.
또한 정치적 주체란 구체적 개별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 개별자들의 단결을 통해 새로운 수준에서 형성되는 집합적 행위자에 대한 지칭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정치적 주체란 정치에 있어 하나의 역할을 수행해야만 주체라 부를 수 있는데, 정치란 결국 가치의 권위적 배분──즉, 가치를 둘러싼 권력 투쟁(Power Game)이기 때문이다. 60억분의 1이라는 에밀리아넨코 효도르조차 하루아침에 가장 허약한 인간에게 살해당할 수 있는 인간 폭력의 한계, 그 취약성(vulnerability)의 조건으로 인해, 구체적 개별자에겐 가치의 배분에 개입할 수 있는 권위도 권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권력이란 언제나 집단에게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 권력의 주체 역시 집합적으로만 존재 가능하다.
이러한 통찰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정치적 주체화란 결국 대중운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권력의 문제에 있어 개별적으로는 언제나 무력할 수밖에 없는 자연적 개별자의 한계를 넘어, 대중을 하나의 (루소적인 의미에서의) ‘인민’으로 묶어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다. 즉 대중운동을 통한 주체화의 정치로써 피억압자들을 집합적 주체로 만들어내는 것이 현 시기 우리의 운동에 있어 핵심이다.
구체적 이해관계로부터 정치적 주체로의 변환
그렇다면 그러한 주체화는 어떠한 방법으로 이룰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없이는 주체화란 그저 관념적인 수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자본의 종속화 전략에 대항하여 그보다 더 큰 주체화의 힘을 만들어낼 우리의 실천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위에서 우리는 정치적 주체를 가치의 권위적 배분에 참가하는 행위자로 규정했다. 그렇다면 그 주체는 어떤 가치를 어떻게 배분하려 하는가? 배분을 필요로 하는 가치는 어떤 것이 있으며, 그 가치를 어떻게 배분하려고 그 주체는 정치에 참가하는가? 또한, 우리는 정치적 주체란 자연적 개별자가 아닌 집합적 행위자로서만 성립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그 집합이 정치에 참여해야만 하는, 즉 가치의 권위적 배분에 참여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배분을 필요로 하는 가치를 배분함에 있어 집합적 행위자는 어떤 조건을 제공하는가? 이상의 질문에 대한 답이 주체화의 구체적인 논의를 풀어나갈 열쇠이다.
만약 어떤 주체가 가치의 권위적 배분에 참가하려 하고 또 참가해야만 한다면, 그에겐 가치의 배분에 있어 어떤 특정한 방향을 견지하는 것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치의 배분을 조정할 필요가 있음을 뜻한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정치적 주체의 성립 조건은 그 정치과정을 통해 분배되는 사회적 가치에 대해 이해관계를 가진 개인 혹은 집단이 정치적 주체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해당 주체가 견지하고 있는 특정한 이해관계에 따라 구성된다. 또한 우리는 정치적 주체란 언제나 집합적이라고 규정했다. 그렇다면 사회적 가치에 대해 특정한 이해관계를 가진 정치적 주체가 성립 가능하기 위해선, 그 정치적 주체를 구성하는 집합에 있어 집합적 이해관계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즉 정리하자면, 정치적 주체의 구성은 권위적 배분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가치에 대해 특정한 집합적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의 존재를 그 조건으로 한다.
이상의 통찰을 전제로 하여 학생사회의 주체를 고찰해 보자. 학생사회에 존재하는 자연적 개별자들은 어떤 존재인가? 학생이다. 상술한 현 시기 자본의 공격 앞에 노출된, 자본주의적 사회체제 내의 고등교육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학생집단은 어떤 집합적 이해관계를 가지는가?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고등교육을 둘러싼 가치──고등교육의 비용, 고등교육의 내용, 고등교육의 시행방침이다. 다시 말해 등록금, 학사과정, 학사관리 및 구조가 학생집단의 주요한 집합적 이해관계의 직접적 대상이다. 나아가서는 그 고등교육을 규정하는 사회적 요인──자본주의 체제의 이윤 생산과, 체제 내지 레짐 수준에서의 요구이다.
이러한 조건들을 인정할 때, 학생집단이 자연적 개별자의 총합으로부터 집합적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선 자신의 구체적인 이해관계, 즉 고등교육을 둘러싼 사회적 가치들을 재편하는 움직임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다시 말해, 제25대 사회대 학생회가 선본 시절부터 강조해 온 교육투쟁의 의제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상상된 것이 아닌, 현실에 실재하는 공통의 이해관계는 자연적 개별자들을 유의미한 사회적 집합으로 묶어낼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기반이기 때문이다.
공통의 구체적 이해관계를 통해 1차적으로 구성된 집단은, 그 이해관계에 대한 추구와 그 이해관계를 가로막는 현실적 조건들에 대한 투쟁 속에서 그 생명력을 얻는다. 이는 인간이 단순히 물과 단백질로 구성된 형체만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그 운동성까지 포함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집합적 이해관계에 대한 집합적 행위는 집합의 사회적 실체를 자연적 개별자 앞에 증명하며, 이를 통해 집합적 주체는 유지되고 재생산된다.
이러한 주체형성의 첫 단계는 그 정치적 성격──이해관계가 걸린 가치의 분배과정 자체에 개입하는 권력의 존재──에 의해, 불가피하게 주체의 심화된 정치화를 가져온다. 등록금 인상을 둘러싼 사회적 구조를 인식하고 그것의 변화 가능성을 인지하는 것은, 등록금 인상 자체의 변화 가능성이 증명된 후에야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해결 가능한 문제만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구조적 억압에 대한 정치적 의식의 지평은, 그 구조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현상적 억압에 대한 반격이 시작되었을 때만, 그리고 반드시 그 때에, 그 모습을 인간 지성 내에 드러낸다.
이미 언급했듯이, 현재 학생집단이 직면해 있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고등교육을 둘러싼 사회적 가치는 그 구체적인 심급에선 학교 현장을 둘러싸고 결정되지만, 본질적인 차원에서는 체제와 레짐의 요구에 따라 규정된다. 예비 노동자──예비 상품으로서의 학생의 존재는 고등교육을 통해 생산된 대규모의 순종적이고 기능적인 산 노동을 원하는 총자본의 이해관계에 직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학내에서의 교육투쟁은 사회적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질 본질적 가능성을 함축한다. 그러한 가능성이 현실 속에서의 구체적인 투쟁을 통해 개화할 때, 정치적 주체화의 과정은 새로운 단계, 대자적이고 의식적인 주체형성의 단계로 전환한다. 이러한 과정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변증법적 통일이며, 오직 이 과정을 통해서만 올바른 대중운동이 성립 가능해지는 것이다.
대중과 행위자의 변증법
이제 보다 구체적인 영역까지 들어가 보자. 앞서 말한 집합적 존재로서의 정치적 주체는 어디까지나 대중정치의 대전제이자 결론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현실에서 벌어지는 정치행위 차원에서는, 정치적 주체를 하나의 실체로 다룰 수 없다. 왜냐하면 현실적 정치과정에서 정치적 주체란 상술했듯이 언제나 형성과정에 있는 역동성 한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우리가 목격하는 구체적 과정은 그 정치적 주체의 형성 내부에서 벌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체형성의 구체적 과정에서는 어떤 요인들이 작용하는가? 이것은 우리가 실제 현실에서 금방 발견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에 굳이 형이상학적인 탐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의 정치적 주체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상호 작용하는 두 요인은 크게 대중과 행위자로 구분할 수 있다. 대중이라 지칭되는 요인은 주체형성의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모습을 보이며, 수적으로 보다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 반대로 행위자는 상대적으로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수적으로 적은 범주라 할 수 있다. 이 두 요인을 구분하는 기준 혹은 수준의 문제는 언제나 구체적이고 상이한 조건들에 의해 규정되며, 시공간적인 차원에서 가변적이다. 두 요인은 주체형성의 구체적 과정에서 현상적으로 분리되어 나타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주체를 구성해 가는 과정의 일부이다. 따라서 두 요인 사이의 관계는 독립변수와 종속변수의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작용과 피드백 속에서 보다 발전된 차원으로 상승해가는 관계이다.
구체적인 예로서 2005년 관악 교육투쟁을 보자. 당시 사회대에선 일방적인 대학국어/대학영어 의무수강 방침에 대한 공분이 대중적으로 조직되었고, 관악 차원에선 상대평가제에 대한 문제제기와 당시 48대 총학생회가 제기한 학점취소제라는 이슈가 캠퍼스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기층에서부터 전 관악까지 고양된 교육투쟁의 기세는 대(對)본부 투쟁에 관악 학우 전체의 의지를 모아내는 정점으로 수렴하였고, 그 결과는 누구도 믿지 않았던 비상총회 성사로 나타났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주요한 현상은, 교육투쟁에 참여한 주요 행위자들의 자신감과 정치의식의 고양이었다. 특히 비상총회 이후 사회대 기층에서부터 올라온 요구로 이루어진 본부농성 전술에 대한 행위자들 사이의 논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게 이루어졌으며, 논쟁에 참여한 당사자들은 당시의 입장에 관계없이 높은 수준의 정치적 의식으로 단련되었다. 이러한 행위자들의 고양은 다시 교육투쟁의 활성화로 이어지고, 대중적 실천의 고양과 의식의 상승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교육투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참여한 대중 사이에선, 많은 사람들이 투쟁의 과정과 내부에서의 논쟁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교육재편 등 구조적 억압에 대한 인식을 갖추며 새로운 행위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예에 대비되는 사례가 2006년의 교육투쟁, 혹은 현재 관악 기층운동의 모습이다. 49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의 부재와 2005년 교육투쟁의 결과적 패배 이후라는 악조건 속에서 진행된 2006년의 교육투쟁은, 비록 4일간의 선동을 통해 3천명의 총투표 참여라는 업적을 일궈내긴 했지만, 행위자들의 무력감과 대중의 무관심 속에 막을 내렸다. 유효한 대중투쟁으로의 실천이 여러 요인에 의해 좌절되면서 교육투쟁의 주요 행위자들은 일정 정도 대중과 유리되었고, 이는 결국 행위자들의 무력감으로 귀결되었다. 또한 행위자들의 무력감은 대중적 실천을 자극해낼 수 있는 역량의 부재로 이어져, 다시 대중의 무관심과 패배감으로 이어진 것이다. 현재 관악 내에 존재한 각 기층단위의 축소 재생산 역시 마찬가지의 사이클을 걷는다. 대중적인 정치적 실천에 결합할 수 있는 기회를 점차 잃어가는 현실 속에, 주요 학생회 행위자들은 심부름꾼에 급급한 현실 속에 무력감에 침식되어 간다. 이 무력감은 결국 기층의 역량을 파괴하여 대중적 실천을 가능케 하는 기반을 무너뜨리고, 이것이 다시 행위자들의 무력감을 강화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대중과 행위자 모두가 주체형성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에 나타난다. 하나의 집합적 주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서로가 자극을 교환하여 집합의 존재를 현실적으로 증명해 냄을 통해서만 성립 가능한 관계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작용이 차단되었을 때 집합적 주체는 자신의 현실적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고, 주체형성의 과정 자체가 후퇴 혹은 정체되면서 그에 따라 그 구성요소인 대중과 행위자 역시 후퇴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형성의 구체적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다. 보다 민감한 감수성과 심화된 의식성을 통해 대중을 자극하는 행위자 요인과, 현실적 힘과 그 실재성을 통해 행위자를 자극하는 대중 요인의 피드백이 유지되어야만 주체형성의 전 과정이 전진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할 때 행위자의 형성도 오직 일반적이지 않은 감수성과 의식성을 갖춘 개별자의 우연적 돌출에 의존하게 되며, 대중적 실천도 정말 극단적인 부조리에 직면한 간헐적 분노의 우연적 폭발에 의존하게 된다. 결국 우리의 정치과정 전체가 환경적 조건의 우연한 부딪힘(clinamen)에, 수동적인 기다림에 종속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 시기 학생운동은 의식적인 행위자들을 보다 널리 발굴하여, 그들을 통해 보다 넓은 범위의 대중적 실천을 기획해야만 한다. 소수의 행위자들을 발굴하고 그들을 적절히 무장시키는 작업과, 대중적 의제를 통해 거대한 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그 시간적 선후관계는 오직 정세적이고 특수한 조건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
주체형성과 학생회 운동
이상의 정세인식과 운동론에 기초할 때, 우리의 학생회란 우리의 정치에 있어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나아가 제25대 사회대 학생회는 사회대 학생운동에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결국 제25대 사회대 학생회가 선본일 때부터 일관되게 주장해 온 학생회론으로 귀결된다. 지금까지의 고찰 전체가 바로 우리의 학생회론의 전제이며, 그 전제에 대한 자기해명이었기 때문이다.
“학생회를 사전적으로 정의할 때, 학생회란 학생 대중이 건설하는 자치기구이다. 학생회는 학생들이 자치를 하기 위해 만드는 기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생회가 해야 한다는 그 ‘자치’란 무엇인가? 자치, 自治, self-governance, 이 모든 표현은 그 본질을 자명하게 가리키고 있다. 즉 그것의 주체가 그 자신을 객체로 하여 스스로(自/self) 다스리는(治/govern) 정치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다.”6)
이것이 우리의 대전제이다. 학생회는 대중 자치 조직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학우대중의 이해관계에 대한 의식적 전망에 기초하여 학우대중을 정치적 주체로 만들어 내는 데 일조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 이러한 전제 하에서 학생회의 실천은 상술한 주체형성의 과정을 스스로부터 시작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따라서 학생회는 가두투쟁을 통해 구조적 억압을 폭로하는 전위조직도 아니고, 학우들과 관련된 일상적인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봉사기관도 아니다. 학생회는 대중정치조직이며, 이는 대중과 정치 양자 어느 쪽의 포기도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무력한 소수의 행위자들이 자기의식의 정합성을 확인하며 자위하는 것도, 파편화된 자연적 개별자들을 절대 조건으로 납득하고 그들에게 봉사하는 것도 학생회 본연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고민 하에서의 실천은 당위의 억설을 넘어, 실제적인 투쟁과 현실적 정치과정으로 짜여야 한다. 소위 ‘공동체’라는 것이, 혈연관계도 오래된 정도 없는 오직 이해관계로만 연결되는 자연적 개별자들 사이에 억설을 통해서 존재할 수 있는가? 민주적인 교통이라는 수사가, 아무것도 만들어낼 능력이 없는 소수의 행위자들에 대한 개별자들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는가? 핵심은 정치과정에 있으며, 정치적 실천을 통해 스스로의 역능을 현실적으로 증명해 낼 수 있는 기회의 창출에 있다. 현재 학생회 운동이 처해 있는 난맥은, 자본의 전략에 의해 가속되는 행위자와 대중 양자의 무력감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자본의 전략 자체를 가장 구체적인 수준에서부터 타격해 나감으로써 우리의 힘을 스스로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타개될 수 있다.
따라서 학생회 운동의 핵심은 이것이다──대중투쟁. 투쟁을 통해서, 권력의 밀고 당김을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는 학생 대중의 집합적 이익을 전투적으로 옹호함을 통해서만 학생회 운동은, 학생정치는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통해서만 관악 학우대중은 고독한 2만의 자연인으로부터 자유로운 인민이 될 수 있으며, 2만 명의 하나로부터 하나의 2만이 될 수 있다.
물론 학생회의 모든 기능이 대중투쟁을 목표로 할 수는 없다. 학생회엔 분명히 사물함 배정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행정업무도 있으며, 공동체 내부를 우호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고, 때로는 대중투쟁의 조건이 좋지 않을 때 목표로 한 바를 적절한 협상으로 성취할 수 있는 정도의 기지 역시 요구된다. 그러나 이 모든 기능은 대중투쟁을 기본으로 한 학우대중의 주체화라는 전체 프로젝트의 일부분으로 봉사할 때만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대전제가 실종되었을 때 학생회가 어떻게 표류하는지에 대해선 이미 90년대 중후반과 2000년대 초반, 우리의 선배들이 잘 보여주지 않았는가?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작년의 황라열 49대 총학생회장과 그를 둘러싼 왕당파들의 획책이 관악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목격하지 않았는가?
대중투쟁의 전제는 단순히 학내의 직접적인 사안 뿐 아니라 사회적 투쟁에도 적용되어야만 한다. 국립대 법인화가 학생 사회를 위협한다면, 학생회는 자기 기층, 자기 현장으로부터 조직된 대중적 저항을 바탕으로 사회적 투쟁을 전개해야만 한다. 자본의 노동정책 재편이 예비 노동자이자 예비 상품으로서의 학생의 조건을 강화시켜 나간다면, 이에 대한 대중적 반격을 바로 자기 기층으로부터 만들어 나가야 한다. 대중의 집합적 주체화가 생략된 모든 투쟁은 결국 무력한 패배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계속적인 축소 재생산에 이은 저항의 사멸만이 예약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제25대 사회대 학생회가 규정하는 학생회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학우대중의 정치적 주체화를 목표로 한 대중투쟁의 준비와 실천, 능동적 행위자의 무장과 대중적 선전․선동의 동시적인 실천, 그리고 그를 통한 기층 역량의 복원과 학생사회의 전반적인 정치적 고양. 이러한 목적에 복무하기 위한 모든 활동은 구체적인 정세와 상황에 따라, 장기적인 주체화 프로젝트의 맥락 안에서 배치되어야 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 이상의 고찰을 토대로, 2007년 관악에서 학생운동의 행위자들이, 특히 제25대 사회대 학생회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 2006년의 대중투쟁의 패배와 황라열 제 49대 총학생회장이 남기고 간 상흔, 가속되는 전 사회적 착취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실천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
상반기 단학대회를 진행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2007년 3월의 관악을 뜨겁게 달군 등록금의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21일의 투쟁을 통해 결의를 확고히 했다면, 29일의 투쟁을 가장 폭발적이고 대중적으로 벼려내기 위해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한다. 오직 대중투쟁을 통해서만 우리의 운동은 바로 설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는 대중적 투쟁을 교란하는 어떤 획책에도 흔들리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싸움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우리의 일차적 과제이다.
이어지는 50대 총학생회 건설을 위한 움직임에도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2006년에 목도했듯이, 총학생회의 부재 혹은 우리의 자치를 파괴하는 총학생회의 오류는 기층의 역량과 대중기반에 불가피하게 큰 상흔을 남긴다. 우리의 자치를, 우리의 대중적 역량을, 우리의 주체화를 바로 하기 위한 총학생회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 총학생회를 건설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관악의 학생운동 행위자들은 이 질문에 진지한 고민으로 답해야 하며, 자본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우리의 힘이 아직 완전히 꺾이지 않았음을 50대 총학생회의 역사적 건설을 통해 증명해야 한다.
또한 사회대 학생회는 사회대 기층 역량의 복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형태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각 기층단위에서 전관악적/전사회적으로 제기되는 대중적 사안에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도록 중간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기층단위 활동가들의 역량 강화를 위한 사업 역시 활발히 진행해야 한다. 그 이외에도 기층 대중들과 직접 대면하여 수행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선전․선동 및 공동체 강화를 위한 행사들 역시 기층 역량 복원이라는 맥락 안에서 배치되어야 한다.
나아가서는 이러한 활동들을 기반으로, 각 기층에서 돌출되는 능동적 행위자들과 기층에 존재하는 대중들과 함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자본의 사회 재편에 대한 저항의 실천을 기획해야 한다. 그러한 실천들을 통해, 직접적 이해관계에 의해 일차적으로 구성된 주체들이 구조적 억압에 대한 정치적 의식을 갖춰나갈 수 있도록 하고, 총체적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전사회적 전망을 불어넣어 주체화 과정에 발전적인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은 학교의 벽에서 멈추는 주체적 전망의 한계를 극복하여, 학생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사회적 현실까지도 바꿔낼 수 있는 힘을 증명함으로써 주체의 정치적 고양에, 결과적으로는 주체화의 발전적 전진에 기여할 것이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자본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적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주체의 사회적 형성에 기여하는 모든 운동에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 특히 현재 자본의 잉여가치 착취의 최전선에 놓인 비정규직 투쟁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미 언급했듯이 현재 학생 대중이 놓여 있는 현실은 자본의 위기 타개를 위한 사회적 재편에 의한 것이며, 따라서 현 시기 자본의 위기 타개 전략의 핵심이 되고 있는 비정규직의 투쟁과 주체화는 장기적으로 학생사회의 현실을 바꿔내는 데 기여한다. 노사관계 로드맵 국회통과 이후 전혀 변화하지 않은 비정규직의 현실과, 점차 가속화되고 있는 전체 노동의 유연화/비정규직화는 2007년의 노동정세가 점차 가열되어 나갈 것을 예고하고 있다. 이 투쟁에 대한 적극적인 연대를 통해 자본의 생명력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노동계급 주체의 형성에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며, 나아가 그를 통해 학생사회에 대한 자본과 착취자들의 지배력을 약화시킴을 목표로 해야 한다.
지금 여기가 반격의 출발점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위기를 이야기하던 90년대 후반도 지나고, 이제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해져 위기를 이야기하는 사람조차 없어져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자신감과 힘을 잃고 노예화되어 가는 주체의 빈자리엔, 이제 피에 굶주린 자본과 그 나팔수들이 득의양양하여 날뛰고 있고, 그나마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저항세력은 점차 고립되고 무력감에 젖어 내부로부터 무너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절벽 끝에 몰려 있고 우리에게 날개가 없다는 사실은, 거꾸로 말해 지금 여기가 바로 반격의 출발점일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만 함을 의미한다. 점점 정수리를 짓눌러만 오는 저 쇠항아리 천장 밑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우리의 선택은 그것을 깨어내고 하늘 아래 서는 것뿐이다. 이제는 좀 막아보자는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막다른 골목에 몰린 지금, 우리의 반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남은 것은 쇠사슬과 족쇄뿐이다.
이제 다시 한 번 힘을 모아내자. 장기적인 전망과, 승리로 가는 길을 꾸준히 뚫어내는 우직한 인내심으로, 우리를 둘러싼 억압의 장벽을 밑에서부터 파내어야 한다. 묵묵히 굴을 뚫어나가 결국 어느 순간 지형을 변화시키고, 벼락처럼 땅 밑에서 솟아나오는 두더지의 인내심처럼 반격을 준비하자. 그 길에 제25대 사회대 학생회가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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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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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줄 요약이 필요해요 ㄷㄷㄷ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