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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최근 한국의 정세에 대하여

1. 민주노총의 총파업 선언

정권과 자본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비정규직 전면화 개악시도는
단호하고 날렵한 비정규직 연대회의 동지들의 비장한 투쟁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양노총의 공동전선 그리고 사회 단체 전체가 함께하는 연대전선 속에 치열함과 긴박감을 더했고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의결하여 물러설 수 없는 투쟁의 현실을 확인해 줬다.

2006년 준비된 총파업을 공약으로 내건 이수호 집행부로서는 시도도 해 보지 못한 사회적 협약(노사정 위)을 아쉬워 하며 투쟁의 전선으로 밀려가고 있다. 



금속연맹의 현중 제명과 민주노총의 총파업 선언은 남하 노동운동의 위태로운 모순을 말해 준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 싶어도 바람이 가만히 두지 않듯이 노동운동의 일부가 만성피로를 앞세워 투쟁을 쉬고 싶고 돌아가고 싶어도 권력과 자본은 이를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자본주의 경제구조가 사뭇 안정적인 타협국면을 용인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 노사정의 사회적 협약은 둘중 하나다. 하나는 유럽처럼 최소한 권력이 사민주의적 개량체제가 되던가 아니면 굴종이다. 많은 이들이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의 형식적 민주주의에 취해 마치 개량 타협적 요소를 기대하지만 그들이 투쟁하는 것은 식민지 자본의 낡은 관행이고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자본의 독한 논리이기에 일반적 의미에서 개량 타협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정권이다.

그래서 노무현 정권은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을 조이면서 그것을 물타기 하기 위해 정치 사회적인 개혁의 외피를 동반시킨다. 김대중의 신자유주의가 6.15의 외피를 쓰고 있듯이 말이다.

표리가 부동한 권력과 자본의 의도를 일반대중이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일부 운동진영도 이런 저들의 의도에 말려 종종 전술의 전후를 논하면서 대중과 함께 승리하는 투쟁이 아니라 대중과 괴리된 자족적 투쟁이라는 저들의 의도에 말리곤 한다.

우리는 외피와 속내의 차이를 구별하되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외피를 살리고 속내를 냉혹하게 공격하는 총체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 국가보안법에 대하여 공안 수호를 외치는 한나라당에 대한 공격과 더불어 위장폐지를 획책하는 노무현 정권의 의도도 분명히 견제해야 하며 이와 더불어 총력적으로 진행되는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박탈과 나라경제의 파탄에 대한 불같은 분노로 투쟁을 해내야 한다.

민주노총의 총파업 선언은 총파업 투쟁이 준비되는 것이 아니라 정권과 자본에 의해 강제(?)되어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모순은 이렇듯 객관적이기에 우리의 투쟁은 주관적으로 준비되는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전개되는 것이며 주체에게는 이 불가피한 투쟁의 전개를 수용할 용기를 묻는 것이다.

남한의 노동운동은 투쟁이 넘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부족하다. 아직 우리는 체제와 맞선 정치파업도 전체 노동자 과반수가 넘는 진정한 총파업도 전개 한 바가 없다. 그런데 무엇이 넘친다는 것인가.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노동운동의 역사적 사명을 정치 사사 조직적으로 무장하지 못한 조합주의 세력들의 만성피로이자 실리와 현실이라는 주문으로 노동조합 조합원을 팔아넘긴 배신에 응징을 가할 정치적 조직적 노동자의 힘이다.

2. 삼성 도시에 대하여
농지를 개간하겠다고 사기치고 만든 새만금에 기업형 도시(아마 삼성도시)가 만들어 지나 보나.

기업형 도시는 한마디로 말하면 봉건 영주의 성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권과 자본의 노동정책이 헌법에서 보장하는 노동권 자체의 파괴와 전 노동자의 노가다화(파견직화)라는 의도와 완전히 동일한 행보다.

기업형 도시라는 한 기업이 그 도시의 모든 주권을 쥐는 것이다. 그 기업이란 재벌이다. 그럼으로 이제 우리는 첨단 기계와 돈으로 무장된 중세 봉건 영주의 출현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 속에는 영주의 법이 있을뿐 헌법이 없다.

자본이 제일 싫어하는 말은 복지 공공 그리고 국유화 같은 단어다.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은 능력있고 힘있는 이들에 대한 시기요 무능력에 대한 위로이기에 경멸해야 한다고 믿는다. 특히 노동자 민중의 민주적 개입에 그들은 바로 사회주의적이니 뭐니 시비다.

그런데 도대체 개인의 토지 강제수용권이라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원칙에 어디에 해당하는 것인가. 자기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적 소유권을 국가도 아니고 개인(기업)이 부정하다는 이런 조처를 그들은 어떻게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런 모습은 결국 자본은 무도덕할 뿐 아니라 가증스러움이 본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말하는 사적 소유권이란 자본의 이윤을 향한 탐욕의 보장이라는 것이다. 국가도 하지 못하는 사적 소유권의 침해가 기업은 된다는 그들의 후안무치는 자본이 이윤을 위해서라면 어떤 도덕도 가치도 기준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3. 신자유주의 그 야만과 퇴행
드디어 한국의 자살율이 세계 최고라는 기사를 본다. 그것이 사회적 타살임을 증명하는 것은 입만 아프다.

세계경제가 되살아 난단다. 그것이 미국대선의 정치적 꾸밈의 결과임을 또 잊는다. 도대체 신자유주의가 사람들의 주머니는 말리고 몸은 조여 상품의 유통 자체를 죽이는 길인데 기껏 자본의 경쟁과 승패를 위해 더많은 이의 좌절과 가난이 필요한 체제인데 무엇으로 경제가 살아 난다는 것인가.

세계는 전쟁과 반 전쟁, 억압과 저항, 빈부격차와 오도된 약육강식이 지배하고 있다. 이것이 신자유주의가 만든 세상이고 인류와 문화와 도덕과 공동체적 가치를 싫어하는 자본의 본질이다.

우리는 이 야만과 퇴행에 맞서 투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절박한 필연이다. 반신자유주의는 반자본이며 반제이며 반전이며 자주와 통일을 향한 피억압 민족과 인류 민중의 정당한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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