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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냉전으로 점철된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로 명명한다. 극단의 시대라... 그럴지도.
그에 비하면,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태어난 새천년, 21세기는 권태롭기 짝이 없다. 아니, 그 권태롭다는 것이 분명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목가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21세기 지금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고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나가야만 하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 권태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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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20세기를 '정신분열증의 시대'라고 부르면 어떨까 싶다. 유례없는 대량살상을 가져온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 전세계를 뒤덮은 이념갈등, 핵전쟁의 위협, 환경위기...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고 극단적인 불안정 상태를 보이는, 정신분열증. 그에 반해 21세기는, 이를테면 '정신강박증의 시대'다.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여섯 방향에서 벽이 거리를 좁혀오는, 숨막히는 강박증의 시대.
세계엔 장발장과 같은 살인적인 빈곤도, 햄릿과 같은 비극적인 절망도,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작렬하는 분노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간혹 그런 것이 있더라도 예외에 불과하다. 그러한 '극'들은 스필버그와 루카스의 스크린 속으로, '극장' 속으로 후퇴해 버린 지 오래다. 사람들은 치열하지만 무료하게, 비참하지만 권태롭게 하루하루를 받아들일 뿐. 그들을 둘러싼 벽과 천장이 서서히 공간을 좁히며 다가오는데도 권태에 젖어있는 그들은, 숨막히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몇몇 '민감한' 자들이 좁혀오는 벽을 발견했을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있는 힘껏 비명을 지르는 것 뿐. 뇌를 꾹 누르는 것 같은 강박감을 받아보았는가. 하지만 비명을 지르는 자들은, 우리가 1세기 동안 겪었던 정신분열증 환자의 하나로 여겨질 뿐이다.
이 강박증의 시대에 사람들은 더더욱 강박적으로 '즐거움'에 집착한다. 그 즐거움은 어떤 것이라도 좋다. 이 권태 속에서 스스로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줄 것이라면야. 하지만 사람들은 또한 즐거움에만 빠져 있지 않을 수 있는 법을 안다. 그들은 현명하게 즐거움을 절제하고 다시 권태로 돌아와, 강박적으로 강요되는 일상을 영유한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고 있는 강박증은, 바로 그 좁혀 들어오는 살인큐브 안이 '당연해야 한다'는 강박이다. 그 큐브를 벗어나는 것은 정신분열증의 재현이기 때문에. 정신분열증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이 뇌는 강박적으로 자신의 안정성을 고수한다. 그리고 그것은 강박증이기 때문에, 반박할 수는 없지만 숨막히는 일이다.
누군가, 파열구를 내지 않으면 곤란하다.
하지만 나는 비명지르는 것이 고작이다.
오히려, 강박증에 걸린 것은 시대가 아니라 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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