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2004.10.24.]근대와 자본의 정치학에 대한 소고

근대가 열어제낀 정치는 권리의 정치이다.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권리(rights)의 개념은 근대 특유의 것임에 틀림없다. 영국의 근대를 잉태시킨 유명한 문서가 권리장전(The Bill of Rights)이고, 프랑스대혁명의 이념적 기치였던 것이 인권선언이었던 것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의 권리란 인간인 이상 당연히 보장되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이런건 노골적인 계급사회인 고대나 중세사회엔 없다. 근대는 부르주아의 주도 아래 이러한 보편적 권리 개념을 최초로 던져줬다.


지배는 언제나 피지배자의 소극적/적극적 동의가 있어야만 성립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다. 그런데 이 이데올로기는 허구적이기만 한 것이어서는 동의를 얻어낼 수 없다. 그것은 반드시 피지배자에게 이익이 될 무언가를 담고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지배자는 피지배자에게 이것을 완전히 보장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바로 이 지점이 이데올로기의 '가장 약한 고리'다.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피지배자는 그 이데올로기의 가장 약한 고리를 치고 나가며 지배의 외부로 나아간다.

즉 근대가 던져준 '권리'라는 이데올로기 역시 이러한 원리에 입각해 있다는 것이다. 자본의 사적 소유권으로 대표되는 '보편적 권리'는 실제로는 백인 남성 자본가의 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그러나 그것이 던져준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그 무엇'이라는 개념은 피지배자들의 저항이 치고 나갈 수 있는 가장 약한 고리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자본의 권리에 저항한 노동의 권리들을 말하며, 유색인종은 백인의 권리에 저항한 권리를 말하며, 여성들은 남성의 권리에 저항한 권리를 말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부각된 '권리의 정치(the politics of rights)'는 그 이전의 전통적인 정치의 양상, 즉 '권력의 정치(the politics of power)'와 연계된다. 왜냐하면 권리란 권력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관철될 수 없기 때문이다. 권력 없는 권리란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에 기반하지 않은 권리구호는 기존에 존재하던 권력에 영합함으로써 스스로의 권리를 관철시키려 하게 되고, 이것은 종국적으로 권리 그 자체의 변질로 이어진다.

권리와 권력의 개념 혼동은 큰 오류를 불러온다. 사회 전반에 침투하고 관철되는 것은 자본의 권리이고, 그것이 관철될 수 있게 하는 것이 자본과 국가의 권력이다. 억압이란 하나의 권력이 다른 권력에 선행하여 '보편화'되어 관철되는 것이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현실적인 힘이다. 권리란 개념이고 현상형태이며 유령이다. 이 유령에 대한 허공의 노성은 박력만 있는 허장성세이다. 권리를 마땅히 실현되어야 할 일반적 가치라고 할 때 권력이란 그것을 독점화시킨 상품가치, 즉 화폐라고도 볼 수 있다.

자본의 권리는 국민국가체제의 권력에 의해 관철된다. 사적 소유권을 '보편적 권리'로 인정하고 그것을 보호하는 권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시키는 체제로서의 국민국가는 자본의 성장과 함께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에 저항하는 일체의 움직임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합법적 폭력의 독점체'로서 기능한다. 근대 이전의 권력이 폭력을 중앙집중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국가와 사회의 분리를 통한 권력의 독점은 화폐에의 '일반적 가치실현의 가능성'의 독점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권리정치 영역에서의 '가장 약한 고리'는 반드시 권력정치 영역에서의 '가장 약한 고리'와 겹쳐져야만 한다. 그것이 교차되는 곳에서 계급지배를 전복시킬 가능성이 살아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계급지배가 관철되는 영역 내부에서의 권력의 충돌로써 지배영역 외부로의 권리 관철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인 것이다. <자본>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권리정치 영역에서 자본가 계급의 권리관철의 가장 약한 고리, 즉 그것이 절대로 충족시켜줄 수 없는 피지배자들의 권리들을 밝혀냈고 그것을 권력정치 영역에서의 현실적인 힘, 가장 약한 고리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세력과 교차시킨 것이다. 그 현실적인 힘은 - 두 말할것도 없이 노동계급이다.

...아직 정리된 생각은 이 정도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