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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에 대한 노트(미완성)

번역본은 요새 읽는 박종철출판사의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사용했습니다. 원내용의 굵은 글씨는 원문에서 강조된 부분 그대로이고, 밑줄친 부분은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밑줄쳤던 부분입니다.

 

허접한 개인적 정리노트입니다만, 저작권이 문제되면 지울 수도 있지요 ㅋ

 



1. 지금까지의 모든 유물론(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을 포함하여)의 주요한 결함은 대상, 현실, 감성이 오직 객체의 혹은 관조의 형식 아래에서만 파악되고 있다는 것 : 그리고 감성적 인간 활동으로서, 실천으로서 파악되지 않고, 주체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능동적 측면은 유물론에 대립해서 관념론에 의하여 - 물론 관념론은 현실적 감성적 행위 자체를 알지 못한다 - 추상적으로 발전된다. 포이에르바하는 감성적인 객체들 - 사유 객체들과 현실적으로 구별되는 객체들 - 을 추구한다 :  그러나 그는 인간의 활동 자체를 대상적 활동으로서 파악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이론적 태도만을 진정으로 인간적인 태도라고 간주하며 반면에 실천은 오직 그 더러운 유태인적 현상 형태 속에서 파악되고 고정된다. 그러므로 그는 '혁명적', '실천적/비판적' 활동의 의미를 개념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 여기서 맑스는 무엇보다도 유물론적 철학이 파악해야 할 것을 '감성적 인간 활동', 즉 '실천(Praxis)' 전체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이 세계가 관조되는 객체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현실적으로 행위하는 인간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는 전제에서 기인한다.

  관념론자들은 '현실적 감성적 행위' 자체를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세계는 머릿속의 관념과 존재들로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이 관념으로써 무언가를 한다는 개념을 갖고 있고, 따라서 유물론과 대립하여 능동적 측면을 가져간다.

  진정한 '감성적 인간 활동'은 be나 will의 세계, 혹은 see나 think의 세계가 아닌 do의 세계에 존재한다. 그것은 논리구조나 관조의 시선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 우리가 감각으로 느끼고 있는 이 세계 속에 존재하며 또 그 세계를 구성한다. 따라서 맑스는 바로 그 do를 정확히 파악하라고 요구한다.

 

2.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 않는가의 문제는 -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를, 즉 현실성과 힘, 자신의 사유의 차안성을 증명해야 한다. 사유 - 실천으로부터 고립된 - 의 현실성이나 비현실성에 관한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주의적 문제이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갈릴레이의 입을 빌려 이렇게 외친다. "지구가 돌면 대체 왜 안된단 말인가?!" 관념 속에 빠져 사는 사람들은 마치 지구가 돌면 안된다고 하는 것처럼, 허구적 중심과 허구적 진리의 기준이 절대로 움직여선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진리의 피안이 아닌 차안의 진리로써 살아가야 하는 인간에게 있어, 모든 것은 역동적으로 규정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따라서 이렇게 역동적으로 규정되는 진리들을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가 혹은 파악하였는가에 대한 문제는 순전히 실천적인 문제인 것이다. 즉 인간은 실천을 통해서 진리를 증명하는 것이지, 쌈빡한 논리구조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실천'이란 단순한 '실험'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진리가 현실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그것이 이 차안에서 무엇을 만들어 내는가의 문제이다. 현실 세계에서 무엇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질문 없이 그저 사유 자체, 고립된 사유 자체의 현실성 - 이것은 do가아닌 be의 차원에서의 '현실성'이라 하겠다 - 을 논하는 것은 스콜라주의적 문제, 즉 배때지가 불러터져서 be를 see할 뿐인 인간들의 문제인 것이다.

 

3. 환경의 변화와 교육에 관한 유물론적 교의는 환경이 인간들에 의해 변화되며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그러므로 그 유물론적 교의는 필연적으로 사회를 두 부분 - 그중의 하나는 사회를 초월해 있다 - 으로 탐구하지 않을 수 없다.

   환경의 변화와 인간 활동의 변화 혹은 자기 변화와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고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 교육자 자신이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은 유물론적 교의는 사회를 초월해 있는 사회의 한 부분을 만들어내어 사회를 탐구한다. 이것은 부르디외가 말한 스콜라적 환상 - 즉 연구자 자신은 사회로부터 초월해 있고 따라서 사회를 '관찰'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구조주의에 있어서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무수한 질문들 역시 이러한 틀을 유지하고 있는 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이 인간 - 특히 고립된 것으로 상정되는 개인으로서의 인간 - 이 결정하는 것이 전적으로 통제 가능한 개인의 책임이며 그로써 세계가 무(無)로부터 창조된다고 믿는 관념론적 믿음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정확한 통찰은 계속해서 강조되는 하나의 맥락 - 즉 실천의 맥락 속에서만 가능하다. 현실 세계 속에 있는 현실적 감성적 인간 활동은 현실 세계로부터 출발하여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러한 여행에 '변화'라는 단어가 추가될 때, 즉 인간이 환경을 변화시키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모든 구상의 일치와 현실화의 문제가 제기될 때, 실천은 혁명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혁명적 실천은 변화시켜야 하는 환경에 대한 공격인 동시에 그 환경 속에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공격인 것이다. 이것은 행위자 스스로가 자기 자신의 현실적 행동으로써 자신의 현실 속의 위치를 끊임없이 재정의해나가야 함을 의미한다.

 

4.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자기 소외라는 사실, 종교적인 세계 및 세속적인 세계로의 세계의 이원화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의 작업은 종교적 세계를 그것의 세속적 기초로 해소한 데에 그 요체가 있다. 그러나 세속적 기초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위로 올라가 구름 속에 하나의 자립적인 영역으로 스스로를 고정시킨다는 사실은 이러한 세속적 기초의 자기 분열과 자기 모순으로부터만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세속적 기초 자체가 자기 자신 안에서, 자신의 모순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 혁명화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세속적 가족이 신성 가족의 비밀로서 폭로된 이후에 이제 전자 자체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파괴되어야 한다.

 

: 맑스에게 있어서 종교의 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이다. 왜냐면 종교는 단순히 종교 그 자체, 크리스트교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전도된 세계의식 일반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도된 세계의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히 말해 본(本)과 말(末), 머리와 꼬리, 중심과 주변을 전부 거꾸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이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을 인간에 선행시키고 인간의 모든 것을 신에 종속시키는 중세적 사고가 이것을 대표한다. 이 사고는 신의 자리에 국가, 시장, 발전 등 수많은 것들이 바뀌어 가며 들어앉았을 뿐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것은 마치 갈릴레이 이전 사람들이 지구를 환상적 중심에 들어앉혀놓은 것과 다를 바 없다. 본래 인간에게 있어 모든 중심은 인간 그 자체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무언가를 환상적 중심에 앉혀 놓는 것, 이것이 '종교적 자기 소외'이다.

  이러한 종교적 자기 소외는 그 세속적 기초를 갖고 있다. 이것을 밝혀 내는 것이 포이에르바하가 수행한 작업이다. 그러나 그 세속적 기초가 자신의 모순 속에서 이해되고 실천적으로 혁명화되지 않을 때,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도 없고 그것을 변혁해 낼 수도 없다. 왜냐면 세속적 기초가 구름 위에서 자신을 고정시키는 것은 그것의 자기 분열, 즉 그 화장실과 향수의 분열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향수가 스스로를 신비화시켜야 하는 것은 그것이 화장실의 구린내를 가려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화장실의 청결 상태와 향수 사이의 모순을 인지하고 나면, 화장실의 구린내를 부정하는 향수를 이론적으로 파괴하고 나아가서는 화장실 청소 -_-;; 를 지향해야만 한다.

 

5. 추상적 사유에 만족하지 않는 포이에르바하는 직관[혹은 관조]을 추구한다 ; 그러나 그는 감성을 실천적, 인간적-감성적 활동으로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 그렇다는 얘기다.

 

6.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의 본질로 용해시킨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각각의 개체 속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다.

  이러한 현실적 본질의 비판 속으로 파고들지 않는 포이에르바하는 따라서:

  ① 역사적 과정을 도외시하고 종교적 심성을 그 자체로서 고정시키고 하나의 추상적 - 고립된 - 인간 개체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② 따라서 그 본질은 '유(類)'로서만, 내적이고 침묵하는, 많은 개체들을 오직 자연적으로 묶고 있는 일반성으로서만 이해할 수 있다.

 

7. 따라서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심성'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산물임을, 그리고 그가 분석하고 있는 추상적 개체가 하나의 특정한 사회 형태에 속함을 알지 못한다.

 

: '인간 본성'에 관한 논쟁은 그 문제제기 - 인간은 원래 악하다/선하다 -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반론 - 인간은 환경 속에서 규정될 뿐이다 - 역시 식상하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에 관한 선험적 규정이 가진 실천적 의의는 매우 위험하다. 왜냐면 그것은 종교적 본질, 즉 전도된 의식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로 융해시킴으로써 인간 자체를 전도시키기 때문이다. 현실 속에 존재하며 감성적 현실적 활동을 행하는 인간을 전도시킨다는 것은 그것을 현실 속의 인간이 아닌 뒤집혀진 인간, 즉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인간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파악된 인간은 논자들에게 그저 하나의 개념, 하나의 규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실적 인간은 그렇지 않다.

  추상적이고 고립된 인간 개체를 상정한 관념적 이해는 결국 인간을 유(類)로서,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일반성으로서만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생물학적 환원론일 수도 있고, 철학적 개념적 파악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 인간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일반성 뿐 아니라 사회 속에서, 다른 인간들 및 존재들과 함께, 행위받으면서 행위하는, 살아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의 몰이해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실천 일반, 나아가서는 혁명적 실천에 대한 관념적 경멸로 귀결된다.

 

8. 모든 사회적 생활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로 이끌고 가는 모든 신비들은 인간의 실천에서 그리고 이 실천의 개념적 파악에서 그 합리적인 해결을 얻는다.

 

: 여기서 실천(praxis)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자. praxis로서의 실천의 의미란 바로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형태의 작용-반작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관념적 태도도 사회 속에서 형성되는 생활인 이상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

  신비주의란 이러한 현실적 양태들을 안개 속에 가리고, 그 공백을 전도된 관념으로 채우는 모든 태도를 의미한다. 현실 속의 인간을 자의적으로 상정된 인간의 모습으로 바꾸고, 현실적 인간 활동을 허구적 기계적 과정으로 대체하는 것. 현실 속에 존재하는 힘(force)들의 작용-반작용에 의한 물리적 효과를 신비롭고 건드릴 수 없는 피안의 추동력으로 대체하는 것이 그것이다.

  차안에 있어서의 합리적인 해결은 실천적인 파악으로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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