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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계급 개념화에 대한 추가 소고

(4월 초에 썼던 글을 이제서야 올린다. 다시 쓰면서 느끼는 거지만 마지막 세 줄은 좀 사족이다.)

 

근래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는 정치학의 기초 재규정과 계급 개념의 정치화에 있어 좀 더 진전된 생각들을 정리해 본다.

 

일단 필자는 '계급' 개념을 기존의 사회분류적 개념에서 탈피시켜 권력의 일차적 담지자가 되는 구성적/정치적 주체로서 재규정해야 한다는 논리를 사전에 밝힌 바 있다. 이를 통해 정치학의 국가 중심주의를 타파하고, 생산관계의 법적 성격을 명확히 하여 기존의 혼란스러운 계급론과 운동론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그렇다면 계급이라는 이 일차적인 정치 주체는 어떻게 형성되며 어떻게 운동하는가? 이것이 전체 체계 상 필연적으로 다음 제기되는 문제이다.

 

물론 현실적 운동을 이론적으로 모델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미처 파악하지 못하거나 파악이 불가능한 현실의 많은 변수들을 사상시키고, 현실의 역동성을 관념의 경직성에 끼워 맞추려 함으로써 종국에는 정세적이지 못한 실천적 오류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정치학이 정치 현실의 운동 경향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할 수 없다면 정치학은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할 것이며, 우리의 정치적 실천은 무계획적인 우연의 카오스로 흩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이 양 극단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역사적 고찰을 통해 일반적 경향의 주요 요소들만을 거칠게 정리해 애는 것이다. 이는 현재 우리가 고찰하고자 하는 대상과 유사한 정도의 역동성을 지닌 정치 현실을 다뤘던 선학, 마키아벨리가 선택했던 방법이기도 하다. 따라서 필자도 그 좋은 선례를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현재 필자가 처해 있는 입장 상, 그리고 본문이 거친 초벌 논의이자 하나의 가설 제시에 머무르고 있다는 성격 상 엄밀하고 풍부한 역사적 사례는 이후의 학습을 통해 보충해 나가도록 한다.

 

먼저 계급 형성은 일반화된 의미에서 보면 하나의 국민 창출(nation-building)과 같다. 따라서 이 형성의 성격에 대해 고찰하기 위해선 굵직한 혁명사의 도입부와 함께 주요 건국사를 참고해 봄이 적당할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제 3계급의 결집, 러시아 대혁명 당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건설, 근대 독일의 국민국가 건설과 이탈리아의 리소르지멘토 등이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살펴 보면, 연구자로서는 안타깝게도 그 과정의 많은 부분이 선험적/환경적으로 이미 주어진 조건으로서 마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그 조건들이 인간 실천과 무관하게 자연적으로 생산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의식적 통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무질서하고 비체계적인 개별 실천들의 클리나멘(clinamen)을 통해서 구성된 것임은 확실하다. 즉 마키아벨리적 용법으로 말하면 정치적 주체의 형성 혹은 국가의 건설이란 많은 부분 포르투나(Fortuna)에 종속되어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대혁명의 경우를 보자. 제 3계급 내의 의식적 부분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농민들의 체제에 대한 불만이나 2등 국가로서의 모호한 위상, 잇따른 기근 등의 조건은 갖추어져 있었다. 게다가 삼부회 소집의 계기가 된 귀족들의 명사회의 소집 요구나 아메리카 독립 전쟁에 대한 무리한 참전 등 통제 불가능한 상대측의 실책도 중요한 변수를 만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 형성의 도입이 통제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주체 형성에 성공한 역사적 사례들에서 유리한 사전 조건을 많이 발견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 해도 그것이 적절한 실천과 융합되지 않으면 허무하게 유실되는 경우도 역사 속에선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정치적 주체 형성의 일반 경향에 대해 고찰하려면 우선 주요 행위자들의 비르투(Virtu)가 그 역할을 수행한 부분을 조건으로부터 분리시켜 관찰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들이 주체 형성 과정에 핵심적인 실천적 대상이 되는가? 역사적 사례들 속에서 주요 행위자들의 좋은 비르투가 주로 나타난 부분을 정리해 보면 핵심 요소들은 명료해진다. 먼저 이탈리아의 리소르지멘토 운동의 사례를 보자. 활동가들은 분열된 이탈리아의 현실에 드리운 주변 강대국들과 교황의 간섭 및 수탈을 핵심적인 문제로 삼았고,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해야만 한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그리고 의용군의 결성을 통해 외국군을 물리치는 한편, 성장하는 피에몬테 왕국과 타협함으로써 이탈리아 통일을 일궈냈다. 러시아 대혁명의 경우는 어떨까?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무익한 희생을 치르던 차르 체제의 무능력함과 비도덕성을 폭로하고, 기생적인 상층 계급에게서 토지와 공장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를 위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권력 인수의 지향과 역량을 분명히 밝혔다.

 

이상의 사례들을 일반화해 보면, 주체 형성 과정의 핵심적 요소는 다음의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새로운 주체 형성과 새로운 주체의 활동 방향이 주체를 구성하는 개별자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여기서 이익이란 단순히 대차대조표 상에 드러나는 회계상의 상대적 이익을 의미해선 부족하다. 기존 주체와 그 활동이 보장하던 상대적 이익을 압도하고, '목숨을 건 도약'을 감행할 가치가 있을만큼 절박한 일반 이익(general interest)이라는 점이 명확히 드러나야 한다. 왜냐면 마키아벨리의 말마따나 "모든 사람은 변화에 수동적이며 ... 개혁에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기껏해야 우호적 방관자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둘째, 새로운 주체의 헌법적 기초를 마련하고 이를 도덕적으로 정당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헌법(constitution)이라 함은 실정법 상의 최고법을 의미함이 아니라 정치체(political body)의 기본 규칙이자 하나의 사회 계약을 말한다. 즉 기존 체제의 근간을 이루던 헌법적 규칙과 차별화되는 새로운 법적 관계를 설정하며, 이 새로운 규칙이 기존의 규칙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함을 인정받아야 한다. 여기서 '차별화'와 '우월함'은 똑같은 중요성을 지닌다. 새로운 주체의 권위가 기존 주체의 권위보다 더 상위에 있음을 인식시키고 이를 내면화시키기 위해선 기존 주체의 권위와 명백히 구별되면서도 더 우월한 원리들이 필요하며, 이 상위의 권위를 인식시켰을 때에만 개별자들을 집합적 주체에 복종시킬 수 있다.

 

셋째, 새로운 주체가 가진 권력을 가시화하여 변화의 현실적 가능성을 경향적으로 확인시켜야 한다. 이러한 현실성에 대한 요구는 단순히 개별자들의 기회주의적 태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주체가 적합한 주권(sovereignty)의 담지자가 되어 정상적인 정치 사회를 구성할 수 있는가를 확인하는 최종 심급이다. 새로운 주체에게 자신의 이익과 헌법적 기초에 도전하는 적 도당을 제압하고 자신의 프로그램을 실행할 역량이 없다면, 이미 요구된 두 요소 모두가 공허한 거짓말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주체는 배타적이며 독재적인 주권을 적합하게 행사할 수 있는 역량을 가졌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물론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연역적으로 완벽하게 증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증명은 어디까지나 경향적으로, 즉 자신이 동원 가능한 자원과 방법들이 충분하다는 것을 구체적 실천 과정에서 보임으로써 점진적으로 달성할 수밖에 없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삼위일체를 이룰 때 비로소 자연적 개별자들은 새로운 일반의지에 스스로를 복종시켜 그 일원이 된다. 이러한 요소는 심지어 성경의 가장 위대한 건국자 모세에게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모세는 이집트 치하의 유대 민족이 받고 있던 종교적/사회적 억압이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으로서 반드시 벗어던져야 할 굴레라는 점을 역설했고, 그 해방을 통해 신의 축복을 받은 성스러운 나라를 만들 수 있음을 입증했다.(신의 보증수표라면 파스칼의 말마따나 무한대의 이익이 아닌가!) 그리고 산상에서 받은 십계를 통해 신이라는 최상위의 권위에 준거한 새로운 헌법적 기초를 마련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엑소더스라는 과감한 결단과 기적의 이능을 통해 유대 민족만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고, 또 실제로 성공했다.

 

이처럼 주체 형성과 새로운 건국을 성공으로 이끄는 적합한 비르투의 행사는 이익, 헌법, 가능성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구현에 집중된다. 그러나 이렇게 개념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요소라 할지라도 각각의 요소를 현실에서 각기 개별적으로 성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혹자가 그런 것을 시도한다면, 그는 이 변화가 이익이 되며 도덕적이고 또 가능하다는 공허한 주장, 그 강변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칭 혁명가들이 우리 사회엔 너무 많지만 말이다.

 

따라서 이제 각도를 바꿔, 주요 행위자들의 역사 속에서 대상적 공통 요소가 아닌 활동적 공통 요소를 고찰해 보자. 프랑스와 독일의 부르주아 혁명에서 큰 역할을 했던 것이 의식적 유산자들의 소모임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러시아의 경우에서도 활동가들로 구성된 전위정당이 핵심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요 행위자들의 조직화만으로는 충분치 않은데, 모든 경우에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가장 큰 배경은 일반적이고 조직화된 대중행동의 동원(mobilization)이다. 주체가 포괄하고자 하는 모든 개별자들에게 열려 있는 실질적 대중행동의 창출, 이것이 프랑스 대혁명의 대중집회와 러시아 대혁명의 정치파업, 리소르지멘토의 청년운동 등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주체 형성의 현실적 운동 양태를 구성하는 원리는 총 두 가지이다. 첫째는 결집의 구심점이자 주체 형성에 요구되는 요소들을 준비하는 신군주(New Prince)의 역할을 하는 전위조직의 결성, 둘째는 이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일반적 집단행동의 창출이다. 이 두 요소는 결국 동원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수렴한다. 찰스 틸리의 혁명사 연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 개념은 국민 이전 단계의 개별자들을 의식적으로 공통의 경험 속에 끌어냄으로써 새로운 국민을 형성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동원 과정이 어떻게 주체 형성의 3요소와 맞물리게 되는가? 첫째, 정치적 집단행동은 그 본질상 자연스럽게 주어진 적대전선을 따라 구성되며, 그 전선의 형성을 통해 역설적으로 그 사이에 있는 이익이 명확해지는 효과가 나타난다. 이는 이익의 절박성과 모순성을 입증함으로써 일반이익을 가시화하고, 동시에 적의 수탈을 실천적으로 고발한다. 둘째, 집단행동에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원칙과 규율에 대한 상호 이해를 모색하는 과정을 통해 헌법적 기초의 틀이 마련된다. 또한 각 개별자들은 그 기초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적 활동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해당 법적 개념 및 관계를 내면화할 수 있으며, 자신의 복종 행위를 규율의 우월성으로 자연스럽게 귀인할 수 있게 된다. 셋째, 집단행동이 발산하는 현실적 힘과 집단행동에 요구되는 조직체가 작용하는 과정에 대한 관찰은 주권 행사의 현실성에 대한 경향적 이해를 제공한다. 이상의 동원 작용에서 전위조직이라는 구심점은 각 효과를 명확히 하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집단행동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 역할은 그 자체로써 각 요소를 강화하는데, 특히 가시화되는 일반이익을 언어화하고 상대적/일시적인 원칙을 보편적 헌법 원리로 연결시키며, 집단행동으로 발산되는 권력을 구심점으로 수렴시킴으로써 그 지속성과 신뢰성을 제고한다.

 

결국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대중행동을 새로운 주체의 틀에 맞춰 일반화시키는 것이다. 그 행동은 즉자적/반사적인 것일 수도 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농민들의 대공포나 파리에서의 바스티유 함락, 러시아 2월 혁명과 10월 혁명 사이에 일어난 무수한 파업과 소비에트의 난립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대중의 일차적 동원을 위에서 언급한 원칙과 과정에 따라 적합하게 지도하면, 조합적 실천과 정치적 조직화 사이의 양질 던환이 발생한다. 즉 일정 범위 이상의 개별자 집단이 적합한 주체 형성 시도에 결합되면, 어느 선 이상에서부터 단절적으로 그 성과가 가시화되어 주체 형성의 삼위일체가 기초적으로나마 성립, 개별자들의 복종과 일반의지의 형성이 시작되는 것이다.

 

다만 이 양질전환의 변증법적 과정 사이에 영향을 미치는 실천에 대해서는 파악하기 어렵다. 즉자적 대중행동의 가운데서 비산하듯 튀어나오는 정치적 계기들은 극히 상황적이며, 우연이나 맥락의 지배를 강하게 받기 때문이다.

 

질적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그에 맞춰 기존 대중행동의 성격,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는 핵심 수단도 함께 변화한다. 프랑스에선 인민이 산악파 전위분자들과 결합하여 혁명적 프랑스 국민을 형성해 감에 따라 수 차례에 걸쳐 의회의 형태와 구성을 변화시키고, 각 위원회와 꼬뮌의 구성 및 관계 설정을 새로이 했다. 러시아에서도 전통적 노동조합을 약화시키고 소비에트와 각 당 사이의 소통체계를 재구축하며 파업을 의식적으로 조정하는 등의 변화가 수반되었다. 이는 즉자적 실천 단계에 적합하던 도구를 일신하고, 새롭게 권력 쟁취를 목적으로 하는 집합적 주체의 일원으로서 집단적 목적 달성을 위해 의식적으로 움직이게 되며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렇게 하나의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형성되면, 그 사회는 일시적으로 이중 권력(dual power) 상태가 된다. 즉 기존에 하나의 지배 주체가 다수의 자연적 개별자들에게 자신의 일반의지를 강제하여 복종시키던 상태가 파괴되고, 둘 이상의 일반의지가 서로를 제압하고 자신을 완전히 일반화하기 위해 투쟁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전환은 어떤 시점을 특정하여 전후로 분할할 수는 없다. 왜냐면 새로운 주체의 형성 자체가 완성 이전과 완성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지속적으로 미완의 상태에서 투쟁을 계속하며 그 범위를 확장시켜 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다만 기존 국가권력에 공공연히 도전할 수 있는 정도라는 모호한 선에서 그 전후를 거칠게 구분해 볼 수는 있겠다.

 

이상의 논의를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계급이라는 정치적 주체가 형성됨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구성 요소 세 가지로 이익의 입증, 헌법적 기초, 현실적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 요소들을 유기적으로 성취해 내는 현실적 운동 양태는 집단행동의 양적 확장과 선진 부위의 조직화를 결합시켜 동원의 양질 전환을 이루어내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시각에서 봤을 때 현재 한국 좌파의 일신을 위해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보다 많은 현장투쟁/비정규직 투쟁의 엄호, 새로운 혁명정당 건설과 자체 역량 강화, 투쟁의 지원 속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계기들에 대한 의식적 개입,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현재이 낡은 노동조합 체계를 노동 대중의 질적 전환과 함께 새로운 체계로 바꿔나갈 준비 등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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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투표의 망상을 걷어치워라

지방선거가 가까워 오면서 슬슬 여기저기서 투표철에 맞는 계절상품들이 몰려오고 있다. 보수 정치권의 보여주기식 정쟁의 대표격이라 할 무료급식, 사법개혁 논란은 물론, 진보 진영에도 계절풍은 피해가지 않는다. 항상 이맘때쯤 되면 진보 진영을 휘감는 계절상품, 그게 바로 '계급투표' 논의이다.

 

간단히 말해 소위 '계급투표'란, 각 사회 계급이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대변하는 대표자에게 투표하는 정치적 선택을 지칭한다. 물론 역사상 완전한 계급투표가 이루어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어느 정도 조직된 노동자들이 좌파 정당에 투표하여 정권을 구성하는 것이 정석으로 되어 있는 유럽 정치 지형을 보고 배운 진보 정치세력들은 이 계급투표가 어느 정도로 이루어지는가가 한 사회의 계급의식의 척도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각계각층에서 이루어지는 계급투표에 대한 논의는, 사실 무용할 뿐 아니라 유해하다. 한국 좌파가 계급투표에 대한 희한한 망상을 걷어치우지 않는 이상 사태는 전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계급투표에 대한 논의에서 제기되는 문제의 유형은 항상 동일하다. 원래대로라면 노동자 계급은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대변하는 후보에게 투표하여 자본가들과 맞서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과연 어떤 다른 요소가 작용하기에 그렇게 되는 것이며, 이 교란 요인을 제거할 방법은 무엇일까? 즉 이미 옳은 것으로 여겨지는 이론적 명제와 그에 모순되는 현실 사이의 괴리 사이에, 해명되지 않은 중간 매개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것을 규명, 극복함으로써 현실을 바꾸려는 시도다.

 

당연히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계급투표 논의의 전제가 되는 명제, 즉 '원래대로라면 노동자 계급은... 투표하여야 한다'는 부분이다. 과연 이 명제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옳은가?

 

혹자는 이러한 의문을 계급성의 사상 시도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가 여기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바로 '노동자 계급'이라는 개념 자체다. 과연 계급이란, 노동자 계급이란 무엇인가? 즉자적/대자적이니, 헤게모니니 하는 골치아픈 말장난은 집어치우고, 간단하게 요점을 조명해 보자. 계급이란 하나의 경제적 범주인가? 아니면 사회적 관계에 의해 규정되어 구성되는 주체적 범주인가? 만약 계급이 부르주아 통계학자들의 차트 안에 존재하는 행렬의 하나가 아니라면, '원래 이러저러하게 투표해야 하는' 노동자 계급이라는 것은 대체 어디에서 나타난 허깨비란 말인가?

 

요약하자면, 계급투표에 관한 모든 논의는 노동자 계급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세련된 논의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한국 사회에 즉자적 노동계급은 존재하지만 대자적 노동계급은 미약하다고 얘기할 것이지만, 이것은 단순히 말을 꼬아놓은 유희에 불과하다. 왜냐면 여기서 논자가 말하는 즉자적 노동계급은 필자가 위에서 언급한 경제적 범주를 의미하며, 대자적 노동계급이란 주체적 범주를 의미하는데, 이 논자는 동적인 주체적 범주가 정적인 경제적 범주에 일치해 가는 것을 정상 상태로의 이행이라고 전제한다는 점에서 결국 정적 범주의 선험적 상정의 오류와 크게 궤를 달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계급투표가 아니라, '어떻게 계급이 투표를 하게 할 것인가'이다. 이미 존재하는 자연적 개별자들의 집합을 관념적인 상태로 다가가게 만드는 방법을 묻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개별자들의 산개된 현상태를 새로운 집합적 주체로 양질전환시킬 방법을 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보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계급투표의 창출 이전에 일단 계급의 창출이 우선된다는 뜻이다.

 

결국 그 말이 그 말 아니냐고 물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즉자적 계급이 대자적 계급으로 전환되는 것을 막는 교란요인을 제거하는 것이나, 자연적 개별자들을 계급이라는 집합적 주체로 전환하는 것이나 결국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하지만 그렇게 묻는 사람들은 여전히 핵심을 빗겨나가고 있는 것이다. 양자의 차이는 전환이라는 화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정치의 기반에 대한 전제에 있다. 즉자적 계급을 대자적 계급으로 전환하고 계급의식을 함양하여 이들을 계급투표가 가능한 정치적 집단으로 만든다는 모델은, 애석하게도 여전히 미조직 대중을 하나의 집단으로 상정하는 오류에 빠져 있다. 즉 비정치적 집단을 정치적 집단으로 전환하는 것이 대중정치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현실적인 대중정치의 기반은 관념적인 경제적 범주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구체적이고 자연적인 개별자들을 어떻게 최초로 집단화시킬 것이느냐에 걸쳐 있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문제는 크게 달라진다.

 

이러한 오류에 빠져 있기 때문에 계급투표에 대한 논의는 금세 노동자 정치세력화니, 이데올로기 투쟁이니 하는 공론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는 결국 개량주의/조합주의로의 길과 관념적 시민운동의 길로 나뉜 갈림길에 좌파 운동을 몰아세우는 것이다. 이 구도 속에서 정치는 투표행위 혹은 투표행위로 이어지게 되어 있는 인식행위에만 국한되며, 모든 논자들은 과거 리용 면직공들의 투쟁이 '정치적이지 않다'고 평했던 브루노 바우어의 오류에 속박된다.

 

말이 길어졌는데, 간단하게 하나의 질문으로 줄여 보겠다. "지금 한국 좌파 운동이 지방선거에 신경 쓰고 있을 때인가?"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계급의 구성보다 계급투표가 선행한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소위 계급투표라는 것은 계급의 구성이 계급의 승리로 이어지지 못하고 패배했을 때 피눈물을 삼키며 선택하는 마지막 보루이자, 동시에 점차 그 안으로 매몰되어 가는 함정이었다는 것이 역사의 증언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계급투표'라는 망령을 좌파의 잔칫상에서 걷어치워라. 지방선거가 중요한 정치적 이슈라면, 선거 과정에서 드러나는 보수 세력의 진짜 의제에 대한 무관심과 무능력을 거리에서 공장에서 고발하라. 대중에게 표를 구걸하는 것은 이제 그만 두어라. 만약 우리가 정말로 유효하게 계급을 천천히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면, 우리가 어떤 이름도 붙이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에게 찾아올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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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돌파 그렌라간>, 2007

 

<천원돌파 그렌라간>

 

감독: 이마이시 히로유키

각본: 나카시마 카즈키

제작: GAINAX

 

 

<천원돌파 그렌라간>을 정의하는 단 한 단어, 그것은 바로 '열혈'!! 90년대를 넘어서면서 오타쿠 문화의 풍조가 절망감, 패배감, 개인적 갈등 등에 초점이 맞춰질 때 가장 먼저 그것을 포착해 그 흐름을 대표하는 불후의 명작,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스타덤에 올랐던 가이낙스가, 이제는 낡았다고 여겨지는 인간 의지와 말도 안 되는 극복을 그리는 작품을 2007년에 내놓은 것이다.

 

배경은 모든 인간이 지하에 갇혀 사는 어떤 시점의 미래의 지구. 지하 마을에 살면서 항상 지상을 꿈꾸던 청년 카미나와, 드릴로 구멍을 뚫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특기도 장점도 없이 항상 주눅들어 있던 고아 소년 시몬이 우연한 발견을 계기로 로봇을 타고 지상으로 나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불가능하다, 위험하다, 그런 것 있을 리 없다,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등 모든 부정적인 장애물들을 뛰어넘고 의지와 패기만으로 전 우주를 해방시키는 스케일 큰 이야기다.

 

 

▲ 이들이 바로 주인공

 

 

이른바 '열혈 로봇물'의 특징: 첫째, 강한 의지로 어떤 것이든 돌파한다. 여기에 합리적인 이유는 사실 필요 없다. 둘째, 로봇이 과학적 근거와는 전혀 상관없이 무지막지하게 크고 또 강하다. 물론 적들도 마찬가지. 이런 측면에서 <그렌라간>은 열혈물의 교과서다. <그렌라간>에서 의지의 힘은 '나선력'이라는 설정으로 표현되는데, DNA 나선구조를 가진 생명체라면 의지와 패기를 통해 누구나 방출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라는 설정이다. 이 설정은 그렌라간의 유일한 무기인 드릴의 나선운동과 연결되면서 재미있는 일치를 구성한다. 또한 그렌라간은 닥치고 세다. 주인공이 악쓰면서 드릴을 갖다 대면 안 뚫리는 것이 없을 정도고, 최종 합체 형태에 가서는 은하를(;;) 손으로(;;) 집어 던지는 스케일을 보여준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처음부터 크고 강한 다른 열혈 로봇물과 달리, 그렌라간은 로봇에게 '성장'이라는 개념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처음 주인공이 발견한 로봇은 기껏해야 성인 남성의 키를 살짝 넘는 정도의 크기에 불과하며, 짧은 팔다리에 얼굴만 커다래서 웃기기까지 하다. 그러나 합체를 거듭함에 따라 결국 이제까지 어떤 로봇물도 보여주지 못한 우주급(!!) 스케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로봇의 성장은 주인공 소년 시몬의 정신적 성장과도 연계되어 있다.

 

 ◀ 이랬던 녀석이

 

▲ 이렇게 변합니다

 

 

또한 애니메이션 내적으로 <그렌라간>의 또다른 특징이 있다면, 만화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데포르메' 기법을 극적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그렌라간>의 캐릭터들의 움직임은 열혈물답게 굉장히 과장되어 있으며, 그 동세(動勢)는 인체비례를 무시하기까지 하며 강렬한 원근법으로 눈을 사로잡는다. 캐릭터들의 신체는 표현의 편의에 따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며, 얼굴 표정도 안면부 함몰을 의심케 할 정도로 자유자재로 변화한다. 이러한 연출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극적 현실에 대한 시청자의 감정 이입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며,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닐 때 어디까지 대상을 뭉개어(;;) 극대화된 감성적 효과를 노릴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 훌륭한 예라 하겠다.

 

내러티브에 있어서 <그렌라간>을 보는 사람을 가장 거슬리게 할 부분이 있다면 그건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마초이즘일 것이다. 사실 '드릴'이라는 무기 자체부터가 일단 좀 그렇다. 약간만 알고 보면 누가 뭐래도 남근의 상징 아닌가. 게다가 클 수록 좋다니(;;) 이런 원초적인 마초이즘도 몇 없을 것이다. 또한 열혈물의 특성상 여성 캐릭터들은 거의 부차적인 역할에 머물러 있으며, 남성적 공격성에 대한 예찬은 어떤 페미니스트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할 지도 모른다. 그 외에도 카미카제 정신의 미화라던가, 정치인에 대한 냉소적 시각이라던가 하는 부분에 대한 비판은 여러 측면에서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그렌라간>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에서 변호하자면, 열혈물이 내세우는 인간 의지와 불가능을 극복하고자 하는 모습은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윤리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애니메이션이라는 대중 문화의 특성상 그 주 소비층인 젊은 남성들을 의식하여 그것이 남성적 형태로 표출되고는 있지만, 일본이라거나 남성이라거나 하는 외형을 걷어내고 보면 마초이즘이나 카미카제 정신과 유사하지만 궤가 다른, 인간의 원초적인 열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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