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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난다

소식을 듣고, 이 블로그에 올라온 글 몇 개를 지우며 자꾸 눈물이 나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처리(?)를 마쳐놓고, 나름 기록이 깨끗하니 올라와서 남은 처리를 도와달라는 친구 녀석의 전화를 받고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처지에 또 눈물이 나려고 한다.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다. 정말로.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왜 우리는 이렇게 살게 되었나.

 

풍문으로나마 존경하던 선배들은 앞날을 알 수 없게 되었고

 

귓가에 지금에라도 불호령이 떨어지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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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어디로 가는가

1. 정세인식이랄 정도로 대단한 글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냥 단순한 찌질이의 망상폭주라고 해 두자.

 

2. 촛불 정세가 두 달째로 치닫고 있다. 25일 오늘 2시, 정부는 관보 고시를 강행한다 하며 다음 아고라는 난리가 났다. 광우병 대책위가 공식적인 투쟁 목표 5개를 정리해 내놓은지 1주일만이다. 그 동안 사람들은 정말 박터지게도 싸웠다. 누군가는 왜 쇠고기 외에 다른 걸 얘기하느냐고 까댔고, 누군가는 평화시위라면서 왜 폭력 쓰냐고 까댔다. 촛불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이에 대항하느라 곳곳에서 분투했고, 보수언론의 이명박 지키기 분투도 나름의 입장에선 눈물겨웠다.

 

3. 국가기구를 둘러싼 비혁명적 정세에서의 특정 폭발국면으로서는 상당히 장기화되고 있는 지금의 정세를 보면서, 확실히 느껴지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시간이 지나면 굳는다는 것이다. 최초의 촛불정세 국면에서 매우 놀라운 것으로 보였던 광장의 열린 공간은, 서서히 경직되어 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징후는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이 듣지 않는다. 모든 폭발적 대중 정세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대중들의 집단적인 지적 욕구의 폭발이며, 이 폭발은 대중들의 열린 귀로써 드러난다. 그 정세 이전까지 개인의 좁은 울타리와 이데올로기의 장벽 속에 갇혀 있던 대중들의 인식이 전사회적이고 완전한 것으로 뻗어나오기 위한 단계인 셈이다. 이번 촛불 정세에서 역시 대중들은 거리에 앉아 열성적으로 연사의 말에 귀기울였고, 거리에 뿌려지는 온갖 리플렛들과 게시판에 뿌려지는 수많은 주장들을 하나하나 검토하고 배워나갔다. 6월 10일까지만 해도 이러한 경향이 퇴조하려는 기미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6월 10일이 넘어가고, 사태가 장기화되는 조짐을 보이면서 조직적인 언론 플레이와 산발적인 개별 반발로 표출되는 반격이 가시화되고, 싸움은 본격적으로 '듣는' 단계에서 '말하는' 단계로 넘어간 것 같다. 누군가의 말을 듣기보다는 이미 준비된 자신들의 말을 하는 것에, 이제 대중들은 더 방점을 찍고 있다.

 

4. 물론 이러한 단계 변화는 역시 대중투쟁에 있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듣는 단계에 머물어 있는 대중투쟁은 있지도 않고 있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지금의 촛불 정세에 있어서 안타까운 것은, 좌파들이 이 듣는 단계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의제의 확대를 이뤄냄에 있어서도 미진했으며(우리가 미진했던 부분을 대중의 선진적 부위가 메꾸었다),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운동권/운동단체에 대한 불신과 분리를 불식시켜 내는 데도 실패했다. '노동자'와 '시민'의 분리주의 역시 지속되고 있으며, 대중들의 담론 수준을 (선진부위부터 후진부위까지 전체적으로) 끌어올려 나가는 데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제 대중들에게 남은 것은 이명박 정권 및 그 알바들과의 일대 결전일 뿐이고, 이 결전을 교란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의 개입은 거부될 것이다. 6월 10일 이후 그런 단계에 진입했음을 대중들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생각은 소통되기보단, 당장의 싸움에 큰 차이를 내지 못하는 거라면 일단 미뤄둘 것이고 큰 차이를 내는 거라면 아군이냐 적이냐를 구분할 뿐일 것이다. 폭력에 대해서, 운동권에 대해서, 노동자에 대해서, 국가에 대해서 우리가 하고 싶었던 많은 이야기들은 이제 얘기하기 뻘쭘한 상황이 되었다.

 

5. 그리고 대중들은 그렇게 귀를 닫고 입을 열어, '지금의'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이야기들을 할 것이다. 아마 대략 보면,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은 반대하지만 FTA 자체의 산통을 깰 수는 없고, 이명박은 용서못할 쓰레기지만 국가기구 자체에 대한 도전은 할 수 없고, 반대의 행동은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은 안 되고(차라리 맞아라!! 라는 말만큼 폭력적인 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숭고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시민이지만 파업하는 노동자들은 이기적 집단이고... 이런 끝도 없이 늘어지는 일정한 성과와 일정한 한계들이 이어질 것이다(물론 선진부위와 후진부위 간의 격차가 존재하지만, 그 격차는 행동의 단계에서 '승리를 위해, 단결을 위해'라는 이름으로 하향수렴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대중이 말을 하는 단계에서 올바른 좌파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한계들을 자신이 미처 못했던 것으로 품어안은 채 무조건적으로 대중의 말을, 그 속의 성과를 지지하는 수밖에 없다.

 

6. 이상에서 볼 때 앞으로 촛불의 진로는 관보고시를 기점으로 1~2주 동안의 힘싸움에 의해 결정이 날 것으로 예측한다. 더 이상의 정치적 급진화나 역동성은 크게 발견되지 않을 것이고, 말 그대로 목표와 의제를 위한 날것의 힘싸움만이 남았다고 본다. 그 속에서 투쟁이 성공한다면 잘해야 재협상, 그리고 오바마 당선(된다면) 타이밍 때까지 질질 끌다가 민주당 입맛에 맞춘 내용으로 자동차-쇠고기 관련 조건을 주고받는 형태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이후 이명박 정부의 핵심정책(대운하 등)은 큰 타격을 받겠지만, 자잘한(?) 착취 서포트 정책은 아마 별 무리없이 지나갈 것이다. 만약 투쟁이 실패한다면, 역풍 속에서 중소규모로 주말마다라도 촛불집회 명맥을 유지하다가 국회 통과쯤 해서 완전히 없어지는 형태로 무너질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큰 상처를 받겠지만 조심스럽게나마 핵심정책을 다시 추진할 것이고, 광우병의 불안에 시달리며 살아야 할 것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일상으로 평화롭게(?) 돌아갈 것이다.

 

7. 위의 예측을 보면 알겠지만, 이제 남은 결과는 어느 쪽이든 정말 '재미없는 9시 뉴스 기사' 수준에 그칠 것이다. 그 이상의 가슴뛰는 역동성을 취할 수 있던 단계는 지났고, 취한 역동성을 이용할 단계지만 이용하기엔 너무 적게 취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정국을 통해 생산된 대중 내의 선진적 부위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 그리고 이 정국을 통해 드러난 좌파의 전략부재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대중의 듣는 단계를 말하는 단계로 착각했던 무기력한 부류들도 있고, 들어야 하는 대중한텐 얘기 안하고 죽어라 원래 붙잡고 있던 사람들만 붙잡고 말하던 부류들도 있다. 영합과 홍보 외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던 부류도 있고, 자신들도 잘 이해 못한 지도라는 개념을 사용하려다가 쪽만 먹고 퇴장한 부류도 있다. 남은 것은 각자의 고민과 반성일 것이다. 확실한 건, 이제 촛불은 마지막 최종연소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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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비폭력

무화과님의 [겁쟁이 기회주의자가 되어버렸다. ] 에 관련된 글.


트랙백 건 원글의 '지나가다'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댓글러는, 비록 혁명적 공산주의를 열렬히 응원하고, 깔끔한 것과 예쁜 것이 아니면 무의식적 거부감을 느끼는 전형적인 중간계급적 정치취향을 경멸하고, 방어적 폭력의 사용을 옹호하는 본인이지만, 정말 짜증나는 타입의 꼴통이라고밖엔 말할 수 없다.

 

사실 애초에 이 주제에 대해 각자 확고한 기준을 갖고 있는 사람끼리 얘기를 나누는 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페미니즘이나 아나키즘 쪽에 큰 지향을 갖고 계신 분들은 대체로 전일적 비폭력을 주장하시는 경우가 많았고, 나처럼 혁명적 공산주의 운운하는 사람들은 폭력을 옹호하곤 한다. 아나키즘 쪽에서도 보다 낡은(?? 물론 시기적으로의 얘기다. 1930년대 스페인에서의 그것처럼) 지향에 속해 계시는 분들은 폭력을 옹호하기도 한다. 어쨌든 명확한 건, 이 점에 대해 각자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 얘기를 열심히 나눠봤자 사실 별 해결될 게 없다는 것 정도다. 왜냐? 상황을 파악하는 서로의 기준이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어느 쪽의 기준을 어느 시점에 꺼내드는 것이 옳으냐를 실천적으로 검증받을 수밖에 없고, 말은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명확히 해두고 싶은 것은, 혁명적 공산주의자가 전일적 비폭력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은 절대로 혁명에 폭력이 필수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현실적 운동을 이념과 윤리로, 규범과 당위로 전도시키기 때문이다. 현실적 운동은 윤리와 규범과는 별개로 돌아가기 때문에, 어떤 국면에서는 투쟁의 승리를 위해 일종의 폭력이 요구될 때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전일적 비폭력을 '선동'하는 사람들은(물론 그런 경우는 별로 없겠지만, 혼자 그렇게 생각하고 만다면 큰 문제도 없고 내 알 바도 아니다) 이런 국면에 쉽게 혁명의 적이 된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거꾸로 말해, 같은 이유에서 어떤 국면에서는 투쟁의 승리를 위해 어떠한 폭력도 요구되지 않거나, 오히려 폭력이 적극적으로 거부되어야 할 때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럴 때는 '지나가다'가 혁명의 적이다.

 

'지나가다'라는 꼴통은 오히려 폭력의 사용을 규범화시킴으로써 거꾸로 물구나무선 규범화를 수행하고 있다. 그의 어법에서 폭력에 반대하는 것은 기회주의가 되고, 여성과 장애인의 입장을 얘기하는 것은 '숨는 것'이 된다. 어떤 당위적 윤리를 중심으로 판단할 때 살아있는 녹색의 현실들은 모두 잿빛 스틸컷이 되는 것이다(여담이지만 이런 현상은, 비폭력을 주장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물론 폭력을 규범화시키는 경우보다 비폭력을 규범화시키는 경우가 더 '양식있는' 분들일 경우가 많아 눈쌀 찌푸릴 정도의 꼴은 보지 못했지만, 문제는 그 '양식'까지도 포함되는 하나의 중간계급적 '아비투스'에 있다). 아마 그의 눈에는 지금 다음 아고라에서 촛불집회에 폭력 사용자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대중들이 다 경찰 프락치거나 후진적 기회주의자로 보일 것이다. 그러한 발언과 판단이 나오는 맥락, 현실적 조건, 국면적 상황과 이후의 전망 같은 것에 대한 총체적 판단은 안중에도 없다.

 

무조건 소위 '빡센' 레토릭에 전투적인 단어들을 섞어 쓰면 혁명투사가 되는양 처신하는 것은 사실 혁명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큰 해가 된다. 이상화시키고 규범화시키는 현실 전도는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지든 사태를 왜곡하곤 한다. '혁명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 현실이 모순을 안은 담지체 자체이기 때문에,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현실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p.s. 그냥 그랬는갑다 하고 지나가면 될 남의 싸움에 굳이 트랙백을 걸어서까지 언급하는 이유는, 최근까지도 소위 한국의 '혁사'라는 사람들에게서 저런 분위기가 벗겨지지 않고 있는 점을 최근에 다시 개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가다'처럼 대놓고 얘기하진 않더라도,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극좌 유아주의적 편향이, 이제는 극복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가도 저런 악과 깡으로 이 인고의 극우 제국에서 혁명을 말할 수라도 있는 싹을 지켜오신 분들인데 하는 생각에 다시 한숨만 내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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