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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질을 위한 변명

고대하던 휴가를 나와서, 저번 일기에서 예고했던 대로 오덕질을 위한 글분류를 새로 정비했다. 일단 본격적인 블로그 오덕질을 시작하기 전에, 나름 뭔가 이 어둠의 취미(?!)에 대한 자기변호가 필요할 것 같아서 몇 자 끄적여 본다.

 

사실.... 오타쿠 취미는, 당사자인 내가 말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별로 떳떳한 것은 못 된다. 몇몇 오타쿠들은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핍박을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영양가 없는 환상의 세계에 빠져서 소비 문화에 침잠해 있는 오타쿠들이 건강한 사회 구성원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그 내용물이라는 것 역시 대체로 극히 통속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시각들 뿐이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은 남성 소비자를 위한 모에함이라는 성적 코드의 매매 행위가 오덕질의 본질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떳떳하지 못한 취미를 버리지 않고 심지어 블로그에 게시까지 하겠다고 나서는 이유는 무엇이냐.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런 거다.

 

"사람이 어떻게 매일 웰빙 음식만 먹고 사나? 쫀듸기도 먹고 아폴로도 먹는 거지."

 

사실 불량식품, 몸에 안 좋은 거 다 안다. 정크푸드도 그렇고 술 담배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렇다고 매일같이 선식 비스무리한 것만 먹고 해롭다는 거엔 손도 안 대는 거? 깝깝해서 어떻게 그렇게 사냐. 간혹 그렇게 사시는 분들도 계시긴 하다만 난 그런 거 보고 있으면 솔직히 좀 소름 끼친다. 인간의 쾌락에 대한 추구에 항상 빠지지 않는 것이 자기파괴의 충동 아니던가? 그 분들께선 왜 그토록 자신의 이드에 가혹하신 것인가? 자기파괴의 충동이 억압되어 전이되면 타인에 대한 파괴충동으로 전이한다는 얘기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정도껏 하면 된다. 사실 오타쿠들이 건강한 사회 구성원이 잘 못 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항상 너무 심해서 아니겠는가? 술이야 다들 먹는 거지만 알콜 중독자는 치료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쫀듸기가 스테이크보다 맛있다고 하는 놈은 문제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살면서 쫀듸기 한 번 안 먹어 봤다는 사람도 나름 문제 있는 거 아니겠나?

 

매일매일을 진지하게 살아야 할 것 같고 모든 일에 정치적 함의를 따져봐야 할 것 같은 속칭 진보파들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부유층에 대한 환상을 불러 일으키는 드라마 안 보고, 대상화된 여성을 소비한다며 모에 애니들을 죄다 폐기처분하고, 폭력을 일상화한다며 치고 박는 게임들 전부 지워버리고.... 대중문화는 인민을 순종시키는 마약이라며 목청 높이며, 꼭 그렇게 살아야 하나? 싸우는 것도 좋은데, 뭐든지 다 그렇게 잡아 뜯으려고 하면 인생 피곤해진다.

 

괜시리 큰 의미 부여하지 말고, 정말 말초적인 쾌감을 위한 취미 한 둘쯤 있어도 나쁠 거 없잖겠는가. 보면 재미있다, 예쁘고 귀여워서 기분 좋다, 그냥 여기서 끝나는 아주 단순한 쾌감. 불량식품 사 먹는 기분으로 즐겨 보는거다.

 

더 이상 길게 쓰면 뭔가 더 찌질해질 것 같고, 그냥 원사운드의 불후의 명대사를 인용하며 마무리 지으려 한다.

 

"오덕질 그런 거 왜 해요?"

 

"시바... 오덕질하는 데 이유가 어딨어! 그냥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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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 논고> 인용문

<로마사 논고>의 일독을 끝냈다. 이제 토플 공부 좀 하면서 천천히 재독 들어가야겠다.

 

일독하면서 가치가 특별한 듯한 문장들을 노트에 정리했다. 코멘트를 달 만한 인용문에 몇 마디를 붙여 블로그에 기록해 놓는다.

 

                                                                                                                                                                                    

 

87p. "모든 도시는 인민에게 그들의 야심을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야 한다. ... 자유를 희구하는 평민의 열망이 자유에 해로운 경우란 거의 없다."

 

88p. "키케로가 말하듯이, 인민은 비록 무식하지만, 그들의 신망을 받는 사람이 무엇이 진리인지를 이야기해줄 때 그 진리를 납득하고 거기에 쉽게 복종하는 법이다."

-> 인용자 주: 마키아벨리가 견지하는 특유의 인민(Popolo)과 귀족(Grandi)의 변증법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마키아벨리 당대의 이탈리아 도시들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로마에서는 마키아벨리의 메타포 그대로 계급적인 차이로서 양자가 드러나고 있지만, 보편적으로 볼 때 대중과 엘리트, 혹은 전위의 구분은 언제나 등장할 수밖에 없다. 사회에서 인간의 의식 발전이 균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부분은 인민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는 것, 다만 인민에게서 신망을 받을 수 있을 만한 현실적인 역량과 진리를 이야기할 수 있을 만한 올바른 자세를 겸비한 전위가 인민과 상호 작용할 때에만 그것이 현실화된다는 것이다.

 

100p. "만약 그가 폭도에 의해 살해되었더라면 ... 그로 인해 개인과 개인 간에 피해가 속출했을 것 ... 그러한 피해는 공포를 낳고, 공포는 방어하고자 하는 욕구를 낳고, 이는 파벌로 발전한다. 파벌로부터 국가의 당파가 생기고, 이로 인해 국가는 파멸된다."

 

108p. "... 어떤 사람이 왕국을 조직하거나 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사용한 부당한 행위에 대해 책망하지 않는다. 비록 그 행위가 비난받을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결과가 용서받을만한 것이라면 여하튼 적절한 것이다. ... 왜냐하면 복원하기 위해서 폭력을 행사한 자가 아니라 파괴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 자가 비난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118p. "실로 어떤 입법자도 신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비상시 법률을 제정하여 인민들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할 수 없다. 또한 많은 좋은 일들이 신중한 사람에게는 명백하지만, 그 자체로는 뚜렷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이런 어려움을 제거하기 위해 현명한 사람은 신에 호소한다."

-> 인용자 주: 여기에서 마키아벨리는 국가에 있어 종교의 중요성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고전 독해가 그렇듯이 우리는 여기서 종교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핵심은 '많은 좋은 일들'이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사회적 합의에 있어서  합리주의의 본질적인 무력성이다. 즉 여기에서의 종교란 이데올로기 일반이며, 모든 입법자 혹은 혁명가는 그 자체로서는 증명 불가능한 많은 필요한 조치들을 선험적 도덕으로 표현되는 대항 이데올로기로써 뒷받침해야 함을 의미한다.

 

120p. "... 공화국이나 왕국을 구원하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 잘 다스리는 군주를 갖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도 잘 유지되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군주를 갖는 것이다."

 

134p. "... 새롭게 자유를 얻은 국가는 열렬한 적은 있지만 열렬한 동맹은 없다는 점이다."

 

135p. "... 다중을 다스리고자 하면서도 새로운 정부의 적에 대해 단단한 대비책을 세워놓지 않은 자는 단명에 그칠 국가를 수립한 셈이나 다름없다."

 

157~158pp. "... 그 개혁된 정부가 잘 유지되고 모든 사람에게 만족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의도하거나 소망하는 자는 적어도 구제도의 외양을 존속시킬 필요가 있다. ... 왜냐하면 일반 사람들은 실제에 못지않게 외양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 인용자 주: 이것은 많은 개혁가들이 잊고 있는 것이다. 구제도의 흔적조차 찾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새로 설계된 사회구조라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그 유명한 코뮌이나 소비에트 역시 기존에 각국에 이미 존재하던 풀뿌리 기구에 권력을 부여하여 변형시킨 것이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제도 중에 그러한 외양을 이용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이고, 어떤 것을 핵으로서 활용할 수 있겠는가?

 

163p. "인민은 자유를 잃지 않고 지속할 때보다도 오히려 일단 잃었던 자유를 되찾았을 때 더 과격한 행동을 보이는 법이다."

 

176p. "... 이와 달리 처신하고 나서 위험이 닥쳐왔을 때 은혜를 베풂으로써 당장 사람들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다고 믿는다면 ... 단지 일신의 파멸만을 재촉할 뿐이다."

 

177~178pp. "내부적인 또는 외부적인 원인으로 비롯되는 위험 ... 그러한 위험이 심각하여 모든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힐 경우, 가장 안전한 계획은 그것을 기어이 제거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적당히 대처하면서 시간을 버는 것이다."

 

182p. "... 무력만 가지고 있으면 어떤 명칭이 붙은 관직이라도 간단히 손에 넣을 수 있지만, 관직의 직함을 가지고 있다 해서 꼭 권력을 잡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183p. "... 공화국은 그 제도 가운데 임시 독재 집정관(인용자 주 - Dictator의 번역어)과 같은 관직을 꼭 설치해두어야 한다."

 

190p. "... 잘 정비된 공화국은 그들의 국고를 넉넉하게 하고, 시민은 가난하게 만들어야 한다."

-> 인용자 주: 여기서 시민을 '가난하게' 만든다는 것에 대해서도 시대적인 인식이 필요하다. 마키아벨리 당대에나 로마 시대에나 '부'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풍요롭게 사용하고도 남는 잉여자원을 의미했다. 즉 무위도식이나 다른 사회 구성원들을 소외시킬 만한 정도의 사치,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경제적 분배를 좌우할 권력을 부여할 수 있는 생산 수단으로서의 부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시민을 배곯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시민에게 그들이 사용할 수 있을 만큼의 자원만을 제공하고, 한 번에 큰 자원을 요구하는 대사(大事)나 사고에 대해서는 공공 사업을 통해 지원해야 한다는 점이다.

 

205p. "... 인민들이 호감을 느끼고 부자들이 적대감을 느끼는 참주들은 훨씬 더 확고한 지위를 누린다는 결론이 나온다."

 

209p. "... 공화국이나 왕국을 유지할 것을 기대한다면, 당신 자신의 백성들로 구성된 군대를 조직해야 한다."

 

210p. "... 우두머리가 없는 다중의 무력함 ..."

 

213p. "그러므로 어느 누구든 공격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아니면 일거에 잔혹한 조치를 취하고 그 후에는 인민 사이에 평온과 확신을 회복할 수 있는 조치를 통해 공공의 마음을 안심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220p. "... 인민은 일반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잘 속지만,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안으로 내려오면 재빨리 그리고 쉽게 사태를 직시하게 된다."

-> 인용자 주: 문제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안만으로는 사회 전체의 구조를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인민이 쉽게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사안들을 서로 연결함으로써 그들에게 일반적인 사안의 형태를 드러내 줄 수 있어야 한다.

 

232p. "... 인민은 좋은 것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에 현혹되어 자주 그들 자신의 파멸을 스스로 초래한다..."

 

241p. "... 토지소유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인해 일하지 않고도 사치스럽게 사는 자 ... 이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모든 공화국은 물론 모든 나라에 위험한 인물들이다. ... 왜냐하면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전적으로 모든 종류의 자유로운 정부에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 인용자 주: 예나 지금이나 잉여자원을 생산 수단으로 활용하는 무위도식자들은 자유의 적이다.

 

246p. "... 지도자가 없어 걷잡을 수 없는 다중보다 더 무서운 것도 없겠지만, 다른 한편 그보다 더 연약한 존재도 없는 것이다. ... 다중이 이러한 위험을 피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지도자를 선출하고, 그의 지도에 따라 단결을 유지하면서 방어책을 강구해야 한다."

 

253p. "다중의 잔인함은 모든 다중의 재산을 탈취할 것이라고 염려되는 한 사람에게 저지르는 것이다. 그러나 군주의 잔인함은 군주가 자신의 개인 재산을 탈취할 것이라 염려하는 모든 사람에게 저지르는 것이다."

 

262~263pp. "... 세계는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고 나쁜 것만큼이나 좋은 것도 많았다고 판단된다. ... 전체로서의 세계는 본래 동일하게 남아 있었다."

-> 인용자 주: 마키아벨리 특유의 순환론적 관점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그가 역사를 횡단면으로 잘라 관찰하고 있기 때문에 드러난다. 즉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 역사란 각각의 시대를 통괄하는 사이클을 단면으로 잘라내어, 다른 시대의 단면들과 겹쳐 봄으로써 그 일치함을 확인하는 작업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역사는 나선형으로 전진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마키아벨리의 방법과 마찬가지로 역사를 관찰하면 당연히 그 원형 운동의 궤적이 크게 변화하지 않는 것을 관찰할 수 있지만, 그것과 반대로 역사를 종단면으로 관찰하면 - 즉, 각 시대를 통과하면서 변화한 모든 요소들을 연속선상에 놓는 방식을 사용하면 - 역사는 분명히 변화하고 있다.

 

272p. "... 도시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개별적인 선이 아니라 공동선이기 때문이다."

 

291p. "... 전쟁을 일으킨 자라면 누구든지 이익을 획득하고 유지하려는 의도를 가지며 ... 위의 지침을 따르고자 하는 자는 ... 무엇보다도 ... 전쟁의 기간을 짧게, 그리고 규모는 크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 인용자 주: 이것은 전쟁 뿐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의 내전에도 적용된다.

 

301~302pp. "... 내가 어떤 군주와 전쟁을 했으면 하는데 그 군주와 우호조약을 맺어 오랫동안 준수해온 사이라면, 그 군주를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그의 동맹국들 중 한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정의의 명분이나 다른 핑계를 쉽게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 그 군주가 분개하고 나서면 그에 대해 전쟁을 일으키고자 한 나의 의도가 실현되는 것이고, 만약 그가 분개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속국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해 그의 나약함과 신의 부족이 만천하에 폭로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 인용자 주: 전쟁을 하고자 하는 군주를 현체제, 혹은 현체제의 표상으로서의 국가로 바꿔 생각해 본다면 어떨까.

 

303p. "군주가 자신의 군대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무력을 금력이나 지형상의 유리함 또는 사람들의 선의로만 측정한다면 그는 항상 스스로를 기만하는 셈이 될 것이다."

 

308p. "...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쉽게 원조할 수 없거나 ... 그 밖의 다른 이유로 인해 무력을 사용하여 원조할 수 없는 군주와 동맹을 맺는 것은 ... 실질적인 원조를 제공하기보다는 단지 허명(虛名)을 가져다주는 데 불과하다는 점이다."

 

315p. "... 전쟁에 대비하여 무장을 하고 훈련된 인민을 거느리고 있는 군주는 강력하고 위험한 전쟁을 수행할 때 항상 자국 안에서 기다려야 ... 그러나 신민들이 무장하지도 않고 전쟁에 익숙하지도 않은 나라의 군주는 가능한 한 본국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 인용자 주: 역시 사회적 내전에도 적용된다고 본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전선을 모순이 첨예화되는 노동의 영토, 즉 현장으로 전제하거나, 아니면 적들의 심장부인 국가기구로 전제해 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 문제는 결국 우리가 얼마나 '무장'한 인민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다른 곳에서도 지속적으로 조언하고 있듯이, 결국 최종적으로 무장한 인민을 가지는 것 이외에 승리할 방법은 없다.

 

317p. "나는 원래 비천한 운명에 놓여 있는 자가 정정당당한 실력만으로 정직한 방법을 통해 위대한 권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347p. "... 공화국이 그 좁은 경계 안에 멈추어 있으면서 자유를 누리기란 불가능하다."

 

358p. "... 사람들은 널리 퍼진 자기 기만을 통해 선하다고 생각되는 어떤 사람을 추종하거나, 아니면 공공선보다는 대중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추천된 어떤 사람들을 추종하게 된다. 그러나 역경에 처하면 이런 기만은 마침내 폭로되게 마련이고, 당연히 사람들은 평온한 시기에는 거의 잊혀졌던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362p. "무릇 통치라는 것은 백성들이 당신을 해칠 수 없거나 백성들이 당신을 해치는 것을 원하지 않도록 백성들을 다루는 것에 다름 아니다."

 

393p. "인간은 운명의 구도에 따라 부딪혀 나갈 수는 있지만 그것을 파괴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인간은 아주 패배한 것처럼 체념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운명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운명 또한 구부러진 미지의 길을 따라 움직이므로, 인간은 어떠한 운명이나 어떠한 고난에 처해 있든지 항상 희망을 품어야 하고 절망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420~421pp. "... 참주의 권력을 강탈하고 나서 브루투스와 같은 자를 죽이지 않는 자나, 국가를 자유롭게 하고 나서 브루투스의 아들과 같은 자들을 죽이지 않는 자는 권력을 단지 일시적으로밖에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어떤 악이 선을 쉽사리 분쇄할 염려가 있을 때 그 선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결코 그 악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453p. "... 군주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되, 자신의 권한과 그들의 권한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또 왕국 이외에 무언가 소망할 것을 그 중간에 남겨두어야 한다."

 

458p. "... 왜 .... 자유로운 정부로부터 참주정으로의 변화와 그 역의 많은 변화들 중 어떤 것은 유혈사태를 수반하고, 또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지 ... 이는 ... 변화된 어떤 정부가 폭력에 의해 수립되었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 만약 어떤 정부가 폭력에 의해 수립되었다면, 틀림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고 생겨났을 것이며, 붕괴할 때에도 과거에 해를 입은 자들은 필연적으로 복수를 시도하고, 이러한 복수의 열망을 유혈과 죽음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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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ea: '계급'을 정치화하기(미완성)

12월 4일의 일기에 마지막으로 썼던 단상을 조금 더 발전시켜 긁적여 본다.

 

                                                                                                                                                                         

 

강막수 선생 이후 사회과학에서 계급이라는 단어를 빼고 이루어지는 논의는 거의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을 긍정하건 부정하건, 어떤 방식으로 정의하건 사회를 논함에 있어 계급을 논하지 않고서는 언제나 중대한 공백을 남기게 되었을 정도로 그 중요성은 명백해진지 오래다. 그러나 여전히도 그 정의나 개념의 이해는 불충분한 것이 사실이며, 정치적 목적을 위해 왜곡되거나 모호한 수사법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그간 Gauche 정치학은 주로 국가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 왔다. 국가가 ruling class의 executive인가, 상대적 자율성을 가졌는가, 가졌다면 얼마나 가졌는가, 현대 국가는 현대 사회의 발전과 함께 어떻게 바뀌어 가고 있는가 등등. 이러한 흐름은 현실 정치에서 국가가 가진 중요성에 기인한 것 못지 않게, 정치학의 대상, 즉 권력이라는 것이 국가로 현상한다는 근대적 시각을 공유하고 있는 것에도 크게 기인한다.

 

그러나 권력을 사회로부터 이반시켜 근대 국가기구라는 특수한 조직체에만 귀속시킬 경우 사회 전체를 총괄하는 시각에서 권력을 고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정치학은 고전적으로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value)"이라는 정의를 사용하곤 한다. 이렇게 간명한 정의를 이미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권력을 국가라는 렌즈만을 통해 고찰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가치의 배분이 언제나 국가에 의해서, 혹은 기초적으로 국가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인가?

 

가치의 배분은 일차적으로 모든 인간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활동이자, 동시에 사회 전체의 규칙에 따라 사회 전분야에서 일어난다. 이 배분에 개입하는 권위(Authority)를 묻는다면 당연히 국가 이전에 무엇보다도 사회 자체의 룰, 가장 근본이 되는 합의된 규칙에서 물어야 한다. 즉, 체제(System)가 가장 일차적인 권력의 핵이라는 점이다.

 

강막수 씨에 따르면 체제는 본질적으로 생산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그리고 이 생산관계는 가치를 수취하는 지배 계급과 가치를 생산하는 피지배 계급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생산관계가 어떠한지에 대해선 필자가 굳이 여기서 언급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 잘 아는 에 잘 나와 있다.

 

즉 권력의 핵이자 권력의 장으로서의 체제를 고찰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생산관계와 그에서 도출되는 계급이라는 얘기다. 우리는 여기서 기존의 Kapital 연구, 생산관계와 그 법칙을 경제 원리로서 연구해온 흐름에 존재한 하나의 맹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 맹점이란 바로 Kapital에서 제시된 관계와 법칙 일체는 모두 자연 법칙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강요되어 최종적으로는 합의에 이른, 인위적인 결과물이자 법적 관계라는 점이다.

 

잠깐 여기서 짚고 넘어가자. 많은 사람들은 어떠한 대상을 인위적이라고 칭하면 그 대상이 그러하다는 것을 밝히는 것만으로 자연히 사멸하거나, 자연적인 흐름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내어줄 것이라 믿는 순진한 구석을 보여주곤 한다. 하지만 여기서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모든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관계가 인위적/법적 관계이며, 여기엔 자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적인 필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법적/사회적 합의에 의해 구성된 구성물이지만, 그것은 자체적인 동력과 작동원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미 현상태로 자리잡은 이상 자족적인 생명력을 가진다.

 

약간 다른 곳으로 샜는데, 결국 정리하자면 생산관계란 경제제도가 아닌 정치적 룰이며, 계급이란 사회경제적 통계 범주가 아니라 권력 관계의 양 끝, 법적 관계의 갑과 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고찰할 때만이 비로소 권력의 근본을 파헤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재정의가 현대 사회를 이해함에 있어 어떠한 새로운 함의를 던져 주는가? 이에 대해서는 새로이 권력의 주체와 그 구성 조건, 그리고 권력의 작동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

 

근대 정치학이 모든 입장 차이를 떠나 합의할 수 있는 하나의 근본적인 발견이 있다면 그것은 권력의 주체가 언제나 집단이라는 것이다. 과거 권력이 개인의 사유물이라고 봤던 전근대적 인식과 달리, 본질적 취약성(vulnerability)에 갇혀 있는 인간 존재는 언제나 집단을 이루어 권력을 쟁취하고, 그를 통해 피지배자들에게서 지배에 대한 동의를 얻어낸다.

 

강막수 씨가 체제의 기본 구조가 생산관계에 있다고 본 이유는 바로 생산관계가 사회의 가치를 배분함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알고리즘을 형성한다고 분석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용하기 위한 물질을 생산해내기 위한 활동을 어떻게 사회화하고, 서로 어떤 관계를 맺게 할 것인가. 여기에서 계급이 발생한다. 즉 이 체계 안에서 계급이란 즉 생산 활동의 사회화 과정에 있어 자신들을 특정한 유리한 위치, 다시 말해 가치를 타인으로부터 수취해 낼 수 있는 위치에 놓고자 하며 또 놓아진 집단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권력의 고전적 정의에 비춰볼 때, 이 집단은 결국 가치를 자기 집단에게 유리하게 배분함에 있어 사회적 권위를 구성하고 강제한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권력의 주체가 된다.

 

이러한 권력의 주체가 구성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에 대해 우리는 루소로 다시 돌아가볼 필요가 있다. 루소는 인간의 정치적 결사체의 근본을 탐구하여 그 기저에 일반의지(la volonte generale)가 있다고 보았다. 일반의지는 해당 결사체를 구성하는 모든 자연적 개인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이해관계의 교집합이며, 집단적 합의와 행동을 통해서만 취득할 수 있는 이익을 성취하고자 하는 집단적 의지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필자가 과거 루소를 고찰하면서 빠뜨렸던 부분이기도 한데) 이미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엔 객관적 차원과 주관적 차원의 공존이라는 테마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루소가 '의지'라는 개념을 이유 없이 사용한 것은 아니다. 즉 일반의지는 그 집단이 가지는 이해관계의 교집합이 존재해야 한다는 객관적 차원의 조건과, 그 집단이 그것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주관적 차원의 조건을 모두 요구한다.

 

권력의 주체로서의 계급 역시 이와 마찬가지 조건을 구비했을 때 구성될 수 있다. 즉 특정한 생산관계에 근거하여 가치를 이동시킬 경우 해당 집단으로 가치가 집중된다는 객관적인 조건과, 그것을 전사회적으로 강제하고 그에 대한 동의를 얻어냄으로써 그 이익을 성취하겠다는 주관적인 조건을 모두 갖출 때 비로소 그 집단을 계급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권력의 주체가 권력을 획득하고 그것을 작동시키는 과정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계급적 일반의지가 사회적 일반의지로 환원됨을 통해 일어난다. 즉 지배 계급의 이해관계와 의지가 사회 전체적으로 피지배 대중에 의해 승인되어 그들 스스로의 이해관계와 의지로서 내면화될 때 권력은 작동하며 관철된다. 이러한 일반의지의 범위 확장 과정에도 역시 일반의지의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객관적으로 지배 계급의 권력 획득(즉, 지배 계급의 룰에 의거한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측면이 있다는 점과, 주관적으로 지배 계급이 내세우는 룰이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정의롭다는 동의가 그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안정된 사회에 계급이란 사실상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지배 계급만이 권력의 주체로서 자신들의 룰을 안정화시키고, 그에 따라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주역으로서 활동한다. 피지배 대중에겐 자신들의 룰이 없으며, 주체로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치의 배분에 참여할 수도 없다. 그들은 지배 계급의 계급적 일반의지로부터 환원된 사회적 일반의지를 수용하여 자신의 의지로 삼는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현대 사회의 체제를 이상과 같은 시각에서 고찰해 보자. 현대 사회의 체제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법적 관계는 소수의 갑이 생산수단의 독점적 소유권을 승인받아 그 조건을 활용해 다수의 을이 가진 가치(즉 노동력)을 수취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생산물을 분배해 주는 것을 골자로 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갑측의 계급적 일반의지는 즉 독점적 소유권이라는 법적 동의를 근간으로 하여 일단 사회의 총생산물을 일차적으로 자신들에게 집중시키고, 그 분배를 수행할 수 있는 권위를 독점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반면 을측의 사회적 일반의지는 그 권위를 승인함으로써 자신들이 분배받을 수 있는 생산물이 보장되고 혹은 증가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차원의 의지가 결합되어 형성된 동의에 의해 구성된 현대 사회의 법적 관계는, 이에 따라 갑측이 을측의 사회적 활동을 합법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난다. 즉 단순히 생산물의 분배 그 자체에만 지배적 권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배를 맡을 수 있다는 승인으로부터 연역되어 사회적 생산과정 전체, 즉 같은 말로 사회적 활동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이 갑측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통제는 달리 말하면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의 통제라고도 할 수 있다.(참고 - 최형익, <자본론의 정치적 해석>)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사회의 구조를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로 나누어 인식하는 것은 실제의 통합적인 성격에서 한참 엇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사회는 물질을 생산하는 하부구조와 문화를 생산하는 상부구조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재화와 생산물 전체가 하나의 계급에 의해 지배되고 통제되는 것이며 이 지배의 성격이 이원화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를 분리하여 이 사이의 결정성이나 자율성을 논하는 모든 논의는 사실상 논의를 어지럽히고 경제주의와 문화주의 양극단의 오류만을 낳아 왔다. 물질적 자원과 비물질적 자원 전체가 사회적 생산물이며, 그 사회적 생산과 분배의 전과정이 지배 계급에 의해 통제된다는 시각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사회 전반의 모든 움직임을 생산관계라는 단일한 틀 안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통합적 지배-피지배 관계의 틀 안에서 을측, 즉 피지배 대중 측은 갑측의 독점적 소유권과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승인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풍요로운 생산물을 구매하여 소유할 권리를 얻는다. 자원 전체에 대한 독점적 소유권의 대당으로서 자기 소비품의 독점적 소유권을 인정받는, 동일한 권리의 등가 교환이라는 논리를 받아들이면서 을측은 사실상 갑측의 의지를 수용하는 객체로서 존재하며, 사회적으로 갑측에 통합된 부속품으로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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