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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ea: '계급'을 정치화하기(미완성)

12월 4일의 일기에 마지막으로 썼던 단상을 조금 더 발전시켜 긁적여 본다.

 

                                                                                                                                                                         

 

강막수 선생 이후 사회과학에서 계급이라는 단어를 빼고 이루어지는 논의는 거의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을 긍정하건 부정하건, 어떤 방식으로 정의하건 사회를 논함에 있어 계급을 논하지 않고서는 언제나 중대한 공백을 남기게 되었을 정도로 그 중요성은 명백해진지 오래다. 그러나 여전히도 그 정의나 개념의 이해는 불충분한 것이 사실이며, 정치적 목적을 위해 왜곡되거나 모호한 수사법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그간 Gauche 정치학은 주로 국가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 왔다. 국가가 ruling class의 executive인가, 상대적 자율성을 가졌는가, 가졌다면 얼마나 가졌는가, 현대 국가는 현대 사회의 발전과 함께 어떻게 바뀌어 가고 있는가 등등. 이러한 흐름은 현실 정치에서 국가가 가진 중요성에 기인한 것 못지 않게, 정치학의 대상, 즉 권력이라는 것이 국가로 현상한다는 근대적 시각을 공유하고 있는 것에도 크게 기인한다.

 

그러나 권력을 사회로부터 이반시켜 근대 국가기구라는 특수한 조직체에만 귀속시킬 경우 사회 전체를 총괄하는 시각에서 권력을 고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정치학은 고전적으로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value)"이라는 정의를 사용하곤 한다. 이렇게 간명한 정의를 이미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권력을 국가라는 렌즈만을 통해 고찰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가치의 배분이 언제나 국가에 의해서, 혹은 기초적으로 국가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인가?

 

가치의 배분은 일차적으로 모든 인간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활동이자, 동시에 사회 전체의 규칙에 따라 사회 전분야에서 일어난다. 이 배분에 개입하는 권위(Authority)를 묻는다면 당연히 국가 이전에 무엇보다도 사회 자체의 룰, 가장 근본이 되는 합의된 규칙에서 물어야 한다. 즉, 체제(System)가 가장 일차적인 권력의 핵이라는 점이다.

 

강막수 씨에 따르면 체제는 본질적으로 생산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그리고 이 생산관계는 가치를 수취하는 지배 계급과 가치를 생산하는 피지배 계급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생산관계가 어떠한지에 대해선 필자가 굳이 여기서 언급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 잘 아는 에 잘 나와 있다.

 

즉 권력의 핵이자 권력의 장으로서의 체제를 고찰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생산관계와 그에서 도출되는 계급이라는 얘기다. 우리는 여기서 기존의 Kapital 연구, 생산관계와 그 법칙을 경제 원리로서 연구해온 흐름에 존재한 하나의 맹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 맹점이란 바로 Kapital에서 제시된 관계와 법칙 일체는 모두 자연 법칙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강요되어 최종적으로는 합의에 이른, 인위적인 결과물이자 법적 관계라는 점이다.

 

잠깐 여기서 짚고 넘어가자. 많은 사람들은 어떠한 대상을 인위적이라고 칭하면 그 대상이 그러하다는 것을 밝히는 것만으로 자연히 사멸하거나, 자연적인 흐름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내어줄 것이라 믿는 순진한 구석을 보여주곤 한다. 하지만 여기서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모든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관계가 인위적/법적 관계이며, 여기엔 자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적인 필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법적/사회적 합의에 의해 구성된 구성물이지만, 그것은 자체적인 동력과 작동원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미 현상태로 자리잡은 이상 자족적인 생명력을 가진다.

 

약간 다른 곳으로 샜는데, 결국 정리하자면 생산관계란 경제제도가 아닌 정치적 룰이며, 계급이란 사회경제적 통계 범주가 아니라 권력 관계의 양 끝, 법적 관계의 갑과 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고찰할 때만이 비로소 권력의 근본을 파헤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재정의가 현대 사회를 이해함에 있어 어떠한 새로운 함의를 던져 주는가? 이에 대해서는 새로이 권력의 주체와 그 구성 조건, 그리고 권력의 작동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

 

근대 정치학이 모든 입장 차이를 떠나 합의할 수 있는 하나의 근본적인 발견이 있다면 그것은 권력의 주체가 언제나 집단이라는 것이다. 과거 권력이 개인의 사유물이라고 봤던 전근대적 인식과 달리, 본질적 취약성(vulnerability)에 갇혀 있는 인간 존재는 언제나 집단을 이루어 권력을 쟁취하고, 그를 통해 피지배자들에게서 지배에 대한 동의를 얻어낸다.

 

강막수 씨가 체제의 기본 구조가 생산관계에 있다고 본 이유는 바로 생산관계가 사회의 가치를 배분함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알고리즘을 형성한다고 분석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용하기 위한 물질을 생산해내기 위한 활동을 어떻게 사회화하고, 서로 어떤 관계를 맺게 할 것인가. 여기에서 계급이 발생한다. 즉 이 체계 안에서 계급이란 즉 생산 활동의 사회화 과정에 있어 자신들을 특정한 유리한 위치, 다시 말해 가치를 타인으로부터 수취해 낼 수 있는 위치에 놓고자 하며 또 놓아진 집단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권력의 고전적 정의에 비춰볼 때, 이 집단은 결국 가치를 자기 집단에게 유리하게 배분함에 있어 사회적 권위를 구성하고 강제한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권력의 주체가 된다.

 

이러한 권력의 주체가 구성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에 대해 우리는 루소로 다시 돌아가볼 필요가 있다. 루소는 인간의 정치적 결사체의 근본을 탐구하여 그 기저에 일반의지(la volonte generale)가 있다고 보았다. 일반의지는 해당 결사체를 구성하는 모든 자연적 개인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이해관계의 교집합이며, 집단적 합의와 행동을 통해서만 취득할 수 있는 이익을 성취하고자 하는 집단적 의지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필자가 과거 루소를 고찰하면서 빠뜨렸던 부분이기도 한데) 이미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엔 객관적 차원과 주관적 차원의 공존이라는 테마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루소가 '의지'라는 개념을 이유 없이 사용한 것은 아니다. 즉 일반의지는 그 집단이 가지는 이해관계의 교집합이 존재해야 한다는 객관적 차원의 조건과, 그 집단이 그것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주관적 차원의 조건을 모두 요구한다.

 

권력의 주체로서의 계급 역시 이와 마찬가지 조건을 구비했을 때 구성될 수 있다. 즉 특정한 생산관계에 근거하여 가치를 이동시킬 경우 해당 집단으로 가치가 집중된다는 객관적인 조건과, 그것을 전사회적으로 강제하고 그에 대한 동의를 얻어냄으로써 그 이익을 성취하겠다는 주관적인 조건을 모두 갖출 때 비로소 그 집단을 계급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권력의 주체가 권력을 획득하고 그것을 작동시키는 과정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계급적 일반의지가 사회적 일반의지로 환원됨을 통해 일어난다. 즉 지배 계급의 이해관계와 의지가 사회 전체적으로 피지배 대중에 의해 승인되어 그들 스스로의 이해관계와 의지로서 내면화될 때 권력은 작동하며 관철된다. 이러한 일반의지의 범위 확장 과정에도 역시 일반의지의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객관적으로 지배 계급의 권력 획득(즉, 지배 계급의 룰에 의거한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측면이 있다는 점과, 주관적으로 지배 계급이 내세우는 룰이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정의롭다는 동의가 그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안정된 사회에 계급이란 사실상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지배 계급만이 권력의 주체로서 자신들의 룰을 안정화시키고, 그에 따라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주역으로서 활동한다. 피지배 대중에겐 자신들의 룰이 없으며, 주체로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치의 배분에 참여할 수도 없다. 그들은 지배 계급의 계급적 일반의지로부터 환원된 사회적 일반의지를 수용하여 자신의 의지로 삼는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현대 사회의 체제를 이상과 같은 시각에서 고찰해 보자. 현대 사회의 체제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법적 관계는 소수의 갑이 생산수단의 독점적 소유권을 승인받아 그 조건을 활용해 다수의 을이 가진 가치(즉 노동력)을 수취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생산물을 분배해 주는 것을 골자로 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갑측의 계급적 일반의지는 즉 독점적 소유권이라는 법적 동의를 근간으로 하여 일단 사회의 총생산물을 일차적으로 자신들에게 집중시키고, 그 분배를 수행할 수 있는 권위를 독점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반면 을측의 사회적 일반의지는 그 권위를 승인함으로써 자신들이 분배받을 수 있는 생산물이 보장되고 혹은 증가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차원의 의지가 결합되어 형성된 동의에 의해 구성된 현대 사회의 법적 관계는, 이에 따라 갑측이 을측의 사회적 활동을 합법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난다. 즉 단순히 생산물의 분배 그 자체에만 지배적 권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배를 맡을 수 있다는 승인으로부터 연역되어 사회적 생산과정 전체, 즉 같은 말로 사회적 활동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이 갑측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통제는 달리 말하면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의 통제라고도 할 수 있다.(참고 - 최형익, <자본론의 정치적 해석>)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사회의 구조를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로 나누어 인식하는 것은 실제의 통합적인 성격에서 한참 엇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사회는 물질을 생산하는 하부구조와 문화를 생산하는 상부구조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재화와 생산물 전체가 하나의 계급에 의해 지배되고 통제되는 것이며 이 지배의 성격이 이원화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를 분리하여 이 사이의 결정성이나 자율성을 논하는 모든 논의는 사실상 논의를 어지럽히고 경제주의와 문화주의 양극단의 오류만을 낳아 왔다. 물질적 자원과 비물질적 자원 전체가 사회적 생산물이며, 그 사회적 생산과 분배의 전과정이 지배 계급에 의해 통제된다는 시각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사회 전반의 모든 움직임을 생산관계라는 단일한 틀 안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통합적 지배-피지배 관계의 틀 안에서 을측, 즉 피지배 대중 측은 갑측의 독점적 소유권과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승인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풍요로운 생산물을 구매하여 소유할 권리를 얻는다. 자원 전체에 대한 독점적 소유권의 대당으로서 자기 소비품의 독점적 소유권을 인정받는, 동일한 권리의 등가 교환이라는 논리를 받아들이면서 을측은 사실상 갑측의 의지를 수용하는 객체로서 존재하며, 사회적으로 갑측에 통합된 부속품으로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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