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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화와 침묵

지난 4년간 나는 무수히 많은 말들을 해왔다. 때로는 발언의 형태로, 때로는 논증의 형태로, 때로는 글의 형태로 끊임없이 내가 옳다고 여기는 원칙들과 결론들에 대해 언급해 왔다. 그 과정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포함되는 나의 작은 오만을 용서하시라) 내가 발화에 특출난 재능이 있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 얻은 자신감은 보다 더 많은 발화를 생산해 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침묵이 찾아왔다.

 

단순히, 학생운동에서 물러나왔기 때문에 이 침묵이 찾아왔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나는 학생회에 대해 과히 적대적이기까지 했던 어린 시절에도 많은 발화를 했었기 때문이다. 현실에 대해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언급을 더 이상 하지 못하고,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만, 그나마 질의에 대한 반작용으로서만 말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꽤나 거북한 일이었다. 글을 써보라는 요구도 몇 번씩 마주쳤고, 나 자신도 글을 토해내야 한다는 욕구로 가득차 있었지만 어떠한 글도 써지지 않았고 나는 조금씩 백지가 무서워졌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나는 결론을 내렸다. 2007년 1학기에 제출된, 26대 관악 사회대 학생회의 총론을 작성함을 통해 나는 내 안에 있던 발화의 재료를 모두 소진해 버렸던 것이다. 나는 이 결론을 최근 몇 명의 믿을 수 있는 친우들과 조심스레 공유했고, 친우들은 그 결론이 타당함을 확인해 주었다.

 

일상 속에서 스쳐 지나가 내가 그런 말을 했었던가 하게 될 짧은 무의미들이 아닌, 뭔가 자기 자신을 온전히 실어 형태화시키고 싶어하는, 본질적으로 자기과시적인 발화의 작업을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재료가 필요하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현실과의 접촉면에서 빨아들인 무수한 경험들과, 인간이라는 군집체가 집단적 지성을 유지해나가는 수단으로서의 독서를 통해 취득한 지식과, 그 삼자를 하나의 체계로 구성하기 위해 땜질과 망치질을 반복하는 사고과정. 이 모든 것들이 갖춰진 이후에야 사람은 더듬더듬 입을 열 수 있게 된다. 이 재료들의 종합의 결과로서 제시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문제화(problematization).

 

학생운동이라는 좁은 지평에 서서 모든 문제를 사고할 수밖에 없었던 나에게(그것은 내가 사회적 지평을 모르거나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나에게 허락된 행동의 지평이 그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학생운동의 논리와 원칙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내놓은 후 모든 문제화가 사라지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조금 늦게 깨달았을 뿐이다. 내가 나의 침묵을 깨고 싶어 몸부림칠때마다 언제나 그 글로 돌아가고 그 글을 다시 읽었던 것은 단순히 나의 가장 찬란한 결과물을 보며 과거를 떠올리는 수음행위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직감적으로 나의 문제화가 사라진 지점을 파헤쳐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한 인간의 문제화가 완전히 소진되기에는 너무나도 왜소한 종착점이었다. 그러나 그 종착점이 그토록 왜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나의 문제화 자체가, 그 문제화를 구성하는 삶과 경험과 지식과 사고과정 모두가 왜소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의 왜소함을 놓고 보다 거대한 문제화들과 비교해 가며 내 과거를 평가절하하느니, 나는 내가 내게 주어진 재료들을 큰 낭비 없이 적절한 결과물로 만들어 내는 능력 정도는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 만족하기로 결정했다.

 

한 친우는 내게 오만하다고 평했다. 나 자신의 지성이 완벽하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문제화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평가를 검토한 결과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핵심에서 빗겨나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물론 나는 오만했다. 그러나 그 오만함은 내가 완벽하다는 자의식이라기보단, 내가 지금까지 쌓아올려온 문제화의 재료들이 앞으로의 문제화를 위해서도 충분할 것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불충분한 경험과 불충분한 지식이나마 그걸 갖고 새로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다는 점이다. 틀렸다. 나는 스물셋에 하나의 선을 그었고, 그 앞으로 돌진하기 위해선 새로운 연료가 필요하다.

 

여기까지 자인하고 나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이상의 논점들을 모르고 있었을 때, 나는 나의 침묵이 매우 불편하고 부끄러웠다. 평생을 발화해왔고 또 발화로써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증명해 온 자가 갑자기 침묵에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은, 존재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썩어가는 과정의 도입부로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저 새로운 충전을 필요로 했을 뿐이다. 내게 잘못이 있다면 빨간불을 빛내는 연료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밖에 없으며, 기름을 다 넣기 전까지는 어쨌든 멈춰있을 수밖에 없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 침묵에서 벗어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지난번의 왜소했던 문제화보다는 그래도 조금은 더 큰 문제화를 위해선, 지난번의 재료들보다 그래도 조금은 더 많은 재료가 필요할 것 같아서이다. 그러나 그 재료들을 채워나가기 위한 행동이라는 원칙에 초점을 맞추고 앞으로의 시간들을 구상할 수 있다는 것이, 지금껏 혼란에 빠져 방황하던 시절보다는 훨씬 나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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