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정세에 대한 단상

1.

 

현재의 정세를 살펴 보면서 스스로의 지성에 심각한 회의를 느끼고 있다. 요새 계속 누군가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처럼, 나는 대중의 역동성과 자발성을 따라가기에 급급하고 뒤처지지 않기 벅찬 정도의 수준밖에는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성명서를 준비하자는 깽의 제안을 수락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글은 역시나 나오지 않았다. 통찰과 고민이 일천한 데에다 글빨만 세우려고 해봤자 영혼의 글쓰기가 나오겠는가? 학생회실에서 자판을 두드리다 술 한 잔 하고 늦은 시간 귀가하면서, 담배 한 대 빼어물고 x같은 세상 왜 이리 살기 힘드나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2.

 

그러나 대중의 역동성과 자발성이 터져 나오는 시점에 어떤 "예측"이나 "전망"은, 원래 소용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그런 것을 이룬 사람이나 세력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왜냐면 대중의 역동성이란 그것이 먹물들의 머리로는 따라잡기 힘들만큼 급격한 상황변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상식적으로는 예측할 수 없었던 시점과 계기에 의해 마찬가지로 급격한 후퇴를 보여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1992년 강경대 열사정국 때와 같이, 사람이 죽은 것에 분노하여 정권퇴진에 박수치던 대중이 교육부 장관이 계란 맞은 것에도 똑같이 분노하여 운동권 꺼져를 외칠 수도 있게 된단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런 지점들을 현재의 정국에 대한 회의주의의 변명 혹은 근거로 사용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역동성에 내재된 불확실성을 보다 명확한 자기이해와 장기적인 전망으로 이끌 수 있는, 실질적인 지도력의 행사이다. 이 지도력이라는 것을 무슨 갑시다 빠집시다 외치는 대오 지도 정도로나 조야하게 생각했던 다함께는 응분의 대가를 치루고 있는 것 같더라.

 

결국 역동성에 대한 지도력의 행사와 개입이란, 1905년의 트로츠키와 1917년의 레닌처럼, 역동성이 터져 나오는 시기에 적합한 구호와 요구사항, 전망과 계획을 제출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대중들을 결집시키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제출된 전망은 그 자체로써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발적으로 이합집산하는 대중들에 의해 '선택'될 수 있을 뿐이다.

 

 

3.

 

그렇다면 이 시기 혁명적 공산주의자가 제출해야 할 전망이란 무엇인가? 이 정국의 긍정성에 무한한 지지를 보낼지라도, 어쨌든 이 정국은 혁명적 투쟁으로, 계급투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질적으로 다른 상황인 것이다. 이 다른 상황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그에 맞춘 계획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 정국을 이용하여 각 현장에서 노동자 대중에 대한 정치선동을 강화해 나가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역동성이 터져나오는 시기엔 가장 후진적인 사람도 정치적으로 민감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는 분명히 적합한 계획이며, 중단기적으로는 현 정국에 대한 정치적 대중파업(룩셈부르크의 맥락에서)의 선동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무엇보다도 이 역동성 자체를 이끌어 간다기보다는, 이 역동성이 가져오는 제반 효과들에 올라타서 기존에 해 오던 일을 단순히 강화한다는 의미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든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필요한 것은 지금 거리로 뛰쳐나오는 저 무정형의 '시민'(citoeyen)들에게 무엇을 선전 선동할 것인가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먼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정권퇴진 운동이다. 인민주권의 행사에 있어서 최종 단계는 불복종하는 폭군을 강제로 끌어내리는 것이라는 점은, 이미 모든 사람에게 널리 알려져 버린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 대한 이해를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혹여나 성공했을 시 찾아올 정치적 공백 상태와 대중적 자신감의 고양이 맞물린 상황에서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의 운신의 폭은 넓어졌으면 넓어졌지 좁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정권퇴진 운동은 개량주의자들이나 불명확한 정치세력에서도, 심지어 민주당 같은 부르주아 야당에서도 레토릭상으로나마 나오고 있는 얘기인데 이것을 어떻게 혁명적 공산주의자가 함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방법론 차원에서 보다 명확하고 현실적인 계획을 제출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가두시위만을 통해서는, 현 상태에서 정권퇴진의 성사는 불가능하다. 실질적인 힘의 행사가 존재해야만 한다. 결국 정치적 대중파업의 필요성이 다시 한 번 여기서 제기되는 것이다. 현장에서 만나는 노동자들이나 조직대중에 대한 경직된 집착을 버리고(물론 이들에 대한 중심성의 유지는 필요하겠지만), 현재 거리로 나오고 있는 무정형의 대중들에게 직접적으로 대중파업을 선동해야 한다. 물론 이미 6월 10일 동맹휴업과 총파업에 대한 선동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 방법론의 목표로서 정권퇴진을 명확히 하고 이것이 한시적인 하루 일정이 아닌 목표를 향한 일반적 방법이어야 함을 역설함을 통해서 하나의 전망을 내놓을 수 있다고 본다.

 

 

4.

 

앞으로의 정국은 정말로 오리무중이다. 정부가 어떤 시점에서 발을 뺄지도 모르고, 대중이 어떤 시점에서 지칠지도 모른다. 어떤 계기로 인해 정말로 투쟁이 급진화/과격화될 가능성도 없다고 할 수 없으며, 현재의 역관계 때문에 살짝 숨죽이고 있는 보수적 대중집단이 어떤 계기로 전면에 나서게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러나 현재의 정세가 어떻게 마무리되던간에,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2008년 봄에 한국의 민중들은 유례없는 자기교육과 집단지성의 발전을 경험했다. 시민들은 거리에서 스스로 소통하고 싸우며 세상의 진실들을 깨닫는 과정을 체험했고, 무언가 다른 얘기를 듣고 그것에 대해 숙고함을 통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체득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삐라와 찌라시를 집어가고 그것을 숙독하며, 누군가가 하는 말이 왜 조리에 맞지 않는가를 서로 얘기하면서 검토할 수 있게 되었다.

 

대규모로 벌어지는 긍정적 대중행동에 항상 부산물-혹은 핵심-처럼 따라오는 이 집단지성의 발전은, 당장의 정세가 어떻게 정리되더라도 장기적으로 분명 엄청난 자산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특히 이 정세에 격발쇠를 당길 정도의 순수함을 가지면서, 이러한 미증유의 체험을 오롯이 가져갈 현재의 10대들이 앞으로 이것을 어떻게 이용해갈 수 있을지는 사뭇 기대되는 부분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치학의 The Issue - 인민권력의 제도화

a issue가 아니라 The Issue. 그러니까 다양한 문제 중에 하나가 아니라 한 가지 핵심을 이루는 절대적 문제라는 얘기.

 

혁명사와 루소, 맑스, 레닌, 로자, 그람시를 거슬러 올라가며 정치학도로서 귀결된 하나의 결론 - 정치학은 현상을 서술하는 학문일 수 없다. 현상을 어떻게 더 정교하게 묘사할 것인가에 집착하는 현대의 주류 정치과학자들마저도, 자신들의 묘사를 토대로 현실 정치에 한 마디 하는 것을 사명쯤으로 생각하는 마당이다. 결국 정치라는 것 자체가 - the political 자체가 - 인간의 주체적 활동이며 현재적 운동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의 동학(動學)이며 변화에 대한 개입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근대정치가 태동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정치에 대한 담론적 접근의 대전제는 결국 하나였다. 어떻게 더 많은 사람의 복리를 더 많은 사람의 결정권 하에서 추구할 것인가. 즉 다시 말해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는 식상하지만 간명한 정치의 정의 속에서 볼 때, 권위를 보다 넓게 그리고 배분을 보다 많이 해내는 것이 좌우를 막론한 모든 근대정치 이론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인식에는 결국 하나의 아이디어가 깔려 있다 - 인민주권. 즉 권력이라는 것이 단순히 한 개인 혹은 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의해 창출되고 재생산되는 것이라는 인식. 이것은 인민이 주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인민주권 뿐 아니라, 결국 절대군주조차도 공동체 전체의 재가(그것이 비록 최초의, 단 한 번의 재가일 뿐일지라도)에 의해서만 성립 가능하다고 주장한 홉스적 의미에까지 확장될 수 있다. 즉 근대정치 담론의 가장 위대한 대전제는 권력이 집단의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결국 하나의 The Issue가 제출된다. 이 집단의 것인 권력을 어떻게 집단 내에 정착시킬 것인가? 어떻게 그 실행과 출현, 작동과 사멸을 우연적인 계기들이 아닌 인간의 의식적 통제 하에 놓을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 제출되지 않는다면 정치에 대한 모든 언급은 한낱 헛소리로 변한다. 주사위의 눈이 다음번에 무엇이 나올 것인가에 대해 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요소들에 대한 해명이 소전제로서 필요해진다. 첫째로 인민이 권력을 가진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에 대해서, 둘째로 권력이 안정적으로 재생산되기 위한 준거와 그것이 재생산되고 있다는 표현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셋째로 우리가 권력을 통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에 대해서.

 

이에 대해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이렇게 해명한다. 첫째, 인민이 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투표권을 가진다는 것이다. 둘째, 권력이 안정적으로 재생산되기 위한 준거는 법치이며 그것이 재생산되고 있다는 표현은 평화적이고 주기적인 정권교체이다. 셋째, 우리가 권력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것은 국민의 후생복리 증진과 대외 안보이다.

 

루소는 이렇게 해명한다. 첫째, 인민이 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정치체의 모든 행위가 일반의지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둘째, 권력이 안정적으로 재생산되기 위한 준거는 정기적인 집회이며 그것이 재생산되고 있다는 표현은 인민에 의한 주기적인 헌법 재가이다. 셋째, 우리가 권력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것은 국가의 공동선 추구이다.

 

맑스는 이렇게 해명한다. 첫째, 인민이 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을 타도한다는 것이다. 둘째, 권력이 안정적으로 재생산되기 위한 준거는 생산력의 발전이며 그것이 재생산되고 있다는 표현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셋째, 우리가 권력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것은 계급지배의 철폐와 국가의 사멸이다.

 

뭐 이런 식인 셈인데(쓸데없이 예를 너무 많이 들었다),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논의들은 여전히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속류적 인식은 차치하고서라도, 루소의 경우 국가를 윤리적 대상으로 삼아 정치와 윤리를 통합하는 계몽주의 시대의 한계적 오류를 범했고, 맑스의 경우 실제로 저러한 해명에 대해 명확하고 체계적인 이해를 제공하지 않는다. 레닌이 그 빈 자리를 메꿔 써내려갔으나 여전히도 국가주의적 한계에 노출되어 있고, 그람시의 경우 보다 통합적인 이해를 시도했으나 그 저술이 가진 본원적 한계 때문에 너무 모호하다.

 

결국 정치학은 여전히도 The Issue에 대한 해명을 시도해야 한다. 권력이란 무엇이며, 인민이 그것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정착시키고 제도화시킨다는 것은 어떻게 성립 가능한가? 이것은 종국적으로 사회 전체의 변혁 프로젝트와 연결되며, 과정과 목표 양편에서 체계적이고 사려깊게 정리되어야만 한다. 파편적으로 산개해 존재하는 주먹구구식의 이해들을 종합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와서, 인민권력의 제도화 -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어쨌든 자신이 공부하는 학문에서 평생을 바쳐도 답을 내리기 힘들 듯한 과제를 발견하는 것은 절망적이면서도 동시에 고무적인 일임에는 틀림없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민중의 머릿수는 권력인가 무력(無力)인가

내 대학생활에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때가 있었다. 내가 새내기였던 시절, 이라크에서 김선일 씨가 돌아가셨을 때다. 얼치기 사회주의자였던 나는 대정부투쟁이 필요하다고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고, 그 전까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피해다니던 학생회 선배들과 함께 거의 매일같이 광화문 앞에 나갔다.

 

광화문에선 소위 '국민적 분노'가 표출되고 있었다. 아이들 손을 잡고 나온 평범한 사무직 가정부터, 발랄하기 그지 없는 청소년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김선일 씨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그것을 방치한 정부를 비난했다. 그러나 광화문 촛불집회는 지리했다. 주최측은 연일 반미구호를 내세울 것이냐 시민들의 눈높이에서 도덕적인 구호만을 내세울 것이냐를 놓고 싸우는 듯 했고, 그나마 급진적 학생들의 돌파전술을 지원하기는커녕 무마시키기에만 바빴다. 매일같이 저녁에 청승맞게 촛불이나 쥐고 앉아 앞에서 아침이슬, 광야에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등을 반복적으로 불러대는 모습이나 구경하고 있어야 했다. 당시 비운동권이었던 관악 총학생회는 자신들이 비운동권이지만 책임있는 사회의식을 가졌음을 보이고 싶었는지 3보1배를 벌이지만, 광화문은커녕 봉천고개를 넘지도 못하고 경찰의 봉쇄 앞에 그냥 엎드려 있었다.

 

'국민적 분노'는 그랬다. '대중이 나섰다'는 말은 내겐 상투어에 불과했다. 같은 해 봄에 있었던 탄핵정국과 여름의 파병반대 정국, 그 이전의 2003년 열사정국 등을 기억하며 나는 대중과 조직, 개량과 변혁, 권력의 가능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었더랬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국민적 분노'는 터져나왔다. 그 귀한 소고기 먹고 죽을지도 모른다니 이 어찌 아니 걱정되겠는가. 그들이 광장으로 나왔고, 세간에선 또 국민의 힘이니 대중의 권력이니를 떠들어 대고 있다.

 

그러나 나는 묻는다. 단 한 번이라도 무정형의 대중들이 내세우는 혼란스러운 - 대체로 자기이해조차 결여된 - 무정형의 목소리가 권력을 가졌던 적이 있느냐고. 단 한 번이라도 체계적인 이해를 가진 결집된 세력이 명확한 조직적 계급과 함께 투쟁하지 않고서 변혁이 일어났던 적이 있느냐고. 그것이 내가 저 한 명의 순진한 '대중'의 말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대중의 머릿수는 권력이 아니라 무력(無力)이다.

 

p.s. 그러나 또 다시... "체계적인 이해를 가진 결집된 세력이 명확한 조직적 계급과 함께"라는 말을 들으며 '그래 나다!'라고 말할 세력은 많고도 많지만, 그 가운데 과연 누가 저 말에 정말 어울릴지. 체계적인 이해도 같지 못하고 결집되지도 않았으며 명확한 조직적 계급과 함께하지도 않는 자들이 명망가 한둘 TV 카메라에 좀 나온다고 깝치는 건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나름의 체계적인 이해는 갖고 있으나 조직적 계급과 함께하지 않는 자들, 명확한 조직적 계급과 함께하지만 체계적인 이해가 부족한 자들, 양쪽 모두 갖췄지만 그 양적인 측면에서 자격 미달인 자들... 그래서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단순한 동조자는 오늘도 그저 술병이나 까는 수밖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