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2005.1.15.]자본주의 사회구성체 단상

좌파이론의 꽃은 역시 누가 뭐래도 사회구성체론이 아닐까 한다. 비록 80년대에 꽃피었던 한국 사회구성체 논쟁은 그 고도의 추상성이 구체성을 결여한 채 이루어짐으로써 많은 오류를 낳았다고 평가되기도 하지만, 과학적 좌파의 변혁전략은 엄밀한 사회구성체 분석에 근거하여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오늘 <현대한국정치>의 손호철 씨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손호철 씨 자체는 믿을만하지 못하지만 =_=;;



특정 형태의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 조응하는 상부구조론으로서의 국가론 연구와, 사회구성체론과 모순론이 변증법적으로 통합된 체계적 변혁론 연구가 참 절실히 필요하지 않나 싶다. 물론 현재 세계의 위기는 이론적 위기라기보단 정치적 위기라고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지배계급의 지배동학과 그에 대한 유효한 균열지점의 비전이 보이지 않는 '총체적 불안정'의 시대에 파편화되고 방향 못 잡는 저항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리플라이 세미나 커리에 있던 셰네의 글에서 '위기적 축적체제'라는 개념을 발견했다. 정확히 셰네에 의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엄밀하게 근거가 있는지 같은 것들은 잘 모르겠지만, 무지 인상깊었다.

내가 불평했던 이 시대의 '정신강박증'은 어쩌면 그런 사회구성체론에 입각하여 그 연원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폭발하지 않고 장기지속되는 위기는 이제 더 이상 체제의 위기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체제가 되었다. 축적체제이자 지배체제로서의 위기는 민중들에게 총체적 불안정화를 강요함으로써 지배계급에게 안정적인 축적과 지배의 재생산을 보장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적 축적체제, '위기적 자본주의'는 최고도의 자본 물신화 단계에 도달한 투기적 금융자본을 지배계급 내의 헤게모니분파로 두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런 사회구성체에 조응하는 국가 상부구조는 전면적으로 대두되고 있는 경쟁적 생산국가기구라고 할 수 있다.

(현대자본주의의 복잡한 제조건들에 대한 분석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단순하고 추상적인 감상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떠오르는 것들을 정리하고 더 공부해 나가다 보면 좋은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이런 식의 통합적인 사회구성체론과 그로부터 도출하는 국가론 연구는 그러한 지배체제의 계급권력기반과 그에 따른 사회적 역관계의 동학에 관한 정치권력론, 정치과정론적인 엄밀한 이론화를 통한 구체에서 추상으로의 하향을 거쳐, 현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형태의 지배와 저항의 실제로 검증받고 구체적인 계급투쟁의 조건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향으로 완성되어야 할 것이다.

 

재미있다. 정치학에서 뭘 공부해야 할 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1.6.]머리로만 생각할게 아니다

요즘같이 저 제목같은 말이 범람하는 시대가 또 있었는지?

난 한 번쯤 묻고 싶다.

그 머리로라도, 정말 고통스러울 정도로 치열하게 생각해 본 적은 있냐고 말이다.

'차가운 이성' 운운하면서 소위 따스함과 인간성을 논하는 사람들은,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이성의 거미줄이 얼만큼의 책임감을 지우며 얼만큼의 자기부정을 강제하는지 아느냐고 말이다.

극한으로 차가운 드라이아이스는 화상을 입힌다고 하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4.12.24.]전쟁과 정치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 클라우제비츠

뒤집어 말하면, 정치는 전쟁의 최소이다.

나는 저항이 '놀이'라는 시각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까지 마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전쟁과 같은 민중에게 저항은 그 삶의 극단, 전쟁의 극단이다. 저항은, 그러한 시각이 어떤 과오를 불러왔대도, 명백히도 전쟁이다.

저항은 전복의 정치다. 그 점은 전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저항은, 삶과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는 전면적인 전복의 정치이며 계급의 투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쟁의 최소, 즉 그 연장형태의 최소라는 규정을 피할 수 없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