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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4.]시대단상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냉전으로 점철된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로 명명한다. 극단의 시대라... 그럴지도.

그에 비하면,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태어난 새천년, 21세기는 권태롭기 짝이 없다. 아니, 그 권태롭다는 것이 분명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목가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21세기 지금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고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나가야만 하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 권태는, 뭘까.



난 20세기를 '정신분열증의 시대'라고 부르면 어떨까 싶다. 유례없는 대량살상을 가져온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 전세계를 뒤덮은 이념갈등, 핵전쟁의 위협, 환경위기...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고 극단적인 불안정 상태를 보이는, 정신분열증. 그에 반해 21세기는, 이를테면 '정신강박증의 시대'다.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여섯 방향에서 벽이 거리를 좁혀오는, 숨막히는 강박증의 시대.

세계엔 장발장과 같은 살인적인 빈곤도, 햄릿과 같은 비극적인 절망도,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작렬하는 분노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간혹 그런 것이 있더라도 예외에 불과하다. 그러한 '극'들은 스필버그와 루카스의 스크린 속으로, '극장' 속으로 후퇴해 버린 지 오래다. 사람들은 치열하지만 무료하게, 비참하지만 권태롭게 하루하루를 받아들일 뿐. 그들을 둘러싼 벽과 천장이 서서히 공간을 좁히며 다가오는데도 권태에 젖어있는 그들은, 숨막히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몇몇 '민감한' 자들이 좁혀오는 벽을 발견했을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있는 힘껏 비명을 지르는 것 뿐. 뇌를 꾹 누르는 것 같은 강박감을 받아보았는가. 하지만 비명을 지르는 자들은, 우리가 1세기 동안 겪었던 정신분열증 환자의 하나로 여겨질 뿐이다.

이 강박증의 시대에 사람들은 더더욱 강박적으로 '즐거움'에 집착한다. 그 즐거움은 어떤 것이라도 좋다. 이 권태 속에서 스스로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줄 것이라면야. 하지만 사람들은 또한 즐거움에만 빠져 있지 않을 수 있는 법을 안다. 그들은 현명하게 즐거움을 절제하고 다시 권태로 돌아와, 강박적으로 강요되는 일상을 영유한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고 있는 강박증은, 바로 그 좁혀 들어오는 살인큐브 안이 '당연해야 한다'는 강박이다. 그 큐브를 벗어나는 것은 정신분열증의 재현이기 때문에. 정신분열증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이 뇌는 강박적으로 자신의 안정성을 고수한다. 그리고 그것은 강박증이기 때문에, 반박할 수는 없지만 숨막히는 일이다.

누군가, 파열구를 내지 않으면 곤란하다.

하지만 나는 비명지르는 것이 고작이다.

오히려, 강박증에 걸린 것은 시대가 아니라 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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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4.]근대와 자본의 정치학에 대한 소고

근대가 열어제낀 정치는 권리의 정치이다.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권리(rights)의 개념은 근대 특유의 것임에 틀림없다. 영국의 근대를 잉태시킨 유명한 문서가 권리장전(The Bill of Rights)이고, 프랑스대혁명의 이념적 기치였던 것이 인권선언이었던 것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의 권리란 인간인 이상 당연히 보장되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이런건 노골적인 계급사회인 고대나 중세사회엔 없다. 근대는 부르주아의 주도 아래 이러한 보편적 권리 개념을 최초로 던져줬다.


지배는 언제나 피지배자의 소극적/적극적 동의가 있어야만 성립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다. 그런데 이 이데올로기는 허구적이기만 한 것이어서는 동의를 얻어낼 수 없다. 그것은 반드시 피지배자에게 이익이 될 무언가를 담고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지배자는 피지배자에게 이것을 완전히 보장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바로 이 지점이 이데올로기의 '가장 약한 고리'다.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피지배자는 그 이데올로기의 가장 약한 고리를 치고 나가며 지배의 외부로 나아간다.

즉 근대가 던져준 '권리'라는 이데올로기 역시 이러한 원리에 입각해 있다는 것이다. 자본의 사적 소유권으로 대표되는 '보편적 권리'는 실제로는 백인 남성 자본가의 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그러나 그것이 던져준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그 무엇'이라는 개념은 피지배자들의 저항이 치고 나갈 수 있는 가장 약한 고리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자본의 권리에 저항한 노동의 권리들을 말하며, 유색인종은 백인의 권리에 저항한 권리를 말하며, 여성들은 남성의 권리에 저항한 권리를 말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부각된 '권리의 정치(the politics of rights)'는 그 이전의 전통적인 정치의 양상, 즉 '권력의 정치(the politics of power)'와 연계된다. 왜냐하면 권리란 권력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관철될 수 없기 때문이다. 권력 없는 권리란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에 기반하지 않은 권리구호는 기존에 존재하던 권력에 영합함으로써 스스로의 권리를 관철시키려 하게 되고, 이것은 종국적으로 권리 그 자체의 변질로 이어진다.

권리와 권력의 개념 혼동은 큰 오류를 불러온다. 사회 전반에 침투하고 관철되는 것은 자본의 권리이고, 그것이 관철될 수 있게 하는 것이 자본과 국가의 권력이다. 억압이란 하나의 권력이 다른 권력에 선행하여 '보편화'되어 관철되는 것이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현실적인 힘이다. 권리란 개념이고 현상형태이며 유령이다. 이 유령에 대한 허공의 노성은 박력만 있는 허장성세이다. 권리를 마땅히 실현되어야 할 일반적 가치라고 할 때 권력이란 그것을 독점화시킨 상품가치, 즉 화폐라고도 볼 수 있다.

자본의 권리는 국민국가체제의 권력에 의해 관철된다. 사적 소유권을 '보편적 권리'로 인정하고 그것을 보호하는 권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시키는 체제로서의 국민국가는 자본의 성장과 함께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에 저항하는 일체의 움직임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합법적 폭력의 독점체'로서 기능한다. 근대 이전의 권력이 폭력을 중앙집중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국가와 사회의 분리를 통한 권력의 독점은 화폐에의 '일반적 가치실현의 가능성'의 독점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권리정치 영역에서의 '가장 약한 고리'는 반드시 권력정치 영역에서의 '가장 약한 고리'와 겹쳐져야만 한다. 그것이 교차되는 곳에서 계급지배를 전복시킬 가능성이 살아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계급지배가 관철되는 영역 내부에서의 권력의 충돌로써 지배영역 외부로의 권리 관철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인 것이다. <자본>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권리정치 영역에서 자본가 계급의 권리관철의 가장 약한 고리, 즉 그것이 절대로 충족시켜줄 수 없는 피지배자들의 권리들을 밝혀냈고 그것을 권력정치 영역에서의 현실적인 힘, 가장 약한 고리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세력과 교차시킨 것이다. 그 현실적인 힘은 - 두 말할것도 없이 노동계급이다.

...아직 정리된 생각은 이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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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홈피, 2004. 10. 1.

오늘부터 일기를 좀 써야지. 근데 왜 일기를 아침시간에 쓰게 되는건지 -_-;; 내 생활패턴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버엉)

오늘 새 마음으로 홈피 새단장을 했다. 이딴 수단으로 새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는 꼴이 우습다면 우습지만 -_-;; 어쨌든 중요한건 새 마음을 가다듬었다는 사실인 거다!! 그렇게 믿는거다 -_-;;



이성, 아우슈비츠를 불러왔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며 이제는 더 이상 믿을만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 것. 아니, 그렇게 믿는 것이 유행이 되어버린 것이랄까. 뭐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그럼 히틀러에 열광하던 사람들은 졸라 이성적이었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게냐.

상대성, 리좀, 탈중심, 탈권위, 해체 등등의 셀수없이 많은 말장난들에 의해 난도질당하고 또 거기서 유행과 공감을 얻을 수 있게 한 이 이성이라는 거, 나도 많이 부정하고 살았다. 입으로 진보 사관을 나불거리면서도 나의 역사관은 진보 사관이 아니에요 하고 발뺌도 해봤고. 한때 푸코와 장자에 미쳐 살던 내가 스스로를 모더니스트라고 칭할 날이 올 줄이야, 하 참.

사실 이성과 감성, 합리와 비합리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어차피 똑같이 뇌의 작용 아닌가. 합리는 비합리에 의해 영향받고 비합리는 합리로 치장되기도 하는 것을. 이것은 거꾸로 뒤집으면 이성에 대한 비이성적 마녀사냥을 굳이 정당화할 수 있는 계제도 없다는 말이 될뿐이다.

얼마나 무수한 인간군상들이 인간의 비합리성과 악한 본성을 논하며 진보를 부정하고 현상태를 정당화했던가. 어차피 그런 것이니 그 속에서 최적의 전략을 찾으라... 언뜻 솔깃하게 들리는 이 레파토리는 사실, 세상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구호 아래 세상을 바꾼 사람들의 집단이 50년만 지나면 채택하곤 하던 레파토리다.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 속에 행복한 천년 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던 중세의 창시자들은 50년만 지나면 인간의 원죄를 강조하기 시작하고, 인간 이성의 승리와 진보를 부르짖던 부르주아들은 50년만 지나면 이성의 한계와 역사의 종말을 논하기 시작한다.

물론 보편적 이성 같은 건 존재하지도, 존재할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비합리에 대한 어떤 변명이 된다는거냐. 오히려 이성의 한계를 이성을 통해 명확히 알고, 인간이 어떤 한계선에서 어떻게 돌변할수밖에 없는가를 밝게 아는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대략 리뉴얼에 대한 변명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스트에서 모더니스트로 선회하는 나 자신의 궤적을 보노라면, 즉 직관과 의지를 찬양하던 내가 이성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언젠간 시장도 찬양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_-

그렇게 되지 않도록 나 자신의 한계와 존재를 더 밝게 아는 것이 중요하겠지. 그러니까, 이성의 횃불을 들고 해방을 향한 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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