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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19.]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그렇게 보고 싶던 영화를 드디어 오늘 봤다. 체 게바라의 일생에 대해서 그닥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감동, 감동.

한 가지 의문나는 점. 왜 제목이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일까? 맨 처음 타고 간 오토바이는 여행이 반도 채 끝나기 전에 망가져서 버린다. 오토바이보다는 다른 교통수단-이를테면 히치하이크, 튼튼한 두 다리-을 더 많이 사용한다. 이건 완전 농간 ㅋ

젊은 의학도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와 30살 생일을 앞두고 있는 생화학자 알베르토 그라나도의 남미대륙횡단여행은, 평범하다면 평범하지만 전혀 평범할 수 없는 여행이었다. 책으로만 접하던 대륙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 젊은 게바라에게 모든 것은 충격으로 다가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충격이, 사르트르가 "우리 세기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칭했던, 혁명가 체 게바라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들의 여행은 젊은이들의 여행답게 유쾌했다. 하지만 대륙 전체에 드리워져 있는 불의의 그림자를 발견하기란, 젊은 그들이기에 더욱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나이든 원주민들의 주름진 얼굴, 살던 땅에서 쫓겨와 비인간적인 불법 광산노동자로 일해야만 하게 된 공산당원, 호화로운 배 뒤에 줄로 매여진 쪽배에 따로 탄 가난한 사람들, 사람들의 편견과 빈곤 속에 격리된 나환자들, 이 모든 이들이 게바라의 젊은 감성을 자극한다.

이 영화를 본 내 최고의 수확은 명대사다. 나환자촌에서, 수술받기를 거부하는 환자를 만난 게바라. 평소 천식에 시달리는 그가 쿨럭거리자 환자가 묻는다.



환자: 왜 그러죠?

게바라: 폐가 안 좋아서요.

-잠시 적막-

게바라: 당신을 돕고 싶어요.

환자: 시간낭비에요.

게바라: 왜죠?

환자: 삶은 고통이니까요.

게바라:(잠시 침묵 후) 예, 맞아요. 정말 엿같죠.
        ...숨쉬기 위해, 매순간 싸워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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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8.27.]굿바이 레닌

봤다. 꽤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결국 봤다. 네오폴더 1CD 다운로드, 뭐 200원 좀 넘게 들더라.

심장발작으로 쓰려져 혼수상태에 있다가 깨어나보니 신봉하던 사회주의 국가는 무너져 있다. 아들의 단 한가지 목표는 어머니로 하여금 절대 위와 같은 경험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래서 그는 이제 이 땅 위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만들어나간다. 모카픽스 골드 커피라던가 하는 것들. 감독을 꿈꾸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옛 동독의 뉴스까지 재현하고, 아이들에게 돈을 주어 옛 동독의 파이오니어가 아직도 있는 것처럼 꾸민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만들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그 자신과 어머니가 바랐지만 이 땅에는 존재한 적 없었던 것들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코카콜라가 동독의 음료수 공장의 선전을 시기해 동독 방송국의 취재를 방해한다던가, 수많은 서독 인파들이 동독으로 이주해오길 원한다던가 하는 것들은, 적어도 현실에선 없었던 일들이다. 하지만 그 어머니도, 아들도, 그러한 현실 앞에서 단지 손들어버릴 수만은 없었던 모양이다. 배우자를 잃고 홀로 살아가기로 한 인간적인 어머니나, 선한 의지로 저 우주에 날아가길 꿈꿨던 한 꿈많은 아들이나 말이다.

이 영화는 내가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 처음으로 자막을 받아적게 만든 영화이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게 몇 줄 인용해보자.

두번째 심장발작으로 앞날이 불투명해진 어머니께 보여드릴 마지막 쇼를 준비한 아들은 병실에서 어머니와, 가족들과 함께 뉴스를 튼다. 우스꽝스럽게 변장한 친구가 앵커로 나오는 뉴스, 옛 동독의 우주비행사 영웅이었던 지그문트가 새로 동독 지도자가 되어 연설한다(실제로는 가난한 택시운전사에 불과하지만).

"...사회주의는 장벽 안에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며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넘어진 베를린 장벽을 넘어가며 환호하는 시민들을 비추며(이들은, 뉴스 안에서만큼은, 동독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환호에 찬 서독의 억압받던 인민들인 셈이다) 이어지는 앵커의 멘트.

"...수천 수만의 서독 인민들이 동독에 오기를 원하고 또한 머물기를 원할 겁니다. 자본주의 체계에서 생존 경쟁을 하기보다는 말입니다. 직장을 얻기 위해 애쓰지 않고, 살아가면서 서로 싸우지 않아도 되는 곳... 이들은 다른 세상을 원하고 있습니다. 자동차와 비디오 카메라와 TV가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또한 새로운 세상이란 선한 의지요 분노요 희망임을 깨달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쇼 사흘 후에 어머니는 죽는다. 그녀의 뼛가루를, 어린 시절 우주 조종사를 꿈꾸며 날려보내곤 하던 모형로켓에 담아 폭죽과 함께 공중으로 날려보낸 후, 주인공의 독백은 영화의 대미를 장식한다.

"...그녀가 남겨놓은 나라는 그녀가 신봉했던 나라이고, 내가 살아갈 나라이기도 하다. 비록 그것이 실존하는 나라는 아니라 할지라도, 내 기억 안에서 나와 어머니는 그 조국에 영원히 함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조국, 세상에 실재하지는 않아도, 그 어머니와 아들이 살았던 조국은 그들이 남긴 저 말들 속에 있다. 순식간에 서구의 문물로 옛것들이 사라져버리고, 30년 동안 모아놓은 노동의 댓가가 서독 은행에 의해 휴지조각이 되어버렸으며, 더이상 공화국 인민의 복리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게 된 옛 동독인들(아들, 어머니, 어머니의 늙은 옛 친구들, 지그문트)에게 남겨진 공허와 눈물이 원했던 것, 보상받고 싶어했던 것이 거기에 있다.

이 영화, 아버지라는 존재를 굳이 끝에 끌어들이지만 않았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굿바이 레닌은 우리가 현실 사회주의권의 흘러간 역사, 그 20세기의 흔적에 흘려주는 마지막 눈물이다. 헬리콥터에 의해 옮겨지는 부서진 레닌상은 그 한세기의 상처를 의미한다. 레닌이 남겨놓은 역사의 흔적, 그 결말에 우리는 필요한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을 이 영화로써 남겼다. 이제 우리는 전진이다. 그러니까, 굿바이 레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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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3.4.]비정규직 정세와 오늘의 계급정치

Ⅰ. 최근 비정규직 정세의 전개



정치라는 것을 단지 인민을 TV 앞에 앉혀 놓고 보여주는 액션들에 국한시키지 않을 때, 현재 남한 사회를 둘러싸고 가장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는 정세는 비정규직 정세라고 할 수 있다. 헌데 그 비정규직 정세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으며, 왜 정세인 것인가?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정 노동의 한 형태가 남한 사회에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근래의 일이 아니다. 멀게는 90년대 초부터, 가깝게는 97년 노동법 개악부터 신자유주의의 도입과 함께 불안정 노동과 비정규직의 확산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비정규직이 하나의 정세가 되고 정세의 아이콘이 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 가장 중요한 기점은 역시 누가 뭐래도 2003년 겨울의 열사정국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많은 비정규직 열사들이 인간답게 살고 싶다며 몸에 불을 지르거나 목을 매었을 때, 이 땅의 양심들과 계급정치 활동가들의 가슴엔 큰 상처가 남았다.

즉 2003년 겨울의 열사정국을 기점으로 제도정치 영역 뿐 아니라 민중정치 영역에서도 비정규직 문제가 매우 극렬하고 급박한 정세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노무현의 레토릭이 아닌, 진짜 현실적인 힘과 힘의 대결 양상이 급격하게 전개되는 상황으로서의 '정세'는 그렇게 비극적으로 첫 출발을 끊었다.

사실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산에 비해 비정규직이 정세로 떠오르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87년 이후 남한 계급운동의 헤게모니를 점유하고 있던 대공장 정규직 남성 노동자 중심의 '민주노조운동'이 게으름을 피웠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열사정국 이후 아래로부터의 압력(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기층 비정규직의 압력과, 그 요구를 받아안고 노조관료들을 압박한 기층 활동가들의 압력)이 거세어지면서 민주노총 역시 비정규직에 대해 발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 현실을 반영한 전개가 바로 2004년 여름의 임단투였다고 볼 수 있다. '국민과 함께하는 총파업' 운운하던 소위 국민파는 2004년 임단투에서 적극적으로 비정규직과 일자리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로 한다. 이러한 정세에 발맞추어 일정한 운동의 전진도 있었다. 특히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진 철도 영역에서 전통적으로 힘이 강했던 서울지하철노조 뿐 아니라 서울 5호선부터 8호선까지를 담당하는 도시철도 노조, 국철을 담당하는 한국철도 노조까지 새로이 스스로를 조직하여 투쟁에 나서는 등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 뿐 아니라 어용의 아성이라고 얘기되어지던 LG 칼텍스 노조 역시 과감하게 사회적 안건들을 들고 나와 투쟁에 임했다. 그 뿐 아니라 서울대병원노조, 기아/현대자동차 노조 등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투쟁에 나서는 전진을 이룩했다.

그러나 여름 임단투는 노조관료주의에 젖어있는 민주노총의 한계 역시 여실히 드러내었다. 새로이 스스로를 조직하여 과감히 투쟁에 나섰기에 더욱 희망찼던 3개 철도노조의 투쟁은 지도부의 배신으로 너무나도 허망하게 막을 내렸다. LG 칼텍스 노조의 투쟁은 외곽의 지원세력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각종 언론과 여론의 포화를 맞다가 패배했다. 서울대병원노조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남겼지만 보건의료연맹과의 마찰로 노조관료주의의 문제를 드러냈다.

이런 패배와 한계를 딛고, 계급적 활동가들은 자체적인 문제의식과 해결방안을 꾀할 수밖에 없었다. 다가오는 11월 전국노동자대회와 예정된 총파업과 관련하여 돌파구를 마련해야만 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조직된 단결체가 바로 '사회적 합의주의/노사정 담합 분쇄를 위한 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약칭 전노투)'였다.

전노투는 계급적/변혁적 성격을 견지하고 노조관료주의에 대항해 계급성 복원을 염원하는 전국의 활동가들을 조직했다. 물론 전노투 자체의 위상이 확실치 않았고, 전노투가 포괄하는 조직들 사이의 의견 차이와 상호 비판으로 불안정했지만, 11월의 정세를 맞이해 전노투는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이러한 정세를 더욱 급박하게 만든 것이 바로 정부가 내놓은 '파견근로자등에관한보호법률(약칭 파견법)'이었다. 이 파견법 상정안은 그 명칭과는 정반대로 파견근로를 전면 확대하고 모든 자본가가 합법적이고 전면적으로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었다. 이 법안의 상정은 전국의 활동가들을 바짝 긴장시켰을 뿐 아니라 노조 상층관료들 역시 대응하게 만들었다. 또한 비정규직 노동대중 스스로가 이 정세에 맞추어 움직이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고 나아가서 법안을 둘러싸고 격렬한 계급투쟁이 전개되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전노투는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에서 관료적 민주노총과 노동운동의 관성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독자집회를 열었고, 총파업 선언까지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지속적으로 아래로부터의 압력을 조직했다. 총파업이 선언되자마자 역사적인 전국공무원노조의 파업을 엄호했고, 총파업이 유실되지 않도록 최대한의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녹치 않았다. 전노투는 그 위상의 불명확함과 내부의 혼란, 역량의 부족 등을 드러내며 대다수 노동대중의 포섭과 조직에 실패했다. 결국 주도권을 쥐고 있던 노조관료들은 며칠만에 무기한 총파업을 제한된 총파업으로 바꿨고, 그로부터 또 며칠만에 그냥 유실시켜 버렸다.

그런 정세 속에서 터져 나온 전환점이자 분화구가 있었다. 바로 아직까지 진행되고 있는 현대자동차 불법파견 비정규직 투쟁이다.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이 멈추면 대한민국 경제가 멈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산업의 비중은 엄청나다. 이런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 비정규직이 약 만여명이 집결되어 있다. 이런 명백하고 노골적인 불법파견에 맞서 현자 비정규직 노조가 설립되었고, 정규직 노조와의 연대를 통해 투쟁을 만들어 나갔다.

이 과정에 전노투가 연관되었다. 앞서 말했듯 현자 공장은 남한 경제에서 엄청난 비중을 자랑하는 곳이며, 불파 비정규직의 규모 역시 엄청났다. 따라서 현자를 둘러싼 불파투쟁은 자연히 파견근로와 파견법을 둘러싸고 자본과 노동의 계급투쟁 대리전 양상을 띠게 된다. 이런 정세 속에서 전노투는 현자 비정규직 노조를 엄호하고 정규직 노조를 압박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런 와중에도 계속하여 파견법과 사회적 합의(노사정위원회 참여)를 둘러싼 정세는 계속되었다. 11월 총파업을 유실시킨 노조관료들은 2월 임시 대의원대회에서 사회적 합의 안건을 상정했고, 전노투는 총력으로 이를 저지한다. 전노투의 단상점거를 통해 사회적 합의 안건과 임시 대의원대회는 2월 22일로 연기된다(추후 이것은 다시 3월 15일로 연기된다).

즉 11월과 12월 이후 주요 정세는 두 가지 줄기를 통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는 현자 불파투쟁이고, 하나는 사회적 합의 안건이 걸린 대의원대회이다. 이 두 줄기의 정세는 아직도 서로가 서로를 피드백하며 진행되고 있고, 정권과 자본의 무자비한 탄압 역시 계속되고 있다. 그것이 나타난 사건이 현자 비정규 노조에 대한 사측 경비대의 폭력진압과 현자 비정규 노조 위원장의 갑작스런 연행사건이었다 할 수 있다.





Ⅱ. 비정규직 정세와 사회구성체 변동



앞에서 간략히 살펴보았듯 비정규직 정세는 현재 민중정치의 현장에서, 거리에서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인민을 어떻게든 앉혀놓으려는 TV의 정치와는 매우 딴판이다. 그렇다면 이런 정세는 왜 구성되고 있는 것인가? 이 정세의 정체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현재와 같은 정세에서 과학적 좌파는 현실을 단순히 관찰하거나 레토릭의 수준에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구성체의 작동 차원에서 다시 한 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형태의 전면적이고 노골적인 계급투쟁은 단순히 이데올로기의 영역이나 정치 수사, 선언의 영역이 아닌, 급변하는 사회구성체와 그 새로운 룰의 영역에 속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원 씨의 다음 글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요? 그것은 언제나 계급투쟁을 먼저 시작하는 쪽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부르주아지이기 때문입니다. 부르주아지는 착취 전략들(새로운 분업구조, 기계, 관리양식 등등)을 생산해 냄으로써 이러한 계급투쟁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바로 그러한 착취전략들에 따른 구체적인 노동자들의 양태가 생겨나게 됩니다.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은 그래서 언제나 이러한 자신에게 가해오는 부르주아지들의 특정한 계급투쟁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되며, 그 특정한 착취전략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목표로 삼는 운동을하게 됩니다. 그렇게 투쟁을 통해 부르주아지들의 특정 해당시기의 착취전략으로부터 노동자들이 빠져나오면, 부르주아지는 가만히 보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또 다른 착취전략을 개발함으로써 반격을 시작합니다."(최원, <무엇을 할 것인가?> 中)

 

최원 씨가 말하는대로 계급투쟁은 언제나 자본에 의해 먼저 시작된다. 지금까지 자본주의 사회구성체 변동의 역사는 언제나 노동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본의 방식이 변화하는 역사였음이 이를 웅변한다. 또한 우리는 그러한 변동기마다 매우 격렬하고 전면적인 계급투쟁이 표면화되고, 자본의 착취전략에 따라 형성되는 새로운 투쟁주체의 부상이 뒤따랐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이러한 급격한 정세는 자본에 의해 촉발된 또 하나의 시초축적이며, 사회구성체 변동기에 일어나는 전면적인 계급전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필연적으로 현재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불안정 노동의 일반화와 비정규직의 확산 추세가 사회구성체 변동에 의한 새로운 노동주체 형성의 과정이라는 결론을 내포한다.

 

현재 세계자본주의 체제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인민에게 전면적이고 일반적인 불안정을 강요하고 있다. 분명 물질적 풍요는 전 시대에 비해 증가했지만 이제 누구도(세계 인구의 1%를 제외하고) 스스로가 '잘 산다' 내지는 '행복하고 걱정없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의 삶이 '전면적이고 일반적인' 불안정에 직면했으며, 그로써 삶의 기반 자체가 뒤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수아 셰네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추세를 '위기적 축적체제'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명명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불안정화가 단순한 누군가의 오판이나 탐욕이 아니라, 체제 차원에서 일어나고 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재편이고 새로운 구조화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자면, 자유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로 변하며 테일러주의를 통해 인민의 육체와 기능을 착취했고, 독점자본주의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변하며 포드주의를 통해 인민의 시간과 공간을 착취했던 것처럼, 이제 위기적 축적체제를 통해 자본주의는 인민의 삶 그 자체를 착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축적체제가 생산하고 구성하는 노동주체, 착취객체가 바로 불안정 노동자이고 비정규직인 것이다(혹자는 이것을 사회적 노동자니, 지식정보 노동자니 하지만, 본인은 말장난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작금의 비정규직 전면 확산 추세는 새로운 사회구성체가 요구하는 자본에 의한 계급투쟁이며, 새로운 시초축적이라 할 수 있다. 최원 씨 역시 이러한 통찰을 지지한다.

 

"지금 우리는 굉장히 위중한 시기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말하자면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일어나는 시기입니다. 아메리카 헤게모니에 입각해 있던 세계자본주의의 순환이 끝났습니다. 다시 원시적 축적을 이루지 않는다면, 자본은 소생하지 못합니다. 이 원시적 축적은 엄청난, 극단적인 폭력을 동반합니다. 마르크스는 사회 외곽에 동질화된 채 집적되는 대중들 안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읽었지만, 지금 사회 외곽에 집적되는 대중들은 몰살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자본의 원시적 축적은 잉여 인구의 학살을 통해서 달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고강도/저강도 전쟁들이 보여주는 현실이 바로 이것입니다.(후략)"(최원, 같은 글)

 

이런 맥락에서 보면 비정규직 정세를 둘러싼 여러 사건들이 하나의 일관성을 갖게 된다. 본디 구 사회구성체의 노동주체들은 구 사회구성체에선 대항세력이지만 변동기엔 사멸의 길을 걷거나 권력층으로의 상승을 경험한다. 공장제도의 도입 시기에 수공업 장인들이 수행했던 역할을 이제 노조관료들이 하고 있는 것 뿐이다. 모두 알다시피 정부가 말하는 노사정 합의란 이 노조관료들의 휘하에 있는 조직 정규직 노동자일 따름이다. 이제 이들은 감독관의 임무를 띠고 비정규직의 투쟁을 무화시킨다. 자본과 정권의 무리하고 폭압적인 행동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 입장에서 사회구성체 변동기의 요구는 빨리 관철시키지 않으면 새로운 축적체제로의 이행이 그만큼 늦어지고 따라서 경쟁에서 뒤쳐져 도태하게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부정적 흐름에 대항하는 비정규직 노동대중의 조직과 투쟁이 떠오르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새로운 노동주체/착취객체의 구성은 필연적으로 그들의 대항세력화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Ⅲ. 제도정치의 전화와 상부구조의 대응/변동

 



최근의 제도정치의 전화 과정 역시 이러한 일관성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사회구성체의 변동은 필연적으로 상부구조의 일정한 대응과 그에 따른 변동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으로 대표되는 현재의 제도정치권과 상부구조의 모습은 어떠한가? 어떤 이는 이들의 행보를 '개혁 파시즘'이라고 명명한다. 즉 다시 말해, 개혁이라는 레토릭을 통해 상부구조를 정비/합리화하고 동시에 사회구성체 변동의 강력한 추진으로써 토대에 피드백하는 형태의 폭력이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파시즘이라는 단어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 용어를 쓴 사람의 말마따나, "히틀러가 죽은지 벌써 언제인데 아직도 선동정치, 포퓰리즘의 흔적만으로 파시즘을 논의하겠는가." 단순한 현상관찰이 아닌 과학적 사회구성체 분석의 수준에서 파시즘이란 자본의 축적을 엄호하고 추진하는 강력한 국가폭력체제를 가리킨다. 독일의 나치즘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 그리고 1930년대 당시 남유럽 등지에 불었던 파시즘 열풍과 전후 남미 및 동아시아에서 수립된 파시즘 등의 서로 다른 모습은 좀 더 추상화 수준이 낮은 차원의 문제이다(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현대한국정치> 참조. 본인 현재 그 중 어떤 글이었는지 까먹었다. 후에 찾아보면 다시 수정하겠음).

 

이러한 개혁 파시즘의 효과는 한국의 특수한 정치지형을 타고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전화한다. 7, 80년대의 엄혹한 세월을 거쳐 형성된 현재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소위 '민주세력'은 현재 행정부를 장악하고 있다(물론 의회에서도 다수당이긴 하지만, 그 견제가 만만치 않다). 소위 '수구세력'은 현재 보통 시민사회 영역이라 불리는 영역, 즉 언론과 시민단체 영역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으며, 정부 내에서도 유일한 대의체 기구인 의회에 준거를 마련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과거 군사 파시즘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인민은 시민사회와 대의체 내의 '수구세력'을 외면하고 행정부 내의 '민주세력'의 집행력을 기대한다(이러한 추세의 대표적 사례로서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그러나 이것이 위험 신호이다. 강력하고 왜곡된 민족주의/국가주의 전통과, 국가의 진보적 역할에 대한 대중적 신뢰, 시민사회 영역과 대의체 기구에 대한 전면적인 불신, 이 모든 것은 너무나도 전형적인 파시즘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즉 국가에 대한 대중적 맹신과 국가주의의 확산, 시민사회 영역의 질식과 민중세력의 고사 등 독일 및 선진 파시즘 국가에서 내보였던 구체적 양상들이 새로이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국가가 인민들에게 강제하는 거대한 불안정과 폭력(비정규직 정세, 인민의 삶 파탄)을 은폐하고, 오직 국가의 부름에 충실할 것을 강요한다. 이에 발맞춰 거대한 민족적 감정선동(역사시비, 독도시비)이 뒤따르고, 행정부를 지지하는 거대한 대중적 운동(탄핵반대)이 나타난다. 참주선동과 여론몰이(소위 '개혁언론'의 여론몰이, 소위 '개혁 정치가/지식인'의 선동)가 판을 치고, 가상의 적('수구세력')을 만들어 인민을 묶어낸다.

 

그리고 파시즘으로서 빠질 수 없는, 자본의 축적체제의 엄호와 추진 역시 충실히 진행된다. 주가는 1000포인트를 돌파했고, 노동시장 유연화는 착착 진행되고 있다. 미국이 일으킨 거대한 전쟁에 동참함으로써 후에 있을 전세계적 구조조정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것은 물론, 불안정 노동을 중심으로 한 산업 재편까지도 이른바 동북아 허브라는 이름 하에 국가 주도적으로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이런 국가의 역할에 있어서만큼은 가상의 적인 '수구세력'까지도 한입을 모아 칭찬하는 것은 딱히 기이하지 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파시즘의 전면화와 헤게모니화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일찍이 좌파 사회구성체론이 밝혀냈듯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에 조응하는 상부구조는 파시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의 폭압적 파시즘 체제와 분명히 차이가 있으면서도 특수한 정치지형에 맞춰 구체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이 파시즘 체제는, 이전의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가 아닌 위기적 축적체제, (본인의 임의대로 이름붙이자면) 영구위기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에 조응하는 상부구조라 할 수 있다.

 

인민의 삶에 전면적이고 일반적인 불안정이 강요되는 위기적 축적체제를 이끌어나가는 국가의 이상적인 상은 현재 너무나도 많이 회자되고 있는 신(新) 발전국가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즉 다시 말하면 국가에 속하는 인민 전체에게 국가를 단위로 한 소위 '운명공동체' 개념을 강제하고, 그 '운명공동체'의 주도에 맞춰 '무한경쟁' 속에 살아남기를 강요하는 국가체제인 것이다. 이러한 강제와 강요는 자연스레 시민사회 영역을 포괄하는 새로운 국가 파시즘의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정권의 행보는 일관성을 갖는다. 지속적인 상부구조의 합리화와 정비, 폭압적인 민중세력에 대한 탄압, 그리고 노사정위원회로 대표되는 '사회적 합의' 추진까지. 이 모든 것은 국가기구의 효율화와 집중화를 의미하는 것이다(정규직 노조운동까지도 국가기구의 일부로 만들겠다는 저 야욕을 보라!).

 

(덧붙이자면, 이러한 파시즘 형태에서 나타나는 남한만의 특수성에 있어, 대중의 빠르고 전폭적인 지지와 이른바 '개혁'에 대한 환상은 7, 80년대 군사 파시즘의 상흔이 남긴 한국 정치지형의 특수성에서 비롯하는 보나파르트적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체제가 보나파르트 체제는 아니다.)

 

 

 

Ⅳ. 민중정치의 전개와 저항의 조직


 

 

그렇다면 이제 눈을 돌려 거리를 보자. 자본과 국가에 의해 촉발된 이러한 계급전쟁에 대응하여 민중세력, 민중정치세력은 어떤 행보를 보이고 있는가? 이 또한 앞에서 설명한 비정규직 정세와 관련하여 유기적으로 설명되어져야 한다.

 

조직적 좌피의 와해와 무정부주의의 확산은 사실 비단 한국적인 현상만은 아니다. 스탈린주의의 오류와 사민주의의 배신 속에서 인민은 조직좌파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조직적 정치세력을 믿지 못할때 저항하는 인민들은 주로 자기 자신을 믿는다. 따라서 자연히 무정부주의적 흐름이 강해지게 된다. 세계사회포럼으로 대표되는 전세계 기층 활동가들의 연합이 보여주듯, 세계의 저항은 이제 좌파와 조직이 아닌 기층과 활동가의 무정부주의적 연합이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는 계급투쟁에서 보여지는 좌파의 무능력함은 또한 한국의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좌파적 전통이 끊어지고, 그 후 7, 80년대의 운동을 통해 변혁적 관점이 복원되었지만 90년대의 거대한 배신의 물결로 인해 좌파운동은 대중적 호소력을 아예 상실한 상태이다.

 

그나마 조직적 좌파가 둥지를 튼 민주노동당은 민족주의/대중추수주의 세력의 주도 하에 파시즘 국가기구에 편입되어 가고 있고, 그나마도 제대로 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당이 대중의 투쟁을 선도하고 지도하기는 커녕 대중에게 공수표를 남발함으로써 대리주의적 흐름만 부추기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런 상태에서 소위 '현장파'라 불리는 무정부주의적 흐름이 계급운동을 주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재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는 변혁적 계급운동의 명맥을 이어가는 전노투는 이러한 성격을 갖고 있다. 이들은 일관된 정치강령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누구보다도 대중과 가까운 곳에서 투쟁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대중에 대한 선동이나 조직에 의존하기보단 스스로의 역량에 따른 선도투쟁 및 실력행사를 선호한다. 이것이 극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임시 대의원대회 단상점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무정부주의적 투쟁은 일견 강력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실상은 매우 취약하다. 전노투가 11월 결국 별다른 성과를 남기지 못한 것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전투성이 생각외로 큰 효과를 못 내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비정규직이 현재 '협상 파트너는 커녕 투쟁 파트너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조직 노동대중을 선도하고 이들을 조직하며, 나아가서는 이행기강령을 통해 이들을 현실적인 정치세력으로 만들 수 있는 좌파의 부재가 너무나도 크다. 사실 이런 좌파적 서포트가 없는 상태에서 무정부주의적 전투성은 대중으로부터의 유리, 대중 포섭 실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급박한 요구에 비해 현실의 우리 좌파세력은 일천하기 짝이 없다. 무정부주의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관료주의에 젖어있는 것은 기본이고, 어떻게 현실적인 힘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에는 너무나도 취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 엄밀하지도 않은 레토릭만을 남발해대는 조직이 국내 유일의 혁명적 전위정당의 맹아로 자임하고 있으며, 그나마 있는 좌파세력은 뿔뿔이 흩어져 서로에 대한 분파주의적 비방만을 일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진보평론이 주도해보려 했던 좌파연대는 공수표로 지나갔고, 현실적으로 지금 시점에서 좌파연대는 무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즉 간단히 말해서 민중정치세력은 자본과 국가의 야만적인 학살에 맞설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한 대중적 저항의 부상은 이와 관계없이 전진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전국비정규직연대가 만들어졌고, 곳곳에서 비정규직 노조들이 투쟁하고 있다. 비정규직의 투쟁이 이슈가 되고 정세가 되며 눈치를 보아야 할 대상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크나큰 진전이라면 진전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의식적 정치세력 부위의 지리멸렬과는 독립적으로, 그 기반이 되는 계급적 연대는 살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단위사업장에 한정지을 수 없고 법적/정치적 조건과 면밀히 연관될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 투쟁의 전면화는 정치적 계급성 복원의 한 전환점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남한 1400만 노동자 중에 13만만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700만 비정규직 노동대중 모두를 대표하고 투쟁하지 않으면 700만 중의 그 누구도 사정이 나아질 수 없는 것이 이들이다. 이런 기반 속에서 계급정치의 정세는 전화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이 걸어온 계급전쟁은 노동계급을 계급적으로 단결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계급정치, 즉 계급과 계급 간의 권력 투쟁의 주체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힘의 맹아는 조용히 싹트고 있으되, 햇살은 아직 비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Ⅴ. 결론을 대신하여 - 좌파의 재건과 반격을 위하여

 

 

 

개인적인 단상들과 분석들을 줄줄이 늘어놓은 이 글에 어떤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 피말려가며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고, 아직 그 투쟁들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결론이라는 제목 하에 투쟁을 예단하는 것만큼의 모욕과 무례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을 대신하여 이 긴 글을 끝맺으면서 개인적인 소망과 전망을 밝혀보고 싶다.

 

위에서 제시된 현실 분석에 기초하여 보자면 현재 정국은 무엇보다도 조직과 단결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조직 대중의 조직, 좌파세력의 단결, 무정부주의 세력과의 연대, 그리고 현실 속에서 실제로 급박하게 요구되고 있는 투쟁.

 

그러나 좌파세력의 복원과 단결을 위해서는 타당한 현실분석에 기초한 명백한 정치강령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그 강령에 기초하여 대중을 지도하고 조직하며, 이행기강령을 마련하고 정치세력화를 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막중한 임무에 비하여 우리의 좌파는 너무 나약하거나 게으르다. 지금 주어진 관료적 지위에 만족하거나, 100년 전의 레토릭을 가져다 쓰면서 폼잡는 것 외에 지금 좌파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 좌파가 과학적 통찰을 필요로 한다면 당장 그 분석에 나서야 할 것인데 분석하고 있는 자 누구인가? 분석에 이견이 있다면 논쟁하고 각자의 입장에 따라 조직해야 할텐데 논쟁하고 조직하는 자 누구인가?

 

급격한 사회구성체의 변동과 그에 조응하는 상부구조의 전화, 그 속에서 위로부터 강제되는 격렬한 계급전쟁이라는 이 총체적 정국은 인민 세력으로 하여금 최대한 빨리 정치강령을 마련하고 정치적으로 조직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의 전투적 투쟁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엄밀한 현실분석에 기초한 명확한 정치강령과, 그에 기반한 인민의 정치적 단결 및 조직이 좌파에 의해 선도됨으로써 이 난국을 극복하기를 무기력하게나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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