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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이야기.

미술학원에서는 늘 관찰력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정밀묘사를 스케치북 가득 그려내면서도

나는 단 한 번도 나무를 갈색으로 표현하는 데에 주저한 적이 없다.

풍경화를 그린다. 나무가 있다. 나는 주저없이 갈색 물감을 붓에 묻혀 나무의 형태를 잡는다.

그래, 나무의 줄기와 가지는 짙은 갈색이다.

이것은 너무도 오랫동안 나를 붙잡고 있던 고정관념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순간 뇌 안에서 작은 전구가 켜지는 듯한 만화적 느낌에 휩싸였다.

 

우리는 종종 나무 또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나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가 연상하는 이미지는 보통 정적이며, 생명의 역동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인체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매커니즘을 통해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고 있듯이

나무 또한 숨가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존재적 처절함만큼, 나무의 생애 또한 처절하지 않다고 누가 감히 단정할 것인가.

인간의 생애에 입혀지고 덧칠되는 수많은 고통과 위선과 허무와 희열과 행복의 색채만큼이나

나무의 생애 또한 그렇지 않으리라고 누가 감히 단정하는가.

인간이 소란스럽게 호들갑 떨며 두려워하는 온갖 자연의 재앙들을

인간보다 훨씬 기나긴 세월 동안 버텨내는 그네들이 아닌가.

 

그래. 어쩐지 안경을 쓰기가 너무나 싫었던 차갑고 청명한 아침.

뭐든지 가까이 가지 않고서는 제대로 볼 수 없는 나의 근시안 덕분에

늘 별 생각 없이 지나치던 나무에게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처음엔 나무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온통 눈으로 뒤덮여 순결하고 깨끗하며 평온했던 그 아침의 공기를 가슴 가득히 채우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성기성기 날카롭고 가벼운 모양새로 엉켜 있는 눈꽃들 위에 가만히 입술을 대어

그 작고 날카롭지만 취약한 창조물들이 입술의 미약한 온기로 녹아내려가는 느낌을 만끽하고 있을 무렵.

나무의 벌거벗은 몸뚱아리가 갑자기 나의 눈을 휘어잡았다.

마치 두드러기에 걸린 아이의 몸처럼 붉은 반점이 점점이 박힌 그네의 몸은

한쪽에서 보면 이끼가 자라난 초록빛. 또 다른 쪽에서 보면 차분한 보랏빛.

또 다른 쪽에서 보면 피를 머금은 듯한 검붉은빛으로 휘돌아치고 있었다.

아주 당연한 발견 속에서 마주하는 신선한 충격. 그네의 몸은 짙은 갈색이 아니었더랜다.

누가 그네의 몸을 갈색 물감을 묻힌 성의없는 붓질 한 번으로 규정하도록 나에게 일러 주었던 것일까.

늘 지나치던 나무였음에도 불구하고, 늘 내 눈으로 봐 왔던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째서 그네의 본래 색을 무시한 채 짙은 갈색이라는 재미없고 심심한 전형을 대입해 왔던 것일까.

어째서 그네 또한 생명이라는 것을 무시한 채 나와는 다른 무생명적 존재로 치부했던가.

그래, 눈부시게 청명했던 오늘 아침,

나의 눈을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상태의 시야를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그 안경이란 놈을 벗어던진 후에야

나는 비로소 나무라는 존재의 생명성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나무에게 완전히 밀착된, 그 자세 그대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순간 아, 하고 터지는 한숨. 혹은 탄성.

그네를 이해하지 못한 채 무심한 타자의 시선으로 볼 때에는

완벽한 피보나치 수열을 이루며 아름다운 자연의 곡선으로 뻗어나가던 그네의 가지가

그네의 뿌리에 기대어 올려다보았을 때는 얼마나 아귀처럼 처절한 모습이었는지.

그래, 관상용이라는 슬픈 이름으로 그곳에 자리잡고 살아가게 되었을 그네이지만,

그네의 삶은 결코 관상용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늘을 향해, 생명을 향해 처절하게 뻗어나간 아귀같은 손,

언젠가 불지옥을 묘사한 그림에서 보았던, 그 지옥불 속에서 뻗어나온 수많은 검은색 손들처럼

그렇게 태양빛을 향해 무섭게 질주해나간 그네의 가늘지만 강인한 가지들의 모습이 말해주듯이.

살아남기 위한 그네의 삶은 얼마나 그 나름대로의 고통과 희망의 연속이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라는 인간은, 세상의 안경 속에서 그 나무를 타자화하여 바라보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삶의 치열함과 생명성을 무생명적이고 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나무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때에서야 비로소

그네의 삶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나무를 '안다'라고 생각해 왔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나는 또 그 나무 외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안경으로 바라보고 있을 것인가.

틀림없이 갖가지 색채가 어둡고 밝으며 또 빠르고 느리게 휘몰아치고 있을 모든 존재들의 삶을

나의 기준에서 너무도 가볍게, 단색의 무생명적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 사람은 너무나 독단적이구나. 저 사람은 매사에 부정적이라 싫구나. 저 사람은 예의없으니 비호감이구나.

내가 그러한 단선적인 색안경을 통해 파악하고 있는 존재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그들 또한 내가 안경을 벗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에는

또 나름대로의 치열함으로, 에너지로 역동하며 다양한 빛깔의 사고를 엮어내고 있을 것이 아닌가.

그들을 그저 스쳐지나가는 '타자'로 파악할 때에는 그러한 존재의 아름다움과 절대로 조우할 수 없으리라.

 

아침,

나는 그렇게 나무를 통하여 다시 한번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경이로움을 자각하였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존재란 얼마나 경이롭고 신비로우며 존엄한 것인가.

누가 감히 상대를 규정하고 비난하고 미워할 수 있을 것인가.

단선적인 앎, 그 '안다고 생각하는 착각'은 무지보다 못하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며, 모든 존재와 합일을 이루려는 의지 즉 사랑과 관용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세상을 바르고 맑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나에게 나무를 보는 눈보다는 전체 숲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나무 하나하나의 경이로움과 생명성을 파악하지 못한 채 어찌 숲을 바르게 알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식으로 '숲'을 '알고 있다' 라고 착각하는 자들이야말로

인간애가 결여된 채 공학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수많은 어리석은 지식인들이다.

굳이 파시스트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 시장중심적 사회에서 인간 존재를 소홀히 하는 자들은 얼마나 많은가.

공돌이와 공순이의 피땀, 전태일의 분신을 망각한 채 개발독재를 찬양하는 이들은

개별적인 인간존재의 경이로움을 알지 못한 채 숲의 형태를 왜곡하여 파악한 불쌍한 이들이다.

여기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논의하고 싶은 것이 많지만 진부하게 길어질 테니 일단은 피한다.

 

그러나 나무의, 그 나무의 경이로운 정도로 치열하고 생명감 넘치는 삶의 흔적이 내게 가르쳐 주었듯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은 모든 존재의 생명을 존엄히 여기는 그 경외심과

포기할 수 없는 경이로움으로 가득찬 모든 개별적이고 고유한 인간 존재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나무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해 준 나의 근시안.

설사 이 눈이 몽골인들처럼 드넓은 평원 전체를 볼 수는 없는 눈일지라도,

나는 이 눈을 가짐으로써 평원에 돋아난 풀 한 포기의 경이로움과 조우할 수 있음이 감사하며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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