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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2/07
    나무 이야기.
    달달
  2. 2007/11/09
    뭉크 '사춘기'
    달달
  3. 2007/11/08
    퀴어들이여, 움직여라!(1)
    달달
  4. 2007/11/07
    양심적 소비의 어려움 - 이랜드의 힘이란!(3)
    달달
  5. 2007/11/04
    가슴이 뜨거워지는 헌법, 하지만 유리된 현실
    달달
  6. 2007/11/03
    '소녀, 소녀를 사랑하다'(3)
    달달

나무 이야기.

미술학원에서는 늘 관찰력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정밀묘사를 스케치북 가득 그려내면서도

나는 단 한 번도 나무를 갈색으로 표현하는 데에 주저한 적이 없다.

풍경화를 그린다. 나무가 있다. 나는 주저없이 갈색 물감을 붓에 묻혀 나무의 형태를 잡는다.

그래, 나무의 줄기와 가지는 짙은 갈색이다.

이것은 너무도 오랫동안 나를 붙잡고 있던 고정관념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순간 뇌 안에서 작은 전구가 켜지는 듯한 만화적 느낌에 휩싸였다.

 

우리는 종종 나무 또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나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가 연상하는 이미지는 보통 정적이며, 생명의 역동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인체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매커니즘을 통해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고 있듯이

나무 또한 숨가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존재적 처절함만큼, 나무의 생애 또한 처절하지 않다고 누가 감히 단정할 것인가.

인간의 생애에 입혀지고 덧칠되는 수많은 고통과 위선과 허무와 희열과 행복의 색채만큼이나

나무의 생애 또한 그렇지 않으리라고 누가 감히 단정하는가.

인간이 소란스럽게 호들갑 떨며 두려워하는 온갖 자연의 재앙들을

인간보다 훨씬 기나긴 세월 동안 버텨내는 그네들이 아닌가.

 

그래. 어쩐지 안경을 쓰기가 너무나 싫었던 차갑고 청명한 아침.

뭐든지 가까이 가지 않고서는 제대로 볼 수 없는 나의 근시안 덕분에

늘 별 생각 없이 지나치던 나무에게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처음엔 나무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온통 눈으로 뒤덮여 순결하고 깨끗하며 평온했던 그 아침의 공기를 가슴 가득히 채우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성기성기 날카롭고 가벼운 모양새로 엉켜 있는 눈꽃들 위에 가만히 입술을 대어

그 작고 날카롭지만 취약한 창조물들이 입술의 미약한 온기로 녹아내려가는 느낌을 만끽하고 있을 무렵.

나무의 벌거벗은 몸뚱아리가 갑자기 나의 눈을 휘어잡았다.

마치 두드러기에 걸린 아이의 몸처럼 붉은 반점이 점점이 박힌 그네의 몸은

한쪽에서 보면 이끼가 자라난 초록빛. 또 다른 쪽에서 보면 차분한 보랏빛.

또 다른 쪽에서 보면 피를 머금은 듯한 검붉은빛으로 휘돌아치고 있었다.

아주 당연한 발견 속에서 마주하는 신선한 충격. 그네의 몸은 짙은 갈색이 아니었더랜다.

누가 그네의 몸을 갈색 물감을 묻힌 성의없는 붓질 한 번으로 규정하도록 나에게 일러 주었던 것일까.

늘 지나치던 나무였음에도 불구하고, 늘 내 눈으로 봐 왔던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째서 그네의 본래 색을 무시한 채 짙은 갈색이라는 재미없고 심심한 전형을 대입해 왔던 것일까.

어째서 그네 또한 생명이라는 것을 무시한 채 나와는 다른 무생명적 존재로 치부했던가.

그래, 눈부시게 청명했던 오늘 아침,

나의 눈을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상태의 시야를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그 안경이란 놈을 벗어던진 후에야

나는 비로소 나무라는 존재의 생명성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나무에게 완전히 밀착된, 그 자세 그대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순간 아, 하고 터지는 한숨. 혹은 탄성.

그네를 이해하지 못한 채 무심한 타자의 시선으로 볼 때에는

완벽한 피보나치 수열을 이루며 아름다운 자연의 곡선으로 뻗어나가던 그네의 가지가

그네의 뿌리에 기대어 올려다보았을 때는 얼마나 아귀처럼 처절한 모습이었는지.

그래, 관상용이라는 슬픈 이름으로 그곳에 자리잡고 살아가게 되었을 그네이지만,

그네의 삶은 결코 관상용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늘을 향해, 생명을 향해 처절하게 뻗어나간 아귀같은 손,

언젠가 불지옥을 묘사한 그림에서 보았던, 그 지옥불 속에서 뻗어나온 수많은 검은색 손들처럼

그렇게 태양빛을 향해 무섭게 질주해나간 그네의 가늘지만 강인한 가지들의 모습이 말해주듯이.

살아남기 위한 그네의 삶은 얼마나 그 나름대로의 고통과 희망의 연속이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라는 인간은, 세상의 안경 속에서 그 나무를 타자화하여 바라보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삶의 치열함과 생명성을 무생명적이고 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나무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때에서야 비로소

그네의 삶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나무를 '안다'라고 생각해 왔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나는 또 그 나무 외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안경으로 바라보고 있을 것인가.

틀림없이 갖가지 색채가 어둡고 밝으며 또 빠르고 느리게 휘몰아치고 있을 모든 존재들의 삶을

나의 기준에서 너무도 가볍게, 단색의 무생명적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 사람은 너무나 독단적이구나. 저 사람은 매사에 부정적이라 싫구나. 저 사람은 예의없으니 비호감이구나.

내가 그러한 단선적인 색안경을 통해 파악하고 있는 존재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그들 또한 내가 안경을 벗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에는

또 나름대로의 치열함으로, 에너지로 역동하며 다양한 빛깔의 사고를 엮어내고 있을 것이 아닌가.

그들을 그저 스쳐지나가는 '타자'로 파악할 때에는 그러한 존재의 아름다움과 절대로 조우할 수 없으리라.

 

아침,

나는 그렇게 나무를 통하여 다시 한번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경이로움을 자각하였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존재란 얼마나 경이롭고 신비로우며 존엄한 것인가.

누가 감히 상대를 규정하고 비난하고 미워할 수 있을 것인가.

단선적인 앎, 그 '안다고 생각하는 착각'은 무지보다 못하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며, 모든 존재와 합일을 이루려는 의지 즉 사랑과 관용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세상을 바르고 맑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나에게 나무를 보는 눈보다는 전체 숲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나무 하나하나의 경이로움과 생명성을 파악하지 못한 채 어찌 숲을 바르게 알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식으로 '숲'을 '알고 있다' 라고 착각하는 자들이야말로

인간애가 결여된 채 공학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수많은 어리석은 지식인들이다.

굳이 파시스트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 시장중심적 사회에서 인간 존재를 소홀히 하는 자들은 얼마나 많은가.

공돌이와 공순이의 피땀, 전태일의 분신을 망각한 채 개발독재를 찬양하는 이들은

개별적인 인간존재의 경이로움을 알지 못한 채 숲의 형태를 왜곡하여 파악한 불쌍한 이들이다.

여기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논의하고 싶은 것이 많지만 진부하게 길어질 테니 일단은 피한다.

 

그러나 나무의, 그 나무의 경이로운 정도로 치열하고 생명감 넘치는 삶의 흔적이 내게 가르쳐 주었듯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은 모든 존재의 생명을 존엄히 여기는 그 경외심과

포기할 수 없는 경이로움으로 가득찬 모든 개별적이고 고유한 인간 존재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나무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해 준 나의 근시안.

설사 이 눈이 몽골인들처럼 드넓은 평원 전체를 볼 수는 없는 눈일지라도,

나는 이 눈을 가짐으로써 평원에 돋아난 풀 한 포기의 경이로움과 조우할 수 있음이 감사하며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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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사춘기'

 

 

 

뭉크의 ‘사춘기’는 발가벗은 소녀가 두 손을 교차해서 몸을 가리고 침대에 앉아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아직 덜 성숙한 소녀의 젖가슴과 앙상한 팔. 겁에 질린 듯 커다란 눈동자엔 슬픔과 두려움이 담겨 있다. 소녀는 막막한 얼굴이다. 이제 더는 아이가 아니다. 몸에 생긴 변화만큼 마음에도 여러 변화가 찾아왔지만 소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어른들은 곁에 없다. 소녀는 낯설고 무섭다. 도대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자기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충고가 한꺼번에 소녀를 짓누른다. 이 사춘기 소녀의 침대 뒤 오른 쪽 벽에 그려진 어두운 그림자처럼 무언가 순식간에 들이닥쳐 송두리째 삶을 망쳐버리게 되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러나 마냥 어둡고 답답할 것만 같던 사춘기가 지나면 네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 아무도 모르지. 그저 방문을 잠그기 시작하는 너의 비밀을 존중해주며 기다리는 수밖엔.

 

삶이 언제는 우리에게 우호적이던가. 때론 끝없이 추락할 것만 같이 위태롭고 우리가 바치는 열정을 비웃듯 차갑고 냉랭한 시선을 던져도 우리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담담히 걸어가야 한다. 끔찍했던 순간들이 돌아보면 아득하게 느껴지는 때도 있는 것처럼.

 

한겨레, 2007년 11월 0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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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들이여, 움직여라!

 

 



 

 

 

 

레주파 카페에서 레즈판님이 만들어 올려주신 이미지 몇 개 가지고 왔어요.

 

'차별금지법이 차별법이 되어도 좋은가' 라는 문구가 확 와닿습니다.

 

처음에 법무부에서 차별금지법 입법했을 때는,

 

드디어 세상이 조금씩 바뀌어가는가... 라며 희망찬 기분에 들떴었는데

 

현재 돌아가는 상태는.... 그야말로 비통한 한숨이 나올 뿐이죠.

 

사회에 잔뜩 끼인 호모포비아의 독가스가 숨구멍을 틀어막고 있는 기분입니다.

 

오늘 광화문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공동 기자회견이 열린다고 들었어요.

 

아마 지금 한창 진행중이겠네요.

 

지금 열심히 발로 뛰고 있으실 분들에게 화이팅을 보내며,

 

우리 모두 차별금지법에 '성적 지향'이라는 네 글자를 포함시키기 위해 단결해요!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죠.

 

그저, 나 자신의 모습 있는 그대로 인간답게 살아가고 싶을 뿐이에요.

 

그 소박한 꿈을 위해 달려요 언니들! (오빠들도!!!)

 

 

 

더 많은 이미지 보고 퍼뜨려 주실 분은 요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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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 소비의 어려움 - 이랜드의 힘이란!

 

 

이랜드와 연을 끊은 지 벌써 두 달이 사뿐히 넘어가고 있습니다.

처음 이랜드 불매운동에 참가하겠다고 다짐했을 때에는 쉬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다 보니 그것 참 생각보다 쉽지가 않더군요.

 

제일 먼저 뉴코아아울렛에서 싸게싸게 사던 옷들의 유혹을 떨쳐내야 했지요.

생각해 보면, 그렇게 옷을 싸게 팔면서도 이윤을 내기 위해서는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인데,

단기적인 이윤에 눈이 먼 자본주의적 탐욕에 가득찬 인간은 그것을 자꾸 잊으려 듭니다.

서민으로써, 세일 깃발을 크게 내건 이랜드 매장을 외면하기란 참 힘든 일이죠.

거기에 납품업체들의 어려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깔려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싼 가격은 자꾸 내 눈을 끕니다.

 

그래요.

자본이 이 사회를 움직이고, 오직 화폐 증식이 사회의 지상 목표가 되며,

'합법적' 방법을 통한 이윤 추구는 오히려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 사회에서는

'돈', '가격', 그 아래 있는 착취구조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안다고 해도 거기에 대항하기 힘듭니다.

 

처음 한 달 동안, 저는 정말로 심각하게 '이랜드 금단현상' 에 시달렸습니다.

우리 동네 유일한 할인마트 홈에버와 뉴코아 아울렛을 거절하고

버스를 타고 좀 나가야 하는 재래시장에 가거나,

똑같은 옷에 돈을 더 내고 산다는 건 뭐랄까,

눈 딱 감고 이랜드 매장에 걸어가고 싶도록 만들더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힘이란 이처럼 강력합니다.

제 생활 곳곳에 이렇게 부도덕한 자본주의가 침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참 섬뜩한 기분이었어요.

나름대로 유기농 제품을 사고 생협에 참가하는 등 노력해 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렇게 착취구조의 일부로 기능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악순환에서 벗어나기란 제법 힘든 일이었구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적 소비란 중요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그 강력한 돈, 돈 돈에 매몰된 인간성을 살리는 길일 테니까요.

우리 옆집 아주머니일 수도 우리 어머니일 수도 있는 이랜드 아주머니들이

바코드 찍는 기계가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노동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 돈 몇만원보다 훨씬 중요할 테니까요.

그리고 지금 고등학생인 제가 졸업한 이후

저 자신이 스스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이겠지요.

 

그래, 그런데,

기계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일원인 동시에 양심적 개인으로 살아가려니 참.

아니, 사실 생각해 보면 '양심적 개인'처럼 거창한 걸 갖다붙일 필요도 없어요.

그저 나를 위해, 내가 인간답게 살기 위한 일인데,

생각해 보면 참 당연한 일인데,

화폐 증식 회로 안에서 쳇바퀴 돌리는 쥐처럼

오늘도 이랜드 매장에 가시는 아파트 아주머니들을 보노라면

참 한숨이 나옵니다.

단돈 몇천원의 의미를 알기에, 따라서 그분들을 비난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그래서 참 무섭습니다.

이랜드라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것이.

과연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낸 자본주의에 대항해 이길 수 있을까요.

과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도 힘겹게 뉴코아아울렛에서 발걸음을 돌리며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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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뜨거워지는 헌법, 하지만 유리된 현실

 

 

대한민국 헌법은, 이 나라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원칙이지요.

하지만 어쩌면 이렇게 현실과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헌법 외우기 시험을 본다고 해서, 헌법 전문을 프린트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헌법 전문(前文)을 읽는데.... 가슴이 뜨거워져 오더군요.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좋은 말들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엄연히 지켜져야 할 말들이구요.

이 개정헌법을 얻기 위해 뿌렸던 땀과 눈물과 피가 얼마였덥니까.

 

그러나 레즈비언 청소년으로서

이제 나의 미래를 구상하기 시작한 저에게,

이 헌법 전문은 저 멀리에서 우렁우렁 울려오는 아주 먼 곳의 소리인 것만 같습니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제 2장에서는 또 얼마나 억울하던지요.

'이반'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

즉 '일반'과 '이반'이 나누어지고 만 이 사회에서,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한다는 말에는 헛웃음이 나옵디다.

어느새 무의식적으로 이성애와 동성애를 분리하고

이성애 계급의 입장에서 동성애자들을 억압하고 있는 꼴이 아니던가요 이뭐병...?

 

내 존엄과 가치,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다만 억울할 뿐입니다.

내 앞에 보이는 수많은 사회적 폐습과 불의는, 음, 헌법의 예외사항인가요?

 

흑흑흑흑흑

 

헌법 전문을 읽으면서 아, 그래, 이렇게 되어야지, 라고 가슴이 뜨거워져 왔지만,

그와 반대로 내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을 돌아보며 절망합니다.

 

어쩐지 헌법 외우기 시험은 만점 맞을 것 같네요.

한 구절 한 구절 어찌나 억울한지,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화나는 것.

헌법에 나오는 Every single word를 달달달 외우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답니까?

헌법의 기본 원리에 대한 어떤 학습도 없이, 이런 암기 테스트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공부하기 싫고 -_- 그냥 왠지 화가 나서요.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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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소녀를 사랑하다'

 

(네이버 책 검색으로 링크되어 있어요.)

 

 

 

이 책을 이제서야 다 읽었어요.

학교 교재 사러 들어갔던 Yes24에 이 책 배너가 떠 있길래,

옆에 있던 친구한테 무작정 '이 책 갖고 싶다, 사 줘,' 라고 농담하듯 말했었거든요.

그런데 진짜 사 주더라구요;; (고맙다, 친구야.)

친구가 책을 주면서, 책을 사기 전까지 '소녀, 소년을 사랑하다' 인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사회가 덧씌운 호모포빅 콩깍지란 무서운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아 그런데 그 녀석,

사실 '소녀'라는 걸 알아차린 뒤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으려나....

 

어쨌든, 선물받은 지는 제법 되었는데, 이제서야 책장을 덮었어요.

주인공들이 선생님들의 집에서 사랑을 나누다,

학교 선생님께 들킨 이후로 왠지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거든요.

벡스터 선생님이라는 '기독교 근본주의자'에 가까운 선생님께서

주인공 소녀들, 리자와 애니를 '현행범'이라고 표현하는 대목을 읽다가 책장을 탁 덮고

막막한 마음에 창 밖을 오래 쳐다보았더랬어요.

 

현실을 피해가며 마냥 미화하려고 한 소설도 아니고,

그렇다고 문제제기하겠어 크아악!! 라고 분노하며 쓴 소설도 아닌 듯 해요.

그저 아기자기하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이런 책이 존재해 주어서 감사한 소설입니다.

해피 엔딩으로 끝나서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제가 처음 여자아이를 좋아한다는 걸 느꼈을 때 들던 그 모든 감정들이,

마치 내가 쓴 듯 표현되어 있어서 작가 언니의 성향에 대한 의심이 들던 ㅋㅋ 책입니다.

(작가 언니에 대해 찾아보지는 않았어요. 뭐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까요!)

 

 

*

아빠의 백과사전을 꺼내서 동성애에 대해 찾아봤다.

하지만 거기에는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긴 설명 속에 '사랑'이라는 단어는 한 마디도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화가 났다. 그 설명을 쓴 사람은 동성연애자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았다.

 

 

*

그건 문제가 아니야. 그건 부정적이지 않아. 모르겠니?

사랑을 말하고 있는 거야.

너는 내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얘기하고 있는 거라고.

나를 구해 내야 하는 병 같은 걸 얘기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아.......

주인공 리자의 망설임, 두려움, 분노, 사랑, 그 모든 것들이

혼자 뚝 떨어진 레즈비언 소녀의 가슴에 푹푹 꽂혀 와서

여러 날 침대에서 혼자 눈물 흘리게 했더랍니다.

그런데 이 책 너무 좋다고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도 망설여져서... 슬프더군요.

아니 제목은 왜 이렇게 적나라한 거야! (괜히 화내기... 사실 제목이 제일 마음에 들었지만서두)

 

아, 그리고 더욱 마음에 들었던 건,

요 책이 보물창고 출판사의 'All Ages Classic' 시리즈 중 한 권이라는 거죠.

모든 세대가 읽어야 하는 Classic!

이걸 정말 모든 사람이 읽고 공감한다면 세상이 좀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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