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7/12

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12/07
    나무 이야기.
    달달
  2. 2007/12/06
    계란 한 판 같은 사람.(1)
    달달
  3. 2007/12/02
    기말고사 전날 밤(1)
    달달

나무 이야기.

미술학원에서는 늘 관찰력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정밀묘사를 스케치북 가득 그려내면서도

나는 단 한 번도 나무를 갈색으로 표현하는 데에 주저한 적이 없다.

풍경화를 그린다. 나무가 있다. 나는 주저없이 갈색 물감을 붓에 묻혀 나무의 형태를 잡는다.

그래, 나무의 줄기와 가지는 짙은 갈색이다.

이것은 너무도 오랫동안 나를 붙잡고 있던 고정관념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순간 뇌 안에서 작은 전구가 켜지는 듯한 만화적 느낌에 휩싸였다.

 

우리는 종종 나무 또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나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가 연상하는 이미지는 보통 정적이며, 생명의 역동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인체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매커니즘을 통해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고 있듯이

나무 또한 숨가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존재적 처절함만큼, 나무의 생애 또한 처절하지 않다고 누가 감히 단정할 것인가.

인간의 생애에 입혀지고 덧칠되는 수많은 고통과 위선과 허무와 희열과 행복의 색채만큼이나

나무의 생애 또한 그렇지 않으리라고 누가 감히 단정하는가.

인간이 소란스럽게 호들갑 떨며 두려워하는 온갖 자연의 재앙들을

인간보다 훨씬 기나긴 세월 동안 버텨내는 그네들이 아닌가.

 

그래. 어쩐지 안경을 쓰기가 너무나 싫었던 차갑고 청명한 아침.

뭐든지 가까이 가지 않고서는 제대로 볼 수 없는 나의 근시안 덕분에

늘 별 생각 없이 지나치던 나무에게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처음엔 나무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온통 눈으로 뒤덮여 순결하고 깨끗하며 평온했던 그 아침의 공기를 가슴 가득히 채우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성기성기 날카롭고 가벼운 모양새로 엉켜 있는 눈꽃들 위에 가만히 입술을 대어

그 작고 날카롭지만 취약한 창조물들이 입술의 미약한 온기로 녹아내려가는 느낌을 만끽하고 있을 무렵.

나무의 벌거벗은 몸뚱아리가 갑자기 나의 눈을 휘어잡았다.

마치 두드러기에 걸린 아이의 몸처럼 붉은 반점이 점점이 박힌 그네의 몸은

한쪽에서 보면 이끼가 자라난 초록빛. 또 다른 쪽에서 보면 차분한 보랏빛.

또 다른 쪽에서 보면 피를 머금은 듯한 검붉은빛으로 휘돌아치고 있었다.

아주 당연한 발견 속에서 마주하는 신선한 충격. 그네의 몸은 짙은 갈색이 아니었더랜다.

누가 그네의 몸을 갈색 물감을 묻힌 성의없는 붓질 한 번으로 규정하도록 나에게 일러 주었던 것일까.

늘 지나치던 나무였음에도 불구하고, 늘 내 눈으로 봐 왔던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째서 그네의 본래 색을 무시한 채 짙은 갈색이라는 재미없고 심심한 전형을 대입해 왔던 것일까.

어째서 그네 또한 생명이라는 것을 무시한 채 나와는 다른 무생명적 존재로 치부했던가.

그래, 눈부시게 청명했던 오늘 아침,

나의 눈을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상태의 시야를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그 안경이란 놈을 벗어던진 후에야

나는 비로소 나무라는 존재의 생명성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나무에게 완전히 밀착된, 그 자세 그대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순간 아, 하고 터지는 한숨. 혹은 탄성.

그네를 이해하지 못한 채 무심한 타자의 시선으로 볼 때에는

완벽한 피보나치 수열을 이루며 아름다운 자연의 곡선으로 뻗어나가던 그네의 가지가

그네의 뿌리에 기대어 올려다보았을 때는 얼마나 아귀처럼 처절한 모습이었는지.

그래, 관상용이라는 슬픈 이름으로 그곳에 자리잡고 살아가게 되었을 그네이지만,

그네의 삶은 결코 관상용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늘을 향해, 생명을 향해 처절하게 뻗어나간 아귀같은 손,

언젠가 불지옥을 묘사한 그림에서 보았던, 그 지옥불 속에서 뻗어나온 수많은 검은색 손들처럼

그렇게 태양빛을 향해 무섭게 질주해나간 그네의 가늘지만 강인한 가지들의 모습이 말해주듯이.

살아남기 위한 그네의 삶은 얼마나 그 나름대로의 고통과 희망의 연속이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라는 인간은, 세상의 안경 속에서 그 나무를 타자화하여 바라보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삶의 치열함과 생명성을 무생명적이고 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나무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때에서야 비로소

그네의 삶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나무를 '안다'라고 생각해 왔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나는 또 그 나무 외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안경으로 바라보고 있을 것인가.

틀림없이 갖가지 색채가 어둡고 밝으며 또 빠르고 느리게 휘몰아치고 있을 모든 존재들의 삶을

나의 기준에서 너무도 가볍게, 단색의 무생명적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 사람은 너무나 독단적이구나. 저 사람은 매사에 부정적이라 싫구나. 저 사람은 예의없으니 비호감이구나.

내가 그러한 단선적인 색안경을 통해 파악하고 있는 존재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그들 또한 내가 안경을 벗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에는

또 나름대로의 치열함으로, 에너지로 역동하며 다양한 빛깔의 사고를 엮어내고 있을 것이 아닌가.

그들을 그저 스쳐지나가는 '타자'로 파악할 때에는 그러한 존재의 아름다움과 절대로 조우할 수 없으리라.

 

아침,

나는 그렇게 나무를 통하여 다시 한번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경이로움을 자각하였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존재란 얼마나 경이롭고 신비로우며 존엄한 것인가.

누가 감히 상대를 규정하고 비난하고 미워할 수 있을 것인가.

단선적인 앎, 그 '안다고 생각하는 착각'은 무지보다 못하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며, 모든 존재와 합일을 이루려는 의지 즉 사랑과 관용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세상을 바르고 맑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나에게 나무를 보는 눈보다는 전체 숲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나무 하나하나의 경이로움과 생명성을 파악하지 못한 채 어찌 숲을 바르게 알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식으로 '숲'을 '알고 있다' 라고 착각하는 자들이야말로

인간애가 결여된 채 공학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수많은 어리석은 지식인들이다.

굳이 파시스트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 시장중심적 사회에서 인간 존재를 소홀히 하는 자들은 얼마나 많은가.

공돌이와 공순이의 피땀, 전태일의 분신을 망각한 채 개발독재를 찬양하는 이들은

개별적인 인간존재의 경이로움을 알지 못한 채 숲의 형태를 왜곡하여 파악한 불쌍한 이들이다.

여기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논의하고 싶은 것이 많지만 진부하게 길어질 테니 일단은 피한다.

 

그러나 나무의, 그 나무의 경이로운 정도로 치열하고 생명감 넘치는 삶의 흔적이 내게 가르쳐 주었듯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은 모든 존재의 생명을 존엄히 여기는 그 경외심과

포기할 수 없는 경이로움으로 가득찬 모든 개별적이고 고유한 인간 존재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나무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해 준 나의 근시안.

설사 이 눈이 몽골인들처럼 드넓은 평원 전체를 볼 수는 없는 눈일지라도,

나는 이 눈을 가짐으로써 평원에 돋아난 풀 한 포기의 경이로움과 조우할 수 있음이 감사하며 자랑스럽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계란 한 판 같은 사람.

 

나이 서른이 훌쩍 넘어 마흔길을 바라보는 노총각 두 명의 결혼 소식이 도착했다.

정말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아갈 것만 같은 분들이었는데,

두 분 모두 엄청 급작스럽게, 게다가 한꺼번에 결혼 뉴스를 들고 등장하셨다.

그야말로 서프라이즈.

두 분 모두 혼자서도 즐겁게 살아가는 화려한(?) 싱글이셨기에

나의 비혼가정에 대한 로망이 깨지는 듯해서 쪼끔 서운하긴 하지만,

그야말로 겹경사라 하겠다.

 

언제나처럼 능글능글한 말투로 전화를 걸어온 노총각 아저씨의 깜짝 결혼 발표에

깜짝 놀란 나머지 "응? 결호오온~~?!??" 이라고 하이톤으로 대답하니

능청스러운 그분의 말씀, "야, 삼촌이 계란 한 판 넘어 두 판으로 갈 때까지 혼자일 수 없잖냐~"

 

'계란 한 판'이라는 표현.

나이 서른을 그렇게 표현한단다.

그 표현을 처음 들어 봤는데,

굉장히 좋은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서른 즈음이 되었을 때,

정말 꼭 계란 한 판 같은 사람으로 성장해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계란 한 판. 그것을 떠올리면, 굉장히 풍성하고 따뜻한 느낌이 든다.

아무리 먹을 것이 없어도 집에 계란 한 판만 있으면 순식간에 식탁이 풍성해진다.

계란 후라이 대충 부쳐서 간장이랑 참기름이랑 넣고 밥 비벼 먹어도 한 끼가 해결되며,

계란말이, 계란찜, 계란으로 만들 수 있는 어머니표 밥반찬들은 얼마나 다양하고, 또 하나하나 얼마나 맛난가.

요즘에는 아토피다 뭐다 해서 계란 들어간 거 잘 못 먹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더만,

대부분의 경우 계란을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다.

친구들과 함께 찜질방이며 목욕탕에서 수다를 떨며 까먹는 계란은 얼마나 감칠맛 나는지.

라면으로 초라한 한 끼를 때울 때에도 계란 하나 깨 넣으면 뭔가 풍성해지는 느낌이 든다.

가난한 농촌 가정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아버지의 학창시절,

막내아들을 유난히 아끼시던 할머니께서 가끔 형들 몰래 도시락에 챙겨 주셨던 계란 프라이는

지금도 아버님의 포근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래, 내가 서른이 되었을때,

계란 한 판의 느낌처럼 그렇게

여러모로 쓸모 많고, 어디서나 환영받으며,

어디에 있던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풍성하며 포근한 느낌을 안겨 줄 수 있는

그런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해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계란 한 판 같이 포근하고 성숙해져 있는 내 자신을 꿈꾸며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기말고사 전날 밤

 

건전한 대한민국 여고생 달달의

기말고사 전날 밤 식단은

 

커피 세 잔

커피만 마시면 두통이 생기는 자신을 위한 타이레놀 두 알

초콜릿 하나

커피+초콜릿이라는 아토피의 적을 섭취한 뒤의 후유증을 막기 위한 스테로이드제 한 알

 

...꼭 의사가 아니더라도,

상식적인 건강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악할 만한 구성이라 하겠다.

커피를 받지 않는 몸에 억지로 카페인을 부어넣고

그 고통을 잊으려 진통제를 먹고

피부병을 가라앉히기 위해 스테로이드제를 먹고........

 

 

이렇게까지 무리수를 두며 공부하는 달달의 모습은,

고3을 코앞에 두고 2학년 마지막 기말고사를 치르는 고2 학생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서로 진통제를 먹는 것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시험 전날이 되면 다들 각성제에 커피에 진통제 등등은 기본이 되어버린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오감도>에서 막다른 골목을 향해 달려가는 아해들이 우리의 자화상인 양 느껴진다.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이유도 모른 채 끝없이 질주하는 아해들.

그저 낙오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며

자멸의 길을 향해 다같이 달려가고 있는 그 아해들의 모습은 현재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다.

 

이렇게 스스로 몸을 망가뜨리면서까지 공부해야 하는 현실

언제쯤이면 사라질까?

 

친구 중 한 명은 일주일 전부터 위염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너무 아파서 공부가 되지 않는다며 아까 식당에서 울음을 터트렸더랜다

병원에 가고 약국에 갈 시간도 아까워서

진통제로 버티면서, 울면서, 토하면서, 계속해서 공부하고 있다. 아니, 해야만 한다.

 

이건 독한 모범생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낙오자에게는 극도로 냉엄한 입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대한민국 모든 아이들의 몸부림이며, 현실인 것이다.

 

대선을 며칠 남겨두지 않은 요즘 인터넷은 온통 대선 광고로 도배되어 있다.

이명박 후보는 명박 오빠만 믿으라며 청년실업 잡아준대고,

정동영 후보는 나의 행복을 찾아주겠단다.

 

사실 두 사람 모두에게 별로 믿음은 없지만,

누가 대통령이 되든

제발

우리 고등학생들

정상적으로 자신의 건강 고려해 가면서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게끔 해 주었으면 좋겠다

 

세계적인 교육수준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우리들을 비인간적인 경쟁 속으로 내몰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

산양 비슷하게 생긴 동물인 스프링벅들은, 풀을 조금이라도 더 먼저 뜯어먹기 위해 달려가다가

결국은 온 무리가 벼랑 끝으로 떨어지는 비극적 집단 자살을 한다고 한다.

우리 또한 이러한 무의미한 경쟁에서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앞으로만 달려가고 있지만

알고 보면 이 길의 끝에는 집단 자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든다.

 

지금 내신에 목을 매며 커피를 몸 속으로 부어넣는 나의 모습,

또한 모든 학생들에게 나처럼 비인간적인 공부 기계가 되기를 종용하는 이 사회, 

이것이 진정 인간적 가치가 중심이 되어야 할 민주주의 사회의 모습이란 말인가?

 

씁쓸하다.

나는 다시 공부로 돌아가야겠다

휴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