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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화, 민영화?

1. 민영화란 말이 근 10년도 넘게 유해이다. 김영삼때부터 치면 20년가까이 되지 않을까?

민영화가 좋다고 하도 을러대니, 이른바 '행정학' 한다는 사람들도 민영화가 좋은 것인줄 알고 호응했더란다.

행정학이 원래 어용성이 있던 것이지만, 특히 경제학이나 경영학 전공자들이 대거 행정학 분야에 진출하면서는 '민영화' 논리를 주창하는 집단으로 성격을 바꾸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정부, 관료제를 연구한다는 사람들이 존재 근거를 배반하고 '민영화'가 좋다고 밑도 끝도 없이 주장했다. 물론 영삼 시절부터  정부가 스스로 정부이기를 포기하고 '민영화'의 주창자 역할을 했으니, 행정학자들이 특별히 밥벌이 하게 해주는 정부를 배반한 것은 아니다. 그 사람들 아래서 배우고 나간 수많은 관료들이 이제 중견이 되어 민영화를 뼛속까지 주장하는 집단이 되었다. 그리하여 공무원이 나서서 공공성을 훼손하는 일들이 난무하고, 공공기관의 이윤창출 행위를 칭송하는 아이러니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되었다. 저들이 지금보다 더 높은 결정권자 급의 지위에 오를 때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2. 민영화라는 위장 언어를 폐기하고 본뜻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민영'이라는 말 자체는 운영 주체가 민간이 되는 것 이상은 아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민영화라는 말에는 민간이 운영권을 갖는것 뿐만 아니라 시장화, 규제폐기와 같은 뜻이 복합되어 있다. (민영화라는 말을 쓰고자 한다면 국유화나 공유화에 대척되는 의미로 '사유화'를 말을 쓰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저들이 바라는 것이 각종 공공 서비스의 시장화인가? 사유화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또 시장화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는 것은, 기만적인 언어 사용법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이 굳이 '사유화를 통한 시장원리의 관철'을 바라는 것도 아니라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일반적인 이야기로, 교과서적인 시장 원리란 것은 이른바 소비자 주권이 관철되어 가장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최저가격으로 재화를 공급하는 시스템이란 것인데, 국가가 제공했던 거대 서비스들은 소비자가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재화들이 아니다. 시장론자들은 경쟁을 통해 서비스 공급의 효율화를 달성한다고 하는데, 그 경쟁이란 것의 승자를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번 쓰고 버리는 물건이라면 모를까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공공 서비스를 선택하는 '소비자' 기준은 단순히 최저 가격의 비교가 될 수는 없다.

 

3. 민영화라는 말은 그래서 뻔한 사기다. 누구나 알겠지만. 시장주의 경제학 교과서의 원론적 주장에는 더더욱 부합하지 않는다. 자본이 여전히 독점적인 성격(일 수 밖에 없는)의 공공서비스를 인수하여 인민의 세금으로 특혜를 받아가며 자기 배를 불리겠다는 노골적인 선언이다.

 

4. 캘리포니아에서 전력 민영화 조치 이후 나타난 재앙적인 대규모 정전 사태는 무엇을 말하는가. 전기 값을 결정하는 것은 일반 '소비자' 의 집단적 힘이 아니라 중간 전력 판매상이었다는 것. 정부는 자신들의 권력 근거인 '인민들'을 자본에게 '소비자'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팔아 넘기고 말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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