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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버타리아트 5

@ 5장 상품화에 맞서기 @

- 공장 밖에서의 유용성 창출 -

 

 

““이윤이 아니라 사용을 위한 생산”은 오랫동안 사회주의자들이 집중하던 슬로건이다.” (93쪽)

 

“그러나 … 이 요구는 당황스럽게 만드는 내적 모순을 감추고 있다. 이 모순은 대안적 경제, 산업전략이 취해야 할 방향에 관한 좌파들의 요즘 혼란 상당 부분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이 요구는, 이윤이 변화를 이끄는 최우선적인 힘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이윤이 일자리를 제공할 것인지 말지를 결정하는 절대적 기준이라고 받아들이지도 않지만, 가장 효율적으로 이윤을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자본주의가 선호하는 산업활동인 상품 문제는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93~94쪽)

 

“자본주의 제품 생산과정 그 자체에는, 모든 요소를 이윤에 종속시키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자본주의는 오직 교환을 위해 상품을 제조함으로써만 노동계급한테서 잉여가치를 착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94쪽)

 

 

“사회주의자들이 미래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구상하는 작업에 나서게 되면, 강조점은 대안 생산물에 확고히 두어진다. 공장의 일거리가 단조로운 단순 노동이며, 저급하며 위험한 것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지만, 공장 폐쇄에 대응한 해법은 공장을 다시 열거나 새 공장을 짓는 것이다. 공장 체제 자체에 대한 총체적인 대안은 생각하지 않는다. 왜 좌파는 자본주의의 상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기를 꺼려하는 것일까? 이윤을 최우선시하는 것에 대한 사회주의적 도전이 왜 열의가 약하고 모호할까?” (94~95쪽)

 

“서로 다르지만 연관성이 있는 일련의 요소들이 관련되는 것 같다. 여성을 ‘서비스’ 업종으로 내몰면서 공장 일은 남성의 일이라는 관념을 유발하는 노동의 성별 구분, 작업 내용을 합리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숙련기능’에 대한 임금 우대를 유지하기 위한 방어적 투쟁의 산물인 숙련기술의 왜곡된 정의, 과학과 기술이 모든 이에게 궁극적으로 이로운 진보의 중립적인 전령이라고 생각하는 맹신, 노동자 의식과 전투성은 상품 제조 과정에 직접 관여하는 노동자들의 전유물이라는 믿음이 이 요소들이다.” (95쪽)

 

 

“화폐경제의 이 3개 산업 외에 꼭 필요한 기능을 하지만 임금노동과는 상관이 없는 네 번째 활동이 있다. 이를 부르는 이름은 여러 가지인데, 어떤 것도 완전히 만족스럽지 않다. 재생산, 소비, 가사노동이라고 하는 영역이다. 이는 가정과 공동체에서 이뤄지는 상품 및 재화의 소비, 어린이와 노인과 장애인 돌보기, 임금 노동자에 대한 봉사와 관련되는 일들로 구성된다. 이런 일들은 거의 여성들이 맡는데, 이 장의 취지에 맞춰 ‘사회화하지 않은 노동’이라고 부를 것이다.” (95~96쪽)

 

 

“가정이라는 사적인 영역과 화폐경제라는 공적인 영역 간 왕래는 이제 쌍방향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집안에서 일어나던 활동을 야금야금 밖으로 가져가 사회화할수록, 생산성을 높이려는 욕구와 이윤이 나지 않는 일을 가능하면 외부 경제로 전가하려는 욕망이 소비자들에게 또 다른 일거리를 떠넘기고, 그래서 소비자들이 대가도 없는 일을 떠안는다.” (103쪽)

 

 

“많은 서비스 산업은 노동자들이 상사에 종속되지 않고 일을 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면서 일정한 진보를 제시하기도 한다. 아주 특화된 지식을 갖춘데다가 자동화 정도는 낮은 상태여서, 대부분의 업무 관련 위험을 잘 이해할 수 있고 그래서 위험을 피하는 것도 상대적으로 쉽다.” (105쪽)

 

“제조업의 상황은 아주 다르다. …… 숙련기술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과정이 진행된다. 한편에서는 아주 고도의 숙련기술을 갖춘 통제 및 설계 담당 일자리를 극히 일부 창출하고 다른 한편으론 각 개인이 전체 생산 과정에서 파편화한 일부만을 수행하는 단순 반복적인 일거리를 대거 만드는 것이다. 이 둘의 간격은 결코 이을 수 없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이제 전체 노동과정에 대한 시각을 지니지 못하며 오직 자신이 맡은 부분에 대해서만 완전히 이해한다.” (105쪽)

 

“그들이 다루는 화학약품, 컴퓨터가 제어하는 통제 시스템과 기타 신비화한 ‘과학’의 산물들은 이제 이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됐으며, 이는 자신들이 직면할 수 있는 위험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105쪽)

 

“일의 속도는 기계가 결정하기 때문에, 개별 노동자는 자신의 업무 속도를 조절할 힘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관리자에게 업무 속도에 대해 항의할 수도 없게 되는 상황도 아주 흔하다.” (105~106쪽)

 

 

“가정의 소비 노동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제조업의 노동과정과 아주 유사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소비 노동은 가공식품, 가정용 화학제품, 가정용 기기, 기성복과 같은 상품의 구매와 가족들에 대한 제공 및 사용에 전적으로 바탕을 둔 활동이다. 이 제품들 대부분의 설계와 작동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부들은 사용법과 사용에 따르는 위험성에 관한 정보를 ‘전문가’로부터 얻을 수밖에 없다. (보통 이 도움이란 끌끔하게 인쇄된 설명서의 형태다.) 망가지거나 사고가 나면 다른 전문가(수리공이나 의사)에게 연락하라고 되어 있고, 그래서 주부들은 그들이 문제를 해결해 줄 때까지 별 수 없이 마냥 기다려야 한다(이것도 물론 그들이 해결할 수 있을 때에 한하지만).” (106쪽)

 

“주부는 학교, 일자리, 상점 여는 시간 등 외부의 시간표에 맞춰 돌아갈 수밖에 없는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일처리 순서를 스스로 결정할 여지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주부가 해야 하는 일거리와 그 일의 마무리 수준은 날로 외부적인 것들에 의해 좌우된다. 이런 외적인 요소들은, 기계와 집의 구조, 음식이나 옷감의 화학적 구성, (아이들을 언제 남들에게 맡겨도 되는지, 또는 학교는 언제 보내야 하는지 등을 정하는 법률 같은) 법적인 제약,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압력 같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주부가 노동과정을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능력을 약화시킨다. 이런 과정은 또 공장 노동자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가사노동에서 모든 숙련기술을 박탈해 기계구조 속에 포함시킨다.” (106~107쪽)

 

“가정일과 서비스업 활동의 상품화가 진행될수록, 여성이 가사노동에서 해방되기는커녕 가사노동이 스트레스 쌓이는 고된 일로 바뀌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나는 걸 볼 수 있다. 공장노동에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타난다. 자동화의 물결이 몰아칠 때마다 숙련기술이 줄어들고 일의 만족도는 떨어진다.” (107쪽)

 

 

“상품생산 우선주의에 도전할 전략개발 측면에서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엔 몇 가지 장벽이 있는 것 같다.” (108쪽)

 

“그 첫 번째는 노동의 성적 분화다. 사회화하지 않은 노동 영역을 보면, 소비 노동을 처리하고 집을 유지하며 가족을 돌보는 일은 압도적으로 여성이 맡는다. 화폐 경제에서는, …… 여성들이 가정에서 무보수 노동을 책임지고 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여성의 시간은 소중한 것으로 취급받지 못한다. 여성들이 일하는 차별받는 영역은 일반적으로 임금이 낮은 ‘노동의 빈민가’이기도 하다. (108쪽)

 

“이런 현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바로 여성의 숙련기술에 대한 평가절하다. 청소, 요리, 아이 보살핌, 옷 만들기 같은 숙련기술은 모든 여성들이 당연히 갖춰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게다가 이런 기술은 가정에서 가족들을 위해 아무 대가 없이 발휘하는 것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이런 기술들은 그 어떤 희소가치도 없으며, 시장에서 임금과 교환되는 상황이 되면 값이 바닥까지 떨어진다. 사실은 왕왕 숙련 기술로 인정받지도 못하며 이런 기술로 벌어먹고 사는 이들은 보통 비숙련 노동자‘로 낙인찍힌다.” (108~109쪽)

 

 

“종종, 일자리에 ‘숙련’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그 일의 어려움을 반영하기보다는 그 일을 맡고 있는 이들의 조직력과 교섭력 정도를 반영한다. 공장노동의 질 저하와 파편화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핵심 원칙은, ‘숙련’이라는 이름표를 붙임으로써 과거의 관행을 지키고, 견습 기간 제도 같은 것을 도입함으로써 그 일자리 접근 기회를 자신들이 통제하는 것이었다. 이런 숙련기술 집단화의 분명한 목적 한 가지는, 여성과 이주 노동자들처럼 그들의 존재 자체가 자신들의 교섭력과 단결을 약하게 하는 자신들보다 취약한 노동자들의 유입을 막고, 이를 통해 위에서 언급한 분업을 영구화하고 더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런 행태는 여성이 하는 일을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게 한다. 대부분의 ‘서비스’ 일거리는 사내답지 않은 일로 여겨지지 않으면 비천하고 격이 떨어지는 것으로 취급된다. 이런 대접을 받는 건, 그 일 자체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보통 그 일을 하는 이들이 지녔다고 평가되는 속성 때문이다.” (109쪽)

 

“서로 다른 일거리의 상대가치를 왜곡되게 평가하는 현상과 함께, 노동자의 전투성에 대한 좌파의 틀에 박힌 시각이 존재한다. 계급의식을 지닌 프롤레타리아를 형성하는 게 공장 시스템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무릎 꿇릴 강력한 노동자 조직이 등장할 곳도 바로 그곳이라는 생각을 깨뜨리기는 아주 어렵다. 혁명을 경험한 러시아‧중국‧쿠바 등등의 나라에서 농민이 맡았던 구실은 차치하고, 영국의 역사만 봐도 이런 전제가 얼마나 의심스러운지 알 수 있다.” (109~110쪽)

 

“1978년 ‘불만의 겨울’(1976년 여름 영국 경제가 침체에 빠져 국제통화기금의 긴급 자금지원을 받았고, 이와 함께 공공 예산을 급격히 줄였다. 77년 8월 실업자가 160만 명을 넘어서는 등 노동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자 주요 노조들이 78년 말부터 79년 초까지 대규모 파업을 벌였다. 당시 노동당의 제임스 캘러헌 총리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했고, 이 때문에 그는 79년 5월 총선에서 패배했다)에 영국 정부를 무너뜨린 이들 또한 공장 노동자가 아니긴 마찬가지다. 대부분은 공공 부문 여성 서비스 노동자들이었다. 제조업 노동자들이 어떤 서비스 노동자들에 비해서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 훨씬 강력한 전투성을 보여 준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1978년에 버금가는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 제조업 노동자 집단을 집어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문제는 자본에 대한 관계 설정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젠더(사회적 성별)의 산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10쪽)

 

“여성 서비스 노동자들은 조직화의 어려움을 깨닫는데, 이 어려움은 서비스 노동자여서가 아니라 여성이기 때문이다. 가정일 때문에 집회에 참석할 수 없고, 가정 때문에 집 근처 중소기업에서 일하거나 시간제로 일해야 한다. 또 남성들이 그들을 배제하고 바보 취급하거나 학대한다. 또는 경제적 어려움이 너무나 커서, 높은 임금이자 좋은 조건을 위해 쉽게 타협하지 않고 버티는 게 힘들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모두가 합쳐지면서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생긴다. 이 관념에 반대되는 긍정적인 인상이 다소간 고상한 일을 하는 백인, 남성 공장 노동자의 노동계급 전투성이다. 유일한 ‘진정한 부의 생산자’로 여겨지는 이들 남성의 노동은 중요하고 고귀한 것으로 평가될 뿐 아니라 숙련 노동으로 받아들여진다. 게다가 미래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어때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모델로 여겨진다. 대조적으로, 보통 서비스 업종에 속하는 다른 종류의 노동은 기생적이라고 노골적으로 평가 받지 않을지언정 노예적이고 고귀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게다가 그것은 비숙련 노동이며 여성적인 데다가 진짜 남자가 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평가된다.” (110~111쪽)

 

“통계를 보면 실제 노동계급 구성은 이런 이미지와 배치된다. 영국에서는 노동자의 40% 이상이 여성이며, 전체 노동자 가운데 서비스업 종사자의 비중은 이보다도 높다. 그런데도 이런 이미지가 좀더 추상적인 수준에서는 사회주의 이념과 어색하게 공존한다. 우리는 과녕 보살핌이 사회화된다면 그 형태는 결국 서비스 형태가 아닌가? 작업복 입은 남성 공장 노동자를 이런 전망에 어떻게 꿰맞춰야 하는가? 이런 모순의 해결은 단순한 문제가 아닌데, 좌파 진영에서 최근 몇 년 동안 이 문제를 꽤 고민했음이 명백하다. 그들의 딜레마는 다름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사회적으로 유용한 대안 생산물을 얻을 때 느끼는 즐거움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이런 ‘대안’ 생산물을 적시할 수 있다면, 이 노동자들을 다시 공장으로 보내 자신들의 숙련 기술을 이용해 필요한 사용가치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남성 노동자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처지로 전락함으로써 자신들의 남성성을 망치는 걸 피하면서도 자신들도 보살핌을 베푼다는 것을 과시할 수 있다.” (111~112쪽)

 

“이런 해법은, 상품생산을 더욱 늘리는 것이 사회주의적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생산력주의)을 강화시켜주는 생각이자 맑스주의자들이 공동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과도 충돌하지 않고 어울리는 생각이다. 그 생각이란, 과학과 기술은 가치중립적인 진보의 추진력이며 힘닿는 한 빨리 개발해서 언제인가 무르익으면 노동계급이 완전히 쟁취해서 모든 이들에게 여가와 풍요를 제공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관념이다.” (112쪽)

 

“이 관점에서 보면 기술은 건설이 아니라 파괴를 위해 개발됐다. 개념과 구상 자체가 반여성적, 반노동자적이며 현재의 형태를 그대로 이어받아서는 생명과 건강과 일상의 삶에 엄청난 위협을 주는 걸 피할 수 없다. 과학은 신비화됐고 타당하지 못하다. 또 과학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건 개발비용을 대는 계급이며 그들은 개발 방향을 지시한다. 이런 비판은, 상품을 더 생산하면 필연적으로 우리가 사회주의를 향해 한 발자국 나아가게 된다는 생각에 반대해 우려를 제기할 근거를 넓혀 준다.” (112~113쪽)

“그렇다면 우리가 나아갈 길은 어딘가?” (113쪽)

 

“일자리 창출과 사회적 수요 충족을 동시에 추구하는 미래 전략을 마련하려고 할 때, 생산물이 필연적인 답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 전제가 맞는다면 십중팔구 현재 자본주의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세력들이 답을 찾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아직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분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는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 이들이 자신들의 조직을 통해서 스스로 제시하는 생각에 귀 기울이는 걸 뜻한다. 임신한 여성이 태아 검사를 더 자주 하길 원하는가? 중증 장애인들이 새로운 장비를 원하는가, 아니면 돈, 혹은 재가(在家) 도우미를 선호하는가, 그것도 아니면 다르게 설계된 집을 원하는가? 살림살이에는 실제로 어떤 노동이 요구되며 그 노동을 가장 잘 사회화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서비스 산업이 날로 자본 집약화하고 셀프서비스 경제화하는 경향을 뒤집을 수 있나? 그리고 어떻게 하면 노동과정을 더 만족스럽고 안전하게 바꿀 수 있는가?” (113~114쪽)

 

“열악한 환경의 저임 노동이 존재하는 새로운 게토를 만들어내지 않고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는 해법을 찾아내려면, 소중하게 간직한 상당수의 생각에 도전하고 새로운 조직화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 특히 사회주의자들은 성적, 인종적 노동 분화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하며 이를 극복할 방법을 찾아나서야 한다. 또 지역 공동체와 서비스 분야 노조 내부에서 전통적으로 침묵해 왔고 소외됐던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조직화를 돕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기 시작해야 한다.”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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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버타리아트 4

@ 4장 전 세계로 확대된 사무실 @

- 정보기술과 사무직 노동의 재배치 -

 

 

“정보기술이 정보처리 일거리를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갈 잠재성과 이를 통해 사무직 노동 분업의 국제화에 기여할 여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다.” (85쪽)

 

 

“정보기술의 도입이 불러오는 이러한 변화상을 서로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연결된 세 가지로 구별 짓는 것이 가능하다.” (85쪽)

 

“첫 번째 것은, 사사무 자동화가 조직구조에 ‘분리’ 또는 ‘분해’ 효과를 끼치는 데서 비롯된다. 의사결정 구조를 정식화하고 조직 내 각 개인의 실적을 개량화하여 감시할 잠재력을 극도로 높임으로써, 정보기술의 도입은 거대 조직의 수직적 분해에 상당히 기여한다. 그리고 이는 하청의 증가와 소규모 기업의 팽창을 부르는데, 특히 첨단기술 산업에서 심하다. 그렇다고 이 추세를 따로 떼어내 봐서는 안 된다. 영국에서처럼 정부가 정책적으로 권장하는 고용의 비정규직화라는 좀 더 일반적인 추세의 맥락에서 봐야 한다. 정부의 비정규직화 촉진은 예컨대 노동권 보호법안의 폐지와 공공 서비스의 사영화 추진 등을 통해 이뤄진다. 산업의 수직적 해체 작업은 특정 지역 내 고용구조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노동 분업과도 연관성이 있다.” (85~86쪽)

 

“정보기술의 고용구조에 변화를 가져오는 두 번째 방법은, 노동과정을 외부화할 수 있는 능력과 그에 따른 노동 비용의 외부화 능력을 통한 것이다. …… 여러 고객 기업의 사무실에 원격 작업용 단말기를 설치함으로써, 그 전에는 중앙에 위치한 조지에서 모두 처리하던 반복적인 사무를 고객에 해당하는 기업이 고용한 사무직 노동자에게 넘기는 게 가능하다. 이는 노동 비용의 상당 부분을 밑으로 전가하고 관련 산업과 영역의 고용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보험회사는 보험 대리점에 비용을 떠넘김으로써 노동을 줄일 수 있게 됐으며, 여행사는 여행 대리점에, 자동차 부품 공급 업체는 차 수리점에 각각 떠넘기는 게 가능해졌다. 은행과 소매점망과 같은 분야에서는, 노동의 상당 부분을 셀프서비스라는 이름으로 소비자들에게 떠넘기는 상황까지 감으로써 이 과정의 논리적 귀결점에 이미 도달했다. 꼭 지적할 사실은, 컴퓨터 시스템이 세밀한 감시와 정교한 경영 정보 시스템을 제공할 수 있게 되면서 고용의 탈집중화에는 통제의 집중화가 보통 수반된다는 점이다.” (86~87쪽)

 

“정보기술이 업무 조직 형태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세 번째 방법은, 통신망 연결을 통한 ‘원격 근무’를 도입할 잠재력에서 비롯된다.” (87쪽)

 

 

“한 국가 내부적으로 보면, 변화는 도심의 일자리를 교외나 지점으로 옮기는 것, 고위 기술직과 경영진의 업무부터 단순 데이터 입력까지 다양한 사무직 업무를 재택근무로 대체하는 등의 몇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변화에는 보통 임금 수준의 하락과 병가, 휴가, 모성보호 장치, 연금 혜택 등 각종 복지의 하락이 따르는데, 적어도 큰 기술이 필여 없는 일자리의 경우는 어린 자녀를 돌봐야 할 필요성 때문에 가정에 더 얽매이는 처지인 여성들이 주로 이런 변화의 영향을 받는다.” (88~89쪽)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정보기술의 발전은 대부분의 사무직 업무(와 전산화한 생산 및 공정처리 시스템과 관련된 몇몇 수작업)가 더 이상 특정한 지역에 묶여 있어야 할 필요성을 없애버림으로써 정보처리 업무의 급격한 구조조정을 부를 이론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는 …… 통제의 중앙집중화와 신기술이 해방의 도구가 아니라 지배의 도구로 쓰이는 걸 보게 될 공산이 크다.” (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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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버타리아트 3

@ 3장 말단의 고립 @

- 망으로 연결된 사회에서 노동과 여가의 원자화 -

 

 

“여성주의자들은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사회적 성별 관계를 형성하는 장소로서 가정의 중요성을 제시하곤 한다.” (65쪽)

 

 

* 가정의 정치경제학 *

 

 

“20세기 초에는 자기 집을 지닌 노동계급이 파업과 반란을 막는 최선의 도구라고 인식됐다. …… 집을 지닌다는 건,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향을 강화시키고 고정 수입에 대한 의존을 심화시키며 비축하는 습성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와 개별 구성원의 이동을 줄어들게 만든다. 결혼증명서보다는 집 담보 대출이 사람을 서로 관계 짓고 특정한 장소에 묶어두는 데 훨씬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67쪽)

 

 

“서비스를 이용하는 대신 상품을 구매하는 현상은, 서비스 업종 노동자가 임금을 받고 하던 일을 소비자들의 무보수 노동으로 대체하고 이런 가정용 기기의 구입, 작동, 유지와 관련된 새로운 일거리들을 만드는 효과를 발휘한다. 서비스업 합리화와 자동화의 다른 측면들은 소비자가 직접 수행해야 하는 새로운 유형의 무보수 운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68쪽)

 

“물론 많은 경우 전통적인 양식의 서비스들은 노동계급 대부분으로서는 그 전에도 접근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셀프서비스의 등장은 그래서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것,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인식된다. 또 새로운 지위의 상징을 제공하는 것으로도 여겨진다.” (69쪽)

 

“이런 과정 전체가 일자리 측면에서 볼 때 소비자의 위치에 급격한 변화를 유발했음을 알 수 있다. 배티어 와인바움과 에이미 브리지스 같은 평자들이 훨씬 정교하게 지적한 것을 빌려 표현하자면 소비자를 ‘소비 노동자’로 변화시킨 것이다.” (69쪽)

 

 

“소비 노동이 날로 개인의 문제가 되면서, 그리고 소비 노동자들이 힘을 쏟는 부분이 자신의 집과 소유물의 개선, 유지, 보호에 집중되는 일이 심해지면서, 공공 서비스 형태는 그만큼 약화되고 있다. 선술집, 극장, 축구장, 정치 집회 장소에 모이는 인원이 지난 몇 십 년 동안 두드러지게 줄었다. 카페, 골목길 식료품점, 번화가 공구점과 같은 수많은 소규모 사업이, 많은 걸 소비자가 손수 처리하는 방식의 도입을 통해 비용을 낮춘 거대 즉석식품 체인점, 슈퍼마켓, 그리고 소비자 직접 조립형 제품 상점 등에 밀려나고 있다.” (70쪽)

 

“1983년 영국 총선은 거의 전적으로 ‘미디어 선거’로 치러진 첫 번째 경우였는데, 이 선거에서 노동당이 크게 진 데는 공식, 비공식적 공고 집회의 퇴조가 한몫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공적인 공간이 줄어들고 사적인 활동이 대신하면서, 대안 문화의 퇴조 현상이 나타난다.” (71쪽)

 

 

“소비 노동 대부분은 여성들 몫이며, 그래서 이런 변화의 영향을 남성들보다 더 많이 받는다.”

“사라지는 전통적인 가사 기술은 일반적으로 여성들의 기술이며, 새로운 살림용 기술(제품)을 설계하고 관련 제품을 수리하는 데 필요한 기술은 거의 남성들이 장악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새로운 기술은 여성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가사노동에 대한 남성들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또 다른 도구를 제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남성들이 대부분 장악한 의료 기술이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것과 유사하다. 가사노동이 늘어나고 가사노동에 새로운 형태의 소비 관련 일거리가 더해지는 것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이들도 주로 여성이다.” (71쪽)

 

“마지막으로, 우리는 공적인 공간의 축소가 여성에게 끼치는 영향도 주목해야 한다. 먼저, 대부분의 여성은 남성보다 상당히 가난해서 경제적으로 남성에 의존하거나 아니면 훨씬 적은 임금으로 홀로 버틴다. 그래서 자동차, 전화, 비디오 녹화기처럼 부실한 공공 서비스를 사적으로 해결하게 해주는 도구들을 살 여력이 남성보다 훨씬 못할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 공공시설이 사라지면 훨씬 더 타격을 받게 된다.” (71쪽)

 

“둘째, 여성들은 이것저것 돌보는 일을 주로 맡는다. 어린 아이들, 노인들, 장애인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집과 집 주변 일에 더 발이 묶이게 된다. 셋째, 여성과 어린이는 주면에 물리적 위험이 늘어날 때 가장 취약한 존재들이다. 오늘날 많은 어린이들은 자동차 위험 때문에 집안에서 논다. 마치, 자신들의 엄마와 누나들이 강간의 위험 때문에 밤에는 집에서 한치도 나가지 못하듯이 말이다. 이웃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안전할 수 있는 공동 공간이 사라짐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자신의 집에 외로이 갇혀 있게 된다.” (72쪽)

 

 

* 가정생활에 대한 암시 *

 

 

“노동자들이 이제 떠맡아야 할 것으로 당연시되는 것들은 이렇다. 집 구매 및 유지 비용과 구매자금의 이자 부담, 서비스 산업을 대신해 새로운 가사 일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세탁기, 전기드릴, 비디오 녹화기 같은) 다양한 자본재 구입 비용, (슈퍼마켓 오가기, 가정용 냉동기 가동에 들어가는 에너지 비용 같은) 소비재 운송과 보관 비용 상당 부분, (직접 조립하는 가구와 장난감 같은) 많은 소비 내구재 조립 비용, (은행 출납원, 주유소 쥬유요원, 상점 보조원 등의) 서비스 노동 상당 부분의 비용, (산업용 재봉틀, 가정용 컴퓨터, 타자기 같은) 임금노동에 필수적인 몇몇 자본재 비용, 게다가 난방비, 각종 에너지 비용, 식당 유지비, 사무실 공간 비용처럼 고용주가 보통 제공하던 많은 간접 비용, 재택 노동자들에게는 제공하지 않는 유급 휴가, 모성보호 관련 혜택, 퇴직수당, 연금 같은 혜택에 들어가는 비용.” (80~81쪽)

 

 

“이런 상황(…)은 통제력 상실과 속박의 강화와 함께 나타나며, 이로써 노동자들은 자본에 종속된다.” (81쪽)

 

“자본의 통제는 몇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먼저, 통제는 노동력의 개별화를 통해 강화된다. 각자의 집에 고립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힘을 합치는 것은 날로 어려워진다. 이는 소비 노동자건 피고용인이건 (또는 다른 측면에서 여성이건, 장애인이건, 부모건, 특정 민족 소속이건) 상관없이 마찬가지다. 두 번째로, 새로운 기술과 재택 노동자의 관계에서 통제는 기계와 시스템을 이용하는 식으로 작동하게 구성되어 있다. 요즘 데이터 입력용 소프트웨어에 표준적으로 포함되는 요소가 작업자의 성과를 아주 철저히 감시하는 기능이다. 1분당 키보드 입력 횟수, 오류 비율, 처리한 항목 개수, 휴식 시간과 휴식 빈도, 기타 고용주가 유용하다고 여기는 변수를 동원해 감시한다. 이런 방법은 전통적인 감독 방법보다 월등하게 효율적으로 노동자들을 단속할 수 있게 해 준다. 몇몇 기업은 이런 원격 통제 기술을 거의 예술 경지까지 높여서 노동자들의 고독감까지 생산성 향상에 이용해 먹는다.” (81쪽)

 

 

“(덜 직접적일지언정) 훨씬 더 사악한 함의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정보기술 때문에 날로 더 손쉬워지는 세 번째 방식의 개인별 통제법이다. 이 방법은 감시를 통해 이뤄지는 통제다. 컴퓨터 단말기로 이뤄지는 업무 기능이 늘어감에 따라, 작업 기록을 디지털 형태로 저장하는 것도 날로 쉬워진다. 이미 당혹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개인 정보가 각종 정부 기관과 기업들에 의해 확보되고 있다. 원격 근무, 원격 쇼핑, 원격 금융거래는 수집 정보를 급격하게 늘려줄 것이며, 이를 통해 개인과 개인의 행동, 선호도에 대한 더욱 세밀한 파악이 가능해진다. 미국에서는 이미 홈쇼핑 실험이, 광고 대상을 정확하게 파악해 내기 위한 개별 이용자의 ‘소비자 특징’ 구성에 이용되고 있다. 이런 자료는 잠재적 파괴분자나 저항 활동 관련자를 식별하기 위해 정부에 의해 손쉽게 이용될 수 있다. 빅 브라더는 예정대로 1984년에 딱 맞춰서 온 것 같다.” (82쪽)

 

 

* 교훈 얻기 *

 

 

“이런 경향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일까?” (82쪽)

 

“첫째,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가정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투자용 자금과 그 가정을 기술(제품)로 채워야 하는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서 임금에 훨씬 더 의존하는 처지로 내몰린다고 볼 수 있다.” (83쪽)

 

“둘째, 집단적 공간이 허물어지고 조직화와 의사소통의 수단이 사라지면서 노동계급의 개별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는 중앙집중식 이데올로기적 통제를 강화한다.” (83쪽)

 

“셋째, 여성은 가정 내에서건 외부에서건 기술 덕분에 해방되기는커녕, 남성에 더욱 의존하는 처지에 놓이고 있다.” (83쪽)

 

“넷째, 막대한 노동 비용이 서비스 산업에서 소비자에게 전가되고 새로운 형태의 소비노동이 늘어감에도, 소비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권한을 잃는 일이 생겨난다. 이는 자동화가 일터에서 촉발한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 권한 상실과 밀접한 연과 속에서 병렬저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83쪽)

 

“다섯째, 여성이 임금 노동자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날로 높아지겠지만 그들의 일은 점점 더 홀로 집에 고립된 채 수행하는 방식으로 되어갈 것이다.” (83쪽)

 

 

“이런 변화 양상이 사회주의자와 여성주의자들에게 던지는 함의는 무엇일까? 제기되는 가장 중요한 의문은, 통제에 관한 것이 되리라고 본다.” (83쪽)

 

“자본과 국가 중앙조직의 손아귀에 점점 더 장악되어 가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한 통제권한을 일정하게 되찾아오게 해 줄 조직 형태와 요구사항을 모색하는 작업이 더욱 시급한 과제로 제기된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일부 활동은 이런 방향을 향하고 있다.” (84쪽)

 

“런던 광역시 의회의 대중 계획 정책 입안, 비정규직 반대와 작업장 내 건강 및 안전 확보를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 가사를 집단적으로 처리하려는 실험, 공공 서비스 축소 반대 캠페인 등이 이런 것들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대응하는 사회주의적 기획은 손에 꼽기도 힘든 것 같다.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선, 기술, 사회, 경제적 변화가 국가, 지역, 마을 또는 특정 산업 단위뿐 아니라 개인 가정 단위에까지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분명히 분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84쪽)

 

“가정이야말로, 빅브라더의 힘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장소이다. 또 고립된 여성과 남성 개인이 체제와 맞부딪힐 때 느끼는 무력감이야말로 빅 브라더의 힘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지점이다. 그 메커니즘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때라야 거기에 맞서 싸울 수 있다.”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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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버타리아트 2

@ 2장 살림용 기술 @

- 해방자인가 속박자인가 -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를 포함한 맑스주의자들의 전통 한 가지는, 새 기술이 기본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점이다.” (55쪽)

 

 

“새로운 기술이 가정에 끼치는 영향을 조사하려면, 지금까지 가정에 도입된 기술들이 여성을 가사 노동자 처지에서 해방시키지 못했으며 여러 시간을 무보수 가사노동에 들여야 하는 현실에서 벗어나게 하지도 못했다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57쪽)

 

“여전히 대부분의 가정에서 가사 일은 여성의 책임으로 여겨진다. 가정 내 노동시간에 대한 조사 또한 평균적으로 여성이 가사노동에 들이는 시간은 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20년대에 주당 60시간 정도였던 것이 1970년에는 70시간 이상이 됐다.” (57쪽)

 

 

“상황을 이렇게 만드는 데 기여한 요소는 몇 가지가 있는 것 같다. 첫 번째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 교육 체계, 광고, 의약품 및 정신의학 ‘전문가’들의 조언이 어우러지면서, 여성들은 자신의 할머니들은 1년에 한번 봄철에 하던 대청소를 집안 구석구석 매주, 심지어 매일 소독까지 겸해서 하도록 설득 당했다. 또 옷은 한번 입으면 언제나 빨라고, 아이들은 끊임없고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으면 극도의 결핍에 시달리게 된다고 설득 당했다.” (57~58쪽)

 

“가사노동이 줄지 않게 만드는 두 번째 요소는 가정생활의 개별화 현상의 직접적인 결과다. …… 음식 조리 기구를 꺼내서 조립하고 분해하고 씻고 다시 집어넣는 건, 두 명분 음식을 만들건 이십 명분을 만들건 별 차이 없이 많은 시간이 드는 일이다. 여성들이 각자 자기 집에서 하는 다른 수많은 일들도 사정이 이렇기는 마찬가지다.” (58~59쪽)

 

“세 번째 요소는 경제 전반에 기술과 과학이 적용된 결과물이다. 임금노동 영역이 자동화되고 이익과 효율을 극대화하는 한편 임금은 최소화하기 위해 합리화되면서, 보수가 없는 ‘소비 노동’(이는 배티어 와인바움(Batya Weinbaum)과 에이미 브리지스(Amy Bridges)가 이름 붙인 것이다)이 날로 소비자들에게, 다른 말로 하면 가정주부들에게 떠넘겨지고 있다.” (59쪽)

 

“무보수 노동은 곧 여성의 일로 통하는 사회에서, 이런 셀프서비스(경제학자 조너선 거슈니(Jonathan Gershuny)는 ‘셀프서비스 경제’ 경향을 주장한다)는 압도적으로 여성들에게 떠넘겨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더 넓은 경제 범위에서 여성노동의 가치가 낮게 취급되는 경향을 공고히 하고, 이는 다시 가정 내에서 여성 억압을 영구화한다.” (59~60쪽)

 

“가사노동을 늘리는 데 기여하는 네 번째 요소는, 여성의 보살피는 구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성은 가정 내에서 가족 전체, 더 구체적으로는 아이들과 나이든 이들과 몸이 불편한 식구의 건강과 안전을 책임지도록 요구된다. 임금 노동자들이 깨닫게 됐듯이,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위험을 유발한다. 지난 100여 년의 과학과 기술 발달의 결과, 이제 가정과 집 주변은 몸이 건장하고 기민하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죽음의 덫과 같은 곳이 되어 버렸다.” (60쪽)

 

 

“이 모든 것의 효과는 아주 모순된다. 한편으로, 가사 일이 쉬워지고 덜 전문적으로 바뀐다는 것은 누구나 맡아서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남성들이 그전보다 더 많은 일을 나눠 맡음으로써 여성을 해방시켜 줄 잠재성을 여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물건 판매상이 광고하는 것만큼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남성들이 더 자신 있게 비판할 수 있게 해 준다. 한 여성이 다른 젊은 여성에게 전수해 주던 비법들은 이제 누구나 아는 대수롭지 않은 게 됐고, 그래서 비법에 대한 존중도 사라졌다. 이것은 특히 나이든 여성들에게 자신이 없어도 그만이고 다른 여성들로 대체될 수도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는 여성들을 더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더 불안하게 만든다. 이런 경험은, 새로운 기술의 도입으로 일이 더 쉬어질 때 나이든 수련 노동자가 자신의 값어치가 떨어지고 자신이 없어도 그만인 처지라고 느끼는 것에 필적하는 것이다.” (62~63쪽)

 

 

“분명히 일터의 새 기술 문제에만 대응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기술이 우리 생활 구석구석에 영향을 끼친다는 걸 인식해야 하며, 이 악영향에 저항할 길을 찾아야 한다. 지역 공동체들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부분적으로 제시할 수 있으리라 본다.” (63쪽)

 

“아마 우리는 의사와 사회복지 담당자, 산파가 자주 더 집을 방문하라고 요구하고 슈퍼마켓에서는 배달을 요구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또 탁아소와 양로원, 장애인 시설 확충, 거리와 놀이터의 안전 확보, 집의 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운동도 분명 계속해야 한다.” (64쪽)

 

“또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믿는다. 지금 가정에서 여성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본주의를 몰아내지 않는 채 자동화 또는 유급 서비스를 통해 해결하는 사회 또는 여성이 해방을 달성하는 사회를 상상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서비스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규정해야 하며, 이 서비스들이 우리의 통제 아래서 이뤄지도록 요구해야 한다.”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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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버타리아트 1

# 『싸이버타리아트』(어슐러 휴즈 지음, 신기섭 옮김, 갈무리, 2004) #

 

 

이 책을 다 읽지 못했지만, 자본주의 경제시스템과 과학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이것들이 가부장제와 가사노동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에 대하여 구체적인 분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 1장. 신기술과 가사노동 @

 

 

--> 이 장에서는 새로운 기술 진보가 가사노동의 사회화(상품화)를 불러오고, 남성들의 임금노동과 여성들의 무보수 가사노동의 분업화를 일으켰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가사노동의 사회화는 가장 값싼 새로운 일자리를 가난한 여성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가난한 여성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효과를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다른 한편, 새로운 기술의 진보가 서비스 업종의 노동의 규격화를 시도하고 생산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함으로써 규격화되지 않는 부분의 노동을 소비자에게 떠넘긴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은행의 자동 입출금 기계 앞에서 기다리면서 과거에 은행원들이 했던 입출금 일 등을 고객이 알아서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가사노동의 사회화에서 거의 똑같이 일어난다. 세탁기, 진공청소기 등이 도입되어도 가사노동은 거의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조금 더 늘어났다는 것이다. 또한 상품의 규격화와 생산성 증대는 남성 노동의 일을 더욱 지루한 것으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남성들로 하여금 가정을 보다 편안한 곳으로 생각하게 만들고, 결국 가정을 이전보다 더욱 편안하고 안락한 곳으로 만들 책임이 여성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결국 여성에 대한 이중 착취가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변화는 지역과 노동자 조직화에 대한 새로운 암시를 우리에게 줄 수 있다고 말한다.

 

 

- “상품 생산의 사회화는 몇 가지 영향을 끼쳤다. 먼저 공장에서 상품을 대량 생산함으로써 생산 방법과 기술 개발의 합리화가 가능해졌고 이는 물건 값 하락을 불렀다. 그래서 집에서 직접 물건을 만드는 것이 더 이상 경제적이지 못하게 됐다.” (40쪽)

 

“두 번째로 가정에서는 창조적인 ‘생산’ 활동이 사라졌고 그 자리를 창조적이지 못한 소비 활동이 대체했다. 장보기가 살림살이의 일부분이 됐고, 이와 동시에 살림살이는 임금에 의존하게 됐으며 소매업이 발전할 길이 열렸다.” (40쪽)

 

“세 번째로 (예를 들어 섬유업처럼) 여성이나 어린이를 위한 일자리가 많이 창출되기는 했지만, 제조업 발전은 ‘남성의 일’(집 밖의 임금노동)과 ‘여성의 일’(무보수 가사노동)의 분화를 재촉했고 ‘가족임금’과 같은 개념을 만들어냈다.” (41쪽)

 

 

- “살림살이의 사회화에서 아주 흥미 있는 측면 하나는, 논리적으로 당연히 예상되는 것과 달리 살림살이에 들이는 전체 시간이 줄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밖에 나가 일거리를 얻을 기회가 생기긴 했지만 집안에서 하는 무보수(가사) 노동량은 약간 늘었으면 늘었지, 별 변화가 없다. …… 가사노동은, 변변한 기술이 없는 생산라인 노동자의 단조롭고 파편적이며 스트레스 심한 일에 가까워 보인다.” (43쪽)

 

 

- “어찌해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됐을까? “일거리를 덜어주는” 장치들이 왜 제 구실을 못하나? 이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서로 다른 몇 가지 요소를 점검해야 한다. …… 첫째로, 서비스 업종 노동자의 일을 규격화하고 생산성을 높이려는 시도가, 소비자에게 몰래 전가되는 “소비 노동”의 양을 계속 늘게 만든다. …… 소비자들이 슈퍼마켓의 상품 진열대에서 직접 물건을 담고, 채소를 직접 봉지에 넣고, 주유소에서 직접 주유하고 은행의 자동 입출금 기계 앞에 줄서고, 그래서 시간을 들이는 사람은 서비스업 노동자가 아니라 소비자인 것이다.” (43~44쪽)

 

“한쪽에서 일을 줄인다는 건 단지 그 일을 다른 쪽에 떠넘긴다는 걸 뜻한다는 지적은 경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유효하다.” (44쪽)

 

“두 번째로, 서비스의 중앙 집중화는 시간, 에너지, 운송비용을 사용자에게 전가한다. …… 골목 귀퉁이의 가게가 아니라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슈퍼마켓, 의사가 집으로 왕진을 오는 대신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 진찰실을 찾아가야 하는 것 등이 그렇다.” (44~45쪽)

 

“세 번째로 이데올로기적 압력도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20세기 초에 나타난 가정학(domestic science) 운동, 미생물 병원설(病源說), ‘과학적 모성’ 이념의 발전이 살림살이의 기준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봄철에 연례 대청소를 하며 살던 이들이, 이제 청소를 일주일에 한 번도 하지 않는 건 부도덕하다고 믿게 강요했다. 가을에 겨울철 속옷을 짓고 봄이 되어서야 풀어 빨던 이들은 매일 속옷을 빨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손자들을 낳고 말았다.” (45쪽)

 

“네 번째로, 임금노동이 발전하면서 나타난 결과물의 하나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일터의 ‘공적인’ 세계와 가정의 ‘사적인’ 세계가 나뉘었다는 것이다. 가정은 소외되고 짜증나며 긴장되는 노동 환경의 피난처가 되고 오락과 휴식, 정서적 지원, 성적 자극과 기쁨을 제공하는 장소가 되기를 사람들은 기대한다. 이런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부담은 그 요구 자체가 사회화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주부에게 떠넘겨졌다.” (45쪽)

 

 

- “정서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이제는 금전적 관계의 일부가 됐음에도, 여전히 이 욕구의 충족을 돌보는 책임은 주부들 몫이다. 가정이 행복하지 못하면 주부 잘못이고,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려면 가사노동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임금노동이 더 따분해지고 더욱 단순 반복적인 작업이 되고 스트레스가 커질수록 이런 욕구 또한 커진다. 그런데 임금노동이 이렇게 힘들어지는 추세는 새로운 기술 도입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46쪽)

 

 

-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가 등장하고, 이것들은 가사노동의 또 다른 부분을 사회화해 대체할 것이며 가사노동의 단순 노동화를 심화시킬 것이다. 기존 서비스업과 제조 공정에 대한 투자는 노동력 착취와 중앙집중화를 더 강화할 것이며, 이는 시간이 많이 소모되고 노동력 집약적인 일들을 소비자들에게 떠넘기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다. 임금노동이 날로 힘들고 불쾌해지면서, 여성에게 정서적 뒷받침과 평화, 행복, 기쁨을 제공하라는 요구가 훨씬 거세질 것이다. 소비 압력도 커지고, 새로운 저임금 일자리가 여성들을 위해 만들어질 것이다.” (46쪽)

 

 

- “이런 분석을 근거로 몇 가지 잠정적인 결론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가사노동의 사회화 자체가 여성을 해방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 여성들도 억압적이고 소외를 유발하는 가사노동 상황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소비수단과 서비스에 대한 어떤 방식이든 통제권을 요구해야 한다. 새로운 기술은 자본이 우리의 생활 영역을 점점 더 자신의 통제 번위 안으로 포섭하는 도구이다. 단지 생산 지점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지점에서 통제권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억압이 계속 강화되기만 할 것이다.” (52~53쪽)

 

“두 번째로, 우리의 조직화 방안에 대해 암시하는 바가 있다. 새로운 기술은 단지 임금노동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지역 공동체 생활의 본성을 극적으로 바꾼다. 기술은 또 여성운동 조직과 지역사회 조직이 새 기술의 가장 나쁜 영향에 대응할 필요성을 유발한다. 새 기술이 불러온 발전상 자체가 새로운 공동체 조직화 방안이 마련될 전제조건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고도로 자동화된 산업에서 새 기술의 도입이 노동자들을 원자화하고 개인을 고립시켰지만, 새 기술의 도입은 소비자와 서비스 이용자들을 대기실에 모이거나 줄서서 기다리는 식으로 무리 짓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방식의 운동과 조직화가 나타날 수 있다. 노동자 조직과 지역 사회 기반 조직들의 연대 행위도 가능할 것이다.” (53쪽)

 

“마지막으로, 신규 산업의 저임 여성 노동자들의 처지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무보수 가사 노동자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초과 착취를 당하는 임금 노동자로서, 신기술이 끼치는 최악의 영향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들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모든 여성, 한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임금 노동자의 조건도 따라서 악화될 것이다.”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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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사 방학이닷!

음하하핫!!!!

좀전에 계절학기 성적 입력까지 다 끝마쳤다.

이제... 제발 조용히 책 좀 읽어보자...

자잘한 게 몇 개 남았지만..

가뿐히 넘겨 주시고...

 

이제 정신 좀 차리고...

공부해 보자,

아니 놀아보자!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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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철도 999와 이상한 나라의 폴...

일요일 오전에 우연하게 EBS교육 방송을 보게 되었는데,

그 옛날 초딩, 중딩 시절에 너무 좋아했던 만화영화들이라서

하루 종일 흥얼거렸댔다.^^ 

그래서 함 올려 본다^^.

 

일요일 이른 10시부터 11시까진,

<이상한 나라의 폴>

일요일 이른 11시부터 12시 30분까진,

<은하철도999>

하니깐 시간 나시면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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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총장 청문회를 보고...

아침에 울 어머님 집에서 아침을 먹다가 검찰총장 인사청문회를 한다고 해서 잠깐 보았다.

 

그런데 검찰총장 후보로 나온 자가 아마도 어떤 비리에 연루되어 있긴 하는가 보다.

돈을 누구한테 빌렸는데, 그 돈의 출처가 불분명하고,

이는 구린 데가 있다는 것처럼 야당(민주당)의원이 질의를 해댔다.

 

하여간 뭐 후보로 올라오는 인간들 대부분이 현재는 MB의 총애(?)를 받으니

어찌 구린 데가 없을까...

일단 참으로 썩소를 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딴나라당 의원들의 노골적인 편들기였다...

정말 희대의 코미디였다.

딴나라당 의원이 마치 검찰총장 후보를 질책하면서 코너에 몰아세우는 듯이

큰소리로 격하게 말을 하는데,

그 말의 내용들이 검찰총장 후보가 공안 검사 출신으로서 얼마나 사명감에 불타고

14억 재산밖에 없어서 얼마나 청렴결백한지를 그 후보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그 후보자의 얼굴은 참으로 난감하고 당혹스럽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것들이 국민 알기를 우습게 아는 거다.

그런 코미디 쇼에 넘어갈 국민들이 어딨을까마는...

이것들은 분위기 파악 못하고 코미디를 하는 꼴이란...

하여간 또 한번의 썩소를 날릴 수밖에...

 

근데 공직자 생활 24년에 14억을 모은 것이 청렴한 것이냐?!

그럼 안 청렴한 것은 도대체 얼마를 해처먹은 것일까... 

아이, 육두문자 나온다...

보지 말았어야 하는... 

 

그래서 그런지 오늘 똥을 두 번 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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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정적 자율지대: 또는 마다가스카르의 유령-국가[펌글]

적린님의 [잠정적 자율지대: 또는 마다가스카르의 유령-국가] 에 관련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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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주요 내용은 마다가스카르의 베타포 마을에는 국가-제도들이 여전히 있어도 실질적으로는 국가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레이버는 전통적인 국가의 정의(합법적 폭력의 독점 혹은 소유관계의 보증)가 이들 지역에 실제 국가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별하게 해 주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분명 어떤 수준에서 국가는 '있지만' 이곳의 국가는 대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국가의 필요, 즉 사회기간시설이나 보장을 제공하는 일에는 무능력하고 그렇게 할 의사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법을 집행하고 폭력을 독점하려는 의사조차 그다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이 마을은 '전통적'인 자치 기술, 일종의 '직접민주주의'적 조직 방식에 훨씬 더 크게 기대고 있으며, 생활에 필요한 물자 역시 주민들이 알아서 조달한다(기간시설을 제외한다면). IMF가 부과한 긴축재정 탓에 생활수준이 크게 추락한 지역들은 마다가스카르 말고도 세계에 많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러한 전통이 유지됨으로써 껍데기만 남은 국가와 상관없이 삶이 지속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물론 그레이버는 지역의 상황을 낭만화하지는 않는다. 식민기에 경험했던 폭력의 역사, 그리고 그것의 잔존물인 공교육 제도 및 의무병제에서 재생산되는 명령-지배 관계의 현존, 그리고 하루 벌이가 힘든 경제적 문제 또한 엄연히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 이런 '제3세계 국가'에서 발견되는 무정부 상태(비정부 상태라고 해도 좋겠고, 여튼 아나키한 상태)에 대해 타지역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유일한 경우는, 폭동이나 소요, 참사와 같이 극단적으로 나쁜 일이 발생했을 경우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시각은 '그곳에서' 매우 다른 일들도 벌어지고 있다는 점, 정말로 국가가 사라졌을 때 다른 가능성들이 열린다는 점을 못 보게 만든다. (보편적/절대적 희생자 담론이 쓸모없을 뿐만 아니라 나쁘기까지 한 이유의 하나다.)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의 전형적인 전략은 '보는 앞에서는 비위를 맞추고' 돌아서면서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듯 행동하는 것, 말을 안 들으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내버려두고 지켜 보는 것, 명시적인 대결을 피함으로써 국가가 '체면'을 잃지 않고 거기에 만족하도록 하는 것, 최종적으로는 국가가 마치 없는 듯 살아 갈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레이버는 마다가스카르에서 국가가 보여 주는 '포용력'(자신이 말라가시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은 그것이 공허하다는 바로 그 사실 하나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번역본은 아래 전문을 옮겨 놓았다. 글이 매끄럽지 않지만... 그래서 미안하지만... 다시 손 볼 짬이 없어서 그냥 이대로 가야 할 듯. 원문은 Possibilities: Essays on Hierarchy, Rebellion, and Desire(2007, AK Press)에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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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정적 자율지대: 혹은 마다가스카르의 유령-국가


나는 마다가스카르로 떠나기 직전에 십 년 이상 그곳에서 작업을 해 온 고고학자인 헨리 라이트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조심해야 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교외 지역을 쑤시고 다니려면요.” 국가 권위가 해체되는 중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섬의 많은 지역에서는 국가가 실질적으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수도 근방의 지역에서조차 (마을 의회인) 포콘올로나fokon'olona가 처형을 집행하기 시작한 상태였다.


이것은 내가 마다가스카르에 실제로 도착하자마자 잊어버리게 된 많은 근심거리들 중 하나였다. 수도에는 상당히 기능을 잘 수행하고 있는 정부가 있었다. 교육 받은 사람들 대부분은 정부에서 일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서쪽으로 한 시간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인 아리보니마모Arivonimamo로 옮겨 가자마자 사태는 상당히 다르게 보였다. 사람들은 분명 언제나 정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사람들이 마치 그런 것이 있는 듯 행동했다. 행정 구조는 있었다. 사람들이 서류를 작성하고 소유물을 등록하는 곳, 출산과 사망을 추적하고 사람들의 가축 수를 헤아리는 관청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가장 중요한 의례를 행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했다. 정부는 학교를 운영했고 국가시험을 주관했다. 헌병대, 감옥, 그리고 군수용 비행기가 놓인 공항도 있었다.


그가 해준 말이 정말로 사실일 수 있었는지 궁금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은, 아리보니마모에 머물기 시작한 지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였고, 지금 되돌아보면 심지어 그곳을 떠난 후였다. 어쩌면 내 자신의 편견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나 효과를 발휘하며 어디에나 있는 정부 아래서 살아왔기 때문에 단서들을 잘못된 방식으로 읽어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베타포Betafo에는 국가가 아예 없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아리보니마모에도. 아니면 나나 다른 서구인들이 국가란 그렇게 움직여야 한다고 추측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는 국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 말로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하는지 설명하기 전에, 무대를 먼저 설정하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리보니마모와 베타포
 
나는 마다가스카르에 1989년 6월 16일에 도착했다. 첫 여섯 달 동안에는 수도인 안타나나리보Antananarivo에 살면서 말을 배우고 문헌 연구를 했다. 안타나나리보 국립 도서관은 매우 뛰어난 자원이었다. 도서관 장서에는 19세기의 마다가스카르 왕국으로부터 유래한 수천 건의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왕국은 수도를 둘러싸고 있는 이메리나Imerina 주의 고지대 지역 전반으로부터 얻어진 것이었다. 대부분은 말라가시어로 되어 있었다. 나는 수백 개의 서류철을 뒤지며 동이마모Eastern Imamo 주와 관계된 모든 서류를 주의 깊게 복사했다. 이 지역은 이메리나의 일부로 내가 작업을 진행하려 했던 곳이었다. 당시 동이마모는 다소간 잠에 빠진 지역으로 수도에서 벌어지는 시끄러운 정치 투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농촌 오지 마을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지역은 또한 도둑떼의 습격과 산업 프로젝트의 진행, 주기적인 반란이 계속 발생하던 반쯤 빈 영토인 불안정한 이메리나 지역의 변방에서 완충되어 있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벌어지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곳은 내가 흥미를 갖고 있던 느린 사회문화적 변화 과정을 연구하기에 완벽한 현장인 것처럼 보였다.


일단 말라가시어를 최소한으로나마 다룰 수 있다고 느끼게 되자마자 나는 지역의 주요 마을인 아리보니마모로 떠났다. 그곳까지 가기는 전혀 힘들지 않았다. 아리보니마모는 수도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멀지 않아 마을에 정착하고 주변 교외 지역으로 정기적인 조사를 다니며 구전되는 역사를 수집하며 더 자세한 연구를 할 만한 지역인지 주시하고 있었다.


아리보니마모는 수도 서쪽에 있는 주요 고속도로의 근방에 수천 명 정도의 사람들이 군집을 이루며 살아가는 마을이다. 그곳에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국립공항이 있었는데, 이 공항은 마을 남쪽에 있는 넓은 계곡 지대에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공항이 돈과 일자리를 가져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경제를 통합하는 구실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공항은 거의 접붙인 채 간신히 매달려 있는 부분이나 다름없었다. 공항으로부터 나오는 길은 아리보니마모를 거의 지나가지조차 않았다. 여행객들이 밤을 보낼만한 장소도 없었다. 공항은 1975년에 수도에서 좀 더 가까운 다른 공항으로 대체되었다. 구 공항은 군대의 소유가 되었지만 군대는 그 공항을 이용할 만한 자금이 거의 없었다. 1990년 무렵 외국인이 그 곳을 거쳐 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잔여물은 부서진 합판 껍데기만 남은 텅 빈 식당뿐이었다. 이 식당은 공항 도로와 마을 바로 바깥에 있는 고속도로가 통합되는 지점에 서 있었다.


현재의 마을은 택시 정류장을 중심에 두고 있으며 이 정류장은 가톨릭과 개신교 두 개의 큰 교회들이 양 옆을 에워싸고 있는 넓은 아스팔트 광장이다. 이곳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승객과 가방과 바구니들을 가득 채우고 수도로 향하거나 고속도로 서쪽으로 더 이동하려 하는 밴과 역마차로 붐볐다. 택시 승강장의 남쪽 가장자리에는 넓게 가지를 펼치고 있는 아몬타나 나무가 서 있다. 이 나무는 매우 오래 된 침엽수로 마을의 상징적 중심으로 여겨지며, 그곳이 한 때 왕의 공간이었다는 점을 표시한다. 그 북쪽으로는 음식 가판대와 붉은 타일로 치장된 아케이드가 들어선 시장터가 있다. 이곳은 매주 금요일이면 시골 사람들과 흰 천막을 친 노점들로 붐빈다. 마을 자체는 길(전기가 공급되는 유일한 장소) 옆에 매달려 있다. 집들은 대개 이층이나 삼층으로 되어 있고, 2층 바닥 주변을 둘러싼 베란다를 받치는 아름다운 기둥들과 주석 혹은 타일로 된 뾰족한 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리보니마모는 같은 이름으로 된 행정구역의 수도이기도 하다. 그곳에는 정부 관청 여러개와 세 개의 고등학교가 있다. 하나는 국립학교(CEG)이며, 다른 학교는 가톨릭계 리세이고, 다른 학교는 개신교 학교다. 진료소가 하나 있으며 마을에서 약간 서쪽에 있는 높은 절벽 위에는 작은 감옥이 하나 있다. 구 공항의 근처에는 헌병대의 병영과 더불어 우체국과 은행이 있다. 이 건물들은 정부가 있음을 알려 준다. 근처에는 한 때 공장이 있었지만 내가 갔을 무렵에는 방치된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난 상태였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그곳에서 뭔가 생산된 적이 있기는 한지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마을의 상업 경제 대부분은 공식적인(세금을 내고 규제되는) 영역 바깥에 나가 있었다. 약국, 그리고 두 개의 큰 상점이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그 밖에는 주민들은 말라가시 마을의 일반 규칙에 따라 움직였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식량을 길러냈다. 모든 사람들이 무언가를 팔았다. 길가에는 수십 개의 가판과 상점들이 들어서 있었고, 모두 얼마 안 되는 종류의 동일한 품목들을 팔고 있었다. 이 품목들은 비누, 럼주, 양초, 식용유, 비스킷, 소다수, 빵이다. 차를 갖고 있는 사람은 택시 연합의 구성원이었다. VCR을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극장 상영기사였다. 재봉틀을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의류 생산자였다.


이메리나 주는 수도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관개 평야인 안타나나리보의 가운데에 있었다. 이곳에는 오랜 동안 매우 밀집된 인구가 있었으며 강력한 왕국의 중심을 차지해 왔다. 메리나 왕국은 19세기에 마다가스카르의 거의 전 지역을 정복했다. 안타나나리보는 1895년의 프랑스 점령 이래 행정 중심지 역할을 유지해 왔고, 주변 영토는 마다가스카르의 행정관료와 교육받은 엘리트층의 영지로 남아 있게 되었다. 현재의 아리보니마모 주를 이루고 있는 영토는 언제나 다소간 변방이었다. 왕국에 통합되기에는 너무 늦었고, 수도를 중심으로 한 화폐 및 인맥의 네트워크와는 매우 약한 정도로만 통합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현재도 정치경제적으로는 주변부이며 많은 일이 벌어지는 법이 없다.


아리보니마모의 북쪽에는 붉은 언덕이 끝도 없이 펼쳐진 시골 지역이 있는데, 일부는 풀로 덮여 있고, 다른 곳들에는 (키 작은 떡갈나무처럼 보이는) 타피아나 유칼립투스 나무가 숲을 이룬 지역, 그리고 소나무가 들어선 지역이 드문드문 있다. 언덕은 좁게 꼬인 계곡들이 가로지르고 있으며, 계곡의 양편에는 조심스럽게 층을 만든 논들이 들어서 있다. 화강암으로 된 산들이 여기 저기 솟아 있는데, 이 산들은 고대의 왕들이 안착했던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외진 시골지역에는 포장도로가 없다. 사람들은 대개 걸어서 다니고 자전거를 살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물건들은 소가 끄는 수레로 실어 나르며, 수레가 지나가는 길은 진흙투성이여서 겨울에조차 가장 강력한 구동의 자동차가 아니면 가기 힘들 만큼 울퉁불퉁하게 패여 있다. 여름철에 비가 오기 시작하면 아예 지나갈 수가 없게 된다. 행정수도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업화된 대규모 농업이 없는 까닭은 왕래의 어려움 탓이 크다. 농부들은 재배한 작물의 일부를 마을에 있는 시장터로 실어 나르는 데 성공하여 안타나나리보의 인구를 먹여 살리는 데 도움을 주지만 그 양이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경작하는 사람들이 매우 작은 규모만을 취급하는 상인들에게 무한하게 다양하고 작은 거래들을 통해 물건을 판매한다. 그 모습은 마치 사람들이 지역 생산품을 사고팔아 얻게 되는 보잘것없는 소득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의 손으로 분배되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이미 말했던 것처럼 나의 첫 작업은 구술사를 채집하는 것이었다. 대개의 경우 나는 아리보니마모에서 온 말라가시 친구들 한 둘을 데리고 마을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집중적인 현지조사를 하게 된 베타포 마을에 안착하게 되었다. 내가 이 공동체에 매혹된 까닭의 일부는 그 [수적인] 구성이 안드리아나andriana(대개 ‘귀족’으로 번역된다)와 그들의 전 노예의 후손으로 거의 완벽하게 양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타포는 암보히드레이딤비Ambohidraidimby라는 이름의 길고 낮은 산맥 남측에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 어느 곳에서든 아리보니마모의 중심까지는 걸어서 30분-40분 정도가 걸린다. 그곳은 많은 사람들이 실제 하듯이 마을에 살면서도 베타포에 경작지를 보유하고 양쪽 장소 모두에 집을 두어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메리나에 있는 대부분의 농촌 공동체들은 일종의 경제적 분업을 이루고 있으며 분업은 특히 겨울에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한 마을에서는 남성들이 모두 푸줏간일을 하는가 하면, 다른 마을에서는 여성들이 [지역 일대에서 소비되는 모든] 바구니를 짜거나 밧줄을 만든다. 아리보니마모 시장통의 공간 지도는 노점상의 근거지나 판매하는 상품을 따라 그릴 수 있다. 베타포 사람들은 전통적으로는 대장장이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전체 가구의 3분의 1정도는 여전히 대장간 시설을 뒤뜰에 유지하고 있다. 대장장이 일을 그만 둔 사람들 중 많은 수는 대장장이에게 철괴를 공급하거나 그들이 생산하는 쟁기나 삽을 시장터나 이메리나 다른 지역에서 열리는 장날에 판매한다. 지역의 노력으로 출발했던 것이 내가 도착했을 무렵에는 극적일 만큼 확장되어 있었다. 행정수도의 서부에 있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베타포는 주로 쟁기를 파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타포 사람들 중 실제 손수 쟁기를 만드는 사람은 전혀 없었고, 모든 쟁기는 베타포의 암매상들이 공급한 철로 아리보니마모의 근처에 있는 다른 마을에서 만든 것이었다.


교역의 집중화는 1970년대 이후 마다가스카르 전체에 걸쳐 삶의 질을 극적으로 하락시킨 경제적 압박에 대한 반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부업이 엄청나게 증가하여 어떤 가정에서든 여성 한 명은 시내에서 커피 가판대를 운영하거나, [옷감이나 바구니를] 짜는 일을 하거나, 시장에 있는 노점상에게 내다 팔기 위해 카사바 발효품을 만들거나 하는 일을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했고, 남성이라면 파트타임으로 소 수레를 몰거나 한 해 여러 달을 이메리나의 다른 지역에서 파인애플을 팔며 보내거나, 교외 지역에는 이따금만 들르면서 시내의 택시 정류장 근처에서 일회용 라이터 기름을 재충전하며 일상의 대부분을 보내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은 베타포와 같은 공동체에 대한 소속을 정의하기 다소 까다로운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통계를 내기 위한 자료조사에 게을렀던 것은 아니다. 사실 내가 처했던 상황이 불러 온 특이한 효과 중 하나는, 서고에서 조사를 하는 동안에는 1840년대와 1920년대 베타포 주민의 인구학적 특성과 재산 소유 상황에 대해 상당히 자세한 내용을 조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베타포에 있던 당시에는 그에 상응하는 통계 자료를 얻는 데 성공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이 중요하다. 나는 이 점이 실제로는 상당히 근본적인 어떤 것을, 내가 실제 있었던 장소가 어떤 종류의 공간이었는지를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아리보니마모에서 살고 베타포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연구 수행의 정치적 측면에 대해 생각하면서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사실 거의 모든 인류학자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이다. 내 경우에는 특히 약간의 자의식이라도 갖지 않기는 매우 힘들었다. 그 시절 도시민들은 나에게 나와 같은 바자하Vazaha(나와 같은 유럽 계열의 사람들)를 시골 사람들이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그리고 시골 사람들은 아이들이 바자하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말해 주면서 각별한 즐거움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말라가시 사람들에게 “바자하”라는 말 자체가 폭력의 위협을 느끼게 만들었다. 나에게는 다행이었지만 그 말은 일차적으로 “프랑스 사람”을 뜻했고, 나는 (끊임없이 설명해야 했던 것처럼) 프랑스어는 하지도 못했다. 말라가시어로만 말했기 때문에 상황을 약간 누그러뜨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연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떤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메리나는 한편으로 매우 교육률이 높은 곳이었다. 내가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으려 연구하는 미국 학생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해도 그 뜻을 이해하는 데 어려워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일이 합법적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존중할 만한 일이라는 점을 의심하는 사람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앎의 기술은 지배의 기술과 매우 가까운 것으로 동일시되었다. 그 때문에 나는 곧 어떤 질문들은 다른 질문들에 비해서 사람들을 훨씬 편하게 만들어 준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과민반응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발을 들여놓기를 원하지 않는 영역으로 들어섰다는 느낌을 받게 되면 곧 그만두었다. 나는 그보다 사람들이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해 주기를 바랬다. 그 결과 나는 처음 그 곳에 갔을 때 1925년의 재산 분포에 대해(심지어는 1880년의 경우에도) 알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재산 조사는 정부나 할법한 종류의 일이다. 이 일은 힘의 위협을 지지대삼아 진행되었고, 노동력이나 세금을 강제로 끌어내는 작업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이 사실은 서고에 방대한 양의 기록이 있다는 점을 의미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바로 그 일이 내가 하려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고 싶어 했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심지어는 집집마다 방문해서 가구 구성원의 수를 체계적으로 확인하는 행동조차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일은 사람들이 등을 돌리게 하는 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을 것 같다. 확실한 숫자를 얻지 못한 것은 지불해야 하는 대가치고는 작은 것이었다.
 
국가의 존재 자체
 
이제 국가라는 최초의 문제로 돌아가 보려 한다.


아리보니마모와 그 주변 시골 지역에는 정부가 있었을까? 한 수준에서는 그 대답이 완벽하게 분명하다. 물론 있었다는 것이다. 정부관료, 정부관청, 그리고 최소한 시내에는 정부가 운영하는 학교, 은행, 병원이 있었다. 대부분의 경제적 거래는 (장부에 기입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정부가 발행한 말라가시 화폐를 사용하며 이루어졌다. 영토 전체는 세계 다른 모든 국가들이 인지하고 있는 말라가시의 주권적 권위가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었고, 이 영토에서 국가의 주권 권위에 대해 공공연하게 도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국가를 대변한다거나 정치적 대안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역시 한 명도 없었다. 반란 공동체도 없었고 게릴라 운동도 없었으며 이중 권력 전략을 추구하는 정치 조직도 없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상황은 사뭇 다르게 보인다. 최소한 이 지역에서 (그리고 이곳은 행정수도의 권력 중심에 매우 가까운 지역이었다) 말라가시 정부는 국가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자체 정의를 충족하는 기능으로 간주되는 일의 대부분을 수행해 내지 못했거나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에 대한 서구식 정의의 대부분에서 국가 권력이 무엇인가를 강요할 수 있다는 문제가 핵심 사안이다. 국가는 “힘”(폭력의 위협을 완곡하게 말한 것)을 차용하여 법을 강제한다. 여기서 베버는 고전적인 정의를 내린다. 즉, “연속적인 조직을 지닌 강제적 정치 연합은 ‘국가’라고 불릴 수 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조건은 그에 소속된 행정부원들이 그 질서를 강제하는 과정에서 물리력을 합법적으로 독점할 수 있는 권한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실제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1968 I: 54). 하지만 베버의 정의는 그 자체로는 그저 당대에 통념적이었던 법적 견해를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 그는 루돌프 폰 이헤링이라는 이름의 초기 독일 법률 이론가의 작업을 직접 참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헤링은 1877년에 국가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정의했다.
 
국가는 사회적 강제력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며 그럴 능력이 있는 유일한 존재다. 강제할 수 있는 권리는 국가의 절대적인 독점을 형성한다. 물리적인 강제 수단을 통해 그 구성원에게 자신의 주장을 실현하기를 바라는 모든 연합은 국가의 협조에 기대고 있으며 국가는 그 권력 안에 그런 도움을 허용할 수 있는 조건을 배치해야만 한다(Turner &Factor 1994:103-104에 인용되어 있음).
 
이런 정의는 사고방식을 고정시켜 두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특정 조직이 국가인지 결정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정의는 국가일-수-있는 것이 그 독점권을 주장하는 데 ‘성공적’이었는지에 대한 개인적 느낌에 의존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의는 분명 근대 서구의 정부제도 배후에 있는 암묵적인 공통감각을 포착해 낸다. 이 감각은 말라가시에서도 전혀 낯설지 않다. 말라가시 공화국은 프랑스의 식민 체제에서 동일한 모델을 따라 조직되었으며 크게 보면 현재의 형태 역시 식민주의적 제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 말라가시 사람들 대부분은 이런 방식으로 힘을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은 본질적으로 국가를 그런 형태로 만든 것이라는 데 동의했을 것이다. 이것은 말라가시 시골 대부분 지역에 국가가 그렇게 하려는 의사가 거의 완벽하게 없다는 점을 더욱 더 충격적인 것으로 만든다. 국가는 강제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완전한 독점을 유지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하기는커녕, 그저 외연적으로 볼 때 자신의 일차적인 기능을 그저 전혀 행사하기 않았을 뿐이었다.


행정수도에는 경찰이 있었다. 아리보니마모 주변에서 경찰력에 가장 가까운 것은 시내의 약간 서쪽에 병영을 갖고 있는 헌병 부대 하나뿐이었다. 그들이 하는 주요 업무는 고속도로를 순찰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따금 들은 바에 따르면 그들은 도적떼와 싸워 더 서쪽으로 보내 버리곤 했다. 그러나 그들은 포장도로 바깥, 다른 대부분의 사람이 실제로 살고 있던 시골지역으로 향하는 울퉁불퉁한 먼지길을 따라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골에서는 누군가가 살해되지 않는 이상은 헌병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경우에조차 실제로 나타나서 누군가를 데려 가기 전까지는 뭔가 상당히 극적인 것이 필요했다. 상당히 많은 수의 증인들이 문간에 나타나 무슨 조치를 취하기를 요구한다거나, 혹은 이미 그들 자신이 용의자를 둘러싸고 있을 경우처럼.


그들은 시내에서조차 그다지 경찰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나는 아리보니마모에서 앙리라는 이름의 불량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체격이 크고 단단한 남자로 어쩌면 미쳤을 수도 있었는데(일부 사람들은 그가 그저 그런 척 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마을 주민들에게 수년 간 겁을 줘 왔다. 앙리는 지역의 가게에서 무언가를 사들이는 데 힘을 쓰곤 했고 누구도 감히 그를 막지 못했다. 그는 마을의 젊은 여성들에게는 특히 위험한 인물이었고, 여성들은 성폭행을 당할까봐 늘 두려움에 떨며 살았다. 시내의 젊은 남성들은 많은 토론을 거친 후 결국 힘을 합해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이 일을 계획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고지대 그 지방에서는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폭행을 하기를 바라면 먼저 그 사람의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비공식적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이것은 그저 부모의 권위를 강화하는 효율적인 수단이며 일종의 궁극적 처벌의 형태였지만(혹은 누군가의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정말로 그 사람이 마을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방식), 이 경우에는 아들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여러 차례 헛고생을 한 끝에 앙리의 아버지가 두 손을 들고 일을 진행하라고 허락을 해 버리게 되었다. 그가 다음 차례로 싸움을 도발했던 때에 한 무리가 즉각 칼과 농기구를 들고 무장한 채 나타났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를 죽이는 데는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심하게 부상을 입혔을 뿐이어서, 앙리는 성당에 피신하는 데 성공하고 은신처를 요구하며 정신질환으로 인한 박해를 주장했다. 이탈리아인 사제는 그를 밴의 뒤에 숨겨서 광인 수용시설로 빼돌렸다. 그는 곧 퇴감되었지만(다른 환자를 때림) 여러 해 동안 아리보니마모에 얼굴도 내밀지 못했다. 내가 처음으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부모가 허락하게 된 상황의 구체적인 면모에 주로 관심이 있었다. 나는 이후에야 이 일이 진짜로 마을의 파출소에서 벌어졌다는 일을 깨닫게 되었다. 앙리는 무슨 수로 오랜 기간 동안 아무 제재도 받지 않은 채 마을을 공포에 떨게 할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물었다. “헌병대는 왜 아무 일도 안 한 거죠?”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앙리를 못 봤어요? 덩치가 어마어마하잖아요!”“하지만 헌병대한테는 총이 있잖아요!”“물론 그렇지만 그래도.”


이와 같은 사건은 모든 면에서 예외적이었다. 아리보니마모 주변의 폭력에 관해서 가장 중요한 점은 폭력 자체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살인은 충격적이며 고립된 사건이었다. 앙리와 같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골 자치조직은 법을 강제하려면 질서의 (강제)력force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창조적인 전략들을 고안해 내야만 했다. 내가 머무르던 기간의 끝무렵에는 베타포에서 폭력이 발발하는 경우에 대처하기 위한 포콘올로나 회의(마을 자치조직)가 있었다. 벤자Benja라는 이름의 남성은 불같은 성격 때문에 악명이 높은데 공동 업무 계획을 둘러싸고 여동생과 말다툼을 했고, 이야기가 계속되기로는 딱 죽기 직전만큼만 때렸다. 그녀가 실제로 얼마나 심하게 맞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상당한 차이를 보였지만, 이 문제는 즉각적인 주의가 필요한 매우 심각한 경우라고 여겨졌다.
 
포콘올로나는 상당히 고심한 끝에 벤자에게 자신의 자매를 죽였다고 고백하는 편지를 날짜 없이 쓰도록 했으며, 그 자백문을 시내에 있는 지역 헌병대 건물에 접수하도록 했다. 만약 그의 자매가 파울플레이의 희생자가 되어 발견된다면 이런 방식을 통해 이미 고백을 한 셈이었고 그저 해당 기관으로 이송되면 될 뿐이었다. 그 결정에 담긴 메시지는 그 이후로 그의 자매의 안전과 행복이 그의 개인적인 의무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 경우 국가는 일종의 권위의 유령-이미지로 이용되고 있었으며, 일종의 원칙이었지만 위협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만약 그의 자매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면 포콘올로나 자신이 그를 체포해서 헌병대 사무실로 데려갈 것이었기 때문이다. 종이는 그저 그가 감옥에서 시간을 좀 보내게 될 가능성을 높여 줄 뿐이었다. 다른 경우에 국가권위는 전적으로 우회하면 될 뿐인 어떤 것이었다. 가령 1980년대에 살던 사람들은 집합적인 시련이 반복되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다. 절도의 경우(예를 들면 베타포에서는 마을 원로에게 속한 쌀독의 내용물 전부를 갖고 도망친 이후) 원로들은 공동체 전체를 한 데 모아 모두에게 특별히 준비한 음료를 마시게 하거나 특별히 준비한 간 한 조각을 먹게 하여 죄가 있는 사람은 심장마비를 일으키게 해 달라고 조상에게 부탁을 했다. 따라서 다음 차례로 급사하는 사람은 조상의 보복에 희생당한 사람이라고 추측되었다. 내가 도착하기 전 십 년 간 베타포에서만 그런 시련이 두 차례 있었다. 심지어는 시골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실제 독약에 의한 시련도 부활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정의를 강제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서나 듣게 된다. 가령 땅에 파묻은 부적, 서 있는 바위, 악한 행실을 한 사람을 찾아 처벌하는 힘을 새로 얻게 된 고대의 희생제의 장소 등. 부나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위험한 주술의 힘(우박이나 번개의 주술, 보복하는 유령들, 고대 왕들의 보호 아래 있다는 것 등)을 사용할 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흘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누구든 상당한 부를 모으거나 유지할 의사가 있는 사람들은 정의상 최소한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들이 어떤 종류의 숨겨진 위험한 힘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이 게임은 매우 미묘했다. 그런 힘에 대해 공개적으로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정의상 그런 힘이 없다고 추측되었고, 한 마을 사람들에게 그런 위험한 주술을 사용하는 사람은 정의상 마녀였기 때문이다. 나는 심지어 시골 깊은 곳에 사는 부유한 남성들이 주술의 힘을 어둡게 암시한 나머지 이웃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여, 결국 그 이웃들이 실제로 대항의약품을 찾아 도적떼로 위장하고 그들을 공격해 약탈했다는 소문까지도 들은 적이 있다.
 
소유관계의 보증자로서 국가
 
사회계급에 관한 이론들은 거의 언제나 국가의 핵심적 역할(어쩌면 가장 중요한 역할)은 소유관계를 떠받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 맑스주의자에게는 분명 이것이 국가가 존재하는 일차적 이유다. 계약 및 시장 관계는 그 기본 토대, 게임의 기본 규칙이 법에 안치되어 있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 법들은 그 다음 차례로 (최후의 순간에는) 그 법을 떠받치는 몽둥이와 총과 감옥이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을 때에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물론 소유 관계의 궁극적 보증자가 국가라면 사회계급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아리보니마모 주변의 시골 지역에서 국가는 이런 역할을 떠맡지 않았다. 국가가 어떤 사람이 타인을 자신의 땅으로부터 배제할 수 있는 권리를 지원해 주려고 무장한 남성들을 파견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계약을 강제하거나 강도사건을 수사하는 경우도 물론이다. 이 사실들 역시 나에게는 현지조사를 마친 이후에야 그 온전한 의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두 마치 그런 문제에 정부가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듯이 행동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각 대지의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계속해서 추적했다. 누군가가 죽었을 경우 그 사람의 땅을 비롯한 여러 재산들이 배분된 방식은 해당 관청에 꼼꼼하게 기록되었다. 탄생과 죽음을 비롯해 소유물을 등록하는 것은 그런 관청이 했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온갖 종류의 땅에 관련된 법률들이 있었고 어느 누구도 그에 맞서지는 않았다. 추상화된 형태로 말을 할 때면 어떤 것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이 궁극적인 권리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마치 토지 소유 등록이 정확한 그림을 제공하는 것처럼 서술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실제 행위에서는 법적 원칙들은 대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단지 하나의 고려대상인 경우가 많았다. 분쟁이 발생한다면 법적인 것은 “전통적” 원칙들(어떤 문제에든 하나 이상의 해결책을 제공하는 것이 보통)이 이루는 홍수에 맞서 그 비중을 고려해야 했으며, 이전 소유자의 의도 및 사람들의 보다 넓은 정의감(예를 들어 공동체에 받아들여진 사람일 경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을 완전히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는 느낌. 분명 누구도 이 문제를 법정으로 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시 사소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분쟁자 중 한 사람이 외부자인 경우가 드물게 있었는데 이 상황만큼은 예외였다. 심지어 그런 경우에조차 법원은 주로 중립적인 중재자 역할을 했다. 모든 사람들은 경찰을 비롯한 다른 무장한 관료들이 법원 결정을 강제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주1)
 
사실 아리보니마모에서는 헌병대 제복을 갖고 있는 남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이따금 돈을 빌려 준 사람이나 상인들을 위해 빚을 갚거나 저당물을 양도하도록 사람들을 회유하는 일을 도왔다. 베타포 사람 중 내가 아는 사람 하나는 어느 날인가 악명 높은 빚수금용역loan-shark을 대동하고 겁에 질린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이웃들이 그 남자가 진짜 경찰일 리는 없다고 설명해 준 다음에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렇게 사소한 문제 때문에 시골로 힘들게 걸어 들어올 만큼 의욕 넘치는 경찰을 찾는다 하더라도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은 민법에 저촉될 뿐만 아니라 진짜 헌병이라면 돈을 빌려 준 사람 역시 체포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 사건은 특별히 진실을 드러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법]질서의 힘이 경제적 문제에 얼마나 대수롭지 않은 영향만을 미치고 있는지를 명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경찰을 사칭하며 돌아다니고 있다는 정보만큼 경찰을 분노케 하는 것은 대개 별로 없다. 그런 행동은 바로 그들이 가진 권위의 근본을 해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특정한 사기꾼이 그 점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그는 그럴 수 있었다) 바로 그가 헌병대라면 아무 관심이 없을 영역에 자신의 활동을 한정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결국 헌병들은 시내에서도 가게 주인들을 앙리로부터 지켜 주려는 행동 역시 전혀 하지 않았고 위조 경찰은 자신의 활동을 시골지역에만 거의 배타적으로 한정해 두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 상황을 분석할 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중 하나는 이메리나 교외 지역에 사는 사람들, 혹은 마다가스카르에 사는 사람 일반은 맑스주의자나 베버주의자들이 생각하곤 했던 국가와는 다른 개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재산의 보호는 정부가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는 기능 중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 사람들이 다르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는, 프랑스 식민 체제가 부과한 외부적 원칙들에 대해 그저 말치레를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상 식민주의 이전의 메리나 주는 재산을 지키는 데 진실로 사로잡혀 있었다. 안드리아남포인이메리나 왕King Andrianampoinimerina은 그 수립자로 연설에서 그 역할을 언제나 강조했다(Larson 2000: 192). 그 자신의 것과 더불어 시작된 법률조항들은 언제나 상속을 규제했고, 구매나 대여와 같은 것들에 대한 규칙들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토지 등록은 식민주의 시대보다 앞서 시작되었다. 이에 관계된 자료는 1878년부터 시작되는데, 이 해는 프랑스의 침략이 있기 17년 전이다.


다른 한편에서 현존하는 증거들은 당시의 사람들이 오늘날에 비해 이러한 정교한 법적 구조에 보다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고 믿게 만드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그에 공공연하게 도전하는 사람에 대한 기록 역시 전혀 없지만 말이다. 법체계는 언제나 원칙상으로만 수용되었고, 현실에서는 매우 선별적인 영향력만을 지녔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이전에 했던 것처럼 일을 계속 진행한다. 내 생각에는 이 현상이 여기서 정말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실마리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 같다.


큰 일반화를 해보려 한다. 어떤 사람이 원치 않는 권위를 부여하려 하는 낌새를 보이게 되면, 말라가시 사람들의 전형적인 반응은 그 사람이 하는 요구가 무엇이든 진심으로 응대해 준 다음에, 그 사람이 사라지자마자 마치 그런 일이 절대 벌어진 적이 없는 것처럼 삶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것이 권위에 대처하는 말라가시의 원형적 방법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첫 방어선은 그저 문제가 되는 사건이 생겨나면 무시하는 것(정부 관료가 가축을 세러 와서 내야 하는 세금을 공지하거나, 노동자들에게 나무를 옮겨 심거나 도로를 건설하라는 소환을 공지하는 것)이다. 분명 이는 마다가스카르에만 한정되는 전략은 아니다. 이 계열에 있는 것들은 전형적인 “농부의” 전략이라고 여겨지곤 한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말하려 하는 사람에게, 만약 자신이 그에게 경제적으로 전혀 의존하고 있지 않을 경우라면 택할 수 있는 확실한 방식인 것이다. 하지만 택할 수 있는 다른 길들도 많다. 대결, 협상, 복종, 묵인과 같이 가능한 조합이 무한하다. 일상에서 명시적인 대결이 강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일이 많은 마다가스카르에서는, 항상 선호되는 접근법은 성가신 외부자가 가버리기 전까지는 그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주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애초에 그가 온 적이 없다고 주장하거나 일이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동의했던 모든 것을 단순히 무시하고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지켜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심지어 우주론적인 차원도 있다. 죽음의 기원에 대한 말라가시의 신화에서는 생명 자체가 인간이 정말로 이행하려 한 적이 없는 거래를 통해 신에게서 따낸 것이라고 주장된다(그 때문에 신이 우리를 죽인다고 이야기된다). 동부 연안의 베치미사라카Betsimisaraka에서 유래한 세기 초반의 신화가 하나 있다. 이 신화의 변주는 끝도 없이 많으며 대부분은 분명 비꼬는 의도를 갖고 있는데, 창조주는 보통 무장한 보조자들을 대동하고 세금을 내라고 요구하며 마을에 정기적으로 나타나 스쳐가는 식민 관료와 섬뜩한 외견상의 유사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서술된다.
 
옛날 옛적에 한 바짐바Vazimba[선주민-저자] 부부가 지구상에 사는 유일한 두 명의 사람이었다. 그들은 아이가 없어서 슬펐고, 그래서 어느 날 진흙을 찾아 인간의 모양으로 빚었다. 그들은 두 개의 형상을 만들었다. 하나는 소년이었고 다른 하나는 소녀였다. 여자가 그들의 코에 숨을 불어 넣어 움직이게 만들었지만 생명을 줄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지구를 여행하고 있는 신을 하나 만났다. 그 여자는 신에게 두 개의 동상에 생명을 넣어 달라고 부탁을 했고, 신이 그 일에 성공한다면 암소 두 마리와 약간의 돈을 주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신은 그 부탁을 들어 주었다.

아이들이 자라나자, 부모들은 그들을 결혼시켰다. 이 때 신이 돌아와 자신에게 대가를 달라고 요구했다.

부모들은 말했다. “우리는 돈이 없어요. 늙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12년 후에 우리 아이들이 대가를 지불할 거에요.”신이 대답했다. “너희들이 나를 속였으니 너희들을 죽여 버리겠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죽였다.

12년이 지나 신은 다시 돌아와 아이들에게 대가를 지불하라고 요구했다.부부는 대답했다. “당신은 우리 부모를 죽였어요. 그래서 당신에게 주려고 모아두었던 돈을 다 써버렸어요. 그러니 빚을 청산하게 10년을 더 주세요.”

10년이 지나고 신이 돌아왔다. 부부에게는 세 아이가 있었지만 돈이 없었다.

신이 말했다. “너희들을 죽이겠어. 너희들과 너희들의 후손들, 너희들이 늙었건 젊건 상관없이.”

그 날부터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고, 생애를 마감하게 되면 말라가시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을 만든 신이 데려갔다.”

(Renel 1910 III: 17-18; 프랑스어로부터 옮긴 것.)
 
이 신화의 핵심은, 아주 소극적으로 말해도, 암시하는 바가 있다. 이 전체의 태도가 궁극적으로는 희생의 논리를 따른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최소한 마다가스카르에서 희생은 신성한 힘에 정당하게 속하는 일부를 줌으로써 그를 기만한 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나머지를 주는 방식이라고 분명하게 언급되곤 한다. 이따금 언급되는 것처럼 동물의 생명은 신에게로 간다. 따라서 (암묵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지킬 수 있다. 그렇다면 마다가스카르 전체에서 이메리나의 의례인 파마디하나famadihana(재매장)와 같은 희생제의(혹은 그것의 기능적 등가물)가 언제나 정부의 허가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알쏭달쏭한 사실을 생각해 보자. 그 허가가 떨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서류 업무가 적절하게 수행되었다는 사실은 행사 자체가 진행되는 동안에 큰 역할을 차지한다. 여기 베치미사라카 발화의 한 단편이 있다. 희생되는 소의 몸 위에 대고 읊는 것이다.
 
이 숫소는 마을 언저리에 똥을 싸고 다니거나 울타리 안에서 빈둥대는 그런 종류의 소가 아니다. 그 몸은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지만 그 생명은 너희들, 정부와 함께 한다. 그대, 정부는, 누워 있는 거대한 짐승과도 같다. 그 몸뚱이를 뒤집어 보는 자는 그 거대한 주둥이를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 벗들은, 그 짐승을 뒤집어 볼 수 없다! 그것이 숨긴 것을 감히 나서 자르려 하는 칼, 감히 그 뼈를 부러뜨리려 하는 도구는 바로 이 공식적인 허가서이며, 이 허가는 정치적 권위를 쥐고 있는 당신들로부터 왔다. (Aly 1984: 59-60)
 
국가를 잠재적인 폭력의 힘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힘의 희생자인 것으로 묘사하는 것에서 끝이 나지 않는다. 허가를 받는 행위는 희생의 행위 자체와 등가화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제시하려 하는 핵심은 자율성에 대한 것이다. 서류를 작성하고 토지를 등록하며 심지어 세금을 내는 행위는 희생과 등가물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삶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자율성을 성취하는 자가 비위를 맞추기 위해 행하는 작은 의례인 것이다.


자율성이라는 이 주제는 식민시대, 그리고 식민 이후의 마다가스카르에 대한 많은 다른 연구들에서 발견될 수 있다. 같은 베치미사라카 지역에 대한 제럴드 알타베Gerald Althabe(1969, 2000) 및 북서연안의 사칼라바Sakalava에 대한 질리언 필리-하르닉Gillian Feeley-Harnik(1982, 1984, 1991)의 연구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들 저자에서 자율성이라는 주제는 첨가된 변주의 일종이다. 왜냐하면 두 저자 모두 마다가스카르에서 자율성을 획득하기 위한 가장 흔한 방법은 지배에 대한 거짓된 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리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동등한 자들의 공동체는 그들을 압도하는 어떤 힘에 대한 공통의 종속에 의해서만 창조될 수 있다. 그 힘은 전형적으로 말라가시의 전통적인 신과 거의 비슷하게 자의적이며 폭력의 잠재력을 지닌다고 간주된다. 하지만 그 힘은 일상적인 인간의 관심사와는 마찬가지로 거리를 유지한다. 두 집단 모두에서 식민시대의 규칙에 대한 가장 극적인 반응 중 하나는 영혼의 강신에 대한 광범위한 확산이었다. 모든 공동체에서 여성들은 고대 왕의 영혼들에게 씌곤 했는데, 이 왕의 의지는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왕이 살아있었다면 갖고 있어야 했을 모든 권위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궁극적인 사회적 권위를 죽은 왕들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황홀경에 빠진 여성들에게 맡겨버림으로써, 공동체를 구성하는 힘은 프랑스 관료와 경찰이 공공연하게 대결할 수 있는 길이 없는 어떤 지대로 자리를 옮겨 간다. 어떤 경우에서든 움직임의 성격은 동일했다. 자유로운 행위를 위한 공간을 창조하는 데 성공하고, 그 곳에서는 권력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간 삶을 살아갈 수 있는데, 이는 절대적인 지배의 이미지를 창조함으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지배는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외연적으로 귀속되는 자들에 의해서만 완전히 조작될 수 있는 이미지이며 판타즘이다.


문제를 다소 조야하게 설명하자면, 내가 알던 사람들은 일종의 사기에 가담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정부에 대한 그들의 이미지는 최소한 식민 시대 이후로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이며 잠식해 들어오고 강요하는 것 중 하나였다. 정부가 환기하는 주요 감정은 공포였다. 프랑스 지배하에서 정부장치government apparatus는 주로 돈과 강요된 노동을 우려내는 엔진이었다. 교외 지역 인구를 위한 사회적 이득은 거의 제공하지 않았던 것이다(교외지역 인구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 하나도 보탬이 되지 않았다). 신민의 일상적인 필요와 정말로 연관되어 있던 한에서 말하자면 새로운 신민을 만들어 내려는 의식적인 의도, 즉 그들의 욕망을 보다 깊은 종속을 창조할 수 있는 것으로 변환시키려는 시도가 관계되어 있었다. 1960년의 독립 이후에도 사태는 그다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첫 말라가시 통치체제는 정책이나 작동방식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구의 절대 다수에게 상식적인 태도는 국가는 뭔가 비위를 맞춰 준 다음 피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떻게든 가능했던 경우였다면.


사태가 정말로 변하기 시작했던 것은 1972년의 혁명이 지나서였다.


반 식민 혁명에 기원을 둔 1972년의 사건들은 국가자본주의적인 군사기반 체제의 계승을 도입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체제는 1975년에서 1991년까지, 디디에 라치라카Didier Ratsiraka 대통령이라는 인물에 의해 지배되었다. 라치라카는 북한의 김일성에게서 정치적인 영감을 얻었다. 이론상으로 그의 체제는 매우 중앙집권화된 사회주의적 발전과 동원 형태에 바쳐졌다. 비록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정체되어 있다고 간주했던 것, 즉 혁명의 잠재력이 거의 없는 전통적인 농민 분파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농경에 대한 그의 통치 방식은 산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외채의 지원을 받는 대규모 투자를 포함하는, 이따금 영웅적인 규모를 지닌 일련의 거대한 발전구도에 모든 노력을 쏟아 붓는 것이었다. 1970년대에는 대출을 받기가 쉬웠다. 1981년 무렵에는 정부가 파산했다. 그때부터 말라가시의 경제사는 주로 IMF와의 협상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


여기서 IMF가 명령한 긴축재정이 불러온 효과들의 세부사항으로 들어갈 여유는 없다. 그 직접적인 결과가 전반적인 삶의 기준이 최악으로 추락했다는 것이라는 점을 언급하는 것이면 충분할 것이다. 가장 강한 타격은 공공서비스 및 기타 정부 고용인들(중산층의 상당 부분을 이루던 사람들)이 입었다. 하지만 (자유롭게 약탈할 수 있는, 대통령 자신 주변에 있는 소수 엘리트를 제외하면) 극빈층화는 거의 보편적이었다. 마다가스카르는 이제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 중 하나다.


라치라카의 “농촌 분파”(핵심 상품을 생산하지 않는 농촌지역)에게 이 전체의 기간은 국가의 점차적인 철수에 의해 표시된다. 프랑스 점령기에 가장 성가신 세금들(인두세, 가축세, 가옥세)은 농부들을 생산물을 팔게 하며 현금경제로 몰아넣기 위해 고안되었으나 혁명 직후에 철폐되었다. 라치라카의 체제는 처음에는 시골 지역의 통치를 무시했다. 하지만 1981년 이후에는 점차로 선별적 통치의 대상이 되었다. 예산이 무한하게 삭감되면서 자원이 점차로 바닥이 난 국가는 지배자들이 그 경제적 중요성을 발견한 마을에 대해서 최소한의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고 행정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이들 마을은 외환을 벌 수 있는 자원을 생산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대부분의 생산과 분배가 공식적인 영역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아리보니마모와 같은 장소들은 그들에게 어떤 관심의 대상도 되지 못했다. 이런 곳((거의 가능성도 없지만) 무장 게릴라의 근거지가 되는 기준에 미달하는 곳)에서는 국가를 실제로 운영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는 일이 벌어진다고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헌병대가 도적떼를 쫒는 데 간혹 보인 열정은 분명 그들이 반란의 핵을 형성할 능력이 있는, 유일하게 조직화되고 무장한 집단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주2)
 
시골 지역의 자원들은 씨가 말랐다. 내가 아리보니마모에 있을 무렵에는 유의미한 자금 지원을 받는 유일한 행정 영역은 교육체계 뿐이었다. 심지어는 여기서조차 그 합이 보잘것없었다. 주정부의 역할은 (최소한 봉급의 일부를 학부모회로부터 이따금 지불받는) 교사들에게 우편물을 발송하여 커리큘럼을 제공하고 시험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후자의 경우, 특히 바칼로레아 시험은 중심의 관점에서는 특별한 관심이 되었는데, 이 시험은 공식적인 국가 영역으로 향하는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바칼로레아를 통과한 사람들은 여러 주에 걸친 군사훈련을 받은 후 한 해 동안 “국방의 의무”를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비록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이 의무는 아무 의미 없는, 일을 위한 일을 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국방의 의무는 중요하다. 실질적인 권위가 실제로 존재하는 영역,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영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교육체계로 피신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정부는 어떤 것도 제공해 주지 않았지만, 또한 그들의 삶에 어떤 힘도 직접적으로 행사하지는 않았다. 주3)
 
하지만 시골지역에서조차 정부관청은 계속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타자기를 자주 분해하며 타자기를 치는 데 필요한 종이를 구입하는 데 부속품을 사용했고, 더 이상 어떤 수요도 없었지만 의무에 충실하게 서류를 작성하며 나무를 뽑거나 시신을 무덤에서 들어내기 전에 허가를 요청하며 출생과 사망을 보고하고 그들의 가축 수를 등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절했다 하더라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왜 그 일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일까?


내 추측으로 그 힘을 관성, 즉 순전한 습관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여전히 동일한 사기를 치고 있었다. 그 거대한 입에 이빨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않는 국가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식민시대의 폭력에 대한 기억 역시 여전히 생생할 것이다. 나는 초기의 대량 학살, 그리고 시골 사람들이 정부 관청에 들어갈 때나 끊임없는 세금의 압박에 노출되어 있었을 때 겁에 질리곤 했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진짜 대답은 그보다 미묘하다고 생각한다.


폭력에 대한 기억들은 국가가 무엇에 대한 것이라고 사람들이 상상했는지를 정의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나는 국가가(그 모든 사회주의적 주장에도 불구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존재했다는 인식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최소한 어떤 사람도 그런 서비스가 없다는 데 대해 크게 불평한 적은 없다. 사람들은 정부는 본질적으로 자의적이고 침략적이며 강요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정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의 주제 중 하나는 말라가시의 통일성이라는 개념이었다. 최소한 고지대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말라가시 사람”으로 보았다. 그들은 자신을 “메리나 사람”이라고 언급하는 법은 거의 없었다. 말라가시의 통일성은 수사법에서 지속적인 주제로 등장한다. 나는 모든 주요 의례(공식적인 의미는 서류가 작성되었고 그 행사가 승인되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에 말라가시 깃발이 항상 등장하는 것의 진짜 의미는 거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게는 국가의 텅 빈 성격이야말로 그것을 통합하는 힘으로 받아들여지게 할 수 있던 원인인 것처럼 보인다. 1972년의 혁명은 무엇보다도 고유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시도였고 국가를 진정한 말라가시로 만들기 위한 시도였다. 나의 경우 고지대의 인구에 관해서라면, 이 노력이 대체로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것 같다. 동시에 국가가 그 모든 실질적인 권력을 잃었던 한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정부는 알타베와 필리-하르닉이 논의했던 고대의 왕들과 비슷한 계열의 존재가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공통된 종속의 힘을 통해 하나의 공동체로 종속되는 이들을 구성하는,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직접적인 실천의 의미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통제에 따르기가 극단적으로 편리했던 절대적이고 자의적인 권력이 된 것이다.
 
잠정적 자율지대
 
현대의 아나키스트 집단에서는 “TAZ” 혹은 “일시적 자율지대”temporary autonomous zone(Bey 1991)에 관한 이야기들이 흔해졌다. 지구상에 국가와 자본에 의해 전혀 식민화되지 않은 지역은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르지만, 권력은 완전한 단일체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언제나 일시적인 균열과 틈이 생겨나고, 자기-조직화된 공동체들이 지속적으로 분출되어 출현하는, 곧 사라지는 공간들, 감춰진 봉기들이 언제나 있다. 자유로운 공간이 깜빡이며 생겨났다가 사라져 간다. 만약 다른 것이 없다면, 여전히 대안을 사유할 수 있고 인간의 가능성은 절대 고정된 법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지속적 증언을 제공하는 것은 바로 이 공간들이다.


이메리나 교외 지역에서는 “일시적인” 것보다는 “잠정적 자율지대”가 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렇게 부르는 까닭의 일부는 TAZ의 이미지처럼 권력 바깥에서 반항하며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그 독립이 반드시 그렇게 일시적이라고 가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베타포, 심지어는 아리보니마모조차 상당부분은 국가장치의 직접적인 통치 바깥에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이들 지역 혹은 상당 부분이 국가의 지배 아래에 있는 자본과 같은 지대 사이를 계속 오간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자율성은 잠정적이며 불확실하다. 이런 자율성은 총이나 돈이 새로 유입되며 장치를 회복하는 순간에는 쓸려 나갈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다시 그렇지 않게 될 수도 있다. 일부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이 추문에 가깝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 자신은 그런 것이 매우 주목할 만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결국 전 세계 모든 국가에 긴축재정이 부과되었다. 하지만 인구 다수가 스스로를 통치하도록 포기하며 내버려둠으로써 반응한 정부는 거의 없었고, 대처할 준비가 그만큼 잘 되어 있던 인구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여기에 여러 이유가 있다고 추측한다. 하나는 자기-통치라는 능동적인 전통, 가령 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운동에서 발견되었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직접민주주의의 문화라고 일컬어졌을 것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합의에 의해 결정에 도달하는 기술은 그저 모든 사람이 성장하면서 익히는 것이었다. 이는 거의 일상적인 상식의 일부이기 때문에 외부자는 처음에는 알아채기조차 힘들다. 예를 들어 타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면 어떤 행위의 과정도 타인들이 미리 동의하지 않는 한에서는 적법하게 수행될 수 없다는 일반적 원칙이 있었다. 그 결과로 개최되는 회의는 “포콘올로나” 회의, 기본 의미가 “모두”인 회의였다. 하지만 식민주의적인 민족지들이 계속 오해해 온 바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the 포콘올로나는 공식적인 제도가 아니라, 집합적으로 해결하려 노력하는 문제의 차원에 따라 다섯 명에서 천 명까지 참가자 수가 달라질 수 있는 유동적인 고찰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 회의가 이루어질 때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나이 많은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동등한 발언권이 공식적으로 주어졌다. 여기서 유일한 기준은 합당한 견해를 내놓을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4) 게다가 진행중인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현대의 합의과정에서라면 “블록”block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일들이 진행되는 전반적인 방향에 대해서는 “난 더 이상 찬성할 수 없다”(tsy manaiky aho)라고만 선언하면 될 뿐이었고, 어떤 사람의 관심사가 공적인 주목을 받기 전까지는 일반적인 위기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렇다면 모든 정치집회가 기술적으로 불법이었던 식민기에조차 평범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일을 외부의 힘은 최소한도로 빌리고 처리할 수 있는 제도 구조와 정치적 관습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들은 또한 국가가 그 실체를 잃게 되었을 때 체면을 거의 잃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붕괴하도록 만들 수 있을 만큼 미묘한 저항의 형식을 발달시킬 수도 있었다.


나는 상황을 낭만화하고 싶지는 않다. 극심한 빈곤을 짊어지는 대가로 농촌 공동체가 얻어낸 자율성이기 때문이다. 먹을 것을 충분히 구하기 위해 계속 시달려야만 하는 상황에 있다면 자유를 향유하기란 힘든 일이다. (가장 뚜렷한 것으로는 학교나 교회와 같은) 지배 제도들은 여전히 기능을 발휘했으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위계적이었다. 다만 이 제도들이 이제는 물리력의 위협을 통해 그 노력을 보강할 만한 힘은 거의 없지만 말이다. 도시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이들 농촌 공동체의 상당 지역에는 분명 깊은 사회적 불평등이 있었다. 부의 차이(세계적인 기준으로는 미미한 것이지만 여전히 현실적인), 그리고 심지어는 “백인”과 “흑인”이라고 일컬어지는 분할, 고대 왕국의 귀족 혹은 평민의 후손, 그리고 그들의 노예들과 같은 구분이 여기에 해당된다. 베타포와 같은 지역이 어떤 곳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곳이 국가권력의 바깥에 서있는 장소라는 점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전적으로 바깥에 서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자율지대를 유지하기 위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강제력의 현실성은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데 사용하는 용어까지 다른 형태로 바꾸어 놓았다. 이런 변화는 바로 경험의 구조 속에 어떤 방식으로든 깊게 박혀 있다.


이메리나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간주한다(2/3는 개신교이며 1/3은 가톨릭이다). 많은 사람들이 규칙적으로 교회에 간다. 정부는 아이들에게 학교에 출석하도록 강제할 수단이 더 이상 없지만, 출석은 최소한 초등학교 수준에서는 거의 보편화되어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 제도, 특히 학교에 대해서는 양가적인 측면이 분명 있다. 연구의 정치성을 이야기할 때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이메리나의 교육체계는 언제나 권력의 도구처럼 보였고, 또한 언제나 바자하와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교육체계는 프랑스 식민 통치 시기에 형성되었다. 여기서 이 체제는 대중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의 최소한도조차 전혀 충족하지 못했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 체제는 정복에 의해 부과된 체제였으며 지속적인 힘의 위협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었다.


여기서는 의존할 수 있을 만한 힘의 위협을 유지하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요구하는지 잠시 고찰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이는 단순히 폭력을 행사할 의사가 있는 사람들을 적정 수로 확보해 두는 문제가 아니며 그들을 무장시키고 훈련시키는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 문제는 조화coordination의 문제다. 핵심은 권위에 대한 공개적 도전이 발생할 경우 언제 어디서나 그런 폭력적인 사람들을 충분한 수로 반드시 등장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정말로 그렇게 할 것이라는 점을 확신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 순서를 보면 이렇게 하기 위해서 상당히 많은 것이 요구된다. 정보를 처리할 수 있도록 훈련받은 기능직 관리들 상당수, 게다가 도로, 전화, 타자기, 병영, 수선 가게, 석유 보급소라는 하부구조, 그리고 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관리자들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 하부구조는 일단 세워지고 나면 의심의 여지없이 다른 기능들도 잘 수행해 낼 수 있다. 병사들을 이송하기 위해 건설된 도로는 닭을 시장으로 나르거나 아픈 친척을 방문하려 하는 사람들을 이동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병사를 이송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더라면 도로가 아예 있지도 않았을 것이며, 최소한 마다가스카르에서 사람들은 이 점을 매우 잘 인식하고 있는 듯 보였다.


국가 관료제(어디에 있는 어떤 국가관료제건 거의 다 해당되는 것이지만)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 매일의 수준에서는 사람들의 두개골을 부수는 것보다는 정보를 처리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군인과 경찰 역시 마찬가지다. 이 점을 국가의 작동에서 폭력이 차지하는 역할이 미미하다는 증거로 보는 것보다는, 이런 정보기술 자체가 어떻게 폭력 장치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지, 사람들의 두개골을 깨버릴 능력과 의지가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언제나 적소에 적시에 나타나는 것을 보증해 주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되는지를 질문해 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결국 감시는 전쟁의 기술이며 푸코의 판옵티콘은 무장한 간수들이 있는 감옥이었던 것이다.


마다가스카르에서 보면 국가에 본질적인 폭력적 본성은 부정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이것은 식민주의의 역사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은 또한 (최소한 내가 아는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의 말라가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지각 기준standards of perception에 적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가장 잘 설명하는 방식은 이들이 대부분의 미국인과는 달리 공포에서 특별히 수치스러운 점을 찾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내가 여기서 적응하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던 면모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성장한 남성이 거리를 응시하며 이따금 “무서운 자동차”들을 언급하거나 “이 황소들이 두렵다”라고 말하는 것을 지켜 볼 때처럼, 이런 일들은 나와 같은 방식으로 양육된 사람에게는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다. 나는 미국의 기준에서 보면 특별히 마초적인 [문화적] 배경으로부터 온 것도 아니지만, 공포의 고백, 최소한은 타인에 의해 신체적인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약간은 당황스러운 것이라고 가정하도록 길러져 왔다. 대부분의 말라가시 사람들은 이 화제가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일부 사람들이 바자하가 그 자체로 어떤 사람이던 상관없이 얼마나 두렵다고 느끼는지 말하면서 진짜로 즐거움을 느낀다. 국가가 대개 국민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겐 명백한 사실일 뿐이다. 서구 사회과학이 강압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는 한에서, 까닭의 일부는 숨겨진 당혹감이 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물리적 힘에 대한 공포에 의해 형성되고 있는 그 수위를 인정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느낀다. 주5)
 
그러나 학교는 궁극적으로 이 폭력 장치의 일부다.


말라가시에서 사람들은 교육이 기술은 전달해도 사실이나 정보를 전달한다고 이야기하는 법은 없다. 사용되는 말인 파하이자나fahaizana는 “기술, 노하우, 실용적 지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학교에서 습득하는 종류의 파하이자나는 본질적으로 외국의 것, 즉 파하이자나 바자하로, 그 자체로는 말라가시의 노하우 형태와는 대립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기술들은 본질적으로 지배의 기술이다. 그 까닭의 일부는 학교 체계 자체가 폭력의 하부구조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다. 학교는 일차적으로 기능직, 이차적으로는 테크니션을 훈련시키기 위해 고안되었다. 가르침의 스타일은 전적으로 권위주의적이어서, 틀에 박힌 암기에 대해 크게 강조했으며, 학생들이 배우는 기술들은 그들이 특정한 사회관계 형태(아마도 명령 관계라고 부를 수 있는 것)를 취하게끔 조직된 사무실, 공장, 혹은 교실에 고용되리라는 기대 속에 제공된 것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명령을 내리고 다른 이들은 복종할 것이라는 점이 언제나 가정되어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체계는 폭력의 하부구조를 유지하는 데 요구되는 능력을 생산하기 위해 고안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다른 현재 측면과는 완전히 다른 사회관계, 신체적 상해라는 지속적인 위협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사회관계를 가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구와 책을 통한 공부를 향한 양가감정은 상황에 대한 완전히 분별력있는 평가에 기초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은 지식 자체는 가치가 있고 심지어는 즐거운 것이라고 여겼다. 모든 사람은 학교에서 배운 기술들이 다른 방식으로는 체험할 수 없는 경험의 영역, 지구 전체를 가로지르는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와 정보 유형들을 열어 보여 준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기술들은 또한 억압의 기술들이기도 했다. 이 체계는 사람들을 다른 것(어떻게 명단과 물건의 목록을 유지하며 어떻게 회의를 진행할 수 있는가)이 아닌 특정한 조직화의 방식 속에서 훈련시킴으로써, 그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한데 묶어 조화시킬 수 있는 대규모의 네트워크(역사보존회건 아니면 혁명정당이건)는 무엇이건 전부 강제적인 관료제와 비슷한 형태로 작동하게 되는 것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분명 많은 사람들이 시도했던 것처럼 이들 장치를 보다 합의에 기반한, 민주적인 방식으로 가동되게끔 가공하려 노력할 수도 있다. 할 수는 있지만 극단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 경향, 이동은 이러한 능력들을 훈련받은 사람들에 의해 창조된 체계라면 어디에서나 드러날 수 있다. 참여자들의 의도가 얼마나 혁명적이건 간에 프랑스 식민체제와 약간은 유사한 모습을 띄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기술들이 본성적으로 외국의 것이라고 간주하며 가능한 한 “말라가시”의 맥락에서 떨어뜨리려 노력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에는 이러한 위계화된 제도의 존재가 가져 온 보다 미묘한 효과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구분은 사람들이 “가시”gasy한 모든 것(즉, 말라가시의)과 “바자하”, 즉 외부의, 권위주의적인, 억압적인, 프랑스의 것으로 간주되는 모든 것을 명쾌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후자의 것을 최소한 약간일지라도 경험하게 한다는 점을 보증해 두었다. 즉, 국가가 “사회적 강제력의 유일한 독점자일 뿐만 아니라 실행능력이 있는 유일한 자”인 지대. 단순히, 유년시절에 불편한 줄에 서 있거나, 체육수업에서 지시에 따라 뛰거나, 지겹고 논점도 없는 수업을 그대로 모방하여 암기해야만 하는 의무를 강요당하는 것의 문제였을지라도 마찬가지다. 국가와 흡사한 규율의 경험은 사람들에게 이와는 대조적으로 “말라가시”의 것(합의에 의한 의사결정, 예를 들면 동료 성인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을 주저하고, 대결의 느낌, 심지어는 카리스마적인 리더쉽으로 간주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일반적으로 의심하게 하는)을 지속적으로 주지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Bloch 1971과 비교해 볼 것). 이런 자질들의 상당수가 언제나 말라가시의 핵심 본질로 간주되어 왔던 것이 아니라는 점은 상당히 분명하다. 비록 나는 말라가시가 섬에 정착한 매우 초창기부터 언제나 자신들을 이런 저런 종류의 외국인들과 대립해 정의하려는 경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말이다. 주6) 충분히 역설적이지만 지역적 자율성의 조건부적 성격은 이런 방식을 통해 실제로는 어떤 의미에서 자족적인 것이 된다. 우리 모두는 부와 권력이 심각한 불평등의 상태에 있는, 보다 넓은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말라가시에서 쌀을 재배하는 농부들과 대장장이, 바느질하는 여성들이나 비디오 상영자들은 모두 이 점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지속적인 주지를 통해 사람들은 크게 봐서는 그들을 절연시키는 데 그럭저럭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질문
 
나는 아리보니마모의 오지가 고립된 사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헨리 라이트가 내게 말해 주었던 것처럼 마다가스카르 전역에서는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사실 섬의 다른 지역들에서는 훨씬 더 오래 그리고 훨씬 더 근본적인 방식으로 그랬을지도 모른다. 결국 수도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고 군용 공항과 헌병대, 감옥이 있는 아리보니마모는 국가 권위가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기가 가장 힘든 곳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마다가스카르 자체 안에서 국가권위는 쇠퇴기에 있고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해를 걸러 가며 이따금은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고 이따금은 후퇴한다. 하지만 교외 지역(특히 아리보니마모처럼 바닐라 플랜테이션, 보크사이트 광산, 혹은 자연보존구역이 없는 곳) 대부분에서 상황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수백, 심지어는 수천에 달하는 비슷한 공동체가 없을지 생각해 볼 법 하다. 전국적 정부national government의 효율적 지배로부터 벗어났거나 그로부터 발을 빼 오면서 모든 의도와 목적에서 자기-통치를 할 수 있게 된, 하지만 여전히 그 구성원들이 그 사실을 위장하기 위해 외적 형식을 유지하며 경의의 표현을 취하는 그런 공동체들.


이것은 우리가 “실패한 국가”, 그리고 특히 아프리카에서 국가 권위의 위기에 대한 현대 문헌들을 읽을 때 깊이 생각해 볼만한 문제다. 최근에 제임스 퍼거슨(Ferguson, 2006)이 주지했던 것처럼,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서는 “국가 주권”이 남아 있다는 것의 유일한 의미는 국제 지역에서 국민들을 합법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특히 그 영토 내에서 다른 국가에서 온 사람들의 자원 접근권과 관련된 계약들을 보증할 수 있는 권리가 국가에게만 있다는 사실에 대한 국제적인 인식일 뿐이다. 심지어 루돌프 폰 이헤링이나 막스 베버가 서술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폭력의 독점권을 보존하는 척 하는 경우조차 별로 없다. 자원의 회수, 그리고 정부가 모든 국민에게 기초적인 필요를 평등하게 제공할 의사나 능력을 어떤 의미에서 포기한 것은, 보건, 교육, 그리고 삶의 문제에서 엄청나게 파괴적인 효력을 발휘해 왔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IMF가 부과한 긴축재정은 의도치 않은 신기한 부수 효과를 불러 온 것으로 알려져 왔다.


사실상 비-아프리카인들이 국가 권력의 붕괴라는 의미에서 “아나키”가 혼란, 폭력, 그리고 파괴를 낳을 때만(예컨대 1990년대의 소말리아나 오늘날의 많은 남부 및 중앙아프리카 지역) 그 점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는 점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내가 마다가스카르에서 관찰한 것은, 그런 사례 모두에서 외부자들만 모르는 수십 혹은 수백 가지의 다른 측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은, 지역주민들이 이 이행을 평화적으로 일궈내는 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라가시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대면을 피함으로써 국가의 대변인들이 공개적으로 모욕감을 느끼거나 체면을 잃어야만 했던 적은 없게 만들었고,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지배를 행하거나 표면적인 지배만으로 만족하기를 가능케 하는 것을 쉽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 전략이나 새로운 자율 공동체들의 존재가 아프리카에 한정되리라는 법도 없다. 세계의 많은 지역들(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그리고 가장 주목할 만한, 심지어는 라틴아메리카의 일부)에서는 국가의 존재가 언제나 다소간 이산적인 현상이 되어 왔다. 국가의 방문은 아마도 이따금 재앙에 가까운 경우가 많더라도 보복적인 말라가시 신의 예외적인 출현과 흡사하며, 전체주의적인 국가나 산업민주주의 사회를 통해 우리가 익숙해진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감시의 형태와는 별로 닮지 않았다.


물론 제도적인 구조는 남아 있다. 학교, 은행, 병원이 있는 것이다. 이들은 예컨대 마리오 트론티가 부르는 것처럼 ‘국가 형태’state form가 언제나 현존한다는 점을 보증한다. 모든 사람은 강요에 기초하고 있는 제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약간씩은 알고 있다. 심지어 실제적인 폭력이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에 현실국가 제도의 유령 같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고 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여기서 보다 자세하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폭력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단순히 후퇴했을 뿐이다. 도시에는 여전히 경찰이 있었고, 예컨대 보크사이트 광산이나 상당량의 외환을 벌어 주는 자원이 있는 다른 곳에는 어디나 경찰이 있었다. 심지어 지구적인 자원 배분(예를 들어 해당 지역의 병원에 어떤 의약품과 장비가 실제 갖춰져 있을 것이냐의 문제처럼)은 소유의 배치를 강제하려는, 체계화된 폭력의 위협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보니마모와 같은 지역에 사는 지역 주민들은, 오직 그것의 먼 효과들, 그리고 자신들이 일상에서 하면 안 되는 행위들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이상하고 텅 빈 제도들에만 대처하면 될 뿐이었다.
 

 
주1) 가령 브라질 교외 지역의 대부분에서 그렇듯 상황이 거의 반대인 경우와 대조를 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경찰은 실질적으로 소유권을 강제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고, 피해자가 재산이 있는 엘리트층이 아니라면 단순한 살인 사건은 무시될 것이라 예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2) 주로 19세기 무렵을 전후해 도적떼가 실제 반란군으로 변했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관심은 국가가 결국 무엇에 대한 것인가에 관한 보다 깊은 이해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하게 된다. 메리나 왕국에서 도적떼들(공식 문서에는 그저 파하발로fahavalo, “적”이라고만 언급되어 있는)은 마녀들과 더불어 원형적인 반-국가로, 합법적인 왕실 권위에 저항하며 스스로를 정의했다. 마녀들과의 관계는 또한 그 점을 가정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즉, 그들은 앙리의 강탈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아리보니마모의 헌병대가 도적떼를 체포하기 위해 행동을 취하고, 1979년 국립고등학교에서 기숙사 전체의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암발라벨로나Ambalavelona의 발발, 즉 악령의 강신 배후에 있었던 것으로 의심을 받았던 십대 소녀를 조사했던 것은 이것과 관계가 있다.
 
주3) 예컨대 의료서비스는 이론적으로 무상으로 제공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부패에 의해 사유화되었고, 그 다음차례로는 정부의 급료가 유명무실해지면서 다시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주4) 자크 데즈(Jacques Dez, 1975:54-57)이 이 점을 대체로 매우 훌륭한 요약을 통해 언급한다. 비록 그는 마지막에 18세기 말엽의 안드리아남포인이메리나 왕에 의해 “하나의” 포콘올로나가 “발명”되었다고 결론을 내림으로써 식민주의적 가정을 재생산하고 있지만.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 배후에 있는 에토스에 대해서는 안드리아만자토(Andriamanjato, 1957)을 참고할 것.
 
주5) 유럽이나 북미에서는 여성보다 남성이 더 그렇다고 느낀다. 마다가스카르에도 만약 그런 것이 있었다면 상황은 반대였을 것이다.


주6) 현대 고고학자들은 이제 마다가스카르의 유의미한 정착 인구는 놀라울 만큼 최근에 형성되었다는 점을 믿고 있다. 이 시기는 어쩌면 8세기부터일 수도 있으며, 마다가스카르의 인구는 오스트로네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심지어는 다른 지역에 기원을 둔 매우 다른 기원을 지닌 이질적인 인구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초기에는 심지어 작은 이슬람 도시인 마힐라카Mahilaka까지 있었다. 여기서는 스와힐리어를 사용했던 것이 거의 분명하고, 동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와의 무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따라서 초기 말라가시는 맨 처음부터 국가 및 세계종교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대의 말라가시 문화가 탄생한 것처럼 보이는 “통합”의 순간은 마힐라카가 최정점 혹은 심지어는 쇠퇴를 겪는 시기에 등장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후 말라가시는 섬 전반에서 놀랄 만한 일관성을 유지했고 섬의 인구를 개종시켜 병합하려는 이슬람교의 잦은 시도에 대한 저항력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말라가시 문화가 일관된 단일체로 출현했던 한에서, 마치 오늘날 “바자하”인 모든 것에 대한 의식적인 대조가 유지되고 있는 것처럼, “실라모”Silamo(스와힐리어를 사용하는, 이슬람교의)로 간주된 모든 것이 의식적인 대립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닌지 강한 의심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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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버, 국가론에 대한 단상[펌글]

적린님의 [그레이버, 국가론에 대한 단상] 에 관련된 글.

 

관련글: 잠정적 자율지대: 혹은 마다가스카르의 유령-국가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단상들』 중간의 몇 페이지(pp.65-70)를 번역한 것.

 

현존하지 않는 과학의 몇몇 교의들(Tenets of a Non-exsistent Science)

 

여기서는 아나키즘 인류학이 탐험할 만한 이론의 영역 몇 가지를 개괄해 보려 한다.

 

1) 국가에 대한 이론

 

국가는 독특한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다. 국가는 제도화된 침략 혹은 갈취 형태임과 동시에 유토피아적 기획이다. 첫 번째 성격은 어느 정도 자율적인 공동체라면 어떤 곳이든 국가를 실제로 경험하게 되는 방식을 반영한다. 하지만 두 번째 특징은 국가가 문자화된 기록 속에서 나타나는 방식이다.

 

어떤 의미에서 국가는 무엇보다 "상상된 총체성"이며, 역사적으로 보면 국가론에 포함된 대부분의 혼란은 이 점을 무능력 또는 거부감 탓에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유래했다. 대부분의 경우 국가는 이념(idea)이었고, 사회질서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자 통제의 모델로 상상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페르시아, 중국, 고대 그리스 어디에서 왔건, 사회론과 관련된 최초의 저작들이 언제나 국정운영법의 형태를 취했던 이유가 된다. 이로 인해 두 개의 파괴적 효과가 발생했다. 첫째는 유토피아주의가 모욕의 이름이 된 것이다. ("유토피아"라는 말이 처음으로 연상시키는 것은 대개 완벽한 기하학적 구성을 지닌 이상적 도시의 이미지다. 이 이미지는 왕실의 병영에 기원을 둔다. 단일한 개인의 의지가 전체로 뻗어 나간 기하학적 공간, 전면적 통제에 대한 환상.) 이 모든 것은 최소한으로만 말해도 무시무시한 정치적 결과를 가져왔다. 두 번째는 국가, 사회질서, 심지어는 사회가 서로간에 상당한 수준으로 조응한다고 추측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가장 웅장하고 심지어는 편집증적인, 세계-지배자들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들이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우주론적 프로젝트라면 무조건, 아주 거칠게 말해도, 지상에 있는 무언가와는 실제로 대응된다고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5줄 정도 생략]

 

그렇다면 적실한 국가 이론은 각각의 경우에 해당되는 지배의 이상(아무 것이나 다 될 수 있다. 군대식의 규율을 강제할 필요성, 다른 이들을 고무시킬 은혜로운 삶을 극적으로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능력, 계시를 피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인간 심장을 신에게 바쳐야 할 필요 등등), 그리고 지배의 메커니즘을 서로 구분하는 것이며, 이들 사이에는 일치/대응(correspondence)이 필연이라는 가정을 버리는 것이다. (일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점은 경험적으로 확인해야 하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보자. "서구"(the West)의 신화 대부분은 복종과 절대권력의 이상에 기초한 페르시아 제국과, 시민적 자율성, 자유, 평등의 이상에 기초한 아테네와 스파르타 같은 그리스 도시 사이에 발생하는 신기원적 충돌에 대한 헤로도토스의 묘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런 아이디어들(특히 아이스킬로스와 같은 시인이나 헤로도토스와 같은 역사가들의 생생한 재현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아마 그런 것 없이는 서구 역사를 이해조차 할 수 없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바로 그 중요성과 생생함 때문에, 역사가들은 점차 분명해지는 현실 앞에 눈이 멀어 왔다. 즉, 이상이 무엇이건간에 아키메네스 제국(Achaemenid Empire → 원문에는 Achmaenid라고 되어 있음)은 그 신민(subject)의 매일매일의 삶에 대해서는 매우 가벼운 간섭만을 했었다는 것이다. 이 점은 특히 아테네인들이 노예들에게, 스파르타인들이 자신의 농노였던 라코니아 인구의 절대 다수에게 행사했던 통제력의 정도와 비교하면 훨씬 더 사소해 보인다. 이상이 무엇이건간에 관련된 대부분의 사람에게 현실은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진화인류학이 발견해 낸 가장 충격적인 사실 중 하나는 물리적인(mechanical) 의미에서의 국가가 전혀 없어도 왕과 귀족, 모든 종류의 외적 군주제의 포위가 완벽하게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주권" 이론에 대해 그토록 많은 잉크를 소비한 정치철학자 모두에게 흥미로운 사실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만도 하다. 대부분의 주권자들은 국가의 수장이 아니며 그들이 선호하는 기술적 용어들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이상 위에 구축되어 있다는 점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 이상 속에서 왕의 권력은 실제로 그 자신의 우주론적 구실들을 주어진 영토의 인구에 대한 진정한 관료제적 통제로 변환시키는 데 성공한다. (서유럽에는 이와 비슷한 무엇인가가 16세기와 17세기 무렵 출현하기 시작했지만, 시작되자마자 주권자의 인격적 권력은 "인민"(the people)이라고 일컬어지는 허구적 인격으로 교체되며, 관료제가 거의 대부분을 점령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인식하는 한에서 정치철학자들은 이 주제에 대해 아직까지 별로 할 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점에 대해 나는, 용어를 너무 잘못 선택한 탓이 크지 않을까 의심해 본다. 진화인류학자들은 완성된 강제적 관료제 형태가 없는 왕국(kingdom)을 "추장제"(chiefdom)라고 일컫는데, 이 용어는 솔로몬왕이나 경건왕(Louis the Pious), [중국의] 황제(the Yellow Emperor)보다는 제로니모[아파치 추장]나 시팅불[Sitting Bull, 수 인디언의 대추장]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용어다. 그리고 물론 진화론적 틀 자체는 그런 구조들이 국가에 대안적인 형태라거나 심지어는 국가가 변화하여 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대신, 국가 출현의 바로 전단계인 것으로 여긴다.

 

이 모든 사실들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주된 역사적 과제가 될 수도 있을 듯하다.

 

2) 국가 아닌 정치체(political entity)에 대한 이론

 

그래서, 그건 한 개의 프로젝트가 된다. 즉, 국가를 유토피아적 상상체, 그리고 도주와 습격의 전략(strategies of flight and evasion)이나 약탈하는 엘리트, 조절과 통제의 역학을 포함하는 혼란스러운 현실 사이의 관계로 재분석하는 것이다.

 

이 모든 문제들은 또 다른 프로젝트의 필요성을 강조해 준다. 이를테면 우리가 국가로 보는 데 익숙해져 있는 많은 정치체들이 최소한은 베버적 의미에서 국가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지 물어보게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정치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또 어떤 함의를 갖는가?

 

어떤 면에서 그러한 이론 문헌이 아직까지 없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내가 짐작하기로는, 우리가 국가주의 틀의 바깥에서 생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징표인 듯하다. 여기에 딱 맞는 좋은 사례는 국경이라는 제한을 없애자고 주장해 온 "반세계화" 활동가들의 지속적인 요구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세계화(globalize)할 것이라면, 우리의 주장은, 정말로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 국경을 없애자.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오고 가게 하며, 맘에 드는 곳에서 살 수 있게 하자. 이 요구는 종종 일종의 세계시민권(global citizenship)이라는 개념과 관련된 용어들로 제시되곤 한다. 하지만 즉각적인 반대 또한 떠오른다. "세계시민권"에 대한 요구는 일종의 세계국가를 요청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그런 것을 원하나?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국가 바깥의 시민권을 이론화할 수 있을지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는 종종 심원하고 극복 불가능한 딜레마로 취급되곤 한다. 하지만 만약 문제를 역사적인 방식으로 고려한다면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하기는 어렵다. 근대 서구(Modern Western)의 시민권과 정치적 자유의 개념은 대개 두 전통으로부터 유도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고대 아테네에서 기원하고 다른 하나의 주요 줄기는 중세 잉글랜드(마그나 카르타나 권리청원 등등에서 왕에 대한 귀족의 특권을 선언하는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경향이 있고, 그 이후에는 동일한 권리가 나머지 인구까지 점진적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사실상 역사가들은 고대 아네테나 중세 잉글랜드가 국가이기나 했는지의 문제에서도 합의를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선은 시민권이, 그리고 둘째로는 귀족의 특권이 그토록 잘 정립되어 있었는지도 불분명하다. 정말로 존재했던 최소한의 국가장치가 시민층이 집합적으로 소유하는 노예들에 의해서만 구성되었다는 점을 고려하기 시작하면 국가장치에 의한 힘의 독점을 행사하는 존재로서 국가가 아테네에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아테네의 경찰력은 현재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수입된 스키타이 궁수들로 구성되었고, 그들의 법적 지위와 유사한 것은, 아테네의 법률에 따르면, 고문(torture)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닌 노예의 증언은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될 수 없었다는 사실로부터 수확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런 정치체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추장제"? 전문적이고 진화론적인 의미에서 존왕을 "추장"이라고 서술할 수도 있을 법 하지만, 페리클레스에게 그 말을 적용하는 것은 정말 우스워 보인다. 고대 아테네가 아예 국가가 아니었다면 "도시국가"라고 계속 부를 수도 없다.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적 도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똑같은 문제가 국가형태, 혹은 보다 최근에는 국가와 유사한 정치체들에 대한 유형학에도 적용된다. 스프루이트(H. Spruyt)라는 이름의 역사가는 16세기와 17세기의 영토국가들이 유일한 선수(only game in town)이기는 힘들었다고 추측한다. 최종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게 되었지만(최소한 즉각적으로는) 본래적인 유효성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 다른 가능성들도 있었다(실제로 국가였던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주권에 대해 전적으로 다른 개념을 포함했던 상인연합인 한자동맹 등). 나 자신은 영토 국민국가가 승리하게 된 까닭은, 이 초기의 세계화 단계에서, 서구 특권층이 국가의 이상에 부합하는 균질한(uniform) 인구를 지녔던, 당시로서는 유일한 국가였던 중국을 모델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균질한 인구는 유교 용어들을 빌면 주권의 근원이고 고유한 문학의 창조자이며, 단일한 법률에 종속되고, 고유한 문학으로 수련받아 그 덕성에 따라 선출된 관료들에 의해 행정이 진행되는 존재다... 현재의 민족국가가 겪고있는 위기, 그리고 국가와 같은 일을 많이 하지만 훨씬 덜 추악한 국제 제도들을 만들어 내려는 시도 바로 옆에서, 그에 맞서는 형태로 정확히 국가는 아님에도 여러 면에서 그만큼이나 추악한 국제 제도들이 급증하는 현상을 볼 때, 그런 이론의 결여는 진정한 위기가 되어 가고 있다.

 

이담에 오는 주제들(tenets)은...

 

3) 또 다른 자본주의론

4)권력/무지, 혹은 권력/멍청함

5) 자발적 연합의 생태학

6) 정치적 행복감에 대한 이론

7) 위계

8) 고통과 쾌락: 욕망의 사유화에 관하여

9) 소외에 대한 하나 이상의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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