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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군화]를 읽고...

# 잭 런던, 『강철군화』, 곽영미 옮김, 궁리, 2009 #

 

1. 『강철군화』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날 한국은 바야흐로 ‘강철군화’의 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는 나라이다. 철거민을 비롯한 도시 빈민들이 ‘강철군화’에 의하여 짓밟혀 목숨을 잃고, 불에 타 죽는다. 수만의 평화적인 촛불 또한 ‘강철군화’에 의하여 ‘불법’(한국의 실정법이 보장하지 못하는 인권에 대한 모든 요구는 불법으로 매도 당한다. 실정법은 자본의 이익을 최대한 낼 수 있는 한에서만 시민권을 보장할 뿐이며, 이익을 내지 못하는 모든 인간 활동은 무가치한 것이며, 그런 활동을 요구하는 행위는 모두 불법으로 취급 당한다)으로 낙인 찍히면서 무참하게 꺼져 간다. 0교시 수업을 없애서 졸지 않고 수업하게 해 달라는 고등학생들, 취업해서 열심히 일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대학생들, 생존의 위협을 그나마 덜 받는 정규직으로 전환해 달라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부당한 차별을 철폐하고 한국인 노동자와 동등한 대우를 해 달라는 이주 노동자들, 최소한의 이동권 보장과 차별을 철폐해 달라는 장애인들, 성 소수자들을 비롯한 다양한 소수자들의 염원과 희망의 촛불이 ‘강철군화’ 앞에 서서히 꺼져 갔다. 이러한 모든 부당한 일들은 이미 『강철군화』에게는 예견된 일이었다, 이미 100여 년 전에!

신자유주의라는 미명 하에 더욱 광포하고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우리 시대를 배회하고 있는 ‘자본’이라는 저 유령이 날뛰고 있는 이곳, 이 시점에서 과연 잭 런던의 『강철군화』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혹자들은 『강철군화』가 소설 정치경제학이니, 소설 자본론이니, 100여 년 전에 이미 오늘날 자본의 첨예한 모순을 예견했느니 하면서 이 책을 칭송(?)하거나 아니면 일종의 예언서처럼 평을 하기도 한다(마치 맑스의 『자본론』을 자본주의를 딱 들어맞게 설명을 하고 있느니 또는 아니니 하는 부르주아들의 호들갑과 어딘지 모르게 무척 닮아 있다).

그런데 『강철군화』에 대한 이런 평들은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며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평들에는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와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평들에는 ‘봐! 결국 해봐야 강철군화에게 무참하게 짓밟히잖아!’라는 교묘한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잭 런던은 이러한 평들에 깔린 이데올로기와는 거리가 먼 것 같다. 그는 『강철군화』에서 먼 미래의 이야기이지만, 이미 사회주의 국가를 꼭 올 수밖에 없는 사회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소설은 미완인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꼭 맑스의 『자본론』처럼!). 잭 런던은 20세기 초와 이로부터 700년이 지난 가상 시점 사이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남기고 있다.

잭 런던이 우리에게 남겨 준 과제인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바로 이것이『강철군화』가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정말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사회주의를 맞을 수 있을 것인가? 잭 런던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어니스트’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한 마리로 말한다.

 

“권력! 우리 노동계급이 그 중요성을 항상 강조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2. 『강철군화』에서 나타난 노동계급의 권력 쟁취를 위한 실마리

그렇다면 이 권력을 어떻게 쟁취할 것인가? 처음에 잭 런던은 부르주아 의회를 장악하면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 소설 전체에 걸쳐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환상인가를 너무나 절절하게 보여 주고 있다(이런 점에서 의회주의자들은 의회 진출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의회 장악이 아니라면 고전적인 방법대로 폭력 혁명을 통해 권력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그때는 우리도 힘으로 봉기하는 거지요.”

“그때는 여러분은 여러분의 선혈 속에 잠겨 있을 거요.”

“그런데 지금 여러분의(필자 수정) 힘이란 게 어디에 있지요?”

 

도대체 폭력혁명을 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 즉 힘은 정말로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역사를 통틀어서 보면 대체로 그 힘이란 ‘강철군화’ 앞에서는 찻잔 속의 태풍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혁명은 도처에서 실패했고, 사회주의권은 무너져 버렸다. 이제 그 힘을 어디서 찾아서 권력을 쟁취할 것인가? 다시 의회주의로 돌아가서 자본주의 체제만이 자신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중의 표를 통해서? 이미 잭 런던은 그것이 환상임을 자신의 소설 속에서 밝혀냈다.

그러면 도대체 그 힘은 어디에 있는 것이며, 또 어떻게 해야 그 힘을 현실화시켜 권력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인가? 잭 런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게다가 여자들이야말로 파업의 가장 강력한 추진 세력임이 입증되었다. 그들은 전쟁에 대해서 한사코 반대의지를 굳혔다. 그들의 남편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죽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또 그 총파업이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사람들의 기분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대중의 유머 감각에 적중했다. 그 아이디어는 전염력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학교에 걸쳐서 어린이들까지도 수업을 거부했으며, 학교에 오는 교사가 있더라도 텅빈 교실로부터 집으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총파업은 거대한 국가적 야유회의 형태를 취했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총단결이라는 생각도 그처럼 확고한 증거로서 나타나고 나니까 모든 사람들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바가 컸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대대적인 놀이판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위험도 없어졌다는 점이 있었다. 모든 사람이 유죄인 판에, 어떻게 어떤 사람들만 처벌할 수가 있겠는가?”

 

 

3. 현재 우리가 해야 할 일 하나 - 여성의 해방을 위한 물질적 조건 확보

여기서는 크게 2가지가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처럼 보인다. 첫째, 여성이 주체적으로 자신 스스로를 반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 세력으로 형성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이다. 둘째, 노동계급의 총파업을 어떻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 민중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놀이판으로 만들 것인가이다. 그런데 이 둘 중에서 선차적인 것은 첫째이다. 여성, 그리고 여성의 노동이 모든 사회적 생산의 근원지이기 때문이다. 즉 자본을 만드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생산하는 노동은 가사노동, 돌봄 노동인데, 이 노동은 성별 분업화된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에게 부과되어 있다는 것이다.

먼저 첫째의 할 일에 대해서 말해 보자. 첫째 할 일은 출발점은 가사노동, 돌봄 노동으로부터 여성이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 하에서의 사회화, 즉 상품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상품화를 시켜봤자 결국 여성의 몫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사노동, 돌봄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중적으로 그 부담을 여성에게 덧씌우는 것이다. 즉 여성이 자본과 임금 노동자인 남성 노동자에게 이중적인 착취와 억압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 노동계급--> 자본이라는 먹이사슬 체제처럼 구성되어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임금은 최소한의 신체적이고 기계적인 생활만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이지만, 자본은 이 노동자가 기계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돌아오길 바라며, 노동자 역시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데, 이렇게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인간 ‘생산’ 노동에 대해서는 단 한 푼의 임금도 지불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의 인간으로서의 자기 생산 내부에는 정치경제학적으로 부불노동(임금으로 지불되지 않은 노동)의 착취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을 가사노동, 돌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노동계급 자신 내부에서의 착취의 계기를 근절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계급의 경제주의적 경향은 여성을 해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오히려 여성을 더욱 더 억압과 착취의 사슬로 옭아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제주의적 경향은 개별 노동자의 임금 상승에만 초점을 두는 것인데, 개별 노동자의 임금 상승이 의미하는 바는 임금 상승에 따라서 노동자 자기 생산을 위한 더 많은 요구를 여성에게 강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착취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대 자본 투쟁은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물적 조건 확보를 위한 투쟁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예를 들어 노동계급의 모든 임단투 투쟁은 일단 아이들의 공동 양육과 공동 교육을 위한 물적 조건 확보에 맞춰져야 한다. 공동 양육과 공동 교육에 필요한 비용을 자본으로부터 쟁취해야 한다. 이렇게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될 때, 노동계급의 진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이는 노동운동이 고민하고 있는 지역운동의 활성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현재 우리가 해야 할 일 둘 - 노동계급의 총파업을 대대적인 놀이판으로 만들기

둘째 할 일에 대해서 말하려면, 첫째 할 일과 관련한 이야기를 좀 더 할 필요가 있다. 공동 양육, 공동 교육은 철저하게 자본 교육, 제도권 교육으로서 공교육에 반대된다는 의미에서 반 자본 교육, 비 제도권 교육, 노동계급 교육으로서의 사교육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이 사교육 체제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누구와도 연대할 수 있는 창조적이고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상상력 풍부한 열린 인간을 생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이러한 인간 생산의 방법으로는 각 연령 별로, 각자 하고 싶은 영역 별로 코뮌을 형성해서 자신들이 하고 싶고, 또 해야 할 일들을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각 코뮌들이 상호 의사소통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며 자유롭게 연대할 수 있는 사회적 개인들로 자신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생산된 사회적 개인은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각 활동 단체들 속에서 활동할 수 있는 새로운 인재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자신의 부모나 누나, 형들이 파업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모든 일상생활을 잠시 접고 여행 가듯이 파업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각 코뮌 단위로 각각의 깃발 아래서 먹고 놀고 자유로이 담소를 나누면서 휴식을 가지는 파업이 될 것이다. 물론 이 파업은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파업, 나아가서 모든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파업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모든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사표를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사표 던지고 논다는데, 그것을 불법이라고 잡아 갈 것인가? 설령 잡아가더라도 감옥에는 온통 나의 동지들일 테니 그것도 괜찮은 일일 것이다. 감옥에서 놀면 될 테니까 말이다.

자본에 대항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본이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서 움직이는 수동적인 활동이 아니라, 자본이 무엇을 하던 간에 억압과 착취가 없는 새로운 세상을 끊임없이 만드는 일이다. 몇 푼의 임금 인상이 새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 노동계급 자신 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사악한 억압과 착취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이야말로 『강철군화』를 완성하는 길일 것이다. 또한 자매, 형제애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를 우리 노동계급의 손으로 만드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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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쿡의 음모...

요즘 데레비에서 몬 쿡이란 광고를 해대고 있다...

배우 변우민이가 나와서 나 쿡하지 않아서 개고생하고 있어 라고 고해성사를 했었다.

그런데 이 쿡이라는 광고가 미국이 한국을 집어 삼키려는 음모를 나타내고 있다는

말이 급속하게 퍼지고 있다는...

너 쿡 안 하면 개고생한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 쿡할래를 안 하면 죽음이나 마찬가지라는 거지...

 

나 쿡할래!를 영어로 하면...

 

미~쿡이다...

 

그러니까 미~쿡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쌈이다...

 

바야흐로 한국은 미쿡의 식민지가 되는 것이고...

 

당신은 나 쿡할래 하고 싶소?!

 

 

미~쿡! ?

 

 

믿거나 말거나...  

 

 

 

덧니> 아우~~~...

머리가 멍하다 보니, 이런 개구라나 생각나고...ㅠ...

얼렁 자판기 커피 마시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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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 먹고 있는 다수의 대학생을 바라보며...

4.30 건대사태를 기점으로 다수의 대학생이 욕을 먹고 있다.

멍청하다고, 대학생의 본분을 망각하고서 자본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고,

앞으로 졸업하면 자신들도 노동자가 될 터인데 자기 존재를 기만하고 있다고...

 

사실 욕 먹어 싸다고 생각하면서도 맘이 편치 않은 것은

욕 먹는 다수의 대학생을 통해서 나의 무능력을 다시금 새삼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4.30문화제 때 어떤 사람은 나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에게 말했다.

-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요!

그냥 미안하고 무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이건 내가 무슨 교육을 잘못 시켜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왜 다수의 학생들이 저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까 생각해 볼 때

뭐랄까 일종의 자괴감 같은 것을 느꼈다.

양쪽 다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쪽 다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아서 함께 하자고 제안을 할 수 있다면

양쪽 모두가 함께, 학교 안에서 당당하고 빵빵하게 문화제를 치를 수 있을 것이다.

 

다수의 대학생들은 자신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가?

사실 멍청하다.

그들은 진득하게 생각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단히 즉흥적이다.

 

왜 그들은 진득하게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걸까?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유전인자를 가지고 태어나서일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들에겐 그럴 짬이 없다.

일단 그들이 1학기 동안 들어야 하는 학점이 평균적으로 18학점 이상이다.

대학원을 다녀본 사람은 1학기에 18학점을 공부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대학원에서 1학기에 9학점을 꽉 채워서 듣는다면 그 학기는 그냥 죽었다 해야 한다.

1주일에 4~5일은 밤을 새야 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공부해도 공부할 게 천지인데...

다시 말하자면 1학기에 평균 18점 공부하라는 것은 아예 공부를 하지 말라는 말과 똑같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생각을 한다는 것인데, 공부를 하지 말라는 것은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저항하게 되면(한 번도 이러한 것에 대해서 이의제기해 본 적이 없다!)

대학교를 그만 다녀야 하고, 대학교를 그만 다녀야 한다는 것은 우리나라 현실에서

장시간 저임금에 시달려서 골병 들며 시름시름 앓다가 죽던가, 아니면 아예 굶어 죽어야 한다는 의미다.

 

대학생들에게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돌려 주어야 한다.

그들에게 시간을 돌려 주는 투쟁이 즉각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런 사태는 계속 일어날 것이다.

그 투쟁은 먼저 일단 140~150 졸업 학점을 70학점으로 낮추는 투쟁이어야 한다.

그런 후에 학습 평가를 현행 A~F로 되어 있는 것을 패스-논패스로 바꾸는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모든 취직 시험 제도를 전 사회적으로 폐지하는 쪽으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그리고 이 투쟁을 통하여 모두가 정규직으로 취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만약 자본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취업 거부 투쟁을 벌여 나가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모든 노동자가 정규직화를 쟁취할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본다.

  

또한 전에 행인이 말씀하셨듯이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나누고 공유할 수 있는 의사소통 체계가

거의 전무하다.

학생들의 생각을 진득하게 들어주고 같이 고민하며 연구하고 실천할 수 선생도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며,

대학교의 학생-교수 사이의 관계 구조가 중세 시대 길드의 장인-도제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삶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을 뿐더러 관심을 가질 여유조차 가지기 힘든 상황이다.

다들 먹고 살기 바쁘기 때문이다.

 

학생들 사이에서의 의사소통 관계 또한 거의 부재하다고 본다.

특히 운동권 학생들과 일반 학생들 사이의 의사소통 관계가 단절되다시피한 상태는 이미 오래 전이다.

운동권은 운동권 나름대로 자기 조직 추스리기도 벅차서 조직원 이외의 삶에 거의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또한 이제 남남이 되어 버렸기에 일반 학우를 보는 운동권 학생의 시각은 싸늘하기만 하다.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과 함께...

일반 학생들 역시 운동권 보기를 돌 같이 한다.

이러한 의사소통 부재가 4.30 건대 사태를 일으킨 주범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학교 측에서는 학생들을 관리하기 편해지며,

틈 날 때마다 학생들 사이를 이간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의사소통 관계의 복원은 위에서 제시한 투쟁을 통해서 복원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같이 하는 투쟁 속에서 머리를 맞대고 논지를 모으는 과정(예전엔 이것을 사상투쟁(사투)이라고 했다)을 통해서 소통의 관계가 복원될 것이다.

이 속에서 대학의 새로운 민주주의 문화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앞에서 대학생들이 멍청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멍청한 이유는 그들이 너무 똑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직감적으로 너무 잘 알고 있다.

세상이 얼마나 먹고살기 힘든가를 말이다.

그 세상에서 살아 남기 위한 과정에는 오로지 혼자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노동 운동도, 진보 운동도 결국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는 것을,

뭉쳐서 싸워봐야 결국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아니 결국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본에게 게겨서는, 자본을 쌩까서는 결코 살아 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어릴 때부터 봐 왔고 세뇌되어 왔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증명을 그들은 '자본의 현실'을 통해 보아왔다.

그러나 운동권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세상이 온다는 '사실'에 대한,

단결 투쟁하면 승리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자유롭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을 그들은 '노동의 현실'을 통해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사실'과 '현실'에 충실한 합리주의자들이다.

그들의 그러한 합리성이 곧 그들을 멍청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돌이 백만 배가 되어서 '우리'에게 되던져져 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돌파구가 필요하다.

그들은 이러한 사실 또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그러한 돌파구를 하나의 유토피아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증명하지 못한 비현실적인 것인 것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돌파구는

사실상 우리에게 너무나도 필요한 돌파구이지 않을까?

그들과 우리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 목적을 어떻게 현실화시킬 것인가, 그리하여 우리 자신과 그들에게 증명해 보인다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라고 본다.

 

대학과 대학생이 문제라고 얘기하는 게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얘기 맨날 얘기해 봐야 죽은 자식 뭐 만지기이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당면 과제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운동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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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성이란...

모 대학에서 메이데이 전야제 문화행사와 관련하여 갈등을 빚고 있으며,

또한 집회를 열 장소 잡기가 너무 힘들어졌다는 민노총 관계자의 말을 듣고 보니

뭐랄까...

어쩌다가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면서 착잡함과 답답함...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성을 근 20년간 입에 달고 살면서

대중에게 다가가고자 했던 결과가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당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대중이라...(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칭하는 것은 아닌 것 같고...)

도대체 대중이란 무엇일까...

대중이란 것이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이기는 한 것일까...

실체도 없는 헛것을 디립다 쫒아다닌 것은 아닐까, 저산 너머 무지개를 쫒는 소년처럼...

  

 맑스주의에서 대중이란 계급적 의미로 쓰인다.

즉 대중이란 노동자 '계급 대중'을 의미한다.

이때 대중은 실체가 있는 존재가 된다.

(물론 계급 역시도 엄밀하게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계급과 관련된 이야기는 조만간 정리를 해 보도록 하겠다.) 

그런데 아마도 90년 초에 공산주의권이 무너지던 시점에

수많은 전향들이 일어났고, 그 전향의 과정에서 '노동자 계급'을 제외한

모든 피지배 계층을 통칭하는 '대중'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 과정에서 맑스주의와 노동자 계급에 관한 이론의 입지가 좁아지고,

아울러 '변혁의 주체가 노동자 계급이라는 것'에서 '대중'으로 옮겨지게 된다고 본다.

또한 정치적 측면에서 '비합법 전위 정당론'으로부터 '합법 대중 정당론'이 득세하면서

합법적인 진보 대중 정당들이 출현하게 된다.

 

그러면서 모든 판단 활동과 행위들의 기초는 '대중'이 되었다.

대중이 싫어하는 것을 하면 안 되고,

대중이 좋아할 만한 것을 따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대중이 원한다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고,

대중이 원한다면 양잿물도 마셔야 한다.

조금이라도 비대중적(?)인 생각되는 판단과 행위들은 종파적, 분파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전체 운동에 해를 끼치는 해당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떠받드는 대중이 지지는 고사하고

이른바 진보의 목을 세차게 조르고 있다.

(또한 진보가 무엇인가 하는 것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토록 신처럼 떠받들면서 그렇게 충성을 맹세했건만,

그 '대중'은 진보를 '쌩까는 것'을 넘어서서

그 대중의 이익에 해가 되는 악의 근원쯤으로 여기고 있다.

 

도대체 대중은 어떤 존재이길래 진보를 '시험에 들게' 하는가!

신과 같은 존재인 대중...

우상 숭배에 빠진 것은 아닌가!...

 대중이 정말 진보의 기초인가?!

 

대중이 진보의 기초일 수 있을 때가 있다.

그때는 진보가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력과 맞짱을 뜰 수 있거나 그 지배력을 넘어설 수 있을 때이다.

그 까닭은 레닌이 말했던 것처럼 오직 생존이라는 전쟁에 대한 정치적 공포 때문이다.

오로지 생존이라는 전쟁에 대한 정치적 공포만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르주아 사회 자체 안에서 자신의 삶을 이어가고 있으며, 부르주아 사회 자체가 무너져서는 자신의 삶을 이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중들은 상당히 기회주의적이며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다. 

 

그러나 진보의 현실은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력을 넘어서기는커녕 맞짱도 뜰 수 없으며,

부르주아 계급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때려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진보의 기초로서 대중'은 허상이며 우상일 뿐이다.

또한 이러한 현실 속에서 대중성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이라고는 없다.

 

대중이 정말 진보의 기초가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사회만이 생존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고 느끼지 않게 하는 현실적인 조건, 부르주아 사회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 또는 공동체가 있다는 생각과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하는 현실적 조건을 진보 스스로가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조건을 '코뮌'이라고 하고 싶다.

자본이 어떤 개지랄을 하더라도 쌩까면서 우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코뮌의 건설이

시급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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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휴지를 왜 착취하는가!

제목이 좀 거창하다...

에~, 그러니까 낚시질하려고 제목을 저헐게 단 것은 아니라는 말쌈^^...

지금 화장실에 가서 똥을 쌀 즈음이다.

화장실에 가긴 가야 되는데...

생각난 것이 있어서 쪼콤 참고 쓴 다음에 가야 힘차게 똥을 눌 수 있을 것 같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보는 것은 휴지뭉치가 엄청나게 화장실 한귀퉁이에서 뒹굴고 있는 광경이다.

화장실 입구에는 화장실 휴지가 걸려 있다.

누구나 필요한 만큼 가져가서 쓰라고 놓아둔 것이었다.

아마도 작년 가을부터인 것 같다.

똥누는 화장실에 들어가면 이틀에 한번 꼴로 휴지 뭉치가 둘둘둘 아무렇게나 말려서

똥누는 곳 선반 같은 데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둘둘 말린 양이 장난 아니게 많다는 것이다.

아마 그것 때문에 하루에 큰 두루말이 화장지 1개가 모자랄 정도이다.

그 양은 내가 화장실에 똥누러 가서 쓰는 양으로 치자면 2주일 정도치에 해당하는 양이다.

처음에는 그걸 가져다가 곱게 펴서 화장실 갈 때마다 쓰곤 했다.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그 화장시 뭉치가 이틀에 한번 꼴로 있는 걸 보게 되는데,

그러면 너무 아까워서 그렇게 화장지를 쓰는 사람을 원망(?)하게 된다.

 

- 아니, 누군데 이렇게 화장지를 쓰는 거야! 에고 아까워라!

 

그런데 아까워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러다가 어느 때부턴가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렇게 내뱉곤 한다.

 

- 어떤 놈인데 이따구로 휴지를 쓰는 거야,

  이거 자기가 한 번 똥 눌 때마다 쓰는 휴지의 양도 가늠하지 못하나!

  어떤 놈인지 낯짝 한번 보고 싶다.

 

그러면서 씨씨티비를 설치해다가 그 인간을 한번 봤음 했더랬다.

그런 다음 <니가 미쳤어~!> 하고 노래라도 불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가면 또 휴지 뭉치가 있을지 어쩔찌...

아까 오줌 누러 갔을 때는 있던데,

없으면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께서 휴지통에 버렸을 것이다...

 

니가 뭔데 아까운 화장실 휴지를 억압하고 착취하고 쥐X이냐!

디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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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3.30...

1. 지금 여친은 꽃보다 남자라는 막장 드라마를 보고 있다.

난 이 드라마가 아주 싫다.

무슨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도 아니고...

돈 많은 것들이 돈지랄하는 것처럼 생각돼서...

본 적이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들들 비롯한 살기 빠듯한 사람들에게

재벌 드라마를 보여 주면서 카타르시스나 하라는 건가... 

또 육두문자 나오려 한다...

케비에수... 정말 맘에 안 든다...

시절이 하수상한데도 이런 막장 드라마를 내보내다니...

 

꺼억꺼억 숨넘어갈 듯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힘겨운 삶을 드라마로 만들지는

못할지언정, 이런 막장 드라마나 만들고 있으니...

바랄 걸 바라자...

정권의 개처럼 짖어대는구나...

 

2. 얼마 있지 않으면 야구 시즌이 돌아온다.

부산 갈매기들이 비상하는 시기가 오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 일찍 비상하는 것이 아닐까...

좀 걱정된다.

시범 경기에서부터 물이 오르면 정규 시즌에는 혹시... 하는 걱정이 앞선다.

 은하철도께서 다음 주 목욜에 잠실 갈매기 게임 보러 가신다는데...

난 주중에는 거의 시간을 낼 수가 없다.

금요일 저녁이나 주말에나 시간이 나는데...

다음 주 게임 너무 아쉽다...

수업하는 아이들 수업 토론과 관련하여 미팅이 있다...

쌍둥이랑 하는 모양인데,

혹시 염둥이 님은 잠실 경기 보러 가시지 않나... ^^

어쨌거나 너무 아쉽다...

 

3. 울 엄니께서 머리가 아프고 자꾸 건망증처럼 무엇을 잊어버린다고

병원에 가서 의사한테 말했더니,

의사가 그러더란다, 울 엄니께서 우울증이 있어서 그런다고...

울 엄니께 너무 죄송스럽다...

일주일에 한 번씩, 토요일 저녁에 집에 간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울 엄니랑 많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 생각한다.

울 엄니 얘기 잘 듣고 잘 이야기해야지...

자꾸 울 엄니가 그리워진다...^^

 

나도 요즘 정신을 놓고 있는데, 나도 우울증이 있는 건가...

그런 것 같다...

우울증이라는 것이 내가 요즘 느끼고 있는 것이라면

울 엄니께서 엄청 힘드셨을 텐데...

하여간 울 엄니 얘기 열심히 들어야겠다.

어머니라는 위치가 모든 사람들의 감정 찌꺼기들을 정화하는 기능을

강제 당하는 위치라서 그 기능이 얼마나 힘겹고 기분 더러운 것인지,

그리고 자기 얘기는 거의 할 수 없다는 것, 자기 얘기를 꺼내더라도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나름대로 아는지라...

울 엄니의 좋은 말벗이 되어야겠다.

이게 또 나의 우울증을 해소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소주 한잔 생각나는 밤이다...

그리고 담배 한모금도...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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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웬만하면 육두문자 안 쓰려고 했는데...

어제 밤에 집에 들어가서 잠깐 티비를 켰더니, 연에인들 나와서 퀴즈 맞추는 프로그램을 하더라.

그래 또 연예인들 나와서 이런저런 수다를 하는가부다 했다.

그런데 세수를 하고 들어와서 이것저것 방 좀 정리하는데... '

갑자기 엄마가 어쩌구 저쩌구 하는 소리가 귀에 팍 들어왔다.

무슨 얘긴가 싶어서 티비 앞에 잠깐 앉았다.

연예인들이 퀴즈 맞추는데, 문제가

<영.유아들이 충치에 걸리는 이유는?>이었다.

그런데 골때리는 것은 그 이유라는 것이

 

<엄마가 이빨 잘 닦지 않고 충치걸린 상태로 아이에게 뽀뽀 등 스킨쉽을 하면

엄마의 충치 세균이 아이의 입 속으로 들어가서 아이에게 충치를 옮긴다는 것>이다.

 

그걸 또 몇 가지의 사례를 들어가며 엄마가 아이 충치의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이며,

따라서 엄마를 무슨 죄인 취급하는 것처럼 보였다.

 

-- 아! 이런 XXXXXXXXXXXX....

 

야! 이 빌어먹을 거시기들아...

엄마가 봉이냐!

이것들이 퍽 하면, 뭐 문제만 생겼다 하면 엄마가 문제란다.

그것도 교수라는 전문가를 데려와서는 그렇댄다...

(거기 전문가라고 엄마 운운하는 교수는 도대체 개념이 있냐...ㅉㅉㅉ...)

 

그럼 엄마가 애들한테 스킨쉽도 하지 말라는 거냐!

그래서 안 하면 또 이런 소릴 늘어놓겠지...

어렸을 때 엄마가 아이한테 사랑 표현을 잘 못 받아서

이 애가 커서 문제아가 되었다고...

또 엄마 핑계를 대겠지... XXX들...

 

독하고 징헌 것들...

 

엄마가 충치가 왜 생기는지, 그리고 충치가 생겼다면

그 충치를 빨리 치료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내는 것이 제대로 된 해결 방법 아닌가!

엄마가 자신의 건강을 돌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보장해 주어야  

하는데도 그렇지 못하면서 엄마에게 <원죄>를 뒤집어 씌우는 자들에게

정말이지 너무너무 화가 난다.

 

더블유비씨 결승전 한일 야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엄마를 원죄로 몰고가는 이 사회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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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개강한 지 벌써 2주일이 지나가고 있다.

언제 개갱했고,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지 느낄 새도 없이 시간이 금방 지나간 것 같다.

그래서 그런가...

 

1. 정신이 별로 없다. 무척이나 산만하다...

무엇인가 생각이 나서 메모라도 할라치면,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잘 모르겠다.

물건을 여기에 분명히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찾아 보면 없는 거다.

도대체 건망증이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아마도 정신 없이 지내는 것이 더욱 건망증을 부채질하는 것 같다.

 

2. 무엇 하나 한 번에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

무엇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그 일을 하는 순간에 예기치 못한 것들이 태클을 걸어온다.

도대체 왜 그런 일들이 생기는지 감이 잡히지 않으면 성질이 부글부글 부아가 치밀면서

속으로 온갖 욕설을 나 자신에게 퍼붓곤 한다.

오늘 아침에도 자전거를 학교까지 잘 타고 왔는데,

학교에서 자전거 바퀴에 바람이 빠진 것 같아서

바람을 넣었는데...

아... 글쎄...!

바람을 넣는 족족 정말로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바람이 빠지고

자전거 바퀴 타이어는 노골노골 오징어 구이가 돼 버리는 거다.

날은 무지하게 춥고, 바람 엄청 불고, 그래서 자전거는 자꾸 넘어지려 하고

손은 또 왜 그렇게 시려운지...

또 혼자 퍽퍽 했다..

 

정신 좀 차리고 살아야지, 이거 원...

하긴 이달 운세가 별로 안 좋더라...

그래도 그렇지...

 

정신 좀 그만 출장 보내! 곰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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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쿨에 대한 단상...

[님이 쓰신 글 중에 제가 우선 풀고 싶은 부분은, 로스쿨이 그렇게 진보적이라면, 왜 미국 법조 아니 변호사사회는 저모양인가 하는 그런 부분입니다.

저는 로스쿨 그 자체가 진보적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로스쿨을 어떻게 설계하는가에 따라, (법률가 자격을 부여하거나 법률가를 키우는 방식도 변화시킬 수 있는 동시에 -- 이는 진보적이냐와 상관없는 부분입니다), ①변호사 사회라는 권력을 가진 집단에 무한경쟁, 개인들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가 들어가는 현재 우리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진보적일 수 있다고 봅니다.

먼저 님이 쓰신 글의 댓글에서 제가 로스쿨을 왜 하는지의 첫 출발은, 법률가 양성제도 개혁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는 진보적인가 아닌가가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겠고, 저또한 그런 진보성을 생각치 않았습니다. 그 다음 단계, ②즉 법률가 양성제도의 개혁의 방식으로 전문대학원 수준에서 법률가가 될 사람을 교육하고 그들의 최소 자격 여부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가자는게 정해진다면, 그 다음 단계에서 그러한 전문대학원에 들어가는 사람이 경제적,또는 사회적 여건에 따라 기회가 봉쇄되는 것을 막는 일이 필요하다고 보고, 그 점에서 '진보적'이라는 말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님은, 대체 국가가 왜 로스쿨을 지원해야 하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현재 사법연수원생들에게 공무원 급여를 지급하는 것이 문제라는 점도 지적했습니다. 저도 현재 사법연수원생들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그들은 공무원이 아니니까요. ③그들중 대다수는 곧바로 나와서 개업 변호사라고 할까요. 전문자영업자가 되니깐요.

연수원생에게 공무원신분의 월급을 국가가 대주는 것과 로스쿨을 지원하자는 것은 다른 것이죠.

제가 국가의 로스쿨 지원을 말하는 것은, 다른 것은 몰라도 '공익적 변호사 활동'을 전제로 한 장학지원, 사회경제적 부담계층에 대한 장학지원을 말하는 것인데, 전 그건 당근 필요하다고 봅니다. 학비가 싼 이상적인 경우라면, 그러한 국가의 지원은 별로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고, 이를 방치하면 앞서 제가 말한 부분의 지원이 없으면 로스쿨은 말 그대로 돈이 있는 사람만 변호사 기회, 따라서 권력을 쥘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것으로 전락할테니 말이죠.

이건 개인에 대한 지원입니다.

이런 개인에 대한 지원은 타겟을 정해서 사회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는 사람, 집단에 대한 지원인데, 저는 이런 지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국가의 로스쿨 지원은 이런 개인,집단에 대한 지원이 아닌, 로스쿨 그 자체에 대한 지원도 고려해볼 수 있다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가하면, ⑤변호사라는 직업은 개인자영업자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공공재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공공재를 양성하는데, 사회가 공동의 관심을 가지고, 필요한 지원이 있다면 적절한 수준에서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기우일런지 모르겠지만, ④이거는 물론 로스쿨이라는 교육기관에 대한 지원을 의미하지, 그 교육기관에 다니는 학생 개개인에 대한 직접 지원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글의 맥락에서 잠깐 벗어날지 모르겠지만, 사실, ⑥이제는 로스쿨을 감시할 때인데, 로스쿨이 기대했던 대로 제대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감시하거나, 또는 국가지원이 아니더라도 학교 자체적으로 사회경제적 배려가 필요한 계층에 대한 지원을 지속할 여건을 마련했는지 등, 그외에도 여러가지 감시해야겠지요.

 

다시 님의 글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님은 로스쿨을 도입하자는 교수들은 그동안 법대에서 교육하던 사람들 아니냐, 그들은 뭐냐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법대, 그러니까 법학부에서 잘 가르치고, 사법시험이 아닌 변호사자격시험을 치르게 바꾸면 '교육을 통한 법률가 양성'이라는 것도 가능하지 않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점은, ⑦학부 교육이 아니라 왜 대학원 수준에서의 교육까지 받게하느냐가 쟁점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건 변호사에 대한 교육을 어떤 수준으로 생각하느냐, 그게 학부가 아니라 전문대학원 수준에서 필요한가 아닌가 하는 그런 고민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유럽의 어떤 나라에서는 법학부 교육을 통한 사람들에게도 자격을 엄격한 과정을 거치게 한 후 주는 나라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따라서 정답이 있는 문제라기보다는 뭐랄까요? 무게중심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학부교육 수준이 아니라 학부교육 수준을 거친후 전문대학원 수준에서의 교육을 받게 한 후 기초자격을 테스트하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저외에도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속 구성원들도 그런 선택을 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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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인 글에 트랙백을 걸어 이 글을 쓰는 것은 참여연대 사법감시 센터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박근용 씨라는 분의 덧글 내용이 납득이 잘 안 가고 너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 행인이 그토록 답답해하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박근용 씨의 글이 로스쿨에 대한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박근용 씨의 덧글을 통해 보자면, 도대체 어떤 구체적인 비전을 가지고 이 로스쿨 제도를 추진하게 되었는지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박근용 씨 글 전체 내용의 전제는 ‘로스쿨이 어떤 경우에도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왜 정당한가에 대한 이야기는 한 군데도 볼 수가 없다. 오히려 로스쿨 제도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제는 로스쿨을 감시할 때인데, 로스쿨이 기대했던 대로 제대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감시하거나, 또는 국가지원이 아니더라도 학교 자체적으로 사회경제적 배려가 필요한 계층에 대한 지원을 지속할 여건을 마련했는지 등,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감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로스쿨이 어떤 경우에도 정당하다’는 자신의 글의 전제를 스스로 뒤집고 있다. 사태가 이 정도면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아니 로스쿨 자체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하고 있는지가 의심스럽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 세세하게 이 글을 따져 보도록 하겠다.

①“변호사 사회라는 권력을 가진 집단에 무한경쟁, 개인들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가 들어가는 현재 우리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진보적일 수 있다고 봅니다.

--> 먼저 로스쿨이 되면 무한경쟁, 개인들의 경쟁을 해도 되지 않는다는 것인가? 로스쿨 입학할 때부터 처절한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변호사 시험을 통해 당락을 결정하는 것 또한 무한경쟁이 아닌가? 로스쿨 입학자들의 대부분은 이른바 ‘스카이’ 대학 출신들이다. 나머지 타 대학 출신들이 로스쿨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이건 로스쿨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다 아는 비밀이다. 현재 로스쿨을 실시하고 있는 상황이 이러한데도 뭘 믿고 현재 무한경쟁이 속속들이 배어 있는 우리 상황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인가?

 

②“즉 법률가 양성제도의 개혁의 방식으로 전문대학원 수준에서 법률가가 될 사람을 교육하고 그들의 최소 자격 여부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가자는 게 정해진다면, 그 다음 단계에서 그러한 전문대학원에 들어가는 사람이 경제적, 또는 사회적 여건에 따라 기회가 봉쇄되는 것을 막는 일이 필요하다고 보고, 그 점에서 '진보적'이라는 말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 결국엔 중산층과 서민층이 변호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제도적으로 좀더 열어 놓았기 때문에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만인이 평등한 사회이다. 누구나가 변호사가 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이 주어진 사회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일단 전문 대학원에 들어가는 자체가 서민들에겐 엄청난 경쟁률을 뚫어야 가능한 일이고, 그 경쟁률을 뚫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사교육비가 들어갈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한 일이다.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 뻔한 것을 ‘진보적’이라 부르는 것은 온당하다고 할 수 없다.

 

그들중 대다수는 곧바로 나와서 개업 변호사라고 할까요. 전문자영업자가 되니깐요.

연수원생에게 공무원신분의 월급을 국가가 대주는 것과 로스쿨을 지원하자는 것은 다른 것이죠.

제가 국가의 로스쿨 지원을 말하는 것은, 다른 것은 몰라도 '공익적 변호사 활동'을 전제로 한 장학지원, 사회경제적 부담계층에 대한 장학지원을 말하는 것인데, 전 그건 당근 필요하다고 봅니다.

--> 여기서 말하고 있는 ‘공익적 활동’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 ‘공익’이라는 말 자체가 대단히 추상적이어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변호사가 된다는 것은 박근용 씨 말 그대로 돈 잘 버는 전문 자영업자가 된다는 것이며, 그리하여 변호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그가 기존 사법시험을 거치던 아니면 로스쿨을 거치던 간에, 돈 잘 버는 전문 자영업자라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뚜렷한 목적을 가진 사람이 변호사가 되어서 할 수 있는 ‘공익적 활동’이란 것이 무엇이 있을까?

다른 한편으로 이런 뚜렷한 목적을 가진 사람에게, 그것이 장학 혜택이 되었건 공무원 신분의 월급을 주건 간에, 경제적 지원을 하는 것은 그 결과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박근용 씨는 ‘공익적 활동’을 전제로 해서 다르다고 계속해서 말을 하겠지만 그 공익적 활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는 이상 다르다는 말은 공허해질 뿐이다.

 

이건 개인에 대한 지원입니다.

이거는 물론 로스쿨이라는 교육기관에 대한 지원을 의미하지, 그 교육기관에 다니는 학생 개개인에 대한 직접 지원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 개개인에 대한 지원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로스쿨 자체에 대한 지원은 어떻게 이루어지길래 서로 다르다는 것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전자는 국가가 개개인의 통장에 직접 경제적 지원금을 입금시킨다는 것이고, 후자는 로스쿨을 통해서 경제적 지원을 한다는 것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여간 이것을 볼 때 경제적 지원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상도 제대로 서 있지 않은 상태에서 로스쿨을 추진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개인자영업자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공공재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공공재를 양성하는데, 사회가 공동의 관심을 가지고, 필요한 지원이 있다면 적절한 수준에서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무엇을 ‘사회적 공공재’라고 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만일 사회적 공공재를 사회 전체에 아주 없어서는 안 될 필요한 재원이라고 정의한다면, 사회 구성원 모두가 사회적 공공재이다. 요즘처럼 국가 경제의 위기가 코앞에 닥쳐 있을 때, 사회적으로 가장 필요한 공공재는 이 경제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주체인 노동자들이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사회적으로 지원해야 할 사회적 공공재는 바로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동자들을 양성하는 모든 교육기관에 경제적 지원을 해야 한다.

 

이제는 로스쿨을 감시할 때인데, 로스쿨이 기대했던 대로 제대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감시하거나, 또는 국가지원이 아니더라도 학교 자체적으로 사회경제적 배려가 필요한 계층에 대한 지원을 지속할 여건을 마련했는지 등, 그외에도 여러가지 감시해야겠지요.

--> 이 대목에 와서는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도대체 시행 첫걸음마부터 감시해야 할 제도를 뭐 하러 만들었는가? 그렇게 문제가 많은 제도였다면 애초부터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감시하는 비용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결과적으로 보자면 박근용 씨가 말하고 있듯이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 할 계층이 그 비용을 감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박근용 씨와 같은 활동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단체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한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학부 교육이 아니라 왜 대학원 수준에서의 교육까지 받게하느냐가 쟁점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건 변호사에 대한 교육을 어떤 수준으로 생각하느냐, 그게 학부가 아니라 전문대학원 수준에서 필요한가 아닌가 하는 그런 고민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유럽의 어떤 나라에서는 법학부 교육을 통한 사람들에게도 자격을 엄격한 과정을 거치게 한 후 주는 나라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따라서 정답이 있는 문제라기보다는 뭐랄까요? 무게중심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아닌가 싶습니다.

--> 여기서는 박근용 씨가 로스쿨 문제는 선택의 문제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선택의 문제라는 것은 ‘절대적’이지 않은 문제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로스쿨에 비판을 하는 사람들을 기존의 보수주의자들과 동일하게 취급하면서 자신들만이 개혁주의자이며 로스쿨만이 문제 해결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로스쿨이 문제가 많다면(이는 일정 정도 박근용 씨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로스쿨 시행을 감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도를 찬성하고 입법 추진한 사람들은 이에 대한 사과를 일단 먼저 해야 하고, 확실하고 구체적인 비전을 가지고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거나 해야 하는데도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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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시작!

오늘이 개강 첫날이다.

이 날이 오는 것이 참으로 부담스럽고 긴장되었다.

어찌 맞이할 것인가...

학생들이 수강신청할 때 보니,

8~90%가 신입생이라서 걱정은 더욱 커졌더랬다.

재학생이 좀 있으면 재학생이 새내기들을 좀 돌볼 수 있을 텐데,

재학생이 없으니 새내기들을 어찌 잘 보살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런 내 생각이 참으로 웃긴 생각이었다는 것이

오늘 처음 수업 들어갔을 때 증명되었다!

새내기들...

참으로 똑똑하고 당차 보였다.

걱정할 일이 아니었는데...

신입생들을 너무 '애'들로 보았던 내 편견이 참...

이번 학기 수업도 아주 재미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해 본다.

 

학생들이 취업이라는 것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비판적으로 살피면서,

앞으로의 삶을 기획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이번 학기도 몸은 꽤 고달퍼지겠지만 마음은 꽤 뿌듯해졌으면 좋겠다.

 

건녀편 야외무대에서는 학생들 자체적으로 입학식을 하고 있다.

그래서 시끌벅적하다^^...

간만에 배가 고프다는 느낌이 온다.

이 느낌이 정겹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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