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쌍용차 아이들이 아프다던데...

앙겔부처님의 [쌍용 자동차 아이들이 아프다] 에 관련된 글.

얼마 전에 파업을 했던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아이들이 많이 아프단다.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학교에서도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한다.

비단 이번 파업 때뿐이겠는가!

이전에 많은 파업이 있었고, 그 파업한 노동자의 아이들이 비슷하게 많이 아팠을 것이다.

그 아이들 중에 이미 성인이 된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미 성인이 된 아이들과 아직 많이 아픈 아이들은 노동자의 파업을 어떻게 생각하며, 파업을 하였던 부모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모진 학대를 당하고 있는 또는 이미 당했던 아이들은 노동자인 부모의 파업을 기피해야 할 공포의 대상, 반드시 없애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이들의 정신적인 상처뿐만 아니라 그 상처로 인하여 세상을 자본가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 자신의 인권을 포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만일 이런 일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면 새로운 세상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생산력의 증대, 다시 말해서 새로운 인간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일이 필요하고 아주 시급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1.

 

노동계급과 자본계급의 갈등과 모순이 눈에 띄게 드러날 때, 노동계급은 투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파업투쟁을 택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노동계급 전체의 총파업 투쟁을 선언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파업투쟁을 선언하고 투쟁에 돌입하더라도 자본계급은 거의 눈 하나 깜빡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파업투쟁의 수위가 높아갈수록 불안해 하는 것은 자본계급이 아니라 노동계급이다. 그리고 옥쇄투쟁을 벌이고는 그 투쟁의 보람과 성과도 없이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형태로 패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본계급은 자신의 도구인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그 투쟁을 고립시키는 것으로 싸움을 결말짓는다. 그러면서 노동계급인 우리는 늘 패배한 싸움을 안타까워하고 자본계급을 비난해 보지만 대체로 허탈해 한다. 이것이 우리가 늘 보아온 싸움의 과정과 결말이다.

우리의 노동계급 투쟁은 늘 패배한다. 물론 하나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경우(이것도 거의 가뭄에 콩 나듯이 한다)도 있지만 전체적인 전선에서는 늘 밀리면서 패배를 하게 된다. 어떤 우리 노동계급 자신의 혁명적 변화 없이는 우리는 늘 패배할 것이다, 아니 패배한다. 우리 노동계급은 십중팔구 패배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이 현실적인 조건들은 무엇일까? 이 현실적인 조건들을 따지기 전에 먼저 도대체 무엇이 패배이고 승리의 의미인지를 따져봄으로써 이 현실적인 조건들을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자본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경우는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경우는 대단히 어려워 보인다. 순수하게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한 경우는 아주 드물며,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경우를 막는 것만으로도 승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현상유지를 하는 경우를 승리라고 대부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승리도 아주 쉽지 않은 승리라고 할 수 있겠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의 전환이 현재의 상황에서 최대 승리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전술적 의미에서 승리이다. 다시 말하자면 전체 계급투쟁 전선에서 보자면 정규직 쟁취 투쟁은 하나의 회전(전투)에 불과하다. 계급투쟁의 최종 목적은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대체할 수 있는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새로운 사회, 즉 공산주의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최종 목적이 현실화되어 갈 때 비로소 우리 노동계급은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죄종 목적의 현실화라는 승리와 연관되지 않는, 연관될 수 없는, 또는 연관시키지 못하는 전술적 승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패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승리를 유지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힘’이 거의 없기 때문인데, 이는 그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모든 힘을 소진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이 계급투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조건은 바로 전술적 승리를 유지하여 계급투쟁의 최종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힘(투쟁력)을 끊임없이 새로이 생산해 낼 수 있는 진지가 없다는 것이다. 한 기업의 노동조합, 즉 개별자본과 대항하는 노동조합 또는 그 연맹은 진지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투를 수행하는 돌격대 또는 선봉대이기 때문이다. 이 돌격대 또는 선봉대가 계급투쟁 전 전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도록 전방위적 지원사격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생산력을 생산하고 보급 조달하며 교체할 수 있는 진지가 필요하다.

이러한 진지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자본주의 외부를 건설할 때 만들어질 수 있다. 이 진지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자본주의에 저항하면서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을 창조할 수 있는 생산력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새로운 생산력이 기존의 생산력을 대체할 수 있고 대체함으로써 자본을 전방위적으로 뒤흔들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 기존의 생산력은 자본에 그 수를 이미 읽히고 있다. 예를 들어 기존의 투수가 타자들에게 볼 배합을 읽혀서 두들겨 맞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새로운 생산력은 자본에게 그 수를 쉽게 읽히지 않는다. 좋은 새로운 투수가 타자를 요리할 수 있듯이 새로운 생산력은 자본을 자기 맘대로 요리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렇다면 새로운 생산력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맑스가 “생산력은 곧 인간 자신”이라고 말했듯이, 이는 새로운 인간 생산을 통한 생산력이다. 이 새로운 인간은 여성주의에 입각한 노동자 계급이다. 맑스가 “노동자 계급은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다고 말했지만, 현재의 노동자들은 잃어버릴 것이 있다. 맑스가 ‘잃어버릴 것’을 착취적 관계를 의미하고 있듯이, 현재의 노동자, 특히 남성으로 대표되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소비재를 소비하는 ‘타인’, 즉 ‘여성’의 노동을 착취하는 구조와 관계가 ‘잃어버릴’ 것으로 남는다.

새로운 인간은 바로 ‘잃어버릴 것’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여성주의적 노동자 계급이다. 새로운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더 이상 착취 관계와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이다. 그런데 이런 착취구조와 관계는 가족 이데올로기로 포장되어 있다. 이 가족 이데올로기의 포장을 벗겨내고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착취구조와 관계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그 물질적 토대를 해체해야 한다.

그 물질적 토대는 한 개별 노동자의 임금으로 한 개별 가족이 고립적으로 생활해 나가는 방식이다. 이 생활 방식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 하에서의 기본적인 생활 방식 단위이다. 이 단위 속에서 노동력의 재생산은 가사노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데, 이 가사노동은 자본주의적 성별 분업 형태에 의하여 대체로 여성들에게 강요된다. 그리고 그 재생산에 들어가는 재생산 생산노동은 거의 아무런 대가 없이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임금은 노동력 재생산에 최소한으로 꼭 필요한 소비재의 구매 비용이지, 그 소비재를 가지고 자신의 욕구에 맞게 변형시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생산’노동 비용은 그 임금에서 제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신자유주의에 의해서 가사노동을 거의 전담하였던 여성들은 임금노동을 해야 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당한다. 그리하여 이제 여성은 이중적 착취와 억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성의 강요된 임금노동의 대가인 임금은 여성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편의 노동력 재생산과 자식들의 다음 세대 노동력 생산에 거의 투입되도록 암묵적으로 강요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중적 착취의 구조와 관계가 해체되지 않고서는 새로운 세계를 차출해 낼 주체를 생산해 낼 수 없다. 오히려 자본주의 생활 방식 구조와 관계를 그대로 유지시키는 인간만이 재생산될 수 있을 뿐이다. 일상적으로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데 익숙해져 버린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경제를 파탄시키는 행위이고, 교통체증을 일으키는 주범이며 가족을 내팽개치는 파렴치한 행위라는 이데올로기가 ‘상식’으로 돼 버린다.

그러므로 새로운 인간은 이러한 착취와 억압이 익숙한 것이 아니라 아주 낯선 것이며 해체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이다. 이 새로운 인간은 개별적 생활 방식을 깨뜨리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만 노동자 계급 안에 내재해 있는 착취와 억압 구조와 관계를 해체할 수 있는 필요조건이 갖춰진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이전에 개별적으로 해결해야 할 생활 전반의 문제들을 조직적이고 사회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본의 내부에 자본의 외부인 노동자 계급의 코뮌을 건설하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 속에 내재해 있는 억압과 착취의 관계와 구조를 깨뜨려 나가기 위해서, 이 새로운 인간은 ‘자기 비판적’이어야 한다. ‘자기 비판적’이라는 측면에서 이 새로운 인간은 ‘과학적’인 인간이다. 그런데 이 ‘자기 비판’은 끊임없는 상호소통과 협력‧연대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 과정 속에서 각 개인은 억압과 착취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개인’이 될 수 있으며, ‘자유로운 각 개인이 연대하는 사회’인 ‘코뮌’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의 내부에 있는 자본의 외부인 자유로운 개인들의 상호소통, 협력과 연대 과정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 방식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 방식의 물적 토대를 형성해야 한다. 이 형성을 위해 대자본 투쟁의 기초인 임금‧단체협상 투쟁이 이루어져야 한다. 개별적인 개인과 가족의 생활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공동으로 살아갈 수 있는 코뮌의 물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투쟁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인간의 생산은 새로운 세대의 생산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이며, 또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산은 그들 스스로가 수행하도록 해야 하며, 그 생산을 도와야 한다. 이 생산은 ‘자기 비판’ 능력을 생산하는 것인데, 그들 스스로가 상호소통하며 협력과 연대를 할 수 있는 코뮌을 통해 이루어진다(이러한 비판 능력을 키우는 것이 ‘대중화’의 진정한 의미이며 노동자 계급의 교육 목표라고 생각한다. 이 대중화와 교육 목표는 ‘자본의 공교육’ 체제 아래에서는 현실화될 수 없고, ‘노동자 계급의 공교육 체계’(이는 자본의 공교육에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이른바 ‘사교육’을 지양하고 해체하는 체계이다)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대중화와 노동자 계급의 공교육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를 빌어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새로운 세대의 자기 생산과 코뮌의 싹에 관한 예로 영화 <우리학교>와 <더 사이더 하우스 룰즈>를 들겠다. 우리학교는 조총련계 조선인 학교의 아이들과 그 지역사회와의 관계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이고, 더 사이더 하우스 룰즈는 부모에게 버려지거나 부모가 없는 고아원 아이들의 삶의 모습을 담은 영화이다. 이 영화들에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생활 규칙을 자신들이 만들어 나가며,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일에 아주 익숙해져 있다. 특히 <우리학교>에서는 학교(이 학교는 일본 공교육 체계 밖에 있는 조선인 공교육 체계로서의 학교이다)라는,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코뮌들 사이의 연대, 그리고 그 학교를 통해 지역 조선인들의 코뮌과 그 코뮌과의 연대가 나름대로 잘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을 통해 새로운 세대의 자기 생산과 코뮌은 기성세대 노동자들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고, 그리하여 기성세대 노동자들을 그들 스스로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하는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본다(맑스가 “교육하는 자도 교육 받아야 한다”고 말했듯이 말이다). 바로 이 토대가 노동자 계급의 진지가 되는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난 별로 느낌 없다...

그가 오늘 가셨단다...

근데 별로 감흥이 없다...

사람이, 그것도 전직 대통령씩이나 한 사람이 죽었다는데

별 감흥이 없다고 핀잔을 줄지도 모른다...

 

잘 가시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그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후배들이 조직 사건으로 엮여 달려갔고,

그가 재임하고 있을 때에

천하의 악법 중 하나인 비정규직 법이 통과되었다.

그 때문에 노동자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그가 짐작이라도 했을까...

돌아가실 때 노동자의 삶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셨을까...

 

뭐 돌아가신 양반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하고 싶지 않다.

다만 잘 가시라는 말밖엔...

 

민주주의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은 하지 말자...

그러면서 추모를 해야 한다느니 하는 말도 하지 말자...

 

그저 편히 가시라는 말밖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공황상태...

계절학기 끝난 다음부터 거의 머리가 공황상태에 이르고 있다.

정말 시쳇말로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냥 멍한 상태...

맨날 술이나 생각나는...

이러다가 정말 뭔일 내는 거 아닌가 하는 느낌이...

 

하여간 정신이 돌아와야 책을 읽던, 글을 쓰던 뭔가 비전을 가지고

뭘 할 텐데...

정말 걱정이다...

혹시 이런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없을까...

지금은 머리가 백지 상태라,

예전에 내가 어떻게 했는지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정신이 안드로메다에 가 있는 것 같다...ㅠ...

 

제발 정신이 빨리 돌아오라고 광고라도 내야 하지 않을까...

근데 어떻게 광고를 내지?!

 

ㅠ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싸이버타리아트 10

@ 11장 누가 기다리고 있는가? @

- 시간 논쟁 -

 

 

“이 장의 논지는, 고용주와 노동자 간의 시간을 둘러싼 다툼은 시간을 둘러싼 다른 사회적 분쟁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그 관계는 역동적이라는 것이다. 또 그래서 이 문제는 단지 노동생활의 질만이 아니라 피고용인이냐 여부를 떠나 모든 시민의 일반적 삶의 질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271쪽)

 

“이 책 전반에 걸쳐 주장한 것을 다시 한번 반복하겠다. 경제사는 점차적인 상품화의 역사로 볼 수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화폐경제 밖에서 단순한 사용이나 교환을 위해 하던 활동들이 돈벌이를 위해 하는 활동으로 천천히 변화했다는 것이다. 전형적으로, 무보수 가내 활동(예컨대 빨래)으로 시작한 어떤 활동은 서비스 활동(세탁업)의 기반이 되고 이는 다시 기술 진보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제조업(세탁기와 건조기, 가루비누 또는 섬유유연제 제조업)의 기반이 된다.” (271쪽)

 

 

“점점 더 많은 ‘상품’을 창출하려는 불굴의 추진력은 그래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형태의 ‘소비 노동’ 창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비스 노동’의 성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272쪽)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일들을 하려면 시간이 든다. 어떤 상황에서 이 ‘시간’은 무보수 시간에서 보상을 받는 시간으로 바뀌거나 그 반대가 됐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상황에서는 이 시간의 성격이 바뀌지 않지만, 필요한 기술과 작업 과정의 변화가 이 시간에 얽혀 있는 개인의 자율성 정도에 극적인 변화를 불러온다. 그 개인의 지위가 임금 노동자이건 무보수 소비 노동자건 마찬가지다.” (272쪽)

 

“상품화 과정은 가게나 전시 판매장에서 살 수 있는 물건들의 생산에 한정되는 게 아니다. 이런 물건들이 계속 새롭게 생겨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과정은 서비스 업계에까지 확대되고 전통적으로 ‘공공재’라고 여기던 분야를 포함한 다른 경제 영역으로도 확산된다. 서로 연관된 몇 가지 과정이 지금 이런 현상을 촉발하고 있다.” (272쪽)

 

“이 가운데 하나는, 새로운 기술 덕분에 가능해진 시스템이 그 전에는 표준화와 단순 노동화를 거부했던 관료 영역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의사결정을 할 때 개인의 전문적 판단을 활용하는 관행이, 몇 가지 표준적인 규칙 곧 예컨대 은행 대출 적합성, 병원 초지의 우선순위, 대학교 직원 선발 같은 판단을 위한 규칙 몇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 ‘인텔리전트’ 시스템에 밀리는 일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런 결정에 관여하는 노동이 규격화되는 순간, 결과를 수량화하고 기능을 별도 기관으로 이양하고 외부 기관에 넘기거나 경쟁 입찰에 부치는 게 가능해진다.” (272~273쪽)

 

“두 번째 관련 요소는 기술의 확연한 융합 현상 때문에 많은 직무의 성격이 점점 일반적인 게 되고 작업과정도 따라서 일반화하며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몇몇 표준 공급업자가 전 세계시장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꼭 지적해야 할 것은, ‘기성’ 소프트웨어의 구성 방식이 점점 더 업무 절차의 성격을 규정하게 되고 예컨대 소규모 기업들에게는 사업 관리, 회계 또는 데이터베이스의 구조에 표준방식을 적용하도록 강제하는 현상이다. …… 조직들이 서로 맞바꿔도 될 정도로 유사한 업무 처리 절차를 갖추게 되면, 이런 처리 절차는 과거처럼 내부의 ‘고정 비용’이나 ‘본사 업무’로 보지 않고 외부에 용역을 주거나 ‘내부 용역을 주거나’ 또는 아예 수익 사업으로 외부 기관에 판매할 수 있는 별도의 기능으로 보는 게 훨씬 쉬워진다.” (273쪽)

 

“세 번째 요소는 서비스의 제공이 날로 통신을 매개체로 이용하는 것이다. 이 현상은 몇 가지 요소가 결합된 결과인데, 통신 및 컴퓨터 기술의 가격 하락과 빠른 확산, 시자으이 세계화, 24시간 문화의 확산이 이런 요소들이다. 24시간 문화의 확산은 자기 확신적 형태를 특징으로 한다. 이것으로 인해, 서비스업 노동자는 소비자 처지가 되는 순간엔 ‘정상적인’ 시간이 아닌 때에 다른 서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잦아지고, 이는 다시 이런 이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노동자가 더 늘어야 할 필요성을 야기하는 악순환이 나타난다. 그래서 이미 전통적인 시간의 경계는 상당 부분 허물어졌다. 통신을 매개로 한 서비스 제공의 확산은 콜 센터 유행을 불러왔고, 공공부분을 포함한 전체 경제 분야에서 다양한 서비스에 콜 센터 모델을 적용하는 일이 늘게 했다.” (273~274쪽)

 

“네 번째 요소는 사유화, 자유화 또는 병원 청소부터 가정 관리까지, 우편배달부터 세무까지를 망라하는 공공 서비스 영역의 경쟁 도입이다.

서비스 자체는 공영이라 하더라도 민간 서비스와 경쟁해야 하기 때문에 (종종 ‘목표’ 달성 요구사항과 연관되는) 절차, 비용의 엄밀한 감시와 ‘비효율’ 방지가 새롭게 강조되고 있다.” (274쪽)

 

 

“비용 절감을 위해 노동을 외부화하는 건 새로운 전략이 아니다. 1950년대에 셀프서비스 개념이 상점에 도입됐고 이는 슈퍼마켓의 등장을 촉발했다. 1960년대에는 이 개념이 금융 분야에 도입됐는데 처음에는 고객들에게 출금전표를 직접 쓰도록 유도하는 편리한 방식으로 시작해 마지막에는 현금 자동 입출금기의 개발과 함께 은행 창구 직원의 임금노동을 거의 대부분 은행 고객의 무보수 노동으로 대체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때 이후, 종종 대기 시간을 줄임으로써 이용자의 불편을 없애준다는 명분과 함께 셀프서비스 원칙이 다양한 분야에 걸쳐 도입됐다.” (275~276쪽)

 

“첫 단계에는 이런 외부화가 권한을 부여 받았다고 느끼는 소비자들에게 종종 환영 받았다. 기차표를 사고 도서관에 책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오래 줄서서 기다리고 자동차에 휘발유를 넣는 것과 채소 무게를 달고 가격표를 붙이는 걸 오래 기다려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록 직접 일을 처리하려면 익숙지 않은 장치들과 씨름해야 함에도 직접 하는 걸 선호한다. 문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발생한다. 사람이 도와주는 게 아예 없어지고 각 개인이 홀로 서서 휘발유를 넣어야 할 때 말이다. 그런데 기계가 어떤 식으로든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어떤 사람이 기계를 처리할 능력이 없을 때 (예컨대 사람이 앞을 잘 못 보거나 외국에 갔을 때) 또는 어떤 이가 필요한 것이 표준화된 메뉴를 선택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때 고객은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소비자의 필요만 충족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 (대가도 받지 못하는) 몇 시간이 허비된다. 대신 처리해 줄 사람이 없어지면 공급자는 눈앞에 경쟁자가 존재하지 않는 한 기계가 제대로 공급되도록 확실히 처리할 동기가 없게 된다. 그럼 고객들은 다시 한 번 긴 줄에 서서 기다리는 처지가 된다. 이번에는 사람의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계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다르다.” (276~277쪽)

 

“진화와 인터넷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느 서비스가 날로 늘어나고 사람을 직접 대면해 처리하는 건 제한되거나 추가 비용을 내야 하거나 아예 완전히 없어져가는 이 세상에서 소외 문제는 더 없이 분명하게 대두된다. 이 소외는, 기반시설, 하드웨어 또는 소프트웨어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당하는 것이고, 언어 능력이 떨어지거나 글을 못 읽거나 언어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사회적 기술이 결여된 이들에게 닥쳐 로는 것이며, 시력이나 청력, 지력이나 손재주가 심각하게 훼손된 사람들이 맞닥뜨리는 소외이다.” (278~279쪽)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좀더 일반적인 수준의 문제도 있다. 서비스 제공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거래 시간 최소화 압력은 생산라인식 대처를 낳고 양적 목표를 강조한다. 서비스 제공 기관의 이익은, 모든 직원이 언제나 생산적인 활동을 하도록 만드는 데 달려 있다. 이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는 직원 가운데 일부는 상황이 느슨한 때는 놀고 있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바쁜 시간에는 줄서서 기다리는 걸 피할 수 없게 되고, 이럴 때 기다리는 과정에서 허비되는 시간은 노동자의 시간이 아니라 고객의 시간이다. 이 과정은 노동자에겐 스트레스가 밀려오는 것이고 고객에게는 짜증이 밀려오는 것이다.” (279쪽)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양적 차원과 질적 차원에서의 시간이다. 양적인 면에는 노동자가 ‘소비한’ 시간의 양, 고객이 기다리고 질문에 답하느라 ‘소비한’ 시간과 비교해 자신의 말에 상대가 귀기울여주는 형태로 ‘돌려받은’ 시간 등이 포함된다. 질적인 면에서는, 노동자나 고객이 발휘할 수 있는 자율성의 정도에 주목해야 한다. 또 서비스 노동의 테일러주의화(컨베이어벨트 작업화)가 노동의 외부화와 결합되면서 소비 과정조차 같은 작업으로 바뀌어 가는 정도에도 주목해야 한다.” (281쪽)

 

“이에 대한 경험적 연구는 지금까지 거의 수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보통의 시민이 자신들의 ‘여가’ 시간 가운데 상품화한 서비스의 소비에 들이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이 소비 과정이 서비스 노동자의 노동 가운데 전가된 부분을 떠안는 것과 어느 정도 결부되어 있는지, 테일러주의화가 무보수 소비 노동과정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 또는 이 모든 게 어떤 비율로 늘어나고 있는지 등등은 여전히 추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추정대로 이것이 실제적인 것이라면, 원격으로 접근할 수 있는 서비스의 범위와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거리를 확대시켜 주는, 표면적으로는 해방의 기능을 하는 전보통신기술이 실제로는 일상생활의 질 하락을 초래할 위험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281쪽)

 

“이런 진전 상황은 몇 가지 주요 질문을 유발한다. 이 질문들은 한편으로는 미래의 경험적 연구 조사의 틀 개발을 위한 것인 동시에 사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이런 것들이다. 날로 상품화하는 경제에서 인간의 작용을 이해해는 데 적용할 ‘개인적 자율과 선택’의 모델은 무엇인가? ‘노동’과 ‘여가’의 경계, ‘생산’과 ‘소비’의 경계, 그리고 ‘서비스 공급’과 ‘서비스 이용’의 경계가 날로 유동적이 되는 걸 어떻게 개념화해야 하는가? 시민들이 한편으로는 노동자 처지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소비자 처지에서 자신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하려고 앞 다투는 상황에서, 어떤 형태의 사회조직을 갖추면 그들이 집단적 이익을 표현하는 게 가능해지고 의사결정 과정에서 힘을 얻을 수도 있게 될까? 고용과 소비 관계가 날로 지리적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이뤄지고, 가끔식은 국경을 넘나드는 상황에서, 어떤 대의구조, 협상구조, 규제구조가 가능할까?” (281~282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싸이버타리아트 9

@ 9장 물질세계 @

- 무게 없는 경제의 신화 -

 

 

 

@ 10장 싸이버타리아트의 형성 @

- 진짜 세상의 가상 노동 -

 

 

“이 글은, 자본주의가 상품화와 축적의 상호 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역동적인 힘이라는 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한편으로 자본주의는 잉여가치를 빼낼 새로운 상품을 탐욕스럽게 계속 찾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왕성한 확장의 연료가 될 새로운 시장을 찾는다. 새 상품은 그전에는 교환을 위해서나 선의로 돈 받지 않고 하던 활동들을 화폐경제 속으로 끌어들이거나 기존 상품들을 정교화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인간의 활동과 필요 곧 생산과 소비는 이 과정의 양 끝에 있다. 자본주의의 피할 수 없는 동력은, 전 세계를 완전히 산업화하는 것이다. 곧 한편으로 모든 사람이 상품의 생산이나 유통 그리고 자본 축적과정에 일정하게 기여하도록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이 생존을 위해서 이런 상품의 구매에 날로 더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다.” (230쪽)

 

 

“이 자리가 계급에 관한 논쟁을 더 자세히 개관할 자리는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지적하고 넘어갈 것은, 사무직 노동자를 어디에 위치 지을지에 관한 혼란 정도는 계급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논할 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과연 계급을 직업에 따라 규정할지 (마셜 등이 지적했듯이 이는 생산의 기술적 관계에 따른 범주와 상응하는 것이다) 아니면 생산의 사회 관계를 따를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 또는 사회적 분업 또는 상대적 소득 또는 신분제나 문화적으로 구성된 위계질서(베버가 말하는 ‘신분 집단’)에 따를지, 그것도 아니면 대부분의 공식통계에서 분류하는 것처럼 일관된 개념적 기반이 결여된 경험적으로 형성된 계층에 따를지에 대한 논의도 혼란스럽기만 하다.” (234~235쪽)

-->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을 <자본을 전제로 하는 임노동자>로 그 테두리를 만든다면, 노동자 계급의 개념 범주는 자본에 의해 정의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게 된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의 계급의식이 항상 즉자적 수준, 곧 그때그때마다의 자본의 악행에 대한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분노 표출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게 될 위험이 아주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로서는 이 시대 좌파 남성 지식인들이 이후 보여 준 정치적 태도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것이 이런 식의 설명이다.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지 오래된 노동계급의 특징을 낭만화하고 하나의 특정한 전형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태도, 몇몇 남성 육체 노동자(광부, 자동차 제조 노동자, 트럭 운전자, 부두 노동자)에 대한 거의 물신숭배적 집착, 자신들의 노동계급 출신 선조를 경쟁적이면서도 집착적으로 내세우는 것, 여성주의는 중산계급적이며 ‘진짜’ 노동계급 남성을 소외시킨다는 주장 등 그들의 태도를 다른 것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240쪽)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고 전투적인 행동을 벌이는 데 분명히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그들의 경제적 이익에 가장 부합할 것 같은 내용일 것이다. 사용자 쪽에 설 경우 저급 사무 노동은 승진의 계단을 성공적으로 상승할 수 있는 일자리라고 그들이 인식한다면, 열심히 일하고 젊잖게 굴고 아부를 하는 게 승진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느낄 것이다. 반면 예컨대 경영진들이 지구 반대편에 있거나, 남성만 또는 백인만 또는 특정 국가 시민만 또는 특정 신분만 승진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은 승진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느낀다면, 임금을 높일 최선의 방법은 동료 노동자들과 공통의 명분을 만드는 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남녀 성별과 인종이 계급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데 핵심적인 구실을 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새로운 싸이버라이트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들이 스스로를 그런 계층으로 인식하느냐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말이다.” (266~267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경기도 지방견찰청장의 어이없는 말

행인님의 [경기지방경찰청장의 법 질서] 에 관련된 글.

 

과 말도 안 되는 광경이 말을 잃게 만들어 버렸다...

육두문자가 입밖으로까지 나왔다...

이런 XXX!!!

 

http://tvnews.media.daum.net/cp/YTN/popup/view.html?cateid=100000&newsid=20090807151505574&p=ytni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싸이버타리아트 8

@ 8장 집단적 꿈의 쇠락 @

- 여성과 기술에 관한 연구 20년 -

 

 

“여성주의가 무언가를 이뤘다면 그건 분명 연구 의제의 핵심에 주체적 자아를 위치 지은 것이다. 한편으로 여성주의는 사회학적 연구의 전통적인 대상 곧 빈민층‧여성‧어린이‧노인 등등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들에게 주체성을 부여하며 연구자는 그들의 세계관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또 다른 한편으로 여성주의는, 제3자적 객관성이라는 실증주의적 이상이 실현 가능하다는 생각에 맞서 연구자의 주체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동시에 연구자의 성병‧인종‧계급이 그의 연구에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했다.” (154~155쪽)

 

 

“당시 내가 알던 사회주의적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여성 해방의 전제조건으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구’가 경제적 독립과 가사노동의 사회화였다. 경제적 독립은 초점을 임금노동에 두게 만들었고, 가사노동 사회화는 초점을 무보수 노동에 두게 하는 것이다. 당시 나는 많은 맑스주의적 여성주의 문건의 도움을 받아서 (그 가운데서도 진 가드너가 특히 많은 도움을 주었다) 사적인 무보수 가사노동과 화폐경제의 관계를 놓고 많은 시간 고민에 빠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162쪽)

 

 

“내가 브레이버먼의 비숙련화 개념을 이용해 가내노동의 숙련기술 개념 변화를 분석하려고 시도한 논문을 썼을 때, <사회주의 경제학자 회의>의 미세공학 워킹그룹 내 남성들의 반응은 적대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관심 범위 안에서 가사업무의 자동화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좋은 일’이었으며 추가적인 분석이 필요 없었다. 그것은 생산의 영역이 아니라 ‘소비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것이었기에, 그들의 논의에는 그 어떤 관련성도 없었다.” (167쪽)

 

 

“당시 우리가 만들었던 문건들은 보통 이런 문제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주된 내용은 ‘이중의 업무’ 곧 임금노동과 무보수 가사노동의 결합이라는 부담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세 번째 업무 곧 노도 업무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별로 거론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이 업무가 훨씬 힘들면서도 다른 두 가지 업무에 비해 보상도 적었다. 최아의 상황은, (어디고 참석할 집회가 없어서 사회적으로는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는 이가 대부분인) 입 사납고 말만 많은 남성들 무리 속에서 환풍도 잘 안 되는 담배연기 자욱한 회의실에서 녹초가 될 때까지 일하고는 지저분한 집으로 돌아가 보면 냉장고는 텅 비어 있고 가게는 이미 모두 문을 닫은 상화이며, 우파들로부터는 투사들이라는 소리를 듣고 좌파들한테는 반동적이라는 소리나 들으며 결코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하고 비난만 당하는 그런 상황이다. 그 와중에 눈앞에서 많은 관계가 깨어지는 걸 봐야 한다. 1970년대가 그렇게 흘러가면서 행복감에 젖는 승리의 순간은 점점 더 드물어졌다.” (169쪽)

 

 

“우리 가운데 다수는 여전히 우리가 익힌 것이 암시라는 바를 세밀히 따져 다른 데 적용하려고 폭넓은 이론적 및 정치적 문제와 씨름했다. 예컨대, 나는 노동자와 생산수단의 관계가 주부와 재생산수단(가정 그 자체와 살림살이용 기술)의 관계와 유사한 점을 찾아냄으로써 맑스의 소외 이론을 가사노동에 적용하려 시도한 글을 쓰던 때를 기억한다. 노동자는 날로 재생산수단을 직접 소유할 것을 요구 받기 때문에, 이런 수단의 구입비 마련을 위해 화폐경제의 노예가 되어가는 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재생산수단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고 공장노동자들이 하듯이 반대 투쟁을 조직할 수 없다는 게 내 주장이었다. 나는 이런 관계에서 비롯되는 자학증상과 노이로제가 어떤 것인지 따져보는 것으로 이 주장을 발전시키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부족했다. 나는 그동안 학계의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잘못된 추상화 단계’에서 주장을 펼친다는 이유로 종종 저지당해왔는데, 또 다시 이런 위험을 감수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가장 먼저 내가 청탁받았던 주제인 첨단기술을 이용한 재택근무 문제로 돌아갔다.” (180쪽)

 

 

“내 생각에, 사회주의 사회의 전 단계로 여겨지는 그 어떤 대안 노동의 전망에서든 미심쩍은 대목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상품생산에 대한 강조(와 오직 상품생산에 참여하는 이들만을 ‘진짜 노동자’로 보는 생각)였다. 사회주의자들이 서비스 분야 일자리를 싫어하는 건 단지 이 분야가 대체로 여성의 노동으로 인식되기 때문인가, 아니면 좀더 복잡한 문제가 있나? 나는 무보수 가사노동, 서비스 업종, 상품생산의 관계는 역동적인 것이어서 그 경계가 계속 바뀌며 이런 변화는 부분적으로 신기술의 도입과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았다. 자본주의 역사는, 과거 집에서 부수 없이 이뤄지던 활동들을 점진적으로 화폐경제 속에 흡수하는 역사로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필수적인 부분이 상품화 과정이며, 새로운 기술의 물결은 꼭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냈다. 이런 상품의 도입은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자와 Tm는 노동자 모두의 노동과정(과 그와 관련된 숙련기술)에 변화를 불러왔다. 특정 숙련기술과 노동과정을 고정시켜 놓고 거기에 ‘대안’ 상품의 개발을 적요시키려는 건 실패할 운명인 것으로 보였다. 성공하더라도, 그것의 영향은 반여성적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왜냐하면 고정된 그 시기의 특정 노동 분업 형태(와 그에 따른 사회적 관계)를 고정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글들은 점점 더 반행을 일으키기 어려워 보인다.” (181~182쪽)

 

 

“날로 우리가 스트레스 더해지는 삶을 살면서 스트레스 관련 질환의 위험성에 대해 글을 쓴다. 우리는 스스로 비참하리만치 적은 사례를 받거나 거저 일해주면서 저임금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 우리 가운데 몇몇은 집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고정수입이 없는 재택근무 노동자들의 소외와 그들에 대한 착취에 대해 쓴다. 우리는 공공의 선을 위해 자신을 가장 희생하는 처지가 되면서도 다른 여성들에게 이기심에서 탈피해 집단적으로 행동하라고 권하고 자기희생에 빠지지 말라고 한다. 우리의 목표는 단지 표현하지 못한 욕구의 반영일 뿐인가? 이런 질문을 놓고 고민하면서 나는 자꾸 내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사이의 갈등으로 돌아가는 걸 깨닫는다. 되돌아보면 지난 20년 동안 나타난 모든 변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집단적 행동의 힘에 대한 믿음이 시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우리가 직접 나서서 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대신 해주지 않는다는 우울한 깨달음이 우리 안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는 것도 중요한 변화다.” (187쪽)

 

“내가 보기에 이런 변화는, 일하는 여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헌신한 사람들의 도덕적 타락만 유발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노동 대중 개인들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덜 공포스런 시절이었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것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그 선택은 고용의 성격과 노동자로서의 삶의 모습 여러 가지를 바꾸어 놓았다. 공공 탁아시설에서 아이들이 제대로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잃음으로써, 그들은 집에서 일하면서 직접 아이들을 돌보는 걸 선택했다. 노조가 지신의 미래를 보장해 줄 가능성을 믿지 못해, 개인연금에 돈을 넣기로 선택했다. 이 모든 개인적인 선택이 합쳐지면서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질 기반인 공공 기반시설이 거의 붕괴됐다. 동유럽에서 들여오는 소식은 영국과 유사한 양상이 거기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암시하지만, 영국이 그동안 겪은 것들이 세상 그 어디에 반영되고 있는지 난 알지 못한다.” (187~188쪽)

“나에게 분명해 보이는 것은, 우리가 제시하고 싶은 그 어떤 해법도, 우리가 제시하고픈 그 어떤 미래를 위한 요구도 이런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다시 서로 신뢰할 수 있게 할 어떤 원대하고 집단적인 희망의 행동을 창출할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이걸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아(그리고 개인적 안위)와 타인(그리고 손해의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하는 험한 상황을 강요하지 않는 조건을 찾는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이타주의를 요구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사람들을 신뢰하고, 그들이 최선의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 직접 보고 그것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정보기술의 도움을 받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188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필요하신 분께 드립니다^^...

 

 

학생 자치기구인 생활도서관에서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이 있어서, 

혹시 필요하신 분들이 있으면 드리려고 합니다. 

물건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 석유난로 큰 것 1개 

- 14인치 컴퓨터 모니터

- 스티로폼(전지 2~3배크기) 5장.

 

필요하신 분들은 아래 덧글에 메일 주소 남겨 주셔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싸이버타리아트 7

@ 7장 재택근무 @

- 전망들 -

 

 

“대중적 미래학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책들의 저자가 보통 남자라는 것과 직접 관련되겠지만, 이런 탈중앙화한 노동 시나리오 중에서 중심인물은 역시 절대적으로 남성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통근자’보다는 판에 박은 ‘창조적’ 노동자와 더 공통점이 많은 모습이다. ‘원격 통근자’와 비교해 이들 ‘원격지 근무자’들은 훨씬 개인주의적이고 덜 전통적이며, 자영업자일 가능성이 높다. 좀더 따져보면 이 남성은 정장보다는 청바지를 입고 도시 교외보다는 전원에 살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136쪽)

 

“하지만 이 두 가지 생각은 많은 공통점도 지니고 있다. 주인공은 두 쪽 모두 중산층 남성이고, 노동자들이 어디서 일할지와 일을 하지 말지 자체를 결정할 자유가 있다는 걸 전제하고 있다. (이는 또한 완전 고용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두 쪽은 모두 기술이 상서로우며 각 개인 사용자가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70년대 말에 이 두 가지 생각은 어느 정도 서로 결합해서 앨빈 토플러의 ‘전자적 전원주택’이라는 개념을 만드는 데 이르렀다.” (136~137쪽)

 

“하지만 그 와중에 기술에 대한 대중의 태도에 급격한 변화가 나타났다. 1978년에는, 서방세계가 대규모 실업을 동반한 대형 산업구조조정에 들어섰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런 구조조정의 중심 도수는 ‘실리콘 칩’이 상징하는 정보기술이 되리라는 것도 분명했다. 적어도 영국에서는 갑자기 신문들이 “모든 것에 칩을”이라는 제목으로 가득 찼고, 텔레비전 화면은 불길한 예언과 소년 같은 쾌활한 흥분이 묘하게 뒤섞인 분위기로 ‘새로운 산업 혁명’을 설명하는 일련의 프로그램들이 휩쓸기 시작했다.” (137쪽)

 

 

“이렇게 날카롭게 모순되는 시각을 접하면서 기술은 기본적으로 부드럽고 상서로운 것이라는 대중들이 그동안 공유하던 생각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기술적 진보를 피할 수 없는 건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건 여전히 러다이트운동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지만, 기술이 ‘위협인지 약속인지’를 묻는 건 정당한 일이 됐다. 이 단계에서 집에서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약속’ 쪽에 해당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아직은 위협이 아닌 듯했지만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138쪽)

 

“컴퓨터를 ‘작동’하거나 통제하는 이들로 표현되는 흰색 옷을 입은 기술자나 고위 경영진과 연관되는 대신 컴퓨터는 수동적인 여성 조작자들이 이용하는 도구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컴퓨터는 조작하는 이 여성들 자신을 통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으로 표현됐다. …… 컴퓨터는 이제 멍청한 금발머리도 조작법을 배울 수 있을 정도로 쓰기 쉬운 기계로 표현된다.” (138~139쪽)

 

“애초에 이런 생각은 가정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이 여성주의자들이 관심을 끌기 시작했는데 이는 특히 당시에 사무직 여성 노동자의 노조회가 급속히 진행되는 것과 맞물려 나타났다. …… 노동자들을 서로 분리시키는 그 어떤 것도 반대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내노동이 아직은 즉각적인 현실이라기보다 이론적 가능성으로 여겨지기는 했지만, 노동자를 분리시키는 것으로 분명히 분류했다.” (139쪽)

 

 

“가정은 남성들의 경우와 달리 여가의 장소가 아니라 억압의 장소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여성주의 문건 속에서 가정은 여성들이 24시간 내내 돈 한푼 받지 못하고 남편과 아이와 환자와 어른들에게 봉사하는 곳이며 여성의 사적인 공간이라고는 없는 곳이다. 또 결혼하게 되면 처벌 없는 강간의 희생자가 될 수 있는 곳이다. 여기서 탈출할 길이 없는 여성들은 우울, 자존심과 자신감 상실로 고통 받을 여지가 있었다. 종종 감옥과 비교됐다.” (140쪽)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새 기술의 영향에 대한 대중적 논의에 전혀 새로운 분위기가 나타났다. 당시는 노동당 의원이었다가 나중에 사민주의당원이 된 셜리 윌리엄스(Shirley Williams)가 말한 “미세전자공학은 가족 재결합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개념이 나타난 것이다. 이 개념은 여성의 우려 일부를 반영하기는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여성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건 아니었다. 반대로 명백히 반여성주의적 논쟁을 제기하는 이들이 가장 많이 내세우는 것이었다. 마가렛 대처 수상, 당시 정보기술 장관인 케니스 베이커(Kenneth Baker), 주교, 산업자본가 등이 그런 이들이다.” (140~141쪽)

 

“가족과 사무 노동은 여성노동의 특정한 표현으로 제시되는 대신에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물론 저자(Mike Aldrich)가 말하는 것은 여성의 변화하는 기능이다. 저자는 여성들이 집에 있으면서 어린이와 노인과 환자를 돌보던 날이 사라졌음을 애석해 한다. 또 여성의 가정 밖 경제 활동과 그 결과로, 원할 경우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살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는 남성으로부터의 독립을 한탄한다. 그는 또 암암리에 화이트칼라 노동력에 포함되는 여성의 노동이 필요함을 인정한다. 정보기술을 이렇게 탐내는 것은, 집 밖의 여성 임금노동과 집안의 무보수 노동이 사회적으로 동시에 필요하다는 명백한 모순의 해법 차원에서다. 재택 노동자가 되면 여성은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다.” (142~143쪽)

 

“원격 노동의 기능은 변화해 왔다. 통근 문제 또는 거대 관료조직의 거추장스럽고 이상한 특성의 해결책이 아니라 가족 붕괴의 해법이 됐다. 기능의 변화와 함께 원격 노동자의 이미지 또한 바뀌었다. 변화는 성별과 지위에서 모두 나타났다. 더 이상 통근을 하던 남성이나 자율적인 예술가가 아니라 여성에서다. 그리고 “가족을 우선시한다”고 암시됨으로써, 이런 여성의 일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으며 할머니의 요강을 비우고 아이의 기저귀를 빠는 사이에 짬을 내서 할 수 있는 정도의 일이라고 추론할 수 있게 된다.” (143쪽)

 

 

“재택근무가 노조 조직을 파괴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을 걱정하는 이들은 여기서 착취의 증거를 찾고, (9시에 출근해 5시에 퇴근하는 미국의 노동자들 같은) 사무직 노동자를 대변하는 노조와 기타 조직들은 전자적 기술을 이용해 가정에서 일하는 노동자 규모를 억제하거나 이 제도 자체를 없애버릴 것을 요구했다. 독일의 거대 산별 노조인 금속노조(아이지 메탈) 같은 세력들이 이랬다. 이들과 다름없는 강도로 또 다른 이들은 재택근무가 여성을 해방시키는 도구라고 주장했다.” (145쪽)

 

 

“관리자들에게는 이런 (노동)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한 몇 가지 방법 가운데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새로운 교대근무 형태, 연 단위 시간 계약, 복합 업무 협약, 임시 또는 고정조건 계약, 시간제 노동, 하청(공공 영역에서 하청은 민영화와 강제 경쟁 입찰의 수단으로 권장됐다), 시간제 노동자 사용 확대, 재택근무자 활용 등이다. 재택근무는 단지 이 많은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만 여겨졌다.” (147쪽)

 

“이런 관점에서 표피를 보면, 재택근무라는 개념은 그동안 담겨 있던 감정적인 내용물 상당 부분이 사라지고 남녀 차별적 성격이 많이 탈색된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일터의 유연성에 관한 많은 문헌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여성에게는 가족들의 요구에 대처하기 위해서 시간을 분배하는 데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언급한다. 하지만 (일터의 유연성과 개인적 유연성이라는) 서로 아주 다르고 일반적으로 공존하기 어려운 이 두 가지의 필요성이 실제로는 같은 것이라는 사실 곧 고용주의 유연성은 노동자의 우연성을 뜻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거론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맞아떨어진다는 증거는 놀라우리만치 적은데도, ‘핵심’ 노동자는 남성이고 ‘주변부’ 노동자는 여성이라는 일반적인 전제가 있는 듯하다. 이런 각본에서 재택근무자는 여전히 여성이지만, 이런 형태의 노동은 더 이상 가족 붕괴의 해법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단순히 고용주의 간접 비용을 줄이고 조직적 적응력을 높이는 데 이용할 수 있는 한 가지 수단일 뿐이다.” (147~148쪽)

 

“재택근무가 찬조 출연하는 또 다른 논의가 이 논의와 교차하는데, 그건 기업 경제 문제에 관한 논쟁이다. 여기서 재택근무는 사업가로 가는 과정의 중간 단계로 간주된다.” (148쪽)

 

“이때 이후, 재택근무의 일부 정의에는 집을 근거지로 하면서 업무 도중 컴퓨터를 쓸 일이 생기는 자영업자도 포함했다. …… 늘어나는 자영업자 인구를 다시 집 밖으로 나가 중소기업을 세우게 될 예비 기업가군이 늘어나는 것으로 볼지 여부는 각자의 선택 문제로 열려 있는 것이다.” (148쪽)

 

“이런 관점을 통해 재택근무자는 다시 이미지를 바꾼다. 이들은 이제 다시 한번 남성일 여지가 높아지며(랭크 제록스의 ‘네트워크’들은 거의 모두 남성이었다), 가사 일에 묶여 있는 이들로 인식되지 않으며 대신 자유 경쟁 시장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자발적으로 장시간 일하는 자유로운 행위자로 받아들여진다. 이들이 대표하는 것은 ‘의존 문화’에 대한 해법이다. 곧 그들의 기능은 경제의 활력을 되살리고, 복지 예산을 줄이고, 자립과 자유시장의 전통적인 가치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148~149쪽)

 

 

“재택근무가 너무나 모호하고 잘못 정의된 개념이어서 분명히 규정되고 계량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또 이는 현실로서보다는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로서 훨씬 강력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149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싸이버타리아트 6

@ 6장 작업장 내 여성 건강 @

 

 

“‘건강’이라는 단어의 뜻을 단지 의학적인 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행복한 상태(well-being)를 뜻하는 것으로 본다면, 반대말을 ‘질병’보다는 좀더 폭넓은 ‘행복하지 않는 상태’(not-well-being)로 봐야 할 것이다. ‘질병’(dis-ease)의 본뜻은, ‘아픔’(illness)(‘ill’은 단순히 ‘well’의 반대다)보다 훨씬 폭넓은 것이다.” (115쪽)

 

 

“이 장은 임금노동이 여성의 행복한 상태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또는 의학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질병 이외에도 명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불편함, 긴장, 불행감을 포함한 나쁜 상태를 유발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116쪽)

 

“첫 번째 질문은 이런 것이다. 도대체 왜 여성을 남성과 구별해서 인식하는가? 물론, 노동 환경이 안전하지 못하거나 유독물질로 오염됐다면 성별과 상관없이 모든 인체에 똑같이 영향을 끼치고, 여성을 다른 종족처럼 취급하는 것은 진정한 위험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여성을 취약한 존재로 보고 초점을 여성에 두면, 어떤 일자리에서는 여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차별적 정책을 유발할 위험이 없는가? 실제로 이러한 위험이 있다. …… 하지만 여성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는 작업장 내 건강 문제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그리고 이 가운데 몇은 서로 연관된 것들이다.” (116쪽)

 

“첫째, 그리고 가장 분명한 이유는 여성의 몸이 많은 면에서 남성과 다르다는 것이다. …… 덩치와 힘이 차이가 문제가 되는 건, 단지 특정 화학약품 노출치 또는 들 수 있는 최대 무게 같은 현재의 안전 기준이 노동자를 젊고 튼튼한 백인 남성으로 전제하고 마련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화학물질 노출치 검사는 보통 해병대에서 ‘자원자’를 받아 실시한다.) 이런 기준치는 몸집이 더 작은 이들과 늙거나 장애 때문에 영향을 더 심하게 받을 수 있는 이들을 위험에 빠뜨린다.” (116~117쪽)

 

“몇몇 작업장 내 위험은 여성의 독특한 생리구조와 직접 관련된다. 2차 세계대전 때까지, 영국 랭커셔의 면화 공장에서는 정해진 짧은 시간을 빼고는 여성들에게 기계 옆을 떠나지 못하도록 하는 게 흔했었다. 그래서 여성들이 생리 중일 때는, 아무 것이나 있는 그대로 이용해서, 보통은 기름 먹인 헝겊을 썼는데, 흐르는 피를 닦았다. 산업용 기름에 접촉되는 일이 늘어나면서 많은 여성은 음부 암에 걸렸다.” (117쪽)

 

 

“생리는 대등한 기회 제공과 관련된 논쟁에서 아주 예민한 문제다. 총체적 차별을 당하고 있는데다가 고용주들이 이 차별을 영구화할 꼬투리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상황에서, 여성주의자 가운데 ‘동등한 권리’를 강조하는 이들은 전통적으로 생리의 영향이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해 왔다. 이들은, 여성이 생리를 하는지 아닌지가 고용주와 무슨 상관이냐고 주장한다.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 건 개인의 사생활 침해일 뿐 아니라, 기분 상하게 하는 농담부터 생리하는 여성 앞에서 일하는 남성에 대한 종교적 금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학대에 여성을 노출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접근법에서 보면, 한 사람의 생리주기는 어떤 식으로든 노동 문제에 개입할 수 없는 순전히 사적인 것이다.” (118쪽)

 

“하지만 이런 신념은 여성들의 사적인 대화에서 보통 인정되는 또 다른 신념과 불편하게 공존한다. 그 신념은 생리는 (예컨대 위경련이나 생리 전 편두통 같은 것 때문에) 고통스러울 수 있으며 육체적으로 진을 빼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또 생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평소보다 손재주가 떨어지게 만들 수 있거나 집중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생각이다.” (118쪽)

 

 

“여성 개인의 일터에서 보면, 생리 중에 아무런 문제가 없거나 그저 생리를 잘 넘기지 않으면 상황은 결코 좋지 않다. 생리를 감추고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거나, 사람들에게 생리 사실을 알리고 필요하면 휴식시간을 더 갖는 선택을 해야 한다. 생리 사실을 알리게 되면, 농담거리가 되고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스트레스 쌓이는 일이고, 어느 쪽도 행복에 도움이 안 된다.” (119쪽)

 

 

“이런 주장은, (납이나 이온 방사선 같이) 태아에 해를 끼치는 물질은 남녀 성인에게도 해를 입힐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또 일터를 청결하게 하는 걸 피하고 싶어 하는 고용주들이 연막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가임 여성이 배제되고 나면, 위험을 감수하는 대가로 임금을 조금 더 받곤 하는 남성들은 아주 위험한 환경에서 자신의 건강과 태어나지 않은 자식의 건강을 신경 쓰지 않고 일하게 된다. 이런 조처가 여성과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야근 금지 조항 무시나 병원 간호사의 방사선 노출 같이 전혀 다른 상황에서 여성이 위험에 처하는 데에 무관심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120쪽)

 

 

“여성이 생리적으로 남성과 다르다는 게 문헌상에서중요하게 부각되지만, 일반적으로는 이 점 때문에 일터에서 여성이 겪는 불행은 전체 불행에 비하면 적다. 주된 위험은 생리적인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위험은 육체적으로 다르다는 데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남녀 차별적 권력 관계, 직업적 남녀 구별, 여성에게 보살피는 일이 부여된다는 데서 비롯된다.” (120쪽)

 

“특히 뒤의 두 가지 요소는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일터에서 여성들이 맡고 있는 많은 일 곧 청소, 조리, 바느질, 간호, 교사일, 사회사업 등은 여성들이 집에서 하던 일을 직접적으로 연장한 것에 불과하다. 또 이 일들은 보살핌과 직,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물론 보살핌의 핵심 요소는 다른 이들의 건강과 안전을 책임지는 것이다. 아이가 화상을 입으면 어머니가 냄비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다고 비난당한다. 남편이 심장마비를 일으키면, 불포화 지방만을 섭취하게 할 여성의 임무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노망난 시아버지가 문 앞을 어슬렁거리거나 버스 밑으로 들어가면 시아버지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며느리의 잘못이 된다.” (120~121쪽)

 

 

“여성들, 특히 어린 아이를 돌보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이는 여성들 가운데 이런 태도를 어느 정도씩 내면화하지 않은 이들은 거의 없다. 여성들은 일상적으로 자신의 복지를 등한시할 뿐 아니라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걸로 여겨지는 사람이 다치거나 아프면 죄책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이런 태도와 보살피는 일을 떠맡는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은 임금노동 현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122쪽)

 

“병원들은 가장 극적인 예를 보여준다. …… 간호사 대부분은 감염된 변, 토해 놓은 것, 혈액, 오줌을 매일 처리해야 하고, 감염된 바늘에 찔리거나 감염된 이빨에 물릴 위험에 직면한다. 많은 간호사는 만성적인 피로에 시달리고 극심한 등 통증은 흔한 질병이다. 하지만 자신의 건강을 위해 휴식을 취하면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122쪽)

 

 

“자신의 건강은 문제가 안 된다는 생각은 일과 무관하고 여성성의 일반적인 조건과 관련되는 듯하다. 진짜 남성은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고 자신의 건강을 위협하는 걸 두려워하는 건 ‘여성적인’ 것이다)이라는 남성우월주의 관념이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여성스러운 것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이 결국 이런 결과를 부르는 것으로 보인다. 남성들이 위험한 노동 조건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 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남성답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지만, 여성들이 불만을 터뜨리지 않는 건 이기적인 모습은 ‘여성답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험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123쪽)

 

 

“직업에서의 남녀 구별이 건강에 끼치는 영향은 물론 여성을 보살피는 일자리로 내모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남성의 일’과 ‘여성의 일’이 분명히 구별되지 않는 산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장에서 여성의 일은 가장 단순하고 반복적인 조립, 포장일, 특히 ‘손재주’가 필요한 일에 집중되어 있다. 유통업에서는, 여성은 금전출납기를 다루거나 값싼 물건들을 생글생글 웃으며 판다. (남성들은 여성들을 관리하거나 자동차, 컴퓨터, 음향기기처럼 비싼 첨단 제품들을 판다.)” (123~124쪽)

 

“이런 남녀 구별은 건강 문제에 몇 가지를 시사한다. 가장 단순한 수준에서는 여성들이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받고 더 가난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터 밖에서 스트레스를 주는 수많은 요인들과 맞부딪칠 여지가 더 크며, 이는 일터에서의 상태에도 영향을 끼친다. 이런 현상은 특히 홀로 살거나 혼자 가족들을 돌보는 여성에게 두드러진다. 또 주거환경이 더 나쁘고 오염된 지역에 살 여지가 높다. 부적절한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여가를 제대로 즐기지 못할 여지도 높다. 무보수 가사노동에 따른 스트레스와 일터에서 남의 뒷바라지를 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에다가 이런 스트레스까지 합쳐지면, 여성이 평소에 항상 느끼는 스트레스의 ‘기본수준’은 아주 높아진다. 그래서 일터에서 약간의 스트레스만 더 받게 되어도 위험한 수준에 이르게 된다.” (124쪽)

 

 

“공장이건 사무실이건 상점이건 여성들이 맡는 대부분의 일들은 좁은 범위에서 반복적인 움직임을 지속하는 일들이다. 게다가 집중적으로 무언가를 지켜봐야 하는 일들이기도 하다.” (124쪽)

 

“근육 일부를 긴장상태로 유지하고 자세를 바꾸지 않는 가운데 다른 부분은 가능한 한 빠르게 움직이는 건,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신체 손상을 부를 수 있다.” (125쪽)

 

“이런 일거리 대부분의 또 다른 특징은.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남성의 일은 이동이 잦다.” (125쪽)

 

“이렇게 한곳에 박혀서 일하는 이들이 차지하는 공간이 옮겨 다니느라 땅에 발을 딛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들의 공간보다 넓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반대인 경우가 흔하다.” (125쪽)

 

 

“하지만 좁은 공간에 묶여 있는 것이 몸에 끼치는 영향이 이런 업무 분리가 만들어 내는 유일한 언짢음은 아니다. 언짢음은 작업장을 지배하는 남녀 차별적 권력구조가 표현되는 과정에서도 겪게 된다. 보통 칸막이가 없는 열린 공간에서 컴퓨터 앞에 종일 앉아 있는 여성들은 자유롭게 오가는 남성들에게 말 그대로 언제나 이용될 수 있다. 여성이 맡는 일에 비서 업무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는 특정한 상사를 돕도록 규정되어 있겠지만 급한 상황에서는 다른 관리자가 본디 업무 영역과 상관없는 일을 시키기 위해 부르는 것이 당연시된다. (“이봐요, 커피 좀 타줄 수 있겠소?”) 일반적으로 지위가 대등하거나 낮다고 여겨지는 남성들(예컨대 우편 수발 담당자나 수위)도 지나가면서 거리낌 없이 방해하거나 농담을 던진다.” (126~127쪽)

 

“이렇게 언제고 남성들의 눈길을 끌게 되는 상태는 비록 그 눈길이 가장 부드럽더라도 신경을 거슬리는 것이 될 수 있다. …… 이는 더 심각한 성적 괴롭힘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노동은 건강과 행복을 해치며 견디어야 하는 매일 매일의 악몽이 되고 만다. 의미심장하게도, 성적 괴롭힘이 가장 심하게 나타나는 경우 곧 남성 무리가 여성을 구조적으로 학대하는 경우는 여성이 눈에 보이지 않는 남녀간 업무 영역의 경계를 넘어설 때 나타난다. 또 여성들이 예컨대 건설현장, 인쇄소, 소방 업무 같은 ‘남성’의 일을 할 수 있음을 내세울 때도 그렇다.” (127쪽)

 

 

“나는 이 장에서 사회적 요소와 물리적 요소의 상호작용은 일터에서 언짢음을 유발하는 과정뿐 아니라 이 언짢음을 겪게 되는 방식에서도 극도로 복합적이라는 걸 보여주려 시도했다. …… 그래서 해결책 또한 다양한 측면을 지니게 될 것이다. …… (그러나) 언제나 여성의 행복이 보장되는 작업 환경을 만들어 내려면, 우리 사회의 기초가 되는 사회 관계 그 자체의 변혁을 일으키는 게 필수적이다.” (128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