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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급이냐, 다중이냐

조정환과 이택광의 ‘촛불 담론 논쟁’이 일간 신문에까지 소개됐다. 본업이 본업인지라, 이쯤되면 바빠서 세세한 논의를 따라가기 힘든 이들을 위해 간단한 요약 정리를 해드려야 하지 않나 하는 ‘의무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이 기질을 버리기 어렵다^^) 하지만 이 논쟁을 요약 정리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쟁점이 되는 문제 한가지를 따져보는 데 그칠 생각이다.

 

(이제 이 논쟁에서 더 나올 건 없는 것 같다. ‘인신 공격’으로 마무리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전체 과정은 조정환의 블로그이택광의 블로그에서 찾아보면 된다. 그리고 이 논쟁에 나중에 뛰어든 최원의 블로그도 참고하시라.)

 

두 사람이 쓴 많은 글들 가운데 딱 두개를 고르라면, 이택광의 주장은 인디피크닉2009 촛불영상 미니강연 녹취록을 추천한다. 조정환과의 논쟁 이전에 한 강연이지만 “기본적으로 촛불에 대한” 이택광의 “생각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 글로도 충분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택광의 다른 글들은, 그가 거론하는 이론들에 익숙하지 않으면 접근하기 쉽지 않다.)

 

조정환의 글을 하나만 추천하라면, 이번 논쟁 와중에 쓴 생산력, 제헌권력, 대도시, 다중을 꼽는다. 이번 논쟁의 쟁점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 글에는 따져보고 생각해볼 문제들이 곳곳에 스며있다. (나는 앞에서 조정환의 글은 내가 감당할 수준을 초월한다고 했는데, 이 글은 그래도 좀 쉽다. 전통적인 좌파 이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글이지만.)

 

나중에 이 논쟁에 뛰어든 최원은 글을 많이 쓰지 않았고 두 사람보다는 좀더 쉽게 글을 썼으니, 굳이 딱 하나를 골라 추천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나는 이 논쟁이 처음에 ‘촛불 비판자’와 ‘촛불 옹호자’의 논쟁 구도로 가면서 별 소득없이 끝날 것을 걱정했는데, 그래도 한가지 쟁점은 선명해졌다. 촛불 주도자들이 ‘다중’이냐(조정환의 주장) 아니면 ‘중간계급’이냐(이택광, 최원)는 것이다.

 

조정환은 촛불 주도자들을 ‘다중’으로 규정하면서 ‘다중의 역량’을 높이 평가한다. ‘다중’으로 규정하는 것은 많은 함의를 지니지만, 이는 이론에 관심 많은 사람들에게나 중요한 문제다. 나라면 ‘대중’이라고 부르지만, 이름이야 ‘다중’이든 ‘대중’이든, 크게 상관없다고 본다. 조정환은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대중’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들의 역량을 무시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대중’의 힘을 긍정하지 않는 ‘좌파’가 있을까?) 다만 ‘다중’이라는 규정에 담겨있는 많은 함의들을 전면에 내세우려면, 조정환은 촛불 주도자들이 ‘다중’이라는 걸 구체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그는 이미 증명했다고 주장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가 증명한 것은 거의 없다.(이택광이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이택광과 최원이 사용하는 ‘중간계급’이라는 용어의 문제는 ‘다중’과는 조금 차원이 다르다. ‘다중’이 이론에 관심 있는 극히 일부 사람들에게나 문제가 되는 ‘전문적인 용어’인 반면, ‘계급’은 훨씬 더 대중적인 용어다. 그래서 ‘중간계급’이라는 말은, 대중들에게 구체적인 인상을 준다. 덜 급진적이라거나, 타협적이라거나, 절충적이라는 인상을 말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중간계급’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비판하되, 문제를 좀더 선명하게 부각시킨 최원의 논의를 중심으로 할 것이다.

 

최원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전에 올린 글에서, ‘사실 촛불이 변하기 위해서 정말 필요했던 것은, 진보진영 내지 조직된 노동자들을 비롯한 다양한 약소자들과의 거대한 합류였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촛불과 공장시대의 프롤레타리아트와의 마주침을 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약소자들과의 합류(특히 비정규직과의 합류)를 말했다.” 또 “촛불과 기층민중/운동권을 선명하게 구분한 것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여 온 갈등선이고 대립선이었다.”고도 말한다.

 

그러니까 최원은 ‘중간계급적 성향을 지닌 촛불’과 ‘비정규직을 비롯한 약소자(기층민중)’의 뚜렷한 구별 또는 대립이 “엄연한 현실”이었고 이 둘의 ‘타협적이면서도 대립적·투쟁적인 합류’가 없었기에 지난해 촛불이 실패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타협적’이라는 말로 그의 주장을 표현한 것은, 촛불이 됐든 약소자가 됐든 단독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부각시키려고 한 것이다. 또 대립적·투쟁적이라는 것은, 그럼에도 이 둘은 필연적으로 주도권 다툼을 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최원 주장의 핵심이다.)

 

최원은, 중간계급 대 약소자의 구도가 자신의 이분법적 관점이 아니라 ‘미선·효순 싸움’ 때부터 엄연히 존재한 현실이라고 강조하지만, 내가 보기엔 “엄연한 현실”이 아니다. ‘미선·효순 싸움’ 당시 ‘네티즌 대 운동권’의 갈등이 지속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은 이른바 ‘다함께 논란’이다. 하지만 ‘다함께 논란’은 극히 부분적인 문제다. 이 논란을 ‘중간계급 대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약소자’의 갈등으로 확대 해석하는 건 비현실적이다.

 

이런 식의 갈등이 촛불 정국에 존재하지 않은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지난해 촛불의 선구자였던 10대 특히 여학생들과 20-30대 초반 여성들은 소수자들이다. 현재 한국 사회의 10대가 제 주장을 펼 ‘몫이 없는’, ‘자격 미달자’로 취급된다는 건 긴 설명이 필요없다. 20-30대 초반 여성들 또한 다를 게 없다. “이제 여성은 비정규직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말이 모든 걸 말해준다.

 

게다가, 이택광이 암시하듯이, 거리로 나선 여성들의 일부가 강남 중상류층일지라도(내가 전해들은 ‘촛불에 대한 강남 사람들의 냉소와 반감’에 비춰볼 때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그들 또한 소수자의 정서를 공유할 수밖에 없다. 비록 부모가 만들어준 환경에 힘입어 ‘번듯한 직장 여성’이 됐을지라도, 직장 안에서는 여전히 차별받는 약자이며 ‘중상류층의 끝자리’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불안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피속에도 ‘소수자의 정서’는 흐른다고 봐야 한다. 극소수 ‘강남 출신 커리어 여성’들조차 이런 측면이 있다면, 나머지 대부분의 ‘촛불 여성’들은 오죽하겠는가?

 

물론 촛불 선구자들이 ‘소수자’라고 해서, 그들이 ‘중간계급’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중간계급 지향성은, 외환위기 이후 자리잡은 “1997년 (이후) 체제의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이라는 ‘약소자’들이 이들과 다르다면, ‘중간계급’이 한낱 희망사항일 뿐임을 알기에 ‘절망하는 소수자’라는 점뿐이다.

 

내 주장을 요약하자면, ‘서울공화국’의 10대와 젊은 여성들은 ‘중간계급의 끝자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채 ‘소수자의 피’를 ‘촛불’로 승화시키면서 거리로 뛰쳐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중간계급’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소수자들의 반란이라는 중요한 측면을 무시하거나 축소하는 행위다. 촛불이 ‘소수자들의 반란’으로 시작됐다는 것은, 촛불집회가 ‘축제’ 성격으로 진행된 것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그동안 자신을 제대로 표현할 기회가 없던 ‘젊은 여성’들은 거리로 나와 떠들고 노래 부르는 ‘표현 행위’만으로도 큰 희열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자기 표출은 일회적인 발산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말에 담긴 ‘(진정한) 국가의 구성’ 요구까지 나아갔다. 물론, 이 질적 전환이 가능했던 것은 촛불 주도자와 그 이후 촛불 합류자들이 이 요구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소수자’(촛불 주도자)와 ‘기존 권위에 대한 총체적 거부자’(이후 합류자 상당수)는 사실 동떨어진 이들이 아니다. 그래서 쉽게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 촛불의 급진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촛불이 ‘진정한 국가’를 요구한 것은, 그들이 ‘보수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어떤 조직도, 동료도 없는 ‘모래알’들이기 때문이다. 의지할 데 없는 그들의 처지는, 미국산 쇠고기 무차별 수입 결정에서 ‘국가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끼게 했고, 또 그래서 ‘국가의 구성’을 절실히 요구하게 만든 것이다. 1987년 대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에겐 ‘노조’가 있었고, 반독재 투쟁을 벌인 대학생들에겐 ‘학생회’가 있었지만, 지금 촛불의 주역들에겐 아무것도 없다. 굳이 있다면 ‘소울드레서’ 카페나 미국 야구 동호회 ‘MLBPARK’이 있었고, 이것도 없는 이들이 의지할 마지막 보루는 ‘다음 아고라’였다.

 

촛불 주도자들과 비정규직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 모두에게 해법은 ‘국가’라는 점 때문이다. 미국 쇠고기 저지, ‘미친 교육’ 몰아내기, 건강보험와 깨끗한 물 지키기, ‘공정한’ 언론 바로세우기는 국가만이 보장할 수 있다. 다만, 주권자인 국민을 존중하는, 제대로 된 국가여야 한다.

 

촛불 주도자들과 비정규직이 갈라지는 지점은 그 다음이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은 ‘주권자인 국민을 존중하는, 제대로 된 국가’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문제로 가면, 필연적으로 ‘계급’을 만나게 된다. 촛불 주도자들은 아직 이 ‘계급적 국가’를 직면하지 않았기에, (중간계급적인 게 아니라!!) ‘무계급적’ 또는 ‘비계급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촛불이 노동문제를 전면적으로 수용하지 않은 것도, 이 점에서 찾아야 한다.

 

그래서, 촛불을 논할 때는 ‘비계급적 국가주의’ 문제를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촛불을 한 단계 진전시켜야 하는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

2009/05/19 22:45 2009/05/19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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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담론’ 논쟁이 본격화하려나

나는 1주년, 2주년 같은 것 따지는 걸 촌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촛불 1년’을 맞고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며칠전부터 몇편의 글을 읽고 있다. 글을 읽으며 내 생각을 정리하고, 지난해 쓰겠다고 해놓고 못쓴 글을 다시 구상해보려한다.

 

먼저 거의 1년전에 발표됐는데 모르고 있던 글들을 읽었다. 2008년 6월27일 열린 ‘제4회 맑스코뮤날레 3차 워크샵’에서 발표된 박영균의 ‘촛불집회를 보는 두가지 시각’과 조정환의 ‘2008년 촛불봉기: 다중이 그려내는 새로운 유형의 혁명’이다. (원문은 여기서 받을 수 있다.) 두 글을 읽고 나는 꽤 놀랐다. 1) 학자들이 지난해 6월말이라는 상당히 이른 시점에 워크샵을 했다는 사실과 그걸 내가 지금까지 몰랐다는 사실 2) 박영균의 글이 내 주장과 여러모로 유사하다는 사실[남들도 충분히 생각하고 깔끔하게 정리하는 걸, 나는 굉장히 힘겹게 씨름해놓고 무슨 성취감 따위를 느꼈다는 사실] 3) 조정환의 글은 내가 감당할 수준을 초월한다는 사실.

 

촛불정국이 1년 지난 현재 상황과 꽤나 대비되는 듯 한 조정환의 촛불 묘사는 잠깐 인용하는 것도 괜찮은 듯 하다. 너무나 아름답지만, 지금 읽으면 더없이 서글프고 환상적이기에 특히 그렇다.

 

시위가 종합예술이 되고 밤에 이루어지는 거대한 소비활동이 새로운 삶을 빚어내는 용광로가 되며 앞섰던 자가 뒤서고 뒤에 섰던 자가 앞서며 가르치던 사람이 배우는 사람이 되고 지금까지 내내 배우기만 했던 사람이 가르치며 이른바 ‘지도자’들이 훼방꾼으로 기능하고 이른바 ‘열패자’들이 투사가 되며 지식인이 무지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대중이 지성의 불을 내뿜으며 늘 지도부를 자임했던 정당이 다중의 행동을 생중계하는 매개자로 되는 이 총체적 역전과 융합(퓨전)의 드라마가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 (1쪽 ‘머리글’의 일부)

 

이어서 나는 ‘사회와 철학 연구회’가 엮은 <촛불, 어떻게 볼 것인가>(울력, 2009)라는 책의 몇가지 글(박구용의 ‘촛불과 지성’, 박병섭의 ‘촛불축제시위와 세계사적 의미’)을 읽어보려고 한다. 전체를 죽 훑어본 바로는 철학 전공자들이 ‘촛불’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양한 관점에서 문제들을 따져보는 책이다. 그러니 별로 재미가 없고, 읽고 싶은 생각도 크지 않다. 다만 박구용은, “따져보고 되짚어보고 생각을 다듬는 작업”에 있어서 ‘내공’이 있음을 내가 인정하는 몇 안되는 학자이기에 읽어보려 한다. 박병섭의 글은 주석이 흥미있다.(주석에 ‘여성주의’와 관련된 비판들이 특히 눈길을 끄는데, 내가 전혀 모르는 맥락의 것들이다.)

 

최근에 나온 촛불과 관련된 책이 몇권 더 있다.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산책자, 2009). 강내희 등, <촛불 집회와 한국사회>(문화과학사, 2009). 조정환, <미네르바의 촛불>(갈무리, 2009). 첫번째 책에 글을 실은 이들은 상당수가 당대비평 계열 사람들이다. 두번째 책은 강내희를 중심으로 한 문화과학 계열 사람들이 썼다. 마지막으로 조정환은 한국의 대표적인 자율주의자(또는 네그리주의자)다. (계열을 거론한 것은, 담론의 갈래를 파악하는 것이 책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점 때문이다. 딱지붙이기의 의도는 없다.) 관심은 있으되 관련 정보를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나열해봤다.

 

또 한가지 정보 제공 차원에서 언급할 것이 있다.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에 글을 실은 이택광과 <미네르바의 촛불>을 쓴 조정환이 논쟁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관련 글은 이택광의 블로그조정환의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이 촛불에 대해 말들을 쏟아내고 책을 내고 있지만 본격 논쟁까지 벌이지는 않은 것으로 아는데, 이번에 두 사람의 논쟁은 잘하면 ‘촛불 담론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두 사람의 논쟁은 “네그리에 의지하는 담론”과 “랑시에르와 라캉에 의지하는 담론”의 논쟁이 되어야 정상이겠지만, 실제로는 ‘촛불비판자’(조정환이 어떤 글에서 쓴 표현)와 ‘촛불옹호자’의 싸움이 될 공산이 크다. 좀더 지켜봐야겠지만, 그래서 별 영양가가 없는 게 되고말 여지가 커 보인다.

 

말이 나온 김에, 지난해 5-7월 내가 주장했던 것들에 대해서도 언급해야겠다. 당시 내 주장은 몇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촛불의 배경은, 기득권층과 좌·우를 막론한 “상대적 특권층”(학자, 정치인, 언론인 등 ‘먹물’ 전체)에 대한 총체적 불신과 거부다. 2) 촛불의 요구는 “한국” 또는 “남한”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재구성”이다. 3) “국가의 부재”을 전제로 한 “국가의 재구성”이라는 측면에서 촛불은 급진적이고 진보적이다. 4) 촛불은 “국가”에 한정되어 있기에 보수적 또는 반동적이다.

 

나의 주장과 유사한 주장을 펴는 이로는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이택광과 박영균이 있다. 이택광은 촛불을 “정상 국가에 대한 욕망”으로 본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정상 국가’라는 표현은 그전의 국가를 ‘비정상 국가’로 전제하는 걸로 생각되는데, 내가 썼던 “국가의 재구성”이라는 표현은 ‘국가의 부재’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래서 사실 나는 “국가의 구성” 요구라고 써야 더 정확했을 것이다.(그 때는 의식하지 못한 부분이다.) 또 하나, 이택광은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모르겠으나 ‘국가’와 ‘민족’을 병치해서 쓰기도 하는데 반해 나는 ‘민족’을 개념과 용어 차원에서 철저히 배제했다. 내가 이렇게 한 것은, 촛불이 ‘민족'을 넘어섰거나 버리고 ‘국가’만 선택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에겐 이 점이 아주 중요한 지점이다.

 

박영균의 주장이 내 주장과 비슷한 점은 그가 대중의 이중성과 대중의 국가주의적 욕망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넓게 보면 이택광도 비슷한 것 같은데, 그가 쓰는 용어는 박영균의 용어보다 나에겐 덕 익숙한 것이다.) 그의 글에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흡사한 대목이 나온다. “촛불집회의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이념도 공화의 ‘가치’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냉혹한 경쟁의 장이 되어 버린 ‘신자유주의 지구화’ 속에서 자신의 이기성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강력한 국가권력’을 요구한다.”(‘촛불집회를 보는 두 가지 시각’ 글의 ‘4 민주공화국, 대중의 두 얼굴’ 부분의 한 대목.) 박영균과 내가 차이가 있다면, 박영균은 조정환 등이 제기하는 자율주의적 해석과 씨름할 필요성을 느끼는 반면 나는 이 부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자율주의를 고려하지 않는 것은, ‘다중의 출현’을 기대하거나 예견할 잠재성은 느낄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이 “지금 이곳에서” 현실성을 띠고 있다는 어떤 ‘근거’도 내게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이택광과 박영균의 실명을 거론한 것은, 그들의 “어떤 권위”를 등에 업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의 생각을 내 생각과 비교하는 것이 내 생각을 좀더 선명하게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밖에 없다. 나는 촛불의 주역들 못지않게 “권위”를 거부한다. 또 내 주장은, 내 글의 논리성과 적합성으로써만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주장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촛불을 기껏 ‘자랑스런 대한민국’에 대한 요구 정도로 폄하한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비판은 이택광 등을 향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니 나만 억울해 할 이유는 없겠다. 하지만 몇마디 부연하자면, ‘폄하한다’는 비판의 배경은 대략 세가지로 생각된다. 1) 내 글에 대한 오독 2) 내가 촛불을 평가하는 ‘오만한 자세’를 보인다는 판단 3) 촛불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촛불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판단. 이 가운데 1) 내 글에 대한 오독은 대체로 급진주의적 조급성 또는 현장을 직접 느낀 이들의 열정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생각되고 2) 내가 평가자의 위치에 있다는 생각은 내 사회적 지위와 내 글의 문체 등에 대한 ‘종합적 판단’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생각되며 3) 촛불을 긍정적으로 보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은, 내 글이 이런 판단과 전혀 다른 의도를 담고 있다는 점을 ‘정확하게’ 간파한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나에 대한 비판은 내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나는 촛불을 ‘해석’하거나 ‘평가’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다. 다만 촛불을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전략을 짜기 위해서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인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없으면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모한 또는 무기력한 정열”뿐이라고 본다. 다만 내가 ‘전략’을 제시하겠다거나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전략’에 필요한 현실 판단과 인식에는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니 1) ‘지적인 호기심’이나 ‘지적인 논쟁’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2) 해석이나 담론 또는 평가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3) 지금은 현실을 판단하고 인식할 여유가 없으니 바로 행동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 이들은, 촛불과 관련해서 나와 ‘소통’하는 걸 크게 기대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다. 소통이 잘 될 수도 없을 뿐더러, 현실 인식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방식의 소통엔 별 관심이 없다. (처음에 올린 글을 다시 읽어보고 말들을 조금 가다듬었으나, 고친 부분을 따로 표시하지는 않았다.)

2009/05/08 21:51 2009/05/08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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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심정

사람들은 참 쓸데 없는 것을 가지고 싸운다는 걸 요즘 절감한다. (여기서 “사람들”에는 나도 포함된다) 어떤 진보 정당 게시판에 가보면, 어떤 여성과 남성이 먼나라 프랑스에서 벌인 일이 어쩌다보니 '진보진영(?)'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일이라도 되는 양 확대되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 일을 보면서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나는 한동안 대단하지 않은 일에 열을 받으면서 스스로를 갉아먹었다. 참 어리석다.

 

“내겐 더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다. 하찮은 일에 나를 소모하지 말자. 나는 소중하잖아?” 이게 요즘 내 심정이다. (섭섭해 하실 분이 있을까봐 덧붙인다^^ “당신도 소중하다.”)

2009/04/13 14:43 2009/04/13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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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