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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는’과 ‘이/가’에 대해 다시 한번

‘은/는’과 ‘이/가’의 차이에 대해서 나는 아래 글에서 두가지 분류법을 비판했다. 하나는 ‘은/는’은 “듣는 사람이 이미 아는 정보”인 경우 체언 따위에 붙여서 쓰는 조사(보조사)이고 ‘이/가’는 “듣는 사람이 모르는 정보”인 경우 사용하는 조사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번역가 이희재가 최근에 나온 자신의 책에서 주장한 것이다. 두번째는 ‘이/가’는 “객관적인 서술”에 쓰이고 ‘은/는’은 “주관적인 시각 따위를” 담을 때 쓴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소설가 김훈이 자신의 책에서 주장했다.

 

그리고 내 주장의 요점은 ‘이’는 객관적인 서술에 쓰이는 조사라는 것은 대체로(!) 맞는 이야기지만, 예외적인 경우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 ‘은’은 대체로(!) 또는 일반적으로(!) 논의를 특정한 대상에 “한정”하려고 할 때 사용하는 보조사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정”이 뜻하는 바는, 특정한 대상을 뺀 나머지를 제외시키는 ”배제”이기도 하고 특정한 대상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자면 ‘은’은 바로 앞에 위치하는 명사나 대명사를 “도드라지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김훈의 주장에 대해서 나는 “부정확하다”고 했다. 김훈의 분류법에서 문제는 ‘은’은 “주관적인 시각 따위를” 담을 때 쓴다는 대목이다. 하지만 김훈 이야기를 여기서 상술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가 객관적인 서술에 쓰인다는 것은 대체로 맞는 이야기고, ‘은’은 “주관적인 시각 따위를” 담을 때 쓴다는 부분은 부정확하고 모호하지만 틀렸다고까지 말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문제는 이른바 “이희재식 분류법”이다. ‘유배지’라는 분은 이희재식 분류법이 틀리지 않다고 주장하는데, 나는 이런 ‘유배지’의 주장에 반박하려고 한다. (유배지라는 분의 글 보기)

 

그런데 그의 주장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사실 ‘은/는’의 용법은 많으며, 어떻게 보면 이른바 이희재식 분류법이 먹혀드는 듯 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극도로 예외적이고, 이런 극도로 예외적인 경우 또한 다른 분류법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는 게 내 주장이다.

 

이른바 이희재식 분류법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박은 이 분류법의 비논리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1. ‘은/는’과 ‘이/가’의 차이는 “듣는 사람이 이미 아는 내용이냐 아니냐”에 있다는 주장의 비논리성

이희재식 분류법의 특징은, 기준이 말을 듣는 사람에게 있다는 점이다. 말을 하는(글을 쓰는) 사람이 ‘은’과 ‘이’를 선택할 때는 먼저 말을 듣는(글을 읽는) 사람이 그것에 대해서 아는지 모르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을 할 때는 그나마 이 문제가 덜 심각하지만, 글을 쓸 때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많은 경우, 글을 쓰는 사람은 ‘은’과 ‘이’ 가운데 뭘 선택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게다가 이제 한국어 문법에서 ‘은’과 ‘이’의 올바른 용법을 가르는 기준은 세울 수 없게 된다. 듣는 사람의 지식 여하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례를 들어보자. 대체로 한국인 대다수는 “수학능력시험”이라는 걸 안다. 그러므로 이희재식 논법을 제대로 따르면 “수학능력시험이 11월 중순에 실시된다”는 문장과 “수학능력시험은 11월 중순에 실시된다”는 문장의 차이는 존재할 수 없다. 아니 앞의 문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국인 대다수는 수학능력시험을 이미 알고 있기에, 이 경우는 무조건 '은'을 써야 한다. 하지만 웬만한 사람은 두 문장이 “뭔가 다른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안다. 앞의 문장은 수학능력시험의 실시일을 “담담하게 서술한” 것이고, 뒤의 문장은 “담담하게 서술”하지 않고 있다. 뒷 문장에는 뭔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수학능력시험을 뭔가로부터 구별해서 한정하려는” 의도다. 여기서 “뭔가”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상황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예컨대, 그건 대입 일정을 설명하는 와중이라면 “대입 수시 면접일”일 수 있고, 아니면 말하는 사람이 준비하고 있는 또 다른 시험(운전면허시험이든 뭐든)일 수도 있다. 심지어 이 뭔가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데, 이 경우라면 “은”은 정확하게 말하면 “한정”이 아니라 “강조”를 위해 쓰였을 것이다. (사실 강조와 한정은 무관한 게 아니다. 강조하려니, 한정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예를 들자면, “청와대가 (뭐라고 뭐라고) 밝혔다”라는 문장은 옳은 문장이 아닌 게 된다. 무조건 “청와대는”으로 시작해야 한다. 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 소리인가?

 

여기까지 오면, 이희재 또는 ‘유배지’라는 분이 할 수 있는 “합당한” 말이라곤 “이 경우는 이희재식 분류법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다”라는 것뿐이다. 다만 문제는 적용되지 않는 사례가 너무 많아질 거라는 점이다. 그리고 수많은 고유명사는 이런 예외적인 사례에 들어간다. 웬만한 연예인, 상당수의 운동선수, 정치인, 학자, 기업인 이름 따위 말이다. 또 웬만한 추상명사도 모두 예외에 포함되어야 한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희재식 분류법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주 예외적인 사례를 설명하는 방법일까?

 

국어학자 남영신이 설명하는 것을 봐도, 이런 분류법이 비논리적임을 알 수 있다. ‘유배지’라는 분이 그의 책 <나의 한국어 바로 쓰기 노트>를 언급했기에 서점에 들렀다가 잠깐 봤다.

 

남영신은 ‘이’과 ‘은’의 차이를 여러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과 ‘독자가 모르는 내용’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그는 2001년 9월에 발행된 한 일간 신문의 기사를 사례로 설명한다. 그 기사는 이런 내용이다.

 

한빛소프트 등 9개 기업이 12일 코스닥 등록 예비심사를 통과했다. 함께 심사를 받은 액토·시스폴·다코스정보통신은 보류 판정을 받았다.

 

남영신의 서술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남영신은 앞의 ‘기업이’는 ‘독자에게 새로운 내용’이기 때문에 ‘이’라는 조사를 썼다고 한 뒤, 다음 문장의 “의도”는 3개 업체가 보류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다.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설명하면서 글쓴이의 “의도”를 거론하는 이유를 나로서는 모르겠다.) 그리고 이어서 ‘다코스정보통신’은 이미 독자들이 아는 내용이기 때문에 ‘은’을 썼다고 말한다.

 

그런데 ‘다코스정보통신을 이미 독자들이 안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또 다코스정보통신을 이미 아는 독자들이 왜 한빛소프트는 모를까? 남영신은 무슨 근거로 ‘독자들이 이미 안다’고 주장하는가?

 

남영신이 인용한 기사를 잘 보자. 기자는 왜 코스닥 예비심사를 통과한 업체 9곳 가운데는 ‘한빛소프트’만 명시한 반면, 남영신이 ‘독자들이 이미 안다’고 주장하는 업체들은 왜 일일이 이름을 썼을까? 보류된 업체가 어디인지 독자는 모르고, 자신은 그것을 가능하면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남영신이건 이희재건, 이런 분류법을 옹호하는 이들이 말하는 “듣는 사람이 알고 있다”는 문장은 분명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뜻을 담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부터 해명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안되면 그들의 주장은 출발점도 제대로 잡지 못한 꼴이다.

 

2. ‘은/는’과 ‘이/가’가 정보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

실제로 정보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은’과 ‘이’를 나눠쓰는 경우가 있다. 이런 사례는, 글을 쓸 때 맨 앞에서는 ‘이/가’를 쓰고 이어지는 문장에서 그 명사나 대명사가 다시 나올 때는 ‘은/는’을 쓰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마리신이 13일 이희재식 분류법을 비판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유배지’라는 분이 바로 반론을 제기했다. 그러자 마리신은 14일 댓글을 달았고, 이에 대해 유배지는 또 댓글을 달았다. 논란이 지속되자 마리신은 다시 한번 이희재식 분류법의 문제점에 대해 글을 썼다.”

 

언뜻 보면 이것이 이희재식 분류법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둘은 다른 것이다. 이번 경우는 ‘은’이 ‘이’의 자리를 대신할 때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그래서 ‘은’은 쓰지 않아도 그만이기 때문이다. 위의 문장을 다음처럼 바꿔도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마리신이 13일 이희재식 분류법을 비판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유배지’라는 분이 바로 반론을 제기했다. 그러자 마리신이 14일 댓글을 달았고, 이에 대해 유배지가 또 댓글을 달았다. 논란이 커지자 마리신이 다시 한번 이희재식 분류법의 문제점에 대해 글을 썼다.”

 

‘은’은 ‘이’를 대신해서 쓸 수 있지만, 대신하지 않아도 상관없음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이희재나 유배지라는 분은 이런 식으로 ‘은’이 ‘이’를 대체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니다.

 

3. ‘유배지’라는 분이 든 사례가 보여주는 것

이제 마지막으로 ‘유배지’라는 분이 내 주장에 반박하려고 든 사례에 대해 간단하게 검토하겠다. 그가 든 첫번째 사례는 다음과 같은 두 문장이다. 1) 철수와 영희가 서류심사를 통과했다. 2) 철수와 영희는 서류심사를 통과했다.

 

그는 “1)에서 듣는 사람에게 새로운 정보는 '철수와 영희'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반면에 2)는 '철수와 영희'가 서류를 넣은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정보이고, 청자가 알고 싶은 것은 서류심사의 '통과' 여부인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논법은 남영신과 거의 똑같다. 도대체 ‘유배지’는 2번 문장에서 “듣는 사람이 철수와 영희를 이미 알고 있기에 실제로 알고 싶은 것은 서류심사의 통과 여부”인지 어떻게 아는가? 그는 아마도 특정한 상황에서의 “대화”를 염두에 두기에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글에서는 과연 어떨까도 생각해 봐야 한다.

 

내가 편지를 쓴다고 생각해보자. “안녕하세요? 마리신입니다. 철수와 영희가 서류심사를 통과했습니다.”라고 썼다. 이 경우 내 편지를 받는 사람은 ‘철수와 영희’를 모르는 사람일까? 결코 아니다. 편지를 받는 사람은 철수와 영희도 알고, 이 두사람이 어떤 서류를 제출했다는 것도 아는 사람이다. 만약 내 편지를 받는 사람이 철수와 영희를 모르지만 어떤 서류심사에 대해 안다면 나는 이렇게 써야 한다. “안녕하세요? 마리신입니다. 철수와 영희라는 두 사람이 서류심사를 통과했습니다.” 또 내 편지를 받는 사람이 철수와 영희도 모르고 어떤 서류심사에 대해서도 모른다면 나는 이렇게 써야 한다. “안녕하세요? 마리신입니다. 철수와 영희라는 두 사람이 한국대학교 수시전형 서류심사를 통과했습니다.”

 

이번엔 내가 소설을 쓴다고 생각해보자. 첫 문장이 “철수와 영희가 서류심사를 통과했다.”라면, 이 경우 독자는 철수와 영희가 서류를 넣은 것을 이미 알고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똑같은 ‘철수와 영희가’도 어떨 때는 듣는 사람이 아는 사람들이고 어떨 때는 모르는 사람이 된다는 것 곧 이희재, 유배지, 남영신의 주장은 “극도로 맥락 의존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보를 아느냐 모르느냐 여부로 ‘이’와 ‘은’의 차이를 설명하는 방법은 무의미하다.

여기서 차이는 ‘이’와 ‘은’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맥락”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희재, 유배지, 남영신이 모르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2009/03/19 16:35 2009/03/19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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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는’과 ‘이/가’도 모르는 것들?

“‘은/는’과 ‘이/가’도 모르는 것들”, 많은 사람이 쉽게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거 쉽게 할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 글은 ‘은/는’과 ‘이/가’에 대한 글이지만, 바로 들어가지 않고 조금 돌아서 갈 예정이다. ‘돌아가는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엔 사정이 있다.

 

전문 번역가 이희재라는 분이 <번역의 탄생>이라는 책을 썼다. 꽤 호평을 받고 있다. 나는 처음 이 책에 대해 알았을 때, 별로 탐탁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글쓴이가 머리말을 “번역을 하면서 나는 한국어에 눈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터넷 서점에 올라온 출판사의 책소개에서 인용.) 사실 어쩌면 상투적이면서도 상식적인 말인데, 나는 아무래도 이상했다. 20년 번역한 사람이 마음 먹고 번역에 대해 책을 쓸 때는 이런 말로 시작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라면 “번역을 하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한국어를 모르는지 알았다”라고 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고, 인터넷 서점에 공개된 내용과 책을 읽은 사람이 옮겨놓는 부분만 봤다. 앞으로 나올 인용문들은 토닥토닥이라는 블로그에서 가져온 것이다.)

 

한마디 가지고 뭘 그리 꼬투리를 잡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글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글의 첫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안다. 김훈은 이걸 잘 표현하고 있다.

 

내가 쓴 장편소설 <남한산성>(<칼의 노래>; 원 인용자가 잘못 인용한듯.)의 첫 문장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입니다... 나는 처음에 이것을 “꽃은 피었다”라고 썼습니다. 그러고 며칠 있다가 담배를 한 갑 피면서 고민고민 끝에 “꽃이 피었다”라고 고쳐놨어요. 그러면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바다의 기별> 140-141쪽.)

 

하지만 나는 우리말답게 문장을 잘 쓰고, 번역도 우리말답게 잘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는 <번역의 탄생>이 시답지 않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말답게 글을 잘 쓰는 건 항상 강조할 일이다.

그래도 “번역을 하면서 나는 한국어에 눈떴다.”라는 말이 계속 걸렸다. “한국어를 제대로 모르면서 번역을 했다는 소릴까”라는 의문 때문이다. 한국어를 모르면 외국어가 제대로 번역이 안된다. 외국어를 번역하면서 한국어 공부를 더욱 열심히 했다고 하면 모를까. 그러던 가운데 '토닥토닥'이라는 블로그에 인용된 대목을 보면서, “번역을 하면서 나는 한국어에 눈떴다.”라는 게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일본의 오노 스스무라는 언어학자는 기지의 정보, 미지의 정보라는 개념으로 일본어조사 は(한국어 ʻ은/는’에 해당)와 が(한국어 ʻ이/가’에 해당)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가령 누군가가 연단에 올라가서 “저는 오노입니다.” 하면 ʻ저’라는 사람은 청중 앞에 있으니까 청중 입장에서는 이미 아는 정보, 곧 기지의 정보지요... 반대로 연단에 올라가서 “제가 오노입니다.”라고 말하면 ʻ오노’는 청중이 이미 아는 정보, 곧 기지의 정보인데 여기다가 ʻ저’라는 미지의 정보를 덧붙이는 형식이 됩니다... 한국어 조사 ʻ은’과 ʻ는’은 실제로 이렇게 이미 아는 대상을 나타낼 때 씁니다... “시험은 어렵지 않았다.”거나 “경찰관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라고 하면 이것은 ʻ시험ʼ이 어떤 시험이고 ʻ경찰관ʼ이 어떤 경찰관인지를 듣는 사람이 안다는 사실이 전제된 표현입니다. (<번역의 탄생> 187-188쪽.)

 

정리하자면 듣는 사람이 이미 안다고 여겨지는 정보를 내놓을 때는 정관사 the를 앞에 붙이고 듣는 사람이 아직 모르는 미지의 정보를 내놓을 때는 부정관사 a를 앞에 붙인다는 것이 영어에서 the와 a를 구별하는 가장 간단한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기지의 정보를 제시하는 한국어 조사 ʻ은/는ʼ’은 영어 정관사 the에 해당하고 미지의 정보를 던지는 한국어 조사 ʻ이/가ʼ는 영어 부정관사 a/an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번역의 탄생>189쪽.)

 

그런데 이런 구분법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내가 간다/ 나는 간다” 이 두 문장이 어감 차이가 있다는 걸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또 ‘내가’의 ‘내’는 “미지의 정보”이고 ‘나는’의 ‘나’는 “이미 아는 정보”라고 하면 초등학생도 비웃는다. 김훈이 말하고 있는,“꽃이 피었다/ 꽃은 피었다”를 봐도 분명하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내가 번역한 것을 출판사 편집자가 바꿔 버려서 내가 되돌려놓은 경우다. “미국 지식인들이 전쟁을 지지하다/ 미국 지식인들은 전쟁을 지지하(한)다” 이 두 문장(사실은 어떤 글의 제목)이 다른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꽤 많은 한국인은 (설명은 못할지언정) 느낄 수 있다. 앞의 ‘미국 지식인들이’는 누군지 모르는 지식인이고, 뒤의 ‘미국 지식인들은’은 이미 아는 지식인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시험이 어렵지 않았다”는 모르는 시험 이야기고 “시험은 어렵지 않았다”는 아는 시험 이야길까? 턱도 없다. 둘 다, 듣는 사람이 아는 시험이다. (듣는 사람이 모르는 시험을 저렇게 불쑥 말하면 돌아오는 말은 “뭔 시험?”이라는 퉁명스런 말뿐이다.)

 

적어도 이 대목만 보면, 이희재는 외국어를 너무 많이 다루다보니 한국어를 오해하게 된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전반적으로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은/는’과 ‘이/가’에 대해서만큼은 그렇다.)

 

전문 번역가조차 ‘은/는’과 ‘이/가’를 구별해 설명하지 못하다니... 일부에서 극찬하는 작가인 김훈은 알겠지. 그런데 그 또한 기대에 못미친다. 앞에서 인용한 부분에 이어지는 대목을 보자.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입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은 것이죠.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입니다. (<바다의 기별> 140-141쪽.)

 

이희재보다는 훨씬 낫다. 조사 ‘이/가’가 “객관적 사실”을 진술한다는 말은 대체로 맞다. 하지만 ‘은/는’이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다는 말씀은 많이 부정확하다.

 

(내 주장을 선명하게 하기 위해 추가한다. 먼저 국어사전부터 보자.)

은: 자음으로 끝난 체언에 붙여 쓰이어, 그 말을 한정 또는 지정하거나, 다른 말과 대조하거나, 때로는 강조하는 뜻을 나타내는 보조사.(동아새국어사전, 1994)

은: 1. ((받침 있는 체언이나 부사어, 합성 동사의 선행 요소 따위의 뒤에 붙어))어떤 대상이 다른 것과 대조됨을 나타내는 보조사. 2. ((받침 있는 체언 뒤에 붙어))문장 속에서 어떤 대상이 화제임을 나타내는 보조사. 3. ((받침 있는 체언이나 부사어, 일부 연결 어미 뒤에 붙어))강조의 뜻을 나타내는 보조사.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여기까지가 나중에 추가한 부분이다.)

 

다시 한번 예를 들어보자. “내가 간다”는 객관적 사실인가? 아니다.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은/는’이 주관적 정서를 담은 것이라는 김훈의 주장을 반박하는 사례다. “아프리카여 기다려라. 내가 간다.”라는 예를 보면 분명해진다. 여기서 “아프리카여 기다려라. 나는 간다.”라고 하면 바보가 된다. 반대 경우를 보자. “아프리카여 잘 있거라. 나는 간다.”는 말이 되지만 “아프리카여 잘 있거라. 내가 간다.”라고 쓰면 바보다. 여기서 ‘는’은 “한정” 또는 “양보”를 표현하는 것이다. “아프리카에 여전히 사람도 많고 동물도 많지만 그리고 그들이 남아있는지 그들도 떠날건지 나는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이제 떠난다”는 뜻이다. (앞의 ‘간다’와 뒤의 ‘간다’가 정반대의 뜻이라는 것도 재미있는 대목이다.)

 

김훈의 소설 첫문장을 보자.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는 무슨 뜻을 담고 있는가? ‘꽃’에 한정해서 말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버려진 섬마다 새가 사는지, 뱀이 사는지는 알 바 아니고(또는 나는 모르겠거나 관심 없고) 적어도 꽃은 피었다”는 뜻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꽃에 한정하기 때문에 김훈은 이를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었다고 표현한 것 같지만,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앞에서 확인했듯이, ‘이/가’라고 해서 꼭 언제나 “사실”만을 함축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는 어떤가? 이 경우는 공통된 사실 곧 “(이유는 모르겠으나) 버려진 섬에는 모두 꽃이 피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가’는 ‘은/는’보다 훨씬 어렵다. 1인칭 곧 “내가”는 대체로(!) 당사자의 의지를 표현한다. 하지만 2인칭은 또 조금 다른 경우도 있다. “네가 가도록 해/ 너는 가도록 해”를 보자. 앞의 문장은 ‘너’라는 주체를 강조한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 시키지 말고 네가 ‘직접’ 가도록 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뒤의 문장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너’에 한정해서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상관하지 말고 아무튼 너는 가도록 해”라는 뜻이다. ‘너’에 한정해서 말하다보니, ‘너’라는 주체를 강조하는 효과도 일부 있지만 “네가”를 쓸 때와는 분명 다르다.

 

3인칭의 경우는 또 다르다. 김훈의 설명처럼 대체로(!) “사실”을 진술할 때 ‘이/가’를 쓴다고 보면 무난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앞의 예를 다시 가져봐오자. “미국 지식인들이 전쟁을 지지하다/ 미국 지식인들은 전쟁을 지지하다” 여기서 앞의 문장은 어떤 뜻을 함축하고 있는가? “사실”을 진술하되, 여기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장에는 미국 지식인들 “일부”가 전쟁을 지지한다는 것도 담겨 있다. 다만 이는 뒤의 문장과 비교할 때만 그 의미가 또렷해진다. (따로 떼어놓으면 이게 잘 드러나지 않고 숨어있다.) 뒤의 문장 곧 “미국 지식인들은 전쟁을 지지하(한)다”는 미국 지식인 “모두”가 전쟁을 지지한다는 걸 함축한다. ‘은’의 “한정 효과”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다 몰라도, 적어도 미국 지식인들은 전쟁을 지지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미국 지식인 전체를 포함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체를 지칭하지 않으려면 “미국 일부 지식인들은”이라고 분명하게 써야 한다.

 

‘은/는’이 “한정 효과” 때문에 전체를 지칭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건 다음의 예에서 아주 분명해진다. “빵이 맛있다/ 빵은 맛있다” 앞의 문장은 단순히 “사실”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모호한 문장이다. 하지만 뒷 문장은 훨씬 더 분명하다. “(내 눈 앞에 있는 빵집의 빵을 말하는 건지, 빵 일반을 지칭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모든 빵이 맛있다”는 뜻이다.

 

반복하자면, ‘은/는’은 “한정” 또는 “양보”를 함축한다. 그래서 어떤 집단이나 무리가 주어인 경우 그 집단 “전체”를 지칭하는 효과까지 발휘한다.

 

하지만 한국어에서 ‘은/는’과 ‘이/가’, 특히 ‘이/가’는 생각보다 상당히 미묘하고 복잡하다. 게다가 사람마다 느끼는 차이 곧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훨씬 더 복잡하고 미묘해진다. 그래서 한국어 알고 보면 굉장히 어렵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번역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명심해야 할 말이다.

2009/03/13 19:41 2009/03/13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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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아무개 오래 가긴 힘들 것 같다

요즘 유행하는 장아무개라는 가수가 있다. 음반을 1만장이나 팔았다니 이제 오래 못 갈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든다.

하지만 오래 갔으면 좋겠다. 노래가 좋아서도 아니고, 시대를 비판하는 '냉소'나 '유머' 따위가 있어서도 아니다. 자본의 마수에 걸려들지 않을 음반 제작 방식 때문이다. 컴퓨터에서 '공시디'에 직접 음반을 구워서 판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큰 돈 들이지 않을 수 있고 그야말로 '지속 가능'할 것이다. (공시디에 음반을 구워 파는 건 이미 옛날 이야기라고 한다. 정식 음반은 기존 방식처럼 막 찍은 것이라고 한다. 아주 편안하게 “인상비평”한 것이어서 대충 썼는데, 역시 제대로 알아보고 쓸 걸 하고 후회가 된다. 낚인 분들이 계시다면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 인기라는 게 내 눈에는 우습기도 하고 묘하기도 하다.

 

1. 잘 생긴 청년이 있다. (게다가 명문대 출신이라지?) 2. 잘 생긴 청년 옆에는, '도도하지만 멍청한' 이미지로 개그 프로그램에 딱 맞는 몸짓을 하는 여성이 둘이나 있다. (내 눈에는 딱 '싸구려 된장녀' 이미지다. 그래서 일정한 냉소 또는 유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3. 노래 가사는 가식이 없고, 그래서 아주 강한 현실 비판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노래는 결코 자연스럽게 부르지 않는다. “이제는 아무러치도 아나”라고 발음하지 않고 “이제는 아무러치도 아너”라고 아주 의식적으로 발음한다. 본인은 가사를 제대로 전달하려고 “짝짝 벌리면서 부른다”지만, “아너”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듣기에는, 이건 “가식”에 가깝다.)

 

다른 요소도 많이 있겠지만, 내 눈에 들어온 인기의 요소는 일단 이 세가지다. 1번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고, 2번은 “개그” 또는 “유머” 이미지를 계속 가져가면 식상할 가능성이 있기에 오래 가기 힘들고, 3번은 조금 바꾸면 또 어느 정도 갈 수 있지만 역시 지속 가능성은 약하다.

가장 결정적으로 이 가수의 지속 가능성을 높여주는 게 바로 컴퓨터로 '공시디'에 음반을 구워 파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게 지속되려면, 음반이 너무 많이 팔리면 안된다. 판매량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대량 생산이 더 효율적이다. 대량 생산 시스템으로 가면, 모든 게 달라지고 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니 밥 먹고 살면서 좋아하는 일 계속할 수 있는 적정선이 가장 바람직한데, 이게 또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이건 비단 가수에게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많은 사람이 딱 밥 먹고 살면서 욕심 내지 않고 즐길 수 있으면 좋을텐데, 세상이 그리고 인간의 욕심이, 이렇게 놔두질 않는다. 우리네 삶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2009/03/13 11:43 2009/03/13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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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