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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단순 성폭력 사건”이 아니다

민주노총에서 최근 벌어진 일을 두고 말들이 많다. 하지만 이 사건의 핵심이 무엇인지 논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이 글처럼 말이다.) 이번 사건은 “단순 성폭력 사건”이 아니다.

 

나는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 사건 때부터 성폭력 사건들을 주시해왔다. (이 사건이 뭔지 모르는 이들은 이 게시판을 읽어보라) 그런데 이번 사건과 같은 종류의 '성폭력'은 듣도 보도 못했다.

 

이번 사건은 민주노총 위원장의 “도피”를 도와주다가 “범인도피죄”를 뒤짚어쓸 처지에 놓인 조합원과 민주노총 간부가 “대책”을 논의하다가, 그 조합원 집에 “침입”해서 강간을 시도한 사건이다. (사건을 제대로 따져보려면 이 글부터 보라.) '범인도피죄'를 혼자 떠안으라고 요구하는 것도 '조폭의 논리'를 연상시킬 정도로 과도한 요구이고, 이런 과도한 요구를 하면서 집까지 따라가는 것 또한 과도한 행동인데, 강간까지 시도하다니... 이 게 단순한 성폭력 사건일 수 있는가? 상식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할 수 없다. “뒷 일은 우리가 도와주겠다. 조직을 위해 도와달라.“고 간절히 호소하고 설득해야 정상이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부담스러운 수준을 넘어서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다가 “성폭력범”으로 돌변하다니, 이건 제 정신이 있는 인간이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번 사건을 단순 성폭력 사건이라고 규정하는 건, 민주노총 조직강화위원장인 사람이 '순간적으로 발동된 성욕'에 눈이 멀어 일을 저지른 철부지라는 소리다.

 

민주노총은 이번 사건을 단순 성폭력 사건으로 보면 안된다. 조직이 조합원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면서 그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성폭력까지 동원한 사건이 아닌지 철저하게 따져야 한다. (이것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의심”이며 이 의심은 확실히 해명되어야 한다는 게 내 주장이다. 조직의 문제라는 측면에서 사태를 따져봐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건 “기껏” 민주노총의 도덕성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민주노총을 해체해도 모자랄 사건이다. (그렇다고 성폭력이라는 측면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민주노총이 이 사건을 앞으로 어떻게 처리하는지 지켜볼 것이고, 처리 결과를 결코 잊지도 않을 것이다. “자랑스런 민주노총의 조합원” 자격으로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번 사건을 타산지석으로 삼자”고 떠드시는 박사님께는 이 글을 선물로 드린다. 저 글은 민주노총 사건을 남의 일쯤으로 여기는 모든 '진보적인 남성'들께도 함께 드린다. 이번 민주노총 사건은 저 사건 같은 수많은 사건들이 쌓이고 쌓인 결과이지, 기존의 사건들과 무관하게 갑자기 돌출된 사건이 아니다. 말 쉽게 하지 말라! 이 또한 민주노총 조합원 자격으로 드리는 말이다.)

 

**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한 사족. 이 글은 나 스스로의 반성도 포함하는 것이다. 이 일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반성이다.

2009/02/12 10:58 2009/02/12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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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의 문제점

< 88만원 세대 >라는 책의 '세대론'이 요즘 극우신문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걱정하는 소리들이 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원래 저 세대론은 우익들에게 이용당하게 되어 있었다.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공동 저자 가운데 한명이 어떤 사람의 낚시질에 걸려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진짜 이유는 또 다른 공동 저자의 말 속에 담겨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공히 세대론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계급문제를 전면에 내세울 경우 책이 얼마나 팔리지 않을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 결과 떠올린 방책이 불안정노동의 전면화라는 다분히 계급적인 문제에 세대론의 '당의(糖衣)'를 입힌다는 것이었다.

출처: 88세대론 <조선> 독우물에 빠지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계'(내 표현으로 하자면 '문제')를 알면서도, 책을 팔기 위해 세대론이라는 '설탕물'을 듬뿍 뿌렸다는 이야기다.

 

책이 많이 팔리고 많은 사람이 읽도록 노력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지 탓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목적이 좋더라도 해서는 안되는 짓도 있다. '설탕물'을 뿌리는 것이다. 설탕을 많이 넣으면 먹는 사람의 이가 썩는다. 게다가 먹는 사람이 단물만 빼먹고 내버릴 위험이 아주 크다. (“이 책을 가장 열심히 읽는 20대”라는 “이른바 명문대생” 대부분이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제 밥그릇만 챙긴 386 때문에 '잘난 내'가 이 고생을 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책을 덮지 않았을까?)

저 글을 읽으면서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글귀가 있다. 리오 후버만의 글이다.

 

우리의 프로그램을 약간 완화하고 약간은 수용하고 약간은 타협하면, 우리가 다시 힘을 얻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도 이제 중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파멸의 길이다. 우리의 말에 세상이 귀기울이게 되더라도 우리의 주장이 왜곡되거나 귀기울일 가치가 없게 변질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우리가 무엇을 지지하는지 정직하고 분명하게 말하자. 우리의 사회주의적 신념을 선언하고 가르치자. 어디에서든지.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든지, 소수의 사람 앞에서든지. 우리의 운동 규모가 적다고 걱정하지 말고, 운동의 질을 더 생각하자. 연구하자. 열심히 노력하자. 사회주의의 복음을 널리 전하는 투쟁을 벌이자. 황금의 지배를 추구하는 세력을 이해할 자질을, 그리고 또 황금률을 위해 투쟁하는 이들을 이해할 자질을, 젊은 세대가 갖출 수 있도록...

 

이것이 바로 우리의 책임이다. 모호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일부를 잘라내 버리지도 않고, 겁을 내 피하지도 않으면서, 우리가 본 데로 이야기할 때 이 일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실을, 전체 진실을 이야기하자.

(이 글귀에 대해서는 내가 썼던 이 글을 참고)

 

(2009년 2월3일 추가) 88만원 세대론의 파산선언!이라는 글을 보면, “계급적인 문제에 세대론의 '당의(糖衣)'를” 입혔다는 공동저자의 말은 거짓말일 뿐이다! 후버만의 글을 권할 가치도 없는 셈이다.

 

그야말로 이제 “끝”... 더 논할 가치도 없다. 그래서 댓글이나 트랙백도 닫는다.

2009/01/30 16:25 2009/01/30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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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워하는 이들에게 드리는 새해 인사

지금 이 땅의 사람들이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 경제 위기가 깊어지면서 내년엔 삶이 또 얼마나 힘들어질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벌써부터 곳곳에서 목숨을 끊는 사람들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이 고통을 어떻게 끝낼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많은 사람은 대통령 하나 잘못 뽑아서 이 꼴이 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절반의 진실이다. 그동안 쌓아온 형식적 민주주의마저 크게 후퇴하고 있고 무능한 정부 탓에 위기가 더 커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근본적인 위기는 이 나라가 총체적으로 부실하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온 땅이 빚으로 지은 모래성이다. 눈을 들어, 우뚝 솟은 고층 아파트들을 바라보자. 한 때는 '상류층의 상징', '중산층의 희망'이었던 아파트들이 이제 모두의 발목을 잡는 덫이 되고 말았다. 아무도 사줄 사람이 없는 이 시멘트 덩어리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빚을 쏟아부었던가? 할 수 있는 건, 재깍재깍 소리를 내는 시한폭탄이 터지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뿐이다. 폭탄이 터지는 최악은 피할지라도 우리네 삶이 더 힘들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민주주의 측면에서도 이 나라는 총체적으로 부실하다. 지난 여름 대규모 촛불집회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아직 살아있다는 희망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이후 상황은 이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상황이 조금 바뀌면서, 폭주하는 정권을 그저 바라보는 처지로 몰렸다. 무기력한 야당, 전략없는 대중운동 탓으로 돌릴 일이 아니다.

 

지난 정권에서도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말뿐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거리고 나서고 심지어 분신까지 했어도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이 강행됐다. 농민들이 두들겨맞아 죽어도, 대통령이라는 자가 진심어린 사과 한번 한 적 없다. 또 비정규직 확산을 재촉할 법률이 힘으로 관철됐다. 이 모두를 정당화하는 데는 말 한마디면 족했다. “국가 경제를 위해서!!!” 경제를 위해서 농민의 희생은 어쩔 수 없었고, 경제를 위해서 자유무역협정은 피할 수 없었으며, 경제를 책임지는 기업들의 부담을 덜어주려면 비정규직들이 희생해야 했다. 또 중소기업들을 살리려고 이주 노동자들의 권리는 뒷전으로 밀렸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암묵적으로 동조했다. 그렇게 '경제' 앞에 '민주주의'는 무기력했다. 힘없고 가난한 이들도 당당한 주권자임을 인정하고 그들의 권리를 먼저 보장하는 민주주의는 ‘돈이 안되는’ 장식품일 뿐이었다.

 

안타깝지만 이제 고통을 피할 길은 없다. 이제 남은 것은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민주주의 대신 선택한 '경제성장'이 결국 남긴 건 빚더미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더 잘 먹고 싶다는 욕망은 유해 물질 쓰레기로 채워질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더 잘 입고 더 잘 놀고 싶다는 욕망은 소비를 부추기는 기업들의 노리개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는 우리를 현혹하는 '욕망이라는 거짓 형상'을 떨쳐내고 '진짜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그 현실이 '시궁창'이고 고통스럽고 폭력적일지라도, 아니 사람마저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현실은 원래 그렇게 고통스럽고 폭력적이며 비참하기에, 그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어느 문닫은 상점/ 길게 늘어진 카페트/ 갑자기 내게 말을 거네/ 난 중동의 소녀/ 방안에 갇힌 14살/ 하루 1달러를 버네

난 푸른 빛 커피/ 향을 자세히 맡으니/ 익숙한 땀, 흙의 냄새/ 난 아프리카의 신/열매의 주인/ 땅의 주인

문득 어제 산 외투/ 내 가슴팍에 기대 눈물 흘리며 하소연하네/ 내 말 좀 들어달라고/ 난 사람이었네/ 공장 속에서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만/ 난 사람이었네/ 어느 날 문득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만/ 난 사람이었네

 

이렇게 노래하는 어느 가수의 놀라운 깨달음을, 괴로움에 신음하는 이들에게 새해 선물로 드린다.

2008/12/29 18:36 2008/12/29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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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