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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동안 드나들 곳

내가 앞으로 일년동안 수없이 지나다니게 될 곳.

 

 

머리 속에 그리던 영국의 모습과는 달리, 서울의 초가을처럼 밝고 맑습니다. 황급히 오느라 인사도 못드린 분들께 영국 리즈시에서 인사를 대신합니다.

2007/09/07 06:56 2007/09/07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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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사장님 대선 주자

문국현 사장이 출마했다. 이른바 범여권이 또 한바탕 출렁일 모양이다. 문 사장은 범여권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지만, 범여권 여느 후보의 출마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일반 대중이 반색하는 낌새가 느껴진다.

 

심상정씨가 쓴 글의 첫머리다. 그의 말대로 일부이지만 대중이 반색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벌써 공개 지지선언까지 했다. 왜 반색을 할까?

 

그들이 원하는 건, “인간 대접을 하는 훌륭한 사장님”인가? 아니면 사장님에 맞설 사장님인가? 또 한번의 '역전 드라마'를 꿈꾸는 건 탓할 일이 아니나, 인터넷을 통해 나타나는 흐름이 왠지 모르게 심난하고 불길하다.

2007/08/29 15:13 2007/08/29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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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를 둘러싼, 지식인과 민중의 대립?

좌파 또는 급진주의자라고 하면, 현존 질서의 지배계급에 대해 반감을 갖기 마련이다. 현실 세계는 뭔가 잘못 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책임은 지배계급에게 있다. 그리고 노동계급( 또는 민중 또는 대중)은 지배계급 때문에 고통받는다고 본다.

 

물론 이것은 이 세계의 진실이다.

 

그래서 대립 구도가 나오게 된다. 지배계급 곧 자본가와 그들에게 기생하는 '유기적 지식인' 대 노동자, 민중, 대중의 대립 구도가 그것이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본가와 지식인은 악, 노동자와 민중은 선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이런 선, 악 이분법은 사실 어떤 좌파도 자유롭지 못한 설정이다.

 

그런데 이게 문제를 발생시키기 시작한다. 파시즘, 전체주의, 애국주의, 국수주의 따위가 등장하면 특히 그렇다. 선하다고 상정한 민중이 파시즘, 전체주의, 애국주의, 국수주의를 움직이는 실제 동력으로 작동하는 걸 설명하기 곤란해진다. 가장 흔한 해법은 '선한' 민중이 '선전선동'과 '강압'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동원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법은 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 약점을 가장 잘 간파한 것이 이른바 '우리안의 파시즘론' 따위인데, 이 파시즘론은 더 근거가 허약해서 한동안 유행하다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는 '극우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민중을 악으로 몰아가니 극우세력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그렇다고 끝이 아니다.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때의 열광, 2007년 '이무기 나오는 영상'에 대한 열광 따위의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된다. 이 문제는 또 어떻게 풀 것인가? 명백하게 어디에도 강압이 없었다. '선한' 민중이 자발적으로 나섰다. '선전선동'도 내세우기 곤란하다. '이무기'의 경우 '선전선동'은 거의 없었고, 월드컵 축구는 모든 언론이 총 궐기하다시피 했지만 이 정도의 선전선동에 몇백만명이 거리로 나섰다고 말하는 건 '선한 민중 또는 대중'에 대한 모독이 되고 만다.

 

그러다보니 문제가 복잡해지고 급기야 맥락을 잃기도 한다. '예술은 취향'이라거나, '제 취향을 경멸하는 재수 없는 인간들에 대한 반발'이라는 말 따위가 그 징후다.

 

민중은 과연 선한가? 서구 사상사에서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한 첫번째 인물이 프랑스의 루소다. 그리고 그 이후 좌파는 거의 대부분 '루소의 후예'다. 이 '루소의 후예'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마르크스의 후예'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그들은 마르크스의 후예가 아니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는 역사이고, 루소에게 그것은 악이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은 선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비참해서 '폐기'되어야 할 계급이라고 주장한다. 루소처럼 선하지만 억압받고 있기에 해방된 뒤 영원히 보존할 집단으로 보지 않는다. '제 자신을 폐기함으로써 세상을 해방시켜야 할 운명'이 노동계급(민중)의 운명이다. 선, 악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후예라면, '이무기에 열광하는' 민중을 옹호하거나 정당화할 방법을 찾을 게 아니다. 필요한 것은 분석이다. '강압'도 '선전선동'도 아니라면, 자본주의의 무엇이 민중(대중)들로 하여금 이무기에 열광하게 만드는가?

 

글 쓴 뒤에 덧붙임: 물론 분석만 해선 안된다. 필요한 것은 연대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후예'가 연대하는 태도는 시몬 베유(베이유)가 보여준다. 베유는 “노동 계급과의 완벽한 연대가 노예상태와 누추함을 전제하고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고 믿었다.

 

마르크스와 루소의 대립을 전면적으로 제기한 대표적인 인물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쓴 에머슨 파머(E. P) 톰슨을 공격한 페리 앤더슨이었다. 그리고 최근 헝가리 학자 G. M. 터마시(Tamás)가 거의 잊혀졌던 이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소셜리스트 레지스터>> 2006년판에 실린 그의 글 '계급에 얽힌 진실을 말하기'(Telling the truth about class)를 보라. (수정: 애초에 “2-3개월쯤 기다리면 한글로 읽을 수 있게 될 것 같다”고 했으나 1년이 훨씬 지나도록 한글로 나오지 않고 있다. 2008년 하반기에는 정말로 한글로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글의 번역본은 <<진실 말하기>>(갈무리, 2008)에 실려 있다.)

2007/08/27 16:34 2007/08/27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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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