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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더 이상 행복을 유보하지 말자!

너무나 익숙한 것과의 결별
- 일중독의 굴레에서 벗어나 건강하고 행복한 삶으로

 


우리의 일상

영국 작가 앤서니 브라운Anthony Browne의 동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린 딸 한나와 함께 사는 아빠는 무척 바쁜 직장인이다. 아빠와 함께 동물원에 놀러가 고릴라를 실컷 보고 싶은 한나가 아빠에게 조른다.
“아빠, 동물원에 가고 싶어.”
“응, 동물원? 아빠 지금 바쁜데? 내일 얘기하자.”
다음날 아침, 한나가 일어나니 아빠는 이미 출근하고 없었다.
아빠가 퇴근한 저녁, 아빠에게 말을 걸려고 하니 아빠는 집에서도 계속 일만 했다.
그 다음날에도 아빠는 정신없이 바빴다.
“아빠…, 동물원….”
“지금은 안 돼. 하지만 이번 주말은 어때?”
한나는 주말만 기다렸다. 드디어 주말이 왔으나 아빠는 너무 지쳐서 푹 쉬고 싶었다.
한나는 또다시 우울한 주말을 보내야만 했다. (…)



바로 우리의 일상을 상징적으로 꼬집는 에피소드가 아닌가?

 

초등학생부터 중고등은 물론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입시와 취업의 압박에 억눌린 우리 아이들, 또 고용 불안과 노동 강도 등 이중고를 겪는 어른들을 동시에 생각하면 현실은 더욱 열악하다. 심지어 서로 얼굴도 못 보고 사는 날들이 얼마나 많은가? 간혹 얼굴을 보더라도 차분히 앉아 서로 진정어린 삶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

자동차가 초고속으로 발달하고 컴퓨터와 인터넷이 엄청난 속도로 일을 처리해주고 온갖 편리한 가전제품들이 살림살이를 도와주는데도 왜 우리는 아이들과 알콩달콩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없을까? 왜 우리는 바로 지금 행복하게 살지 못하고 날마다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유보하는 것일까? 우리의 행복은 과연 언제까지 ‘집행 유예’되어야 하는가?


‘열심히 살자’라는 말의 공허함

 

2006년 12월에 별세하신, ‘ET 할아버지’이자 두밀리 자연학교 교장이던 채규철 선생님이 평소에 강조하던 말씀 중에, 삶에 있어 누구에게나 공평한 점이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는다”는 사실과 “하루는 누구에게나 24시간”이라는 말씀이 기억난다. 너무나 평범한 이 사실들에 대해 우리는 어느새 무감각하게 반응하며 살아간다.

 

아침만 되면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학교나 학원, 직장과 일터로 바삐 달려 나간다. 그런데 다람쥐 쳇바퀴 돌듯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가는 우리의 삶을 조금 차분히 들여다보면 뭔가 빠져 있는 느낌이 든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열심히 살자”라는 말을 잘 주고받는다. 참 좋은 말이긴 하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또 ‘어떤 일을’ 열심히 할 것인가? 이런 내용에 관한 토론을 생략한 채 그저 열심히 살기만 하면 행복해진단 말인가? 잘못하면 모든 것이 말짱 도루묵이 된다. 예컨대, 사람들은 가능하면 하루 24시간을 보다 많은 일 처리나 성과 쌓기로 채우면 매우 뿌듯해 한다. 또 사람들은 어차피 한 번 살다 가는 인생을 가능한 한 오래 살기 위해 몸에 좋다는 것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찾아 먹으려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삶의 태도들은 앞의 채규철 선생님이 말씀하신 참뜻과는 거리가 멀다고 본다.

 

그 참뜻은,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기에 후회 없이 ‘잘 죽으려면’ 살아 있는 동안 가치 있고 보람찬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또 하루 24시간도 늘 같은 모습으로 다가오는 듯하지만 그것을 ‘얼마나 많이 이루느냐’가 아니라 ‘어떤 과정으로 살아나가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리라.

앤서니 브라운의 ‘한나와 고릴라’ 이야기는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던진다. 그것은 바로, 오늘 행복을 오늘 찾으며 사는 것.

 

달리 말해, 하루하루를 바삐 사는 우리 모두는 막연하게나마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가는 행복해지겠지”라는 가정을 깔고 하루 24시간 채우기에 급급해하며 정신없이 살아간다. 도대체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향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 그러나 학교든 직장이든 우리에게 말없이 강요한다. “내일 행복해지려면 오늘 고생을 달갑게 받아들여라.”
결국, 오늘 행복을 내일로 유보하라는 것. … 늘 이런 식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논리가 온 사회에서 체계적으로 재생산되었다. 1960년대엔 “대망의 70년대를 바라보며 열심히 일하라”고 했고, 1970년대가 되니 “대망의 80년대를 바라보며 성실히 일하라”고 했으며, 1980년대가 되니 “대망의 90년대를 바라보며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했다. 그러다가 1997년엔 나라가 온통 ‘대 망’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또 매어 이제 대망의 21세기, 2000년대가 되었다. 이제 구호가 약간 바뀐다. 그것은 “일인당 국민소득 2만불 시대, 또 3만불 시대, 4만불 시대를 바라보며 갈수록 허리띠를 더 졸라매자”는 식이다. 이런 구호 속에선 늘 오늘은 없고 미래만 있다. 환상적인 미래를 그리며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일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끊임없는 행복의 유보 …, 이것이 문제다.

 

환상적인 미래를 그리며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일하라고 할 때, 과연 그 환상적인 미래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더 높은 소득을 올려 더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는 삶, 이른바 ‘부자 되기’로 요약된다.

 

내 경험 한 가지를 보자. 세상에서 가장 잘 산다는 미국의 중산층 가정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첫 번째 가정의 주인들은 돈을 많이 벌어 풍족하게 산다. 대단히 멋지게 꾸며 놓은 그 집에는 방방이 고급 가구와 멋진 설비가 있고 정원도 멋지다. 심지어는 부엌조차 고급 목재에다 멋진 오븐, 냉장고, 세탁기, 요리기계, 식기세척기 등이 완벽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 완벽한 부엌은 손님이 오면 자랑하려고 갖춰 놓은 전시용일 뿐, 막상 밥은 집에서 잘 해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개는 패스트푸드 점 같은 데 가서 한 끼 때우는 식으로 처리하고 만다. 반면에 두 번째 가정은 그보다 훨씬 소박하게 살지만 사람들이 오면 반갑게 맞이하고 정성껏 차린 밥상에서 오순도순 온갖 얘기꽃을 피우며 살아가는 가정이었다. 비록 가구나 설비 같은 것이 소박하더라도 그 안에서 사람 사는 냄새가 풀풀 나는 가정, 이런 가정과 사회가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 아닌가?

 

만일 우리가 첫 번째 가정과 같은 완벽한 외형을 갖춘 집을 꾸미기 위해, 그런 식으로 소유하고 소비하기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일한다면 그 인생은 결국 한 토막의 공허한 연극이 되지 않을까? 만일 두 번째 가정처럼 소박하더라도 사람 사는 냄새를 풍기며 산다면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가정을 넘어 각종 조직이나 사회 전체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범생이 콤플렉스’를 벗어나 ‘반쪽의 범생이와 반쪽의 문제아’!

 

이 책에서 말하는 ‘일중독’이란 우리 삶의 내면이 공허할 때 그 허기를 일(성과)로 채우려는 질병의 일종이다. 마침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가 일을 해서 성과를 내면 칭찬도 하고 상도 준다. 그래서 사회가 이미 일중독을 잘 키울 수 있는 토양이다. 그런 토양 위에서도 일중독에 잘 빠지는 사람과 빠지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어릴 적부터 일종의 ‘범생이’로 크는 사람들이 일중독에 더 빠지기 쉽다. 반면에 이른바 ‘문제아’들은 어른들이 설정한 테두리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성향이 강하기에 일중독에 잘 걸려들지 않는다. 물론 범생이가 가진 성실성의 일부와 문제아가 가진 저항성의 일부를 고루 갖춘, ‘반쪽의 범생이와 반쪽의 문제아’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일 터이지만….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는 일(성과)을 통해 생계도 해결하고 때로는 승진(권력)도 하며 나아가 사회 통합도 이루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유치원, 학교, 직장, 언론, 종교 등 온갖 사회 제도를 통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주입한다. 그러다보니 자본주의 사회와 ‘문제아’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문제아’들은 ‘날라리’로 낙인찍히고 벌칙이나 규율을 통해 체로 걸러진다. 정 안 되면 감옥까지 가야 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노동자가 된 뒤에 ‘범생이’처럼 일하지 않고 허구한 날 개기며 파업도 불사하고 ‘인간다운 삶’을 외치면 역시 ‘노동자 문제아’ 취급을 받는다. 공권력이 개입하고 심하면 옥살이까지 한다. 요컨대 범생이에겐 빵과 평화를, 문제아에겐 해고와 철창이다.

 

이런 대조적 이미지가 반복 주입되면 사람들은 경향적으로 문제아를 기피하고 범생이를 동경한다. 자신이 어중간한 문제아일지라도 마치 자신이 범생이인 것처럼 범생이의 기준을 들이대며 더 심한 문제아를 욕한다. “생산성이나 경쟁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이렇게 ‘범생이 콤플렉스’가 온 사회로 확산된다.

그런 일이 수 년, 수십 년 반복되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중독에 익숙하게 되고 일중독에 빠질 때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는 일중독자로 ‘만들어진다’. 일종의 ‘사회적 DNA’가 바뀌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일이 흥분제로 작용하고, 어떤 이에게는 일이 진정제로 작용한다. 또 어떤 이에게는 일이 위장제나 망각제로 기능한다. 모두에게 공통적인 점은, 일중독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의 안팎에서 벌어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잘못된 여행의 종착지는 불행히도 죽음이다.

 

우리의 ‘집단 불감증’을 고발한다!

 

최근의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직장인들 절반 이상이 일중독에 빠져 있다고 한다. 몸과 정신이 서서히 썩어가는데도 일의 굴레에 매인 이웃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매일 과로사 사망자가 몇 명씩 나오고 매 시간 산재 사고가 10건 이상씩 발생하는데도, “별 이상 없다”거나 “경제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자”며 무감각하게 일에 매몰된 ‘집단 불감증’이 우리 사회에 심각하다. 개인과 가정은 물론 조직과 사회 차원에서의 불감증, 바로 이것을 학문적으로 고발하고자 이 책을 내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기존의 전통적인 근면성실을 강조하는 책이나 풍토는 물론이고, 최근에 정말 새로운 듯 성공비결을 조언하는 책이나 풍토들은 모두 직간접으로 일중독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어떤 책들은 주변의 익숙한 것들과 과감히 결별하고 변화와 혁신을 강조하지만 그 역시 일중독과 결별하기를 강조하지는 않는다.

 

일중독을 벗어나려면 일중독을 솔직히 ‘인정’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오기가 나서 “나는 일중독이 되어도 좋다”는 적극적 긍정론을 펴거나 조심스럽게 “나에게 일중독은 없다”는 소극적 부정론을 펴는 것은 어떤 표현과 논리를 갖다 들이대더라도 모두 일중독을 조장하는 데 일조하고 말 것이다. ‘진실한 인정’이 전제되어야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일중독에 대한 치유가 비로소 가능하다.

 

개인적으로는 삶과 일, 일상과 직장 사이의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회적으로는 과감한 노동시간 단축과 더불어 삶의 질 차원에서 노동내용 혁신이 필요하다. 결국 일중독을 벗어나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참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구조를 구축하자는 것이 이 책의 근본 목적이다.

 

이 책은 모두 8장으로 구성되었고 3가지 부록이 있다. 1장은 일중독의 개념과 종류, 2장은 일중독에 관한 여러 접근 방식들, 3장은 일중독의 역사적 뿌리, 4장은 일중독의 사회적 토양을 살핀다. 5장은 일중독의 현실 - 개인적, 조직적, 사회적 차원의 실제 사례와 악영향을 예시하며, 6장은 일에 대한 태도와 관련, 필자가 직접 수행한 4개국 비교 연구 결과를 제시한다. 7장은 일중독을 벗어나기 위한 개인적, 조직적, 사회적 차원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8장은 일중독으로부터의 해방가능성을 조심스레 이야기한다. 부록의 1장은 폴 라파르그가 120여 년 전에 쓴《여유로울 권리》(The Right To Be Lazy)를 한글로 옮긴 것이다. 2장은 익명의 일중독자 모임Workaholics Anonymous에서 제시한 일중독의 특성과 해결책, 3장은 직무 스트레스와 일중독의 진단을 위한 설문지로 구성되었다.

 

이 책의 기본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내용을 형성하는 데 있어 독일 브레멘대학교의 은사이신 홀거 하이데Holger Heide 교수께 이론적으로 힘입은 바 크다. 하이데 교수님은 이미 발간된 국내외 저서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저자와 친밀한 학술적 교류 속에서 일중독 연구를 보다 심층적으로 하도록 자극하고 격려했다. 한편, 본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는 2006년 고려대학교 특별연구비 지원이 재정적 뒷받침이 되었다. 이 자리를 빌어 깊이 감사드린다.

 

이 책이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에는 척박한 한국의 문화적 풍토에서 고집스레 진보적 사회과학서를 출판하고자 애쓰는 메이데이 출판사의 박성인 대표와 김영선 편집장의 노고가 특히 컸다. 출판사 관계자들께 거듭 감사드린다.

 

끝으로, 이 책이, 일중독이라는 사회적 질병에 걸린 줄도 모르고 그저 앞만 보며 살아가는 모든 직장인들에게, 그리고 미래의 예비 직장인들에게, 일중독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작은 촛불이 되길 소망한다.

오늘도 내일도 스스로 물어 보자.

 

“과연 내가 지금 하는 일은, 행복한 삶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2007년 1월 6일

 

폭설이 내렸다 햇살이 비쳤다 하던 날
고려대학교 서창캠퍼스 뒤 서당골에서

 

지은이 강수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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