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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칼럼] 진보정당이 가야 할 길 ‘학벌 타파

박노자칼럼] 진보정당이 가야 할 길 ‘학벌 타파’
박노자칼럼
 
 
한겨레  
 
 
»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노무현 정권의 실책으로 한국의 중도 우파는 정치적 불구자가 되고 말았다. 이는 다음 대선, 총선에서 극우 정당의 주된 경쟁자가 노동자·농민의 좌파 정당이 될 것을 의미한다. 금년과 내년에 계급적 진보 정당이 좋은 성적을 올릴 경우, 정계는 드디어 총자본을 대표하는 거대 부르주아 정당과 총노동을 대표하는 진보 정당의 양자 대립 구도로 재편돼 언젠가 가까운 미래에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진보의 승리가 현실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 진보의 실패는 한국 정치의 장기적 보수화를 의미할 것이다. 진보의 성패는 노동자·농민·서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장기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정책 대안의 유무에 달려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한국 사회의 특성상 학벌의 문제야말로 핵심적 정책 문제로 떠오를 수밖에 없으며, 진보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부터 자세히 잘 준비해야 한다. 대학 간의 단극적인 서열화인 ‘학벌’은 계급적 신분 재생산의 중심적 장치이며, 중·고등학교 교육까지 황폐화시켜 학생들을 ‘공부 기계’로 만드는 교육 파탄의 원흉이다. 최근 나온 한 조사 결과를 보면 고교생의 약 28%가 성적·수능에 대한 부담감으로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하는데, 경쟁적 수능시험으로 이어지는 학벌의 위계서열이란 말 그대로 ‘살인적’ 제도다. 진보 정당이 집권할 경우, 5년 동안 학벌을 철폐할 수 있는 묘책은 무엇일까?

이미 잘 알려진 서울대 학부 폐지안, 국립대학 통합 운영 방안의 시행은 가장 급할 것이다. 그런데 서울대 출신들이 3급 이상 공무원의 약 30%, 교육부 같은 일부 핵심 부처 고위급 인사의 85% 정도를 점유하는 ‘서울대 공화국’에서는 아무리 서울대 학부를 폐지한다 해도 그 학벌의 영향력이 당장 사라질 수는 없다. 그렇기에 동시에 서울대 학생 선발 방식을 약자 위주로 바꾸고 여러 계급 출신이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전국 고3 졸업자 가운데 서울이 약 23%를 차지하는데도 서울대 진학생 중에서는 서울 출신이 45% 이상 점유하고, 전국 남성 경제활동인구 중에서는 생산직 노동자가 거의 40%를 차지하는데도 서울대 입학생 중에서 생산직의 자녀가 10%도 안 되는 오늘의 현실은 ‘지방’과 ‘노동’에 대한 태심한 차별을 의미한다. 이 차별을 극복하려면, 현존하는 지역균형선발제의 대폭적 강화에다 농민·영세민·저소득자 등 취약 계층 출신에게 가산점을 부여하는 고강도의 계급적 역차별 정책 말고는 없을 듯하다. 마찬가지로 수도권의 주요 ‘명문’ 사립대학의 입학제도에도 이와 같은 계급적 약자 우대 정책을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역차별 정책의 범위를, 입학제도로만 좁힐 필요가 없다. 지방대학 출신 10명 중 7명이 구직 때 차별을 느끼고, 지방대 출신의 평균 임금이 수도권 대학의 졸업생에 견주어 약 10% 더 낮은 오늘날에는 공무원 시험이나 기업 공채 때 신청서에서 학력란을 단순히 지우는 것보다는 지방대 출신을 우대하는 할당제를 설정하여 여태까지의 차별에 보상을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이런 적극적인 약자 우대 정책이 아니면, 일제 강점기부터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학벌 제도를 과연 타파할 수 있겠는가?

학벌주의를 청산하지 않으면 이 나라는 수능 수험생들의 ‘공부 지옥’으로, ‘비명문대’ 출신들의 ‘차별 지옥’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학벌 폐지야말로 진보 정당이 총력을 기울여야 할 핵심 의제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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