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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여적-공단의 퇴출 (7/10 칼럼)

[여적]공단의 퇴출
입력: 2007년 07월 10일 18:19:49
 
“꿈으로 가득찬 설레이는 이 가슴에/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사랑을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지우개로 지우면 되니까”(노래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가수 전영록이 지울 수 있는 사랑을 열창한 것이 1983년이었다. 광주항쟁의 상처가 덧났고, 최루탄이 대학을 덮을 때였다. 석유파동 이후 세계경제 침체로 경제는 위기에 빠졌고, 오빠와 동생 학비 뒷바라지를 위해 벌집에서 쪽잠을 청하던 구로공단 여공들은 더 일하고 덜 받던 시기였다. 내일을 위해 어제는 지우고 오늘은 연필로 쓰자는 이 노래는 차라리 역설이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 기억이 남아있는 이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아, 마음이 급해요. 나 김수진은 당신 최철수만을 사랑합니다. 이것만은 잊고 싶지 않은데. 잊으면 안 되는데…기억이 또 사라질까봐 두려워요”(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치매에 걸린 수진은 철수에게 죽음보다 더한 망각의 아픔을, 그나마 지워질까봐 이렇게 편지로 남긴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광고 카피에 고개를 끄떡이던 젊은이들조차 ‘지우개’를 내려놓고 눈물을 훔쳐야 했다.

“현재 디지털 기업 7000여곳이 입주해 옛 공단의 이미지는 찾아 볼 수 없다. 공단로(路)의 개명이 확정돼 ‘쪽방’ 등 공단의 잔재를 완전히 털어낼 수 있게 됐다”(구로구청장). 1967년 공업단지 1호로 문을 연 구로공단(九老工團·현 구로디지털단지)의 마지막 흔적인 ‘공단로’마저 지우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공업단지나 디지털단지나 뭐가 다른지 알 수 없지만, 공단의 이미지는 지워야 할 ‘잔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간의 눈물과 땀도 추억조차 하지말라며 지우개를 들이대고 있다. 결코 연필로 쓰여진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에 대해 22년 만에 백서를 펴낸 유경순씨는 “지금의 노동계 현실은 80년대보다 더 나빠졌다”고 평가했다. 당시 파업에 참가했다는 한 블로거는 “22년전엔 백서를 쓰지 못했지만, 지금은 운동사를 쓰지 못하는 상황은 아닐는지…돌아볼 일이다”고 했다. 공단의 퇴출은 노동의 문제만이 아니다. 망각을 강권하는 우리 사회의 부박함과 기억 결핍증을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제는 연필로 쓰고, 오늘은 지우는 ‘지우개 정치’가 추억과 성찰의 사회적 곳간을 헐어버리고 있다.

〈유병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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