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한겨레 2013.6.22) "진보운동과 성평등, 함께 갈 수 있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한겨레 2013.6.22)

 

"진보운동과 성평등, 함께 갈 수 있을까?"

 

 

[하늘을 덮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진실]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 지음
메이데이, 2013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이 질문(389쪽)을 질문한다. “왜 함께 가야 하나요?”, “함께 어디를…?”, “역사상 함께였던 사례가 있나요?”

 

‘우리’는 성폭력을 모른다. 딸이 일곱살이었을 때, 당시 내가 일하던 여성단체의 지침대로 성폭력 예방 교육을 했다. “싫어요, 내 몸에 손대지 마세요! 이렇게 네 의사를 분명히 밝혀야 해”. 옆에서 듣고 있던 엄마가 “애를 죽일 작정이냐”며 반박했다. “지금 네 엄마(나) 말대로 하면, 절대 안 돼. 가만히 있어라. 아저씨 얼굴 보지 말고. 소리 지르면 그 아저씨가 너를 죽일 수도 있어. 목숨이 중요하지 그까짓 게(성폭력) 뭐이 대수냐” 엄마는 지혜로웠다. 많은 여성들이 이런 ‘자세’로 일상을 산다.

 

이 책은 권김현영의 표현대로 백서가 아니라 보라색 책, 자서(紫書)다(16쪽). 긴 부제, ‘잊고 싶은,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 1639일 생존과 지지의 기록’. 이 책은 성폭력 사건을 통해 드러난 통합진보당, 민주노총, 전교조 소속 일부 간부들(이 글에서 ‘진보 진영’은 이들을 가리킴)의 손바닥으로도 하늘을 덮을 수 있는 약자에 대한 권력, 관료주의, 무능과 무식에 대한 보고에 멈추지 않는다. 한국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정밀 진단서이다. 청소년에게 가장 권하고 싶다. 나는 이 책이 진보 진영의 성폭력과 은폐, 이에 대한 투쟁의 기록으로만 읽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1960년대 미국 시민운동에서도 좌파 남성이 동료 여성을 구타, 강간하는 사례는 비일비재했다. 작가 안드레아 드워킨은 그 모든 경험을 작품으로 남겼다. 1979년 하이디 하트먼은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주의의 불행한 결혼”이라는 유명한 논문을 발표한다. 결혼 비유가 불편하지만, 결론은 ‘이혼’에 가깝고 이 글과는 거리가 있지만 <불가능한 결혼>이라는 책도 있다.

 

나는 진보 진영을 옹호한다. 기존 진보의 범위를 폐기하면 된다. 애국, 민주화, 일신영달, 성폭력, 종파주의… 뭐든 좋다. 각자 자기 욕망에 충실하면 되지, 진보의 의미를 독점해서 ‘과도한’ 비판을 자초할 필요가 있을까?

 

진보와 성평등은 지향하는 바와 인식 기반이 다른 별개의 정치학이다. 이 사실을 상호 인정해야 한다. 연대나 협상은 가능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남녀 모두 “진보는 전체운동, 여성운동은 부분운동”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보 세력에게 성평등 의식을 당연시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역설적으로 그런 기대는 성별 제도에 대한 안일한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진보 진영은 여성의 참여를 통해 외연을 넓히고 싶지만 자체 무능 때문에 실패한다. 여성을 동원하려면 평등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인간적 존중이 전략적으로라도 필요한데, 그들의 정세는 언제나 “급박, 엄중”해서 그럴 겨를이 없다. ‘불행한 결혼’, ‘불가능한 결혼’은 이러한 현실을 상기시킨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진보 개념은 근대화 시각에서 발전주의(progress)를 의미한다. 민주주의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는 적대하거나 논쟁하는 세력이 아니다. 정상적인 국가 건설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갖되 방법이 다를 뿐이다. 공통점은 성차별과 주류 지향이고, 차이는 종북이라는 기이한 용어에서 보듯 제대로 된 국가를 만드는 일에 통일을 포함하는가 여부와 그 방식일 것이다.

 

사건의 가해자는 5년 구형에 3년 실형을 받았다. 진보 진영이 ‘일반 사회’보다 성폭력이 더 빈번한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조직 보호를 내세운 이들의 사후 대응 방식은 유별나다. ‘공작 정치’(social rape)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다. 진짜 피해와 무서움은 이것이다. 남성은 물론 많은 여성 활동가들이 이를 주도, 가담했다. 진보라는 과도한 자의식에 비해, 기본적인 인권 개념은 물론 자신이 남성인지 여성인지조차 인식이 없는 이들의 사회생활의 목적을 묻고 싶다.

 

사족 - 내가 피해 당사자라면, 영화 <황해>에도 인용된 두치펑 감독의 방식대로 할 것 같다. 책 제목이 적절하고 아름답다. 투쟁 과정의 절실함 그대로일 것이다. <하늘을 덮다, …>. 하지만 그들은 덮지 못했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사용자 삽입 이미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