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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9/16
    저작권: 이데올로기 비판(1)
    아, 넷!

저작권: 이데올로기 비판

다섯병님의 [저작권의 역사]에 대한 글에서 읽고 정리해주신 " <저작권의 형성과정에 관한 역사적 고찰>(김정오, 신동룡, 2003)":

그런 논문이 있었네요... (저작권 역사 부분과 관련해서, 영어로 된 책 중에 copyright and copywrong을 보고 싶었는데, 아직 구하지를 못해서... )

정리해주신 거 잘 보았습니다. 제가 "역사적 아이러니"라고 한 부분은 사실 자세히 살피고 정리한 것이 아니라서... 부끄럽습니다... 지적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 정말, 법률(가)나 이론(가)의 문제는 완전 동감...
어떤 관계망을 통해 새로운 접근을 할 것이냐에 대한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저도 창작자-이용자 연합이라든가 이용자연대 혹은 이용자조합 같은 것도 가능하고, 이미 여기저기 있는 사례들을 풍부하게 찾고 싶고 합니다... (혹시 아시는 거?) 김영식님의 글("자본주의를 넘어선 반-저작권 투쟁을 위해서")에서 얼핏 본 street performer protocol(요것은 제가 한 번 기회 만들어 정리해보겠습니다)과 같은...

관련해서 몇 가지 떠오르는:

* Dmytri Kleiner, "Copyfarleft and Copyjustright, Mute magazine - Culture and politics after the net (http://www.metamute.org), 18/07/2007
- 사회주의적 대안을 찾으려고 하는 글
- 크리에이티브라이선스(와 함께 정보공유라이선스)는 '좀 더 공정한 저작권'이라는 한계를 갖고, 카피레프트(반저작권?)는 더 나아가야 한다...

* Yochai Benkler, The Wealth of Networks: How Social Production Transforms Markets and Freedom. Yale University Press, 2006
- 지적재산권의 한계를 이러저러하게 분석/비판하면서, 공유지(commons)에 기반한 또래 생산(peer production)을 현재의 네트워크정보경제의 사회적 생산 양식으로 보고 있는 듯 하고, 그리고 자유에 대한 가능성을...
- 아시겠습니다만, 주류경제학자들도 사실 지적재산권의 독점적 성격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내용(비판을 실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을 보면(이 책에서), 창조와 혁신과 함께 돈벌이에도 꼭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경제학적 분석이나 사례들도 있구요...
- 아닌게 아니라, 문화산업의 거대 독점기업들이 핵심 문제라서 복제기술을 놓고 돈 되는 지점이 다른 산업/사업/기업 간의 충돌도 주목되기도 합니다... 단적인 예로: 미 IT업계 "저작권 보호 남용말라", 2007년 8월 3일, 디지털타임스

* Fair Use Economy Represents One-Sixth of U.S. GDP, Sep 12, 2007, CCIA(Computer and Communications Industry Association)
- 연구 보고서인데, '공정이용산업'이라는 표현을 쓰네요... 요것이 미국 GDP의 1/6을 차지하는, 경제성장의 중요한 영역이라고 하는... 이 역시, 문화산업의 독점 기업들과 충돌하는 정보산업 기업들이 '공정이용'을 볼모로 한 작업이 아닌가 싶은데 - 안 보고 하는 얘기라 짐작입니다만, 공정이용이 갖는 한계 역시 저 첫번째의  '좀 더 공정한 저작권' 수준에 있을 듯 하고, 저 첫번째 글과 두 번째 글(이라기보다 책)이 말하는 대안들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지만... 현재 상황은, 그나마 언급이라도 되어 있는 공정이용조차 파탄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여간, ... 죄다 영어네요... 그러니, 참... 법률가나 이론가의 문제가...
꾸역꾸역 짬으로 내서 봤거나 보고 있는 것들인데, 기회를 만들어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 ...


아! ... 아래의 글과 곧 이어질 두 개의 글은 저 나름대로 문제(들)의 구도를 잡아보고, 어떻게 실천적인 대안 운동을 해나갈까 정리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너무 길어서 탈인데, 그것은 곧 잘 정리를 못하고 있다는 것이겠다는...


조동원, "저작권: 이데올로기 비판", 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저널 [ACT!], 제45호 2007년 9월

2007. 조동원. "정보공유라이선스 2.0 : 허용"(www.freeuse.or.kr)

누구나 ()편집할 수 있고, 재편집된 2차 저작물을 활동의 경제적 뒷바침을 위해서뿐 아니라

돈벌이를 위해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2차 저작물에 원저작물과 동일한 조건의 라이선스를 적용해야 합니다.



이 아래에도 옮겼습니다...



그냥 보기 불편하신 분들 계실 듯 하여, 아래의 내용을 pdf로도 만들었습니다: 내려받기


저작권: 이데올로기 비판

조동원 (jonair@riseup.net | 미디어문화행동)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등장, 그리고 끊임없는 창조와 혁신으로 미디어-문화 산업은 위기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네트워크 된 디지털 미디어 환경의 가장 큰 화두의 하나이자, 자유롭고 평등한 커뮤니케이션을 점차 강력하게 억압하는 힘으로 작용해온 저작권(더 넓게는 지적재산권)의 문제는 그 산업의 위기와 발전을 가르는 결정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또한, 독립영화 제작이나 대안 미디어 활동, 다양한 공동체들의 자유로운 표현과 민주적인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더 이상 지나칠 수 없는 이슈가 되었다. 액트에서는 이 저작권의 문제를 미디어운동의 주요한 투쟁 의제의 하나로 제출하려는 필자의 글을 아래의 순서로 이어 싣고자 한다.


1. 저작권: 이데올로기 비판
2. 저작권: 수많은 대안들
3. 미디어 문화 운동과 저작권 반대&대안 투쟁

 
 

건물에 들어갈 때마다 그 건축가에게 로열티 지불하라고?

지난 2007년 3월에 타결되고 4월말에 공개된 한미FTA 협상 지적재산권 분야를 일컬어 정부는 ‘선진제도의 도입’이라고 포장했지만, 저작권 조항들에서도 미국의 요구 사항을 한국측이 일방적으로 수용한 종속성이 곳곳에 드러났다(오병일, 2007: "한미FTA 협상 저작권 분야, 협상은 없었다!"). 한미FTA 지적재산권 협상의 저작권 타결 내용은 지적재산권 제도의 본질인 권리의 보호와 이용 사이의 균형에 대한 고려는 찾아볼 수 없고 권리만의 강화, 그것도 국제기준(무역에 관한 지적재산권 협정, TRIPs)을 훨씬 상회하는 미국의 핵심 요구 사항을 빠짐없이 모두 수용한 결과에 불과했다.
이 타결 내용의 공개를 통해 처음 알려진, 협정 제18장(지적재산권)의 부속서한(온라인 불법복제 방지)은 저작권 보호를 빌미로 인터넷 사이트를 일거에 폐쇄시킬 수 있는 내용까지 담고 있다. “저작물의 무단 복제, 배포 또는 전송을 허용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가차없이 폐쇄될 수 있는데, 이들 사이트는 저작권 침해를 조장하거나 적극적으로 유도한 사이트가 아니라, 저작권자로부터 허락받지 않은(unauthorized, 무단) 저작물의 복제, 전송이 가능한 인터넷사이트 즉, 모든 포털과 인터넷 사이트가 될 수 있다. 극단적인 통제를 고안해 낸 것이다.
이러다가는 사람들이 어떤 건물을 들어설 때마다 입장료를 통해 그걸 설계한 건축가에게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 지경까지 가지 않을까?("저작권의 종말"[Ernest, 2005: Designer's Notebook: The End Of Copyright]이라는 글을 보면, 저작권 보호 기간의 설정, 그리고 연장의 근본적인 근거가 없다고 하면서, 현재 우리가 건물에 출입할 때 그 건축가에게 로열티를 내지 않는 이유와 같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현재의 저작권 체제 강화의 흐름은 그 반대로 가고 있는 듯하다) 웹사이트의 일시적 저장조차 복제권으로 인정하면서 저작권의 보호를 받도록 한다는 것은, 기실 온라인에서부터 그러한 일들이 현실로 되고 있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다.

저작권: 왜들 난리야?

현재 나라 안팎으로 저작권법을 강화하는 것은 ‘건물에 들어갈 때마다 그 건축가에게 로열티 지불하라’는 식이라고 볼 수 있지만, 법조문들이다 보니까 당장 무엇이 바뀌고 하는 거냐에 대해서는 너무 어렵기만 하다. 저작권의 문제는 우리 사회 전반의 변화와 복잡하게 맞물려 있지만, 우리는 저작권 문제를 관련 법 개정이나 고소고발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를 통해 주로 접해오면서 우리 각자의 삶과 생활의 문제로 인식하지는 못해왔다. 그러나 저작권 ‘사태’는 그보다 훨씬 더 구체적으로 우리 사회의 현실과 변화의 조건들과 맞물려 가고 있다:
저작권은 문화산업, 대중문화 생산과 공유, 표현의 자유, 정보통신기술 환경과 사회변화 등과 긴밀한 연관 속에 있다. 최근 저작권 법 개정이 이루어지고, 자유무역 협정에서도 저작권의 강화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라면, 저작권 논란과 갈등, 이를 둘러싼 헤게모니 투쟁 과정은 저작권을 넘어서는 보다 큰 사회적 연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그 해결책 또한 보다 큰 그림을 그리며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저작권을 둘러싼 다양한 이슈들을 접하면서 드는 다음과 같은 의문들이 그렇다:

저작권? 그 말대로라면 왜 창작한 사람의 권리(author-right)가 아니라, 복제권(copyright)이라고 부를까? 저작권이 부동산과 마찬가지로 매매하거나 상속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빌려줄 수 있는 사적 소유의 문제인가? "불법복제"나 "불법다운로드"는 진정 문화산업을 망하게 하고 있나?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이용자들이 손수 만들어 공유하고 있는 온라인 비디오 콘텐츠(UCC)와 같은 '재창작물’(remix)이 저작권을 침해했다면, 이로 인해 누가 손해를 보고 있나? 돈(저작권료) 은 어떻게 배분되는가? 저작권이 왜 계속 논란인가, 저작권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저작권, 그리고 이를 포함하고 있는 지적재산권에 대한 의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왜 내가 가진 정보를 친한 친구에게 나누어주면 안 되는가? 왜 디지털 도서관의 풍부한 정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가? 왜 인터넷을 통해서 음악을 듣는 것이 제한받아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감시의 위협에 시달려야 하는가? 왜 치료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싼 가격 때문에 치료받지 못하는가? 왜 특정한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제한받아야 하는가? 왜 제3세계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정책을 결정할 수 없는가? 왜 정보를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정보격차는 갈수록 벌어져가는 것일까?"(오병일, 2000: "'지적재산권'의 민중적 재편을 위한 정책 제안" ).
저작권법 조항들 중 수많은 법 개정 과정에서도 결코 바뀌지 않아 왔지만, 다른 조항들이 바뀌고 새로 만들어짐에 따라 그 의미가 죽어가고 있는 제1장(총칙), 제1조(목적)에는, "이 법은 저작자의 권리와 이에 인접하는 권리를 보호하고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도모함으로써 문화의 향상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소위 저작권 산업이라는 것이 등장하여 미국의 경우 지난 해 미국 경제에서 차지한 규모가 8190억 달러에 이른다는 이야기는 무슨 얘기인가? 공공의 권리 보장을 해주는 것이라면서 언제 이렇게 많은 돈을 벌었단 말인가? 도리어 사회문화적 공공성을 희생하면서까지 공공부문을 사유화하여 이윤 창출을 꾀하는 자본-기업들이 이러한 저작권과 지적재산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온갖 국내국제법 개정을 위한 로비를 벌이고, 유명 스타들을 앞세워 각종 이데올로기 선전을 유포하면서, 공권력까지 동원하여 저작물 이용자들에 대한 폭력적 처벌을 감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화적이고 예술적이며 학술적인 저작물 혹은 창작물에 대한 저작권 보호(라기보다는 통제)를 통해, 혹은 이러한 저작권 통제를 야기하는 오늘날의 정보, 지식, 콘텐츠의 생산 및 소통 방식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저작권을 둘러싼 문제들에 대한 대안은 무엇이고, 어떻게 실현해 나갈 수 있는가?

현재 저작권 체제가 강화되는 흐름에서, 법제 강화와 법 적용이 합리적이고 합법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뿌리 깊은 저작권 이데올로기들을 비판하고자 하는 이 글은,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재의 저작권 이슈와 정책 사안들을 구체적인 쟁점으로 들어가 논의하기보다는, 저작권 체제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문제설정을 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파란들은 "현실의 지적재산권 체제를 인정한 상태에서 구체적인 정책을 개편하는 것"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사안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 중심의 생산, 유통, 분배, 소비 시스템에 근거한 지적재산권은 그 본질상 희소하지 않은 정보 생산물을 법적 규제와 통제를 통해 희소성을 가진 경제재로 만들어버리는 것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둘러싼 모순은 지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오병일, 2000: "'지적재산권'의 민중적 재편을 위한 정책 제안" ). "지적재산권에 대한 정의와 그 체제 자체를 문제 삼는 것" 을 포함한 문제설정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저작권 모순과 이데올로기를 통한 해결

저작인접권자에게 전송권을 부여한 지난 2006년 1월 17일 사태 이후, 인터넷에서의 저작권 보호가 법적 처벌의 수위를 높이면서 강화되기 이전까지 아마도 저작권은 전문가들의 특수한 경우에 발생하는 문제로 여겨졌을 뿐 대중의 관심 속에 들어온 적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법 내용도 어렵지만, 무시하고 살아도 크게 문제될 게 없어 알 필요도 없던 것이, 2000년을 전후로 하여 현재와 같은 형세를 향해 급속한 변화들이 생겨났다. 정책과 담당 기구들이 새로 생기거나 비대해지고, 관련법이 개정되거나 새로 생겨나고 무역협정을 통한 국제법의 규제를 받으면서, 이용의 측면은 축소되거나 통제되는 반면 권리의 보호만이 일방적으로 강화되고 있고, 이제 일상의 문화와 커뮤니케이션의 장이 되고 있는 인터넷은 또한 저작권 분쟁의 전쟁터를 방불케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스타 연예인들이 불법복제하지 말라달라는 광고라든가, 어처구니없게도 토마스 에디슨[1]이나 빌 게이츠[2]와 같은 사람이 되자는 공익광고(였나, 그런 스타일의 기업광고였나)가 등장한 점도 흥미롭다. 필자는 이 광고의 등장이 대중을 향한 저작권 이데올로기 형성의 가장 두드러진 사례라고 보고, 중등학교에서의 저작권 관련 교육 과정의 신설 움직임(문화부, 2007: “저심위,청소년 눈높이 맞춘 저작권 교육 프로그램 개발”)은 이러한 이데올로기 생성과 작동을 부추기는 비가시적인 힘의 정도를 가늠케 하는 사례라고 본다.

저작권위원회의 "청소년저작권교실"교재 표지(일부)
 
1. 권위적이고 낭만적인 개인 "저자"?

저작권의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는 바로 저작물의 저작자이자 그 소유자인 저자에 대한 것이다. 창작은 개인의 독창적인 노동의 과정이고, 그 결과물은 노동을 투여한 그 개인의 소유물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는 존 로크의 자연법 사상이나 노동가치설, 칸트와 헤겔로 이어지는 개인주의 사상에 기반 해 왔다. 개인 저자 및 창작자가 그 저작물의 당연한 소유자라고 하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저작권의 핵심적인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우선, 이러한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서, 저작권이 인류 역사의 등장과 함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세계 어느 곳에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새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역사적 현상"으로 저작권을 보자는 것이다.
저자, 자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재능, 그리고 연마한 기술을 통해 새로운 창작물을 만든 개인 저자 및 창작자 등의 개념은 보편적이지 않다! 포스트구조주의의 "저자의 죽음"은 이미 1960년대에 선고되었다. 그런데 철학적인 의미에서 저자가 죽을 수 있다면, 역시 태어나기도 했을 것이며, 저작권과 관련해서 사회역사적으로는 언제 이 '저자'가 태어났는지가 우리의 관심사이다. 역사나 전통 자체가 그렇듯이, 저자 역시 근대적 산물로서 발명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최초의 저자 개념의 발명이 출판 독점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즉, 저자의 권리가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저자의 이득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득을 독점하는 자를 규제하고, 정보를 자유롭게 유통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저자는 독점을 깨기 위한 가장 논리적이고 자연스런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카피레프트모임 편집부, 2000: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카피라이트와 카피레프트" ).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역사적 설명은 카피레프트모임 편집부, 2000과 로렌스 레식의 자유문화, 2005를 주로 참고하여 요약 재구성함).

저작권법의 초기 형태는 15세기 유럽(이탈리아의 베니스)에서 등장하였다. 당시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의 개발에 힘입어 출판업이 발전하게 되고, 출판물이 급증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봉건 통치 권력은 출판업자의 이익을 보호해달라는 요청에 응하는 동시에 출판물을 검열할 필요성이 맞아떨어지면서 출판특허제를 도입하는데, 이는 16세기를 거치면서 유럽 전역에 확산된다. 이 출판특권제(printing privileges)는 곧 당시 출판소가 지적 재산을 독점하는 것을 보장해 준 것이었다. 그러다가, 근대적 의미의 저작권이 제도로 도입된 것이 1710년의 앤여왕법(Statute of Anne)을 통해서였다. "다른 사람들이 책을 다시 찍어내는 것을 금지하기 위한 일련의 구체적인 제한 사항들" 을 정한 내용에 불과했다. "특정한 저작물을 복제하기 위해 특정한 기계를 사용할 권리"의 형태로, 서적상들에게 부여된 책 인쇄의 배타적인 권리를 의미했다. 이 권리는 일정한 기간으로 제한(신간은 14년, 기출판물은 21년)되어 이 기간이 종료되면 해당 저작물이 자유롭게 되어 누구라도 그것을 출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이러한 서적상(출판업자)에게 부여된 배타적 권리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다. 계몽주의 계열의 존 로크나 다이엘 데포 등의 저술가들은 이러한 출판 독점이 자유로운 지식 획득에 해악을 끼친다고 주장하며, ‘저자’ 라는 새로운 개념과 그 권리를 통해 서적상들에 대항하여 정보를 유통시키고 공유하려고 하였다(우리가 여기서 비판하려고 하는 현재의 저작권이 갖는 개인주의 이데올로기를 정치사상적으로 뒷받침한 자연법사상가, 존 로크가 당시의 저작권에 문제 제기했다는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때 저자는 출판 시장의 독점을 깨기 위한 가장 논리적이고 자연스런 근거가 되었다. 활자 인쇄술의 발명과 구술문화전통의 약화, 자본주의적 질서의 확대, 군주와 귀족 중심의 구질서의 붕괴, 근대적 시민사회의 출현, 계몽주의의 등장 등에 따른 전근대적 후원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저자"는 이렇게 자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18세기 이전까지 전달자(reteller) 혹은 대행자로 간주된 저자는 지식의 생산자, 창조자, '자율적이고 독창적인 개인'(낭만적 저자상)의 위상으로 껑충 뛰어오른다.
이와 같이, 저작권의 시초가 된, 군주의 검열을 위한 것이기도 했던 15세기 출판특허제(검열과 저작권의 거래관계)가 해체되고, 독창적인 개인의 창조물에 대한 군주의 검열을 비판하는 '표현의 자유'와 작품에 대한 저자의 책임 등이 저작권과 새롭게 관계를 맺게 되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본주의 질서의 확대는 자연스럽게 저자의 달라진 위상에 재산권 개념을 덧붙여 주었다. 즉, 저자의 작품은 창조적 개인의 노동의 산물로서 저자의 재산이라는 새로운 관념이 '발명'된 것이다.
오늘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저작물이 창조적 개인으로서의 저자의 독창적인 노력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근대적인 발명품일 뿐이다. 이러한 발명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되면서 그에 맞춰 지식 체제가 변동되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는 곧 한 사회에서 지식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 무슨 목적으로 생산되고, 분배되며, 그 보상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의 문제였다. 결국, 저작권은 당시 지식과 정보를 사적 소유에 의한 재산권적 성격을 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사회적 공유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타협물이자 모순의 해소를 위한 '발명품'이었던 셈이다.

이제 현대로 돌아와 보자. 곧바로 생겨나는 질문: 현대 사회에서 수많은 (대중적인) 창작물들이 이러한 '낭만적인 저자'나 창작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저작권 이데올로기의 진상이 드러나는데, 오늘날 대부분의 문화 예술적 생산물은 문화산업을 통해, 지적 생산물은 출판 산업 등을 통해 시장에 유통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생산물들이 시장에 나서기 위한 생산의 과정은 사실상 분업화되고 유연한 노동과정 내의 낭만적이지 않은 지식/정보/문화 산업 노동자(“creative worker”)들의 노동 과정이다. 저작권법 내에서도 '업무상 창작(work-for-hire)'이라는 항목이 있다. 이 규정에 따르면, 작품을 창작한 사람은 이들 노동자들이 아니라 이들에게 임금을 지불한 사람(법인 기업)이 저작물의 실질 소유자, 즉 저자(저작권자)가 된다. 이때, "... 법적으로 고용주의 권리는 창작한 노동자들에게 일정액의 보상금을 주고 그 창작물을 양도받는 것이 아니라, 고용주이기 때문에 그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김영식, 2005: "자본주의를 넘어선 반-저작권 투쟁을 위해서"). 이때, 낭만적 저자는 그 노동자들이 아니라, 그들을 고용한 기업 경영/소유자의 이미지로 대부분 그려지고 있다.
원래 저작권은 저작자를 보호하기 위해서지만, 실제의 보호는 저작물에 대해 이루어진다는 점도 주의를 요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논리는, 저작/창작이 머릿속의 아이디어로 존재해서는 보호받을 수 없(다고 전제하는 것이)고, 일정한 형태로 표현된 저작'물'을 통해서(만) 저작자의 창의성, 그 기술 및 노력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저작재산권은 저작물을 하나의 소유물 - 재산으로 보기 때문에 그 결과물에 대한 보호가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하게 되는 것이다. 저작인격권 역시도 저작물의 이용 과정에서 원저작자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장치를 통해 보호되게 된다. 그런 차원에서 저작권법은 저자와 작품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법률이다. 그런데도, 저작권이 낭만적 저자와 같이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호소하는 경향 - 이데올로기를 갖는 것은 역설적이다. 이는 한편으로 (실제) 저자와 창작물의 분리를 통해서만이 창작물들이 더 많은 시장에서 오래도록 (교환)가치를 실현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 여전히 그 분리된 창작물이 사적 재산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누군가에 의해 맘대로 복제되고 사용될 것이기 때문에 사적 소유의 합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관념상으로 그 창작물은 저자(원저작자)와의 (재)결합이 필요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역설이다. 이는 현재의 경제 구조, 그리고 지식 생산과 유통 구조의 특수성에 기인한 자본주의 사회의 저작권이 갖는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김영식, 2005: "자본주의를 넘어선 반-저작권 투쟁을 위해서"). 현실에서 창작물은 문화산업 시스템 하의 (유통)상품이고, 저작권은 주로 이 유통 상품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되고 있다. 반면, 실제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창작(주체, 수단, 과정)에 대한 보호와 진흥은, 현재의 저작권법과 같이 그 결과로서의 창작물에 대한 보호만이 아니라, 그 외의 다양한 방법으로 가능함에도 말이다(이는 다음 호에 이어지는 “대안들” 부분에서 자세히 알아보자).

“저작권 보호기간 연장, 민중의 저작물에 대한 자본의 해적질!”(부분)/ 출처: 한미 FTA 지재권 협상, 대량난감

한미FTA협상을 통해 저작권 보호기간이 그렇지 않아도 "저자" 사후 50년에서 70년으로 연장되고 있는 상황인데, 바로 이러한 법 개정의 논리가 현실을 왜곡하는 저자 관념을 빌미로 한 것이다. 사후 70년까지의 저작권 보호는 유통자본의 이윤 보호 이외의 목적이 없다. 즉, 법 논리는 현실에 잘 존재하지 않는 개인 창작자라는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실제 이해관계를 뒤에 숨기고 있다. 미키마우스법이라는 별칭을 가질 만큼, 저작권 보호기간 연장의 결과가 뻔해 보이지만, 이해관계를 은폐시키는 효과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의해서인지) 강력한 듯하다. 권위를 갖는 낭만적 저자 혹은 창조적 개인 창작자에 대한 이러한 왜곡된 이미지의 문제는, 개인과 창작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논리를 전제로 한다. 즉 저작권은, 교육이나 문화적 다양성과 같은 보다 많이 필요한 사회적 목적이나 공동의 목표와 같이, 개인 노동 이외의 창조성의 원천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Story, Darch, Halbert, 2006: Copy/South: Issues in the economics, politics, and ideology of copyright in the global South). 현실을 왜곡하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그러나 추상적이면서 강력하게 우리의 현실에서 작동하고 있다.

 
2. 창작물의 상품화와 문화산업-소비주의

왜 창작을 하는가? 생각을 나누고(커뮤니케이션), 문제를 해결하고, 누군가를 교육하고, 의견과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서이다(Story, Darch, Halbert, 2006: 54). 그러나 저작권과 문화산업의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볼 때, 창작물들은 시장에서 다른 것과 교환되는 재산 - 무형의 재산이며, 팔기기 위해(교역과 상업) 창작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55). 무언가를 창작한다는 것은 곧 팔아야 하는 것으로 곧바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상품화 이데올로기가 등장한다.
이러한 상품화 과정은 대충 이렇다. 창작자(author's right)는 자신의 창작물을 시장에 내놓기 위해(직접 판매 활동을 하기에는 경쟁력이 없다) 유통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과 계약하거나 그 외의 여러 가지 이유로 문화산업의 제작-유통 기업들에 고용된다. 고용이나 계약의 과정에서 수수료를 내기도 하지만 일정한 보상을 받으면서 그 창작물의 저작재산권을 그 기업에 양도하게 된다. 이러한 양도의 과정을 거치며 실제 창작자의 권리는 이제 고용한 제작 관련 기업 혹은 유통업자에게 가서 저작복제권(copy right)이 된다. 그렇게 통제되기 시작한 지적이고 문화적인 창작물들은 시장에 나서게 되고 소비자를 만나 판매되는데, 그 판매의 수익과 함께 (개별 소비자의 일회적인 사용 이외의) 재사용 과정의 수익(로열티) 역시 실질적인 창작자에게 인센티브로 가는 게 아니라, 대부분 기업의 자본운동을 위한 재투자된다.
이 상품화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은, 앞서 저작권의 근거가 되었던 개인 창작자의 소유라는 사실이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작물을 통제하던 개인 창작자는 없어지고, 소유 권리의 재산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개인성(개성)은 그래서 자본이 된다. 즉, 상업적 생산-유통의 채널에 들어가는 순간, 그 개인 창작자를 벗어난, 상업-유통 자본의 통제와 소유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Story, Darch, Halbert, 2006: 55).
문화적 창작물의 상품화를 포함한 이러한 순환 과정을 통한 문화산업의 팽창은 결국, 바로 현재에 이르러 세계 시장을 겨냥한 판매(무역) 단계까지 진전되어왔다. 그것을 보장하라는 것이 무역에 관한 지적재산권 협정(TRIPs)인 셈이다.

이와 같은, 문화생산물의 상품화 과정은 곧 문화산업의 소비주의로 직결된다. 점차,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장 이윤 창출을 위해 잘 팔리는 것만을 생산하게 만든다(56). 소비자(consumer)는 단순한 구매자(buyer)와 다르게, 구매한 상품의 사용가치와 더불어 상징가치, 혹은 "기호가치"를 소비하며 즐긴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소비를 촉진하기 위한 상품들 - 홍보가 많이 되어 많이들 입에 담고, 최신 유행하는 대중적인 상품들을 통한 소비-이윤창출을 보장(조장)하는 문화 산물에 저작권 보호 장치가 필요해지는 것이다(56). 바로 그러한 것들에 또한 불법복제가 따라붙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저작권 체제는 문화산업-소비주의와 뗄 수 없는 연관 속에서 강화되고 있다. 허버트 쉴러는 이러한 문화산업의 과정을 통해 문화생산이 그 기본 형식 및 (생산)관계에서 [자본주의] 생산 일반과 점차 구분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Story, Darch, Halbert, 2006: 56에서 재인용). 이렇게 미디어와 문화의 콘텐츠 생산과 소비의 방식이 자본주의적 상품 생산 일반의 형태로 전개되어온 과정은 세계 영상산업을 지배해온 헐리우드를 통해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이미 헐리우드는 2차 세계 대전을 지나면서 포드주의에서 포스트포드주의로 그 영화(문화상품 생산) 방식을 바꾸며 자본주의 생산 양식 전체의 생산-축적 체제 변화를 충실히 따라왔다. 또한, 헐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가 연합한 전미영화인협회(MPAA) 등이 세계자유무역 체제를 위해 로비하며 지적재산권의 강화를 주장해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대중문화의 영화에 대한 소비 패턴은 블록버스터를 중심으로, 멀티플렉스를 중심으로 획일화되어온 셈이다.

 
3. 창조와 혁신의 조건, 정보와 지식의 가치 창출 방식

위에서 살펴본 상품화의 과정 중에서, 다른 소비재 공산품과 다르게 창조적 노동이 결부되어 있다고 보는 정보-문화 생산물의 경우에는 특히 그에 대한 보상(reward)을 더 많은/좋은 창조를 위한 동기부여(incentive)와 결부시키는 과정도 존재한다. 좀 더 자세히 보면, 이제 개인 창작자의 손을 떠나 유통 자본의 통제와 소유가 된 창작물이 상업 유통망에 들어간, 저작권 보호된 상품은 이제 이윤과 교환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때 보상으로서 인센티브가 없다면, 더 창작을 하지 않을/못할 것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이 시점에서 작동한다(Story, Darch, Halbert, 2006: 55). 그래서 금전적으로 사회가 창작자들에게 보상을 해줄 의무가 있다고, 그래야 창작물의 질이 보장되고, 우리가 지불한 돈에 필적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현재까지 이러한 논리는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더 많고 좋은 창조적 생산을 위해 그 사람들에게 동기부여가 되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 바로 저작권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작 재산의 보호를 통해서 "새로운 작품에 시간과 돈의 투자가 촉진되고 또 이 법에 의해 많은 저자들이 작품 출판으로부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김영식, 2005: 121)는 것이다. 즉, 저작권이 (경제적인) 인센티브라는 것이고, 따라서 저작권이 없으면 새로운 창작을 안 한다는 논리가 된다.
저작권이 없다면 더 창작을 하지 않게 될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저작권 없이, 경제적 보상이 없다고 해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새로운 서비스와 도구를 만들고 싶은 욕구와 의지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앞서도 보았듯이, 창작은 기본적으로 생각을 나누고(커뮤니케이션), 문제를 해결하고, 누군가를 교육하고, 의견과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기 위한 것들이다.
설령 저 논리가 맞다고 치더라도 저작권이 새로운 창작을 위한 인센티브를 충분히 제공해 주고 있는가? 앞서 보았듯이, 저작권 강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보상(금)은 실제 그 창작자에게 돌아가지 않고 있다. 창작자들을 위한 인센티브라고 해놓고, 그 경제적 보상은 실제 창작자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는 최근의 현상이 아니다. 저작권 자체가 사회 제도로 된 계기 자체가 그러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당시 개인적인 후원에 의지했던 저자를 독립시켜, 저자의 저작물을 자유 시장에 자유롭게 팔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모든 저자는 출판하기 위해 출판사에 권리를 양도해야 했기 때문에 저자권의 원초적인 수혜자는 출판업자들이었다. '소유권을 갖는 현대적 저자‘개념은 사실 출판사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완곡한 표현인 것이다"(김영식, 2005: 118).
그래서 창작에 대한 보상과 창작물의 교환가치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그렇게 되어 왔고, 현실적으로도 창작물의 교환가치가 창작자들에 대한 보상으로 가지 않기 때문에(한 번의 대가를 받고 저작권을 출판사나 유통기업에 양도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미 분리되어 있다. 문제는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만 이것이 분리되지 않고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개인적 만족과 인정받는 것 등의 금전적이지 않은 인센티브들이 더 보편적이며 저작권의 (그러려고 하지도 않는) 보상체계와는 다른 형태의 인센티브들이 있는 것이 사실 우리에게 더 익숙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저작권 체제가 창조적 생산물들을 사유화하고, 주요하게는 그 저작권 소유자의 잇속만 챙기는 방식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저작권의 소유자가 애초의 창작자가 아니라는 점에 문제가 있다. 저작권이 창조와 혁신을 촉진하기는커녕 저작권이 창조와 혁신을 저해하고 있다는 것은, 그 보호기간 연장의 문제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앞서 보았듯이, 저작권 보호기간을 저자 사후 70년으로 연장하는 것은, 사실상 영원히 보호하는 것과 차이가 없다. 이러한 보호기간의 연장은 한마디로, 새로운 창조와 혁신의 비용을 엄청나게 늘리는, 전체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3] 로렌스 레식은 이미 창조되어 있는 것에 대해 돈을 내고 하면서 인센티브를 주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지적한다. 오히려 미래에 창조될 저작물에 대한 인센티브를 만들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또한, 더 많은 창조와 사회적 발전을 위한 비용이 더 많이 든다는 차원에서 저작권 보호의 터무니없는 강화가 갖는 한계만이 아니라, 이러한 것은 우리 문화의 독점적 상품화를 가속화시키고 다양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와 혁신의 조건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중요한 창조와 혁신은 상대적으로 열리고 덜 규제된 시기, 그래서 사람들은 개인의 재산 권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선(common good)을 위해 노동하였던 때에 이루어졌다(Story, Darch, Halbert, 2006: 160). 표트르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은 그의 "상호부조론"에서, 개인주의로 귀속된 18-9세기의 주요한 혁신들은 15-7세기에 존재했던 상호 부조의 패러다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물론, 창조와 혁신을 이렇게 상호 공유한다고 해서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이익이 공유와 상호 돕는 인간적 가치를 억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161).
결국, 저작권은 다양한 창조와 혁신의 과정의 산물들을 사적 소유를 통한/위한 정당화 논리로 작동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화 예술적이고 지적인 생산물들이 사적 소유물이 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저작권이 정당화하는 사유 재산이 지식과 정보와 콘텐츠를 그 대상으로 삼는 것 역시 다른 공산물들처럼 자연스러운 것일까? 저작권과 사적 소유, 그리고 역사적으로 존재해온, 현재도 비주류적인 형태로 지속되고 있는 다양한 소유 권리의 형태들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사적 소유가 지배적인 형태로 보이지만, 다양한 개인적 소유나 집단적 소유가 공존하고 있는데, 저작권과 관련한 이에 대한 논의는 다른 기회에).
지적 생산물(정보, 지식, 콘텐츠)의 성격 자체, 보다 정확하게는 그 생산의 특수성에서 저작권은 또한 모순을 담지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시장 유통을 통해 정보-지식-콘텐츠가 상품화된다. 그리고 이러한 시장 교환을 통해 사적으로 (독점) 소유된다. 그런데 정보-지식-콘텐츠는 널리 공개되고 이용되어야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내는 속성을 띄고 있다. 즉, 많은 사람이 이용했을 때 창작물에 대한 가치가 커지는 것이다. 더군다나 아이디어나 정보, 지식의 특성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유포시킨다고 하더라도 사용가치는 떨어지지 않는다. 정보는 정보의 특정 부분을 이용할 때 그 정보를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것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비-경합’적인 상품이다. 그리고 어떤 정보의 일부를 사용할 때 그 정보를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비-배제적’인 특성을 갖는다."(김영식, 2005: 120). 이와 같이, 정보나 지식 더 나아가 문화 생산물의 특성은 기존의 재산권 관념과 거리가 있다. 저작권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의해 만들어지는 고도의 접근가능성을 통제하려는 방향으로만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4. 창작(자)와 이용(자) 간의 조장된 충돌: 자본이 조절하는 불법복제

저작권법의 표면적 목적이 저작자와 이용자의 권리를 모두 보호하면서 균형을 이루는 것이듯이, 창작자와 이용자는 상호 존재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즉, 이용자 없는 창작물의 창작은 존재할 수 없고(있더라도 일회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이고), 창작자들의 창작물이 없다면 이를 이용하는 주체도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둘 간의 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앞서 보았던 것처럼, 현실적인 저작권자인 기업들과 자본은 이렇게 실질적인 창작자들과 이용자들의 충돌을 조장하여 부가적 효과를 얻고 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문화나 미디어 생산자들은 사실상 저작권 체제를 통해 수입을 얻고 있는 게 없다는 것(단적인 근거로, 저작권 강화가 작가들에게 더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2005년 수천 명의 작가에 대한 조사 연구 결과: Strict copyright laws do not always benefit authors - And they could even increase risk, study says, The Register, 2007년 7월 17일). 그런데도 문화산업의 독점 기업들은, 그리고 이를 대변하는 관료나 정치인들은, 저작권(의 보호)가 없다면 예술적, 문화적 창작 작업이 가능하지 않다는 믿음을 조장하고 있다.
저작권법 개정안들은 하나 같이 저작권료 징수(산업적 부가가치)를 보다 잘 하기 위한 조치들을 포함한다. 그러는 동시에, 문화적 부가가치의 중요성은 점점 탈각되어간다. 그런데도, "가난하고 고군분투하는 저자들 즉, 무명의 저자들의 작품을 해적질(무단복제)하고 표절로부터 보호"(김영식, 2005: 123)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생산은 소비나 이용과, 창작은 향유와 상호 전제하는 관계가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고 어떻게 확장되고 있는가? 우선, 창작자의 권리와 이용자의 권리가 충돌한다? 하지만, 가장 적극적인 이용자가 바로 창작자이다. 새로운 창작을 위해서는 다양한 창작물들에 대한 수용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의 기술 문화 환경에서 점차 수많은 이용자들이 생산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도 창작자와 이용자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면서 자본의 어부지리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사안이 바로 불법복제 혹은 해적질에 대한 사건/사고이다. '불법복제'는 그 자체로 강력한 이데올로기이다. 음악 산업 및 영화산업과 p2p파일 공유 간의 전쟁을 통해 우리는 해적질 혹은 불법복제의 오해와 현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해적질 혹은 불법복제는 이 전쟁의 표면적인 이유가 되고 있고, 이 전쟁은 저작권 체제 강화의 빌미가 되고 있으며, 저작권 체제의 강화는 p2p 파일공유를 모두 불법화하면서 심지어 불법적이지 않은 자율적인 공유 문화까지 파괴하는, 지난 수년간 이런 악순환의 골이 깊어져 왔다.
음악 산업 및 영화산업의 엄청난 로비를 통한 법 개정과 공권력 동원은 승리를 가져다주는 듯 하지만 문화산업의 토대이기도 한 대중 문화를 파괴하는, 벼룩 잡는다고 초가삼간 다 태우는 문화자본의 자기 파괴의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이 과정의 하나를 살펴보자. 로렌스 레식은 p2p 파일 공유와 저작권 문제를 다루면서, 불법과 합법의 구분이 경제적 피해와 이익의 구분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그는, p2p의 (음악) 파일공유를 공유하는 콘텐츠 및 공유자 유형에 따라 파일공유를 다음의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레식, 2005: 118-20).

 
다소 도식화의 위험이 될 수 있겠으나 이렇게 놓고 볼 때, 현재 강화되고 있는 저작권법 하에서 1, 2, 3은 불법이다. 하지만 1을 뺀다면 2, 3, 4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문화산업에조차 간접적으로 경제적인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1처럼 불법적이면서 사회적 이익이 되지 않는 경우를 처벌하고 제거하기 위해, 여전히 경제적 도움이 되는 2와 3의 경우까지 불법화 시키고, 최근까지 불법이 아니었던 4의 경우조차, 비친고죄가 도입되면서 (이론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불법화될 가능성도 커졌다.
그러나 현실은 여기에 있다. 보통 해적질이라는 말은 창작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말로 들리지만, "많은 경우 해적질(불법복제)은 시장의 요구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김영식, 2005: 124). 우선, 모든 정보와 지식과 콘텐츠에 해적판이 있고 불법복제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특별하게 인기가 있거나 어떤 가격 한계에 도달한 것들에 한해서 주로 볼 수 있다. "만약 해적판이 돌만큼의 위상에 도달했다면 그 저자는 더 이상 가난하지도 힘들게 발버둥치지도 않을 것이다”(124).
이데올로기 작동에 있어, 가장 효과를 발휘하는 불법복제에 의한 피해액 통계는 또한 가장 허위적이다. 한국 영화의 연간 불법복제 피해액은 3000억 원, 게임 산업은 500억 원, 음반업계는 연간 8000억 원의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소프트웨어 불법복제는 2006년 기준으로 4억4000만 달러였다는 통계가 횡행한다. 통계가 늘 그렇지만, 불법복제에 있어서 그 피해 규모가 이다지도 뻥튀기되는 데에는 그 경제학적 전제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 "불법복제물을 구입한 사람들이 불법복제가 없다면 모두 합법적인 복사본을 살 것이라는 가정"(김영식, 2005: 125), 즉 p2p를 통해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원래는 다 돈이 넉넉히 있어서 제대로 된 경로(극장, 비디오-DVD대여점, 대형CD점 등)로 구매 사람들이라고 보고, 그랬다면 수익이 얼마였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는 피해액을 계산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소프트웨어만 놓고 보면, MS는 2005년 소프트웨어 불법복제로 140억 달러를 손해 봤고, 게다가 불법복제와 싸우기 위해 수백만 달러를 쏟아 부었다는 발표를 했지만, 1998년 빌게이츠는 워싱턴 대학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Charles Piller, “Bill Gates isn't too bothered by Piracy”, LA times, 2006년 8월9일자): "중국에서는 해마다 3백만 대의 PC가 팔리지만 아무도 소프트웨어에 돈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사게 될 것이다. 그들이 훔쳐 쓰려고 하는 것도 우리에겐 나쁘지 않다. 그들은 그렇게 중독이 될 것이고, 우리는 어떻게 돈을 챙길지만 생각하면 되니까." 2007년, MS의 영업부문 담당 제프 래익스(Jeff Raikes) 역시 투자자 회의에서 비슷한 주장을 했다: "만약 당신이 복제 소프트웨어를 쓴다면, 그것이 MS 제품이길 바란다"(InformationWeek, Mar 12, 2007). 그래서 당연하게도, 불법복제는 더욱 기승을 부리지만, MS의 수익 역시 꾸준히 늘고 있다. MS 매출: 2002년 300억 달러, 2005년 410억 달러, 2006년 440억 달러로 계속 상승하는 중이다”(MS OS 불법복제, 실보다 득 많다", 2007/03/1, JI.DIGITAL 365℃). 자본은 이렇게 불법복제를 통해서 네트워크효과[4]와 잠금 효과[5]를 노리는 것이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불법복제나 해적질을 빌미로 한 저작권 지배 이데올로기는 많은 사람들의 지적재산권 문제, 저작권 문제를 불법/합법이나 절도-처벌의 구도로만 바라보도록 하는데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는 소송이나 법률 개정의 사안을 통해서 주로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적인 공유의 다양한 측면들까지 "불법복제"라는 한 마디로 낙인을 찍고, 법률-처벌의 문제로 해결되어야 하는 것으로 각인시키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면:
그런데 심지어 지배적 문화산업과 상업적 유통구조에서 독립해 있거나 변방에 위치한 창작공동체(독립영화, 인디음악, 거리미술 등) 역시, 보다 강화되고 있는 저작권의 보호를 받아야 되지 않을까 고개를 갸우뚱하고, 문화다양성의 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에서조차 불법복제로부터 한국의 문화산업과 한류를 또한 지켜내야 하기 때문에 저작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의 동시에 나오며 분간이 안 되는 상황이다. 이 해적질 혹은 불법복제와 관련된 핵심 문제는 이것이다: 돈 놓고 돈 먹자는 시장논리에 거스르는 복제를 "불법복제"라 이름 붙이는 것 자체로 삼엄한 분위기를 잡으면서, 그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으며 저작권 법 강화가 가속되고 있는 이 상황에 대한 비판적 논쟁을 약화시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