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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말할 나위 없는 세계의 양심, 사르트르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의 문학과 철학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그의 삶만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있지만, 그에게는 역시 비판이 어울리지 않는다.
- 동서 냉전이 격화되던 시기인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사르트르는 즉각 "전쟁의 책임은 미국과 남한에 있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을 옹호하고 나섰다. 남한 군대가 북한의 군대로 하여금 공격하게끔 유인함으로써 북한이 먼저 군사적 행동을 개시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고, 도발의 주체는 미국의 사주를 받은 남한 정권에 있다는 것이다.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82&article_id=0000051455§ion_id=102&menu_id=102
- 또다른 저서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의 서문을 쓴 사람은 사르트르다. 프랑스에서 정신병리학을 공부하는 동안 파농은 직간접적으로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참가 당시 파농의 사상은 사르트르의 폭력적 혁명노선과 궤적을 같이 한다. http://www.chosun.com/svc/news/www/viewArticle.html?id=199907280487
-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됐지만 ‘부르주아의 상’이라는 이유로 수상을 거절했다. ‘부르주아적 결혼’에 대한 저항으로 보부아르와 ‘계약결혼’으로 평생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했다.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38&article_id=0000275906§ion_id=102&menu_id=102
- 프랑스의 68세대는 사실 중학교 때부터 준비되어 있던 세대라고 대체적으로 평가한다. 68년도에 학생운동을 만들어낸 세대라고 하지만, 실제로 68년의 세상을 바꾼 것은 프랑스에서는 대학생이 아니라 고등학생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중학생일 때 그들이 장 폴 싸르트르의 ‘존재와 무’라는 책을 탐닉하면서 읽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존재와 무’... 지금 들여다봐도 한 페이지를 온전히 나가기 어려울 만큼 어려운 책이지만, 드골의 제3공화국 속에서 프랑스의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존재와 무를 읽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샤르뜨르를 읽지 않던 아이들은 까뮈를 읽었다. 조금 더 대중적이고 지나친 일반화를 가지고 있지만, 까뮈의 이방인의 테제와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의 테제는 같은 생각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 이런 거대한 변화가 준비된 것은 중학생들이 샤르뜨르를 읽기 시작할 때의 일이지만, 정작 그 때에는 아이들이 이렇게 어려운 책을 읽는 이유와 그 징조를 읽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도식적으로만 해석하자면, 이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대학의 문제를 해결했고,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서 프랑스의 문화와 매체가 변화하였고, 이 아이들이 푸코의 책을 읽으면서 푸코의 지지자가 되었고, 강단해서 추방당하다시피한 데리다를 파리에서 강단에 설 수 있도록 하였다. http://blog.naver.com/wasang2.do?Redirect=Log&logNo=20006481992
- 어느날, 현장에서 시위를 취재하던 당시 시사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 기자 장 모로는 시위대 전면에 섰던 프랑스의 대표적 지식인 시몬 드 보부아르, 장 폴 사르트르와 함께 경찰에 연행됐다. 그런데 신분을 확인한 경찰은 어떤 제재도 없이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뿐만 아니라 이들과 함께 연행된 시위대를 풀어주었다. 경찰의 이같은 결정은 프랑스를 붉은 물결로 뒤덮었던 1968년, “볼테르를 체포하지는 않는다”는 드골 대통령의 선언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드골이 지칭한 볼테르는 바로 사르트르였다. 68혁명의 중심에 있었던 사르트르는 프랑스 정부에게 치외법권이었던 것이다.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47&article_id=0000057119§ion_id=104&menu_id=104
- 심지어 70년대에는 한국에서 김지하 시인이 반공법으로 구속되자 그를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http://blog.naver.com/jinguja.do?Redirect=Log&logNo=80013924221
-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하면서도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저지른 1956년의 헝가리, 1968년의 체코 침공에 대해서는 단호한 비판을 할 정도로 자립적 지성의 면모를 보였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범죄 심사를 위해 영국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이 창안한 국제법정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말년에도 마오이스트계열의 기관지인 '인민의 기치'를 손에 들고 거리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던 사르트르였다. http://db1.chosun.com/cgi-bin/gisa/artFullText.cgi?where=PD=19990902&ID=9909022103
- 약 2만 5,000명이 참석하여 매우 성대하게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빅토르 위고의 장례식을 연상시키는 것이었지만, 그의 훌륭한 선임자 위고가 받았던 국장(國葬) 승인은 없었다.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었고, 사르트르가 항상 그의 글로써 권리를 지켜준 사람들이었다. http://preview.britannica.co.kr/spotlights/nobel/list/B11s0046b.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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