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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을시 격자형 도로? 뻘짓 그만해라 (우석훈)

지하도로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한다. 보통 2~3킬로미터 정도하고, 길면 10킬로미터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노무현 시대부터 전국을 격자형 도로라는 개념으로 7x9이니 하는 수치로 전국을 도로로 가득채우겠다는 기백으로 달려나가던 사람들이 드디어 서울까지 밀고 왔다. 그리고 이들이 내민 손을 이명박 서울시장이 굳게 잡은 셈이다.

도로 정책을 정말 단순하게 구분하면 수요정책과 공급정책이 있는 셈인데, 90년대 이후로 공급정책만으로는 교통 정책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조금은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도심지역을 아예 자동차 출입금지 지역으로 문화공간으로 조성하거나, 주차장 자체를 설치하는 정책들이 각광받으면서 진행 중이다.

결국 도시는 밀도의 함수인데, 밀도를 높이면 아무리 도로를 잘 만든다고 해도 교통 문제는 생겨날 수밖에 없고, 어떠한 공급 정책도 언젠가는 포화상태에 의해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거나, 혹은 중심지역 이전에 의하여 황폐화되거나, 둘 중의 하나의 길을 가게 된다.

최근 사막 한 가운데에서 결국 지하철이라도 놓는 수밖에 없다고 결정한 듀바이의 경우가 대표적 사례이다. 아무리 사막이라도 밀도를 높이고 나면 치명적인 교통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서울시의 지하도로는 발상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는 일이지만, 이 문제를 지하도로를 격자형으로 총연장 수 백킬로 정도로 놓는다고 해서 문제가 풀리지는 않는다. 지하공간에서의 안정성 문제와 생태적 문제와 같은 기술적 문제가 생겨나는 것과는 별도로 서울의 밀도와 집중도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철학의 문제에 가깝다.

현재로서는 서울의 밀도를 줄이고, 경제적, 문화적 집중도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옳다. 개인적으로 나는 서울을 몇 개의 도시로 쪼개는 방향과 교육 및 행정기관들 그리고 경제기관들을 지속적으로 지방으로 이전시키는 또 다른 방향 모두를 지지한다.

그리고 이런 전제 하에서 나는 현재의 준공영제로 운영되고 있는 시내버스를 완전 공영제로 바꾸고, 무료 셔틀버스 체계로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서울과 같은 대기오염지역에서 교통 속도만을 함수로 해서 교통량을 늘리는 집중형 교통체계로 구성하는 것들은 장기적으로 현재의 상황을 푸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보건적·생태적 부작용의 '임계 한계(thresh-hold)'를 넘어가게 하는 일종의 파국적 해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입체적으로 공간을 활용하면 좋을 것 같지만, 미세먼지나 납성분 혹은 질소산화물 같은 대기오염 물질은 입체적으로 공간을 활용한다고 해서 줄어들지 않고, 총주행량과 엔진성능 그리고 연료종류의 함수일 뿐이다.

오세훈의 서울시가 '쾌적'을 내세우며 벌이는 또 다른 거대한 공사판은, 전혀 쾌적과는 상관없고, 생태적이지도 않고 문화적이지도 않다.

파리에도 문화유적을 피해가기 위해서 짧은 지하도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개선문을 통과하는 - 영국의 다이애나비가 여기에서 사망했다 - 지하도로 같은 것들은 국제적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파리를 비롯한 유럽의 도시들도 교통 문제에 별대책이 없을 정도로 정책입안자들이 괴로워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도시도 오세훈의 서울시처럼 거대하고 입체적이며 총체적인 지하도로망을 만들지는 않았다. 도로 기술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교통문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그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되기 보다는 더 큰 문제점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자, 9억원을 들여서 이제 서울의 격자형 지하도로에 대한 타당성 조사를 하고, 2010년부터 시범착공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 물론 아직 타당성 자료가 없으니까 당연히 예산자료도 없을 것이다.

서울시가 제시한 총연장 8개 도로 163.9킬로미터에 고속도로 건설단가 킬로미터당 300억원을 곱하면 5조원 정도의 돈이 나오고, 여기에 지하공사에 따른 공사비용을 감안해서 500억원의 단가를 사용하면 8조원, 그리고 복층구조와 서울시의 평균 지대가격을 감안한 1,000억원의 단가를 사용하면 16조원 정도의 돈이 나온다.

강변북로처럼 토지매입 비용이 없는 곳과 있는 곳, 그리고 주변 정비사업까지 전부 포함해서 감안한다면, 최저 8조원에서 최고 18조원 정도의 공사비가 필요한 사업이라고 추정해볼 수 있다. 아마 실제로는 이것보다 조금 더 들어가서 20조원 정도의 돈이 소요되지 않을까 한다.

이 정도의 돈이라면 구청별 혼잡통행료와 대기오염부담금 같은 종합재원에 의해서 차라리 혼잡을 만들어내는 승용차를 대중 교통인 버스체계로 전환하기 위한 완전공영제에 무료버스를 도입하는 것이 더 손쉽고, 부드럽고, 효율적인 대책이 아닐까?

꾸리즈바시의 버스중앙차선제는 지하철 신설 비용을 버스차선제로 전환하고 서민들에게 버스요금을 대폭 인하하는 것이 그 주요 내용이었다. 수없는 공무원들이 꾸리즈바시를 방문했지만, 정작 이 정책의 근본정신은 보지 못한 것 같다.

현실적으로 20조원 가까이 소요될 대공사에 따른 10여년간의 공사에 따른 혼잡비용과 보건효과 같은 것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오세훈의 서울시가 주장하는 격자형 지하도로는 미봉책일 뿐만 아니라, 서울 전체에 미치는 보건적·생태적인 의미에서의 부정적 폐해가 보통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이 정책은 서울의 밀도를 높이고, 서울로 자원이 몰리게 하는 역진적 효과를 국민경제 내에서 만들어낼 것이다.

이 사건이 오세훈이 지금까지 쓰고 있던 녹색 가면을 벗고 본격적으로 '그린 워시' 시대에서 개발주의 시대로 역행한 제 2의 이명박 사건인가, 아니면 그가 생각해보는 답이 없어보이는 서울시의 교통문제에 대해서 대한 수많은 대안 중의 하나일 뿐인가?

유심히 지켜볼  일이다. 제발 이 사업의 정치적 의도가 2010년에 임기가 끝나는 오세훈 시장의 대통령 만들기의 일환이 아니기를 빈다. 하필이면 첫 시범사업이 2010년인가? 격자형 지하도로의 기술적·경제적 논의와는 별도로 2년 연구하고 바로 시행하겠다고 해서 될 간단한 사업이 아니다. 도로가 통과하는 지역주민 및 지자체와의 협의는 6개월만에 끝내고, 임기 마지막 달에 시범사업 착공식 하고 대선출마하겠다는 말인가?
인생에서 무엇을 하십니까? : 직업에 귀천이 있는가?

 


기본적인 초급 불어 표현 중 Qu'est-ce que vous faites dans la vie?라는 표현이 있다. 인생에서 무엇을 하느냐는 말인데, 우리 말로 “직업이 무엇인가요?”에 정확히 표현하는 표현이다. 노동이 분화된 세상에서 사람이 사회 속에서 멀고 사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는 해야하는데, 이 삶을 위해서, 즉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 무엇이냐는 이 표현은 상당히 시적이며 동시에 현실적이다.


이 말이 딛고 있는 기본 전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먹고 사는 무위도식 귀족층이 사회에 없다는 것 하나와 사람이 하는 일, 즉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또 다른 사회적 합의이다. 사람이 인생에서 하는 일들 즉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하는 일들은 모두 고귀한 일이며, 그 어떤 일을 하더라도 깔보거나 얕잡아보면 안된다는, 자본주의라는 경제 시스템 위에 근대를 만든 시대정신이 이 표현에 담겨 있다.  


우리나라는 결혼을 할 때 여성의 집에 남성이 먼저 방문하는 것으로 절차가 시작된다. 불어 표현과 약간 유사하지만 맥락은 전혀 다른 “그래, 아버님은 뭘 하시고?”라는 표현이 있다. 여기에 당당하기 대답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결혼부터 새로 생각해야 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이 질문은 짧지만 까다롭고 편견 투성이의 질문이다. 사업, 고급공무원, 은행원 같은 질문이 준비되어 있어야 당당하게 말할 수 있고, 그 외의 경우에는 어깨가 쪼그라드는 느낌을 받거나, “뭐, 그럼 자네 벌이는 괜찮고?”라는 날카롭지만 잔인한 후속 질문을 받게 된다.


현대 한국에서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외국에서 도입된 윤리책에만 있는 말이다. 모든 직업은 평균 보수, 사회적 네트워크의 크기 그리고 작업장의 소재지의 함수에 의해서 정확히 귀천이 나뉘어진다. 서울에 있는 작업장은 그렇지 않은 작업장에 비해서 언제나 월등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여기에 최근에 정규직 여부가 보조함수로 들어갔다. 도대체 귀천이 없다는 것은 어디에 들어가있는 말인가?


프랑스에서 얘기하는 직업의 귀천에는 ‘인간의 자유’ 혹은 ‘영혼에 대한 존중’이라는 매우 특별한 근대적 인권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자신의 직업이 끝까지 가면 인간이 자유로와질 수 있고, 그러한 일 속에서 영혼이 고귀해진다는, 도저히 돈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인간 개개인에 대한 존중이 있을 때에만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표현이 성립될 수 있다.


직업의 귀천을 사위감을 처음 만났을 때 강조하는 이 사회에서, 그 누구도 다음 세대에게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주장할 수 없다. 모두가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해지는 한국 사회, 그 속에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라고 말하기가 너무 어렵다.


왜, 어떤 일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월급액수로 대답해야 하는 사회, 그것은 모래 위에 세운 천박한 성궁에 불과하다. 이런 사회는 지속가능하지 않고, 그 안에서 모두가 불안하며 임시적인 위안거리로만 삶을 생각하게 된다.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 인생이라 하지만, 사람이 날 때부터 귀족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할 때, 직업의 귀천을 빠지는 사회는 자본주의 원칙에서도 아름다운 사회는 아니다. 위태하다.  우리는 모두 위태하다.
 
2007.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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