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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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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이야기가 아무래도 엊그제 선거를 치러가지고, 선거 얘기부터 실마리를 풀어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신문이나 매체에서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가 하고 여러 가지 분석이 나왔는데, 다들 알고 있다시피 한마디로 경제, 경제를 살리겠다는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되었다. 심지어 투표 전날 어머니께 전화 걸었더니, 어머니 누구 찍을 거냐고 물으니 ‘이명박이 이명박이 찍어야지’ 이래. 어머니는 내 감옥시절부터 석방운동하고 야당인데 말이야 ‘이명박이를 왜찍어?’ 하니 ‘경제를 살린대잖아’ 할 말이 없더라고. 어머니의 그 한 마디가 대한민국 민중들의 기본적인 인식. 도대체 경제가 뭐길래,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길래 경제를 살리겠다는 그 한 마디에 이명박에게 표를 몰아주게 되었는지... 일단 이런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대한민국 평균인 민중이라고 할 수도 있고, 서민이라고 할 수도 있고, 중산층이상의 엘리트라든지, 중산층이상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한민국 평균인이 생각하는 경제라는 것이 뭐길래 투표결과가 이렇게 나왔는가에 대해서.. 그것부터 먼저 좀 짚어봤으면 좋겠어요. 강교수님은 국민들이 알고 있는 경제, 경제라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시는지...


강 : 좋은 말씀하신 것 같고요. 이번에 화두가 경제 살리기가 된 것은 분명한 것 같고, 실물경제 기업인 출신이 성공적인 기업경영을 했다. 했는지 안했는지 팩트 자체가 정확하지도 않는데, 어떤 후광효과에다가 청계천이니, 버스전용차선이라든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앞으로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경제를 잘해줄 것 같은 환상 이런 것들이 결합되었다고 본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많겠지만, 서민들의 평균적인 인식으로 가지고 있는 경제는 한 마디로 돈벌이 경제다. 개인경제는 월급이나 소득이 많아지는 것을 말하고, 기업은 이윤이나 수익성을 올라가는 것을 경제가 잘 돌아간다고 알고 있고, 나라 전체적으로 보면 수출을 많이 해서 달라를 많이 벌어들이는 것을 경제라고 알고 있는 것이죠. 돈벌이 경제인데, 제가 생각하는 것은 이 돈벌이 경제와 상반되는 것이 살림살이 경제다. 큰 흐름으로 쫓아 올라가면 칼 폴라니가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기존의 사회로부터 독립되어있지 않는 경제. 그것이 살림살이 경제거든요. 제가 즐겨 쓰고자 하는 표현이죠.. 예전에 김지하 선생이 살림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단순한 집안 살림살이가 아니라, 죽임에 대척되는 살림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그 맥락에 동의를 하면서 경제를 구분하는 개념으로 응용을 하고 싶어요. 칼폴라니 용법으로 사회, 인간사회, 인간욕구로부터 이탈되어 떨어져나간 경제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돈벌이 경제. 그 이전에 결합되어 있는 모습이 살림살이 경제라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과정들이 한국에서도 역사로 따지자면 농업 중심의 사회로부터 공업화, 산업화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드디어 돈벌이 경제가 살림살이 경제로부터 분리되어 나와 마침내 살림살이 경제를 지배하는 형태로 되었고, 특히 노동시장을 통해서 직장에서 출세해서 더 많이 돈을 벌 수 있는 위치로 상승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욕구로 내면화된 것이죠.


황 : 아까 뭐로부터 분리된 것이라고 했는데..

강 : 사회로부터 혹은 인간적 욕구로부터 분리된 돈벌이.

황 : 돈벌이 경제를 달리 말하면, 사람의 구체적인 삶 보다는 돈을 벌기 위한 가치.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이 어떻게 되건 말건 간데. 그런데 살림살이 경제를 추구해야된다, 혹은 살림살이 경제가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경제라고 말할 때.. 다른 용어로 우리말에 적합한 말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생계경제라는 것이 있는데 영어로 subsistence economy라는 것이 있는데,

강 : 저는 같은 맥락으로 봅니다.

황 : 대개 녹색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계경제... 근데 생계경제라고 표현해요? 우리말로?

강 : 네 그렇게 표현하기도 하고 혹은 자립경제라고도 한다. 원래 사전적인 뜻은 생계경제인데. 좀 표현이 말갛지 않잖아요?

황 : 간신히 먹고사는 경제를...

강 : 생존경제처럼...

황 : 이것을 주장하게 되면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고, 일반 대중들은 뭐라고 하냐하면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야 너네 ?같이 살아라’ 이런 소리를 듣거든. 이것을 좀 구분할 수 있겠어요? 살림살이 경제하고 뭔가 좀 푸어놓은 느낌이 드는데.. ‘내가 그러면 잘사는구나’하는 웰빙 개념도 조금 들어가 있는 것 같고, 근데 subsistence economy 라고 하면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간신히 먹고산다는 느낌이 들어가지고..

강 : 뭐 굳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런 뉘앙스가 풍기는 것 같고, 좀 더 적극적으로 의미부여를 하자면, subsistence가 생계위주이고 자립형이고 하지만, 좀 빈곤하다고나 할까 양의 수준으로 볼 때 좀 낮은 차원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살림살이 경제는 양의 낮음이나 높음을 포괄할 것 같아요. 그 어느 것을 따지지 않고, 그 속에서 좀 추상적인 표현이지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살고, 삶의 구체성이 구현되는.. 그러니까 추상적인 돈벌이나 어떤 지위상승이나 권력 획득이나 하는 그런 욕망이 깔려 있지 않고, 삶의 풍요로움, 관계의 풍요로움 그리고 어떤 삶의 결들, 다양한 무늬나 결들, 지각 이런 것을 느끼며 살아가는 경제를 말하는 것이죠. 이런 의미에서 subsistence economy를 분명히 포괄을 하는데, 거기에만 국한되지는 않은 측면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황 : 제 느낌에도 우리가 돈벌이 경제에 대한 대안으로 얘기를 할 적에, 아무래도 대중의 감각, 느낌을 무시할 수 없다. subsistence 경제라는 말 보다는 살림살이경제 혹은 생명살림경제. 뭔가 대중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용어를 하나 만들 필요가..

강 : 저도 뭐 거칠게 life economy. 이렇게 써보기도 한다.

황 : 근데 뭐 합의된 용어나 많이 쓰이고 있는 용어가 있나요?

강 : 스탠다드가 없어요. 만들어야 되더라고요.

황 : 그런 것부터 정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대중적을 설득시키려면

강 : 맞습니다. 원천적으로는 economy의 oikos 개념에서 그 속에 이미 호응이라고 하는 살림살이. 가정은 사랑의 보금자리의 상징 아니겠습니까? 그 사랑으로 사람을 살리고 식구를 살리고 자연을 살린다고 하는 것이 그 속에 들어 있다 말입니다. 그래서 사실 구태여 oikos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살림살이 oikos 라고 표현할 필요가 없는데, 워낙 돈벌이로 규정되는 oikos로 변질되다 보니, 거기에 대한 대척으로서 살림살이 경제라고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황 : 원래 말뜻은 그렇더라도 말이 어용되거나 오염되었을 때 거기에 대처를 해야할 것 같다.

강 : 그렇습니다.

강 : 앞으로 좀 열심히 이런 관계에 대해서 용어를 논의를 좀 해서 경제학자들이나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 우리 앞으로 약속해서 이 용어를 줄기차게 밀고나가자 그래서 지금의 주류경제학에 대해서 대안전선 혹은 대중들이 알기 쉽게.. 그런 작업들이 필요한 것 같아요.

강 : 네 그렇습니다.

황 : 저도 사회활동을 하면서 늘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 저들이 말하는 경제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데, 용어가 없는거야.

강 : 어떤 현상이든지 자기자신의 요구나 가치를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용어를 찾는다는 것이 이미 정치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 속에 우리 스스로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토대가 있기 때문에.. 특히 여성주의 이론에서 그런 표현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여성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어를 찾는데 수십년이 걸렸다. 그것 자체가 정치적인 싸움의 과정이었다고 하는 표현들을 본 적이 있는데 저는 적극 동의한다.

황 : 돈벌이 경제를 대신할 수 있는 용어들을 아시는대로.. 뭐뭐가 있습니까? 살림살이경제, 생명의 경제.. 등

강 : life economy를 어떻게 표현하는냐... 영어로 쓸 때는 이것이 제일 간단할 것 같다. 그랬을 때, 이것을 살림살이라고 할 수 있고, 생명살림의 경제라고 할 수 있고, 살림의 경제라 할 수 있고, 생명경제라 할 수 있고.. 저는 life 라는 뜻 안에 그런 것들이 들어있을 것 같다. 생명의 경제는 죽음의 경제가 아닌. 명사형 자체도 되고, 그 다음에 생명살림의 경제라고 하면 일종의 과정이거든요. 액티브한 액션이 들어가는 것이죠. 내가 땅을 일구더라도, 즉 유기농 채소를 생산, 유통한다고 하면, 화학농에 비해서 생명의 경제라 하겠지만, 생명살림의 경제라고 한다면, 예를 들면 지렁이를 넣고 하는 과정들, 움터 올라오면서 땅을 열어 제끼고, 이러는 과정들이 생생하게 살아 날 거라고 생각한다.

황 : 생명살림 하면,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이 가미되는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 생명의 경제라고 하면 자연생태계에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

강 : 우리의 적극적인 액션이 깃들어간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황 : 옛날에 영국에서 생명농업 논문 쓸 때, 그냥 life agriculture 하니까 생태계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용어 같더라. 그래서 life intense 그러니까 생명살림이죠. 그리고 또 하나가 무소유의 경제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것은 간디 연구하는 사람들의 용어이기도 한데, 무소유라고 하면 너무나 자본주의 경제와 동떨어진 개념이라 들이대기는 좀 어렵지만, 경제 개념의 좀 승화시키면 무소유까지 가지 않을까

강 : 무소유의 경제를 다르게 표현하면, 집착으로부터 탈피한다. 해방된다. 그런 개념이라고 본다. 생명 과정 자체가 살고 죽고 성장하고 사라지고, 사그라들고 그 속에서 또 새로운 싹이 올라오고 하는 것이 집착이 없는 과정이거든요. 도교적으로는 무상의 경제 무상함의 경제.

황 : 원래 그곳에 소유의식이 들어설 자리는 원래 없는데, 인간의 소유의식이 들어서면서 억압의 문제가 만들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강 : 근대 노동력을 규정할 때, 근대 자유인의 권리, 개인의 인권을 규정할 때, 존 로크가 얘기했지만 ‘인간은 자신의 노동력의 소유자이다.’ 이렇게 규정한다. 자신의 몸뚱이마저도 생명살림의 과정으로 보는 존재 내지 관계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소유의 개념으로 본다. 그러면서 내 노동력에 대한 소유의식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재산이 되고, 그래서 그 재산의 가치를 높여야 하고, 높이는 수단이 교육이나 훈련이고 기술이 들어 가고, 남과 경쟁해서 나를 높여야 된다. 그러다 보니 약육강식의 생존경쟁. 팔꿈치사회. 남을 쳐야하는 경쟁적인 경제가 강화되는 토대 밑에는 말씀대로 가장 근본적으로는 물질적인 소유의식과 더불어 자기 몸뚱이마저도 소유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자리잡고 있다.

황 : 지금까지 돈벌이 경제와 그 대안적 개념으로 살림살이 경제의 원리적인 측면을 일단 살펴봤고, 녹색과 관련해서 경제 얘기를 좀 나누자면, 강교수님 책이라든지 글이라든지 평소에 열심히 읽는 편인데.. 최근에 또 일중독이라는 책을 내셨더라구요. 사실 지금같이 돈벌이 위주로 경제를 추구하다 보면 백이면 백 일중독에 걸릴 수 밖에 없는 이런 사회인데.. 그 책을 읽으면서 자본주의 사회가 일뿐만 아니라 중독의 사회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일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중독이다. TV 보는 것, 관계 맺는 것, 여행가는 것, 기호품부터 스포츠.. 중독사회이다. 이게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사회에서 가능할까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이렇게까지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 왜 자본주의가 인간을 중독에 빠지게 만드는가? 자본주의의 어떤 속성이 도대체... 그점에 대해서 좀 얘기를 부탁드린다.

강 : 좋은 말씀이고요. 선생님의 ‘야생초 편지’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가장 근원적으로 생명살림의 경제를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에요. 이미 그것이 삶의 제한된 공간 속에서 역설적으로 그 삶을 더 깊이 생각하게 해주는.. 그래서 우리에게 울림이 있는 것 같아요. 중독사회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삶의 제한성 속에서 깊이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무한대를 추구하는 욕망과 경향성을 깔린 것이죠. 자본주의가 중독사회라고 표현하시는데 저는 적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돈이나 지위나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만족을 모르는 시스템이거든요. 10억을 벌면 행복할 것 같아서 10억을 벌면 100억을 벌어야 할 것 같은.. 끝없는 무한을 추구하는.. 저 멀리 떠 있는 무지개를 잡기 위해 뛰어가는 .. 그런 과정이 깔려있고요. 그런 과정에 사람들이 왜 동참하느냐? 더 기본저긍로는 진정한 자기 내면을 상실했기 때문에.. 진정한 자기와의 만남과 접촉이 이루어지는 만큼 중독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산골짜기 생활해보면 알잖아요. 내가 나를 만날 수 있는 만큼 세속적인 욕구나 욕망이나 무한대적인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거든요. 내가 나를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외적으로부터 그 공허함을 채워낼려고 노력하는 것은 채울려고 노력하면 많이 소유하고 확보하면 할수록 금방 만족에 이르는 것 같지만 금방 공허해진다 말이에요.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소비중독에 빠지고, 일중독에 빠지고, 여행중독에 빠지고, 관계중독에 빠지고 한다 말이에요. 사람은 진정한 친구를 한 사람만 사귀면 더 많은 친구가 필요없어요. 근데 진정한 친구가 없으니까 끊임없이 사람을 챙겨보려한다

황 : 핸드폰에 전화번호부를 보면 20년 전 전화번호부 하고는 비교가 될 정도로 많이 적혀있다. 여기 몇백 개씩 적혀있는데, 그것을 쭉 눌러 보면서 함석현 선생이 말하는 질경이선생 시 있잖아요. 그런 친구를 가졌는가 하고 쭉쭉 눌러보면 전화번호부에 수 백개가 찍혀있어도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생각해보게 된다. 이것이 전화번호부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가 그렇단 말이에요. 이것이 좀 있다가 경제 얘기를 나눌 때 나오겠지만, 자본주의에서 이렇다고 얘기했는데, 예전에 공부할 때 정치경제학, 현대자본주의, 맑스주의 등..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되더라. 그래서 더 깊이 들어가야된다 해서 나중에 인류학까지 공부하게 되었다. 깊이 들어가보니 자본주의로 인해 특이하게 극대화된 것은 맞는데, 우리 인간의 문명의 시작부터가 이쪽으로 발전되어왔다는... 아까 말한 내명 상실이라는 것이 우리가 문명의 반지를 끼울 때 자꾸 외부에서 뭘 찾으려고 하는 문명을 계속 발전시켜온 것이라.. 그래서 자본주의에 와서 극단적으로 꽃을 피운 것이라 생각한다.

강 : 결정적인 것은 땅으로부터의 인간의 이탈 같아요. 소위 말하는 땅이라는 생산수단과 사람이라는 노동력이 분리되면서 땅의 경제에서는... 땅이 결국은 생명 아니겠습니까.. 땅의 경제에서는 사실 그 땅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경제인데, 땅으로부터 이탈되는 경제가 되다 보니 결국 땅을 확대해보면 생명이고, 또 확대해보면 자연의 환유, 상징이잖아요. 자연이 nature라고 하는 사전에 찾아보면 본성이라는 뜻도 있다. 자연과 가까이 하는 마음은 본성과 맞닿아 있단 말이에요. 만물일체, 물아일체가 가능한 경제가 땅의 경제인데, 그것으로부터 이탈하는 경제가 바로 중독사회로 접어드는 것이고, 만족을 모르는 것이고, 무한대를 추구하는 것이고, 구체성을 잃어버리고 추상적인 무한대를 쫓아가는 것이죠.

황 : 땅으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인간들이 결국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는 말..

강 : 오늘날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목적이 뭐냐하면 ‘얘들아 땅 파먹고 살기 싫으면 공부해라’ 공부하는 목적 자체가 이미 땅으로부터 이탈을 위한 것이다.

황 : 결국 우리가 이 얘기를 이렇게 하면 지금 현재 세상에 대한 대안을 찾는 것도 결국은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된다. 옛날에는 땅이 인간의 내면하고 하나의 통일된 생각이었다는 말이지요.

강 : 땅을 어머니라고 보는 것도 결국 우리가 그 속에 들어있던 어머니고, 그 속에서 내가 형성되는 토대이고, 나의 내면과 외면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죠. 갈수록 이게 분리가 되는.. 그래서 크게 보면 사회와 경제의 분리도 그 확장과정,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황 : 얘기를 현실로 좀 돌아와보면, 우리가 이명박대통령을 만든 것도 한국국민들의 정서나 살림살이 자체가 많이 땅에서 분리된 ??속에서 뭔가를 많이 가지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명박이라는 사람이 이것을 충족시켜줄 수 있다고 환상을 가지고 찍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렇게 굴러가는 한국 경제가 과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이건 미래학과도 관련되는 문제고.. 이미 노무현정권 시절에 신자유주의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이명박의 경제정책을 바로 들이댈 수 있게끔 토대를 만들어 잘 놓았다고 생각해요.

강 :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국민들이 경제를 살려줄거라고 이분을 뽑은 것이 너무나 흥미로운 거에요. 신자유주의 부정적인 결과로서 현재의 대량실업 사회양극화 생겨서 고통에 시달리는 것은 분명한데, 불행하게도 신자유주의를 더 가속화시키겠다는 사람을 통해서 이 문제를 풀어 달라고 하니.. 결과는 뻔한 것이고 너무나 웃긴 사태가 벌어진 것이죠. CEO형 대통령에 대한 환상과 우리가 돈벌이 경제에 대한 내면화 과정이 얼마나 심하게 전개되고 있는가를 거꾸로 알 수 있는 흥미로운 현상이라고 봐야죠

황 : 대선 얼마 전에 김근태의장이 국민이 노망이 들었나하는 발언을 해서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는데, 일부에서는 맞는 말이냐 하는 얘기도..

강 : 대놓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솔직히 토론하는 수준에서는 그런 이야기도 해야지요

황 : 그런데 나는 그 말을 하는 열린우리당 의원들 자체도 그런 말을 하는 자격이 없어요. 이 사람들의 세계관이나 경제를 보는 관념이 똑같거든. 똑같은데 자기들한테 표를 안준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왜냐면 자기들이 그런 정책을 펴서 국민들의 마음을 이렇게 만든 것이거든..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를 더욱 철저하고 밀고나가는 대통령이 나왔는데, 이것의 미래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관적으로 본다 이거 아닙니까?

강 : 경제적인 성과 차원에서는 상당히 비관적인데요.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을 부활시킬거라는 점에서는 정말..

황 : 또 다시 저항의 시절이...

강 : 생명살림의 저항이...

황 : 10년 동안 잠잠했어...

강 : 그 동안 많이 죽여놨죠... 어찌보면 추상적인 농담으로 얘기했지만 그런측면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졌던 환상으로부터 깨어날 수 있는 계기. 아니구나 라고 하는 것을 학습하는데 한 5년이 필요할 거라는 거죠

황 : 사실 노정권이 망쳤다 망쳤다 욕하지만 뭘 망쳤냐고 물어보면 딱히 대는게 없어요. 이 사람들이 잡아도 이 이상 잘할 것 같지는 않거든요...

강 : 그런 점에서 정동영씨가 안된게 개인적으로 다행이다. 그 사람이 되면 대책이 없잖아요.

황 : 한나라당이 한 번 휩쓸고 이 기조 한번 해봐라 니들은 다른 거 만들 수 있겠는가?

강 : 어차피 어려운 민중들이야 누가 잡아도 마찬가진데, 환상으로부터 깨어날 수 있는 일정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냥 놔두고 볼 일은 아니고, 끊임없이 이런 건강한 문제제기 대안적인 이야기를 해나가는 작업이 필요하겠죠

황 : 그저께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선거 인터뷰를 봤는데, 저 달동네에 있는 할머니와 인터뷰를 하는데, 기자가 누구찍었냐고 물으니 ‘이명박이 찍었지’ 달동네 서민 중에 서민인 그 할머니가.. ‘왜 찍었어요?’고 물으니.. 이 할머니가 또 말을 잘 하시더라고.. 대답은 우리 어머니가 한 말과 똑같더라 ‘경제를 살린데잖아.. 그 사람이 당선되도 우리 같은 서민이야 별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그 사람이 대통령이 돼서 나락 잘 살게 되면 덕분에 우리도 조금 잘 살게 되지 않을까?’ 이게 경제학에서 말하는 트리클 다운[Trickle Down] 아니겠습니까? 이 말이 할머니 입에서 나오는 것인데.. 서민들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까? 트리클 다운이 60년대부터 경제개발계획하면서 미국의 경제학자들이 제시해서 한국의 정치인들을 쇄놰시켜 이런 것 아닙니까?

강 : 크게 보면 트리클 다운 이팩트는 제가 해석하기에는 하나는 국익중심의 사고를 강화하고, 두 번째는 대기업중심의 사고를 강화하는 것. 위에서 잘 되고, 돈벌이 경제를 말하는 것이죠.. 전형적으로 돈을 잘 벌면  그것이 흐르고 흘러넘쳐서 밑에 떡고물이 많이 떨어질 것이다 이런 이야기이죠. 결국 이런 사고방식은 국가주도적인 경제개발이 되면서 나라가 잘 살아야 우리도 잘 산다고 하는 식으로 수십년의 과정에서 사회화된 학습과정이라고 저는 생각하지요.

황 : 단순한 논리인데. 이것을 틀렸다고 딱 말하기 어렵다라고요. 집안이 잘 되야 너도 잘 사는 것이 아니냐...

강 : 좀 차분하게... 1960년대 초에 우리의 1인당 GNP가 따지면 80불이었는데, 지금은 2만불 시대니까 200배 이상 나라 전체가 잘 살게 되었는데, 할머니가 예전에 비해서 훨씬 행복하게 잘 사느냐 하면 아니거든요..

황 : 다들 그러잖아요. ‘그래도 예전이 좋았지. 그때는 인정이라도 있었지.’

강 : 바로 그거죠. 인정이라고 하는 것이 이른바 민중복지거든요. 그 사이에 수준은 높으냐 낮으냐를 따지지 말고, 낮은 수준이라 하더라도 마음이 편하고 정이 흐르고 그래서 이게 삶의 감정들의 흐름이 자연스러워서 중간에 탁탁 숨막히는 스트레스가 없는 것이죠. 절벽 보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 없는 것이죠

황 : 인정이라는 것이 없는 이웃들 끼리 상부상조하는 이런 것은 있었다는 것이죠

강 : 지짐 하나라도 조금씩 나눠먹고 지나가는 사람 이리 오라고 함께 먹고 해야 마음이 편한.. 자기 혼자 먹으면 불편한... 그런 것으로부터 이제는 자기 혼자 먹어야 편한...

황 : 아까 민중복지라고 표현했는데, 민중 스스로의 복지. 민중이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복지.. 그런 용어 있습니까?

강 : 그것도 지금 만들고 있는 중이지요..

황 : 민중자율복지..

강 : 풀뿌리목지 내지 민중복지 이렇게 표현해보는 것이지요.. 굳이 복지 개념을 가지고 가면 시장복지라는 것이 있고, 영미식의 시장을 통해서 웰빙을 사겠다는... 국가복지는 국가가 교육이나 노후나 그런 것들을 대신 해주는 것이고, 민중의 자율복지는 self organizing이라고 하는 것이고 solidarity를 통해 해결하는 것.

황 : 복지의 세 가지 모델을 얘기했지만 어느 것이 전적으로 지배하기는 힘들 것 같고, 우리같은 경우는 사실 독재시절에는 국가복지 중심으로 사고를 하다가 기업이 사회를 전적으로 지배하면서 시장 쪽으로 맡기다가.. 예전에는 민중자율복지로.. 신경 안 쓰고 니들이 알아서 살아라.. 근데 이것이 점점 축소되어서 시민운동차원으로 떠넘겨졌다고 보는데, 앞으로의 국가 내지 시장 복지의 경향화의 개념으로서의 민중자율복지를 점차 확대시켜나가야 하는데, 어떤 측면에서는 국가도 참 투박해요. 이런 NGO나 민중자율복지를 잘 된다 싶으면 국가가 그것을 따먹더라. 자기네 속알음만 만들려고 하더라고요

강 : 그렇기 때문에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민중의 자율복지에 있어서 첫 번째 주도권과 두 번째 내용을 채우는 것은 풀뿌리가 확실히 잡고 있어야해요. 그리고 자원의 재분배 라던지, 위험으로부터의 보호 즉 기득권으로부터의 저항 그런 역할을 국가가 해주는 정도로 분담이 된다면 그것은 OK. 그러나 내용을 가져가고 주도권을 가져간다면 그것은 저항해야 되는 것이죠

황 : 그러나 이 지점이 참 어렵다. 제가 인도의 간디경제를 좀 연구하다보니, 간디주의자들이 민중자율복지를 추구하더라. 국가의 간섭이 굳이 없더라도 자기들끼리 상부상조하고 자급자족하면서 잘 사는 것을 축으로 했는데, 국가가 확대되니까 세금을 걷어 돈이 많으니 국가에서 학교를 지어주고 보건소를 지어주고 이것저것 시설을 지어주니까 NGO나 시민단체가 자발적으로 하던 것들을 자꾸 놓게 되는거에요. 그러니까 그 힘이 약화되니가 내용이나 주도권을 하나하나 국가가 떠안게 되면서 민중들이 국가에 의존적이 되고, 운동이 점점 소멸해버리는 형상이 빚어진다. 오늘날 인도에 간디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국가가 상대적으로 비대해지면서 그리 되는 것이다.

강 : 그게 규모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조직방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율적인 조직이 아니라 국가가 지어준 타율적인 조직 의존되고.. 저는 규모의 문제와 조직방식의 문제가 같이 결합된 것이라고 봐요. 국가의 개념적인 이야기 보다 기능적인 면을 보면, 크게 자원의 분배 역할이나 조정역할 갈등의 조정역할 이런 것을 국가가 해야 하는데, 그것을 중앙집권적인 조직원리하에 배치하다보면 분명히 소외되고 의존되요. 마을 자체적으로.. 굳이 표현하자면 마을 국가지요. 마을 자체적으로 직접민주주의의 방식에 걸맞게 의논하고 조율하고 조정해나가는 그런 형태로 나가면 그때는 규모도 소규모이지만 그게 크게 보면 국가의 역할인데, 이미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의 틀은 사라지고 민중자율적인 조정시스템으로 가는 것이죠. 그랬을 때 소외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죠

황 : 하지만 그것이 한국식 문화전통에서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죠. 새마을운동 이래로 물론 일제시대부터 그 기원을 따져야겠지만, 리 동 단위까지 관료주의적인 인맥이라던지 기구를 섭렵해나가지고, 우리 민중이 굉장히 관의존적이 되어버렸어요. 뭘 하더라도 시민운동하는 사람이나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이 이거 좋다고 하면 콧방귀도 안뀌지만 공무원이 와서 자금 지원해줄테니.. 이러면 굉장히 열심히 와서 달려들어 하거든요. 마을의 자율적인 자치기구를 만들고 정치사회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한국의 실정에 너무나 어렵다는 거죠.

강 : 결국은 아까 중독사회와 맞닿아 있는데요. 결국은 우리 내면을 상실하고, 그 내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 삶에 대한 자기 책임성. 다른 말로 하면 자율성이거든요. 삶의 자율성. 내 삶을 내가 스스로 이끌어나가고, 스스로 조절하고, 스스로 수정 변화시키기도 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진다라고 하는 의미. 신자유주의시대에서 국가나 시장이 져야하는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로서 자율성. self responsibility. 이게 상당히 중요하다고 본다. 그것을 복원시켜 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신자유주의 내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 맞설 수 있는 근본 토대라고 봐요. 그런 삶의 자율성과 더불어 유대감, 연대정신, 상부상조의 관계망 이런 것을 복원해내는 노력. 이런 것이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모든 면에서 이루어져야하는 것이죠.

황 : 현재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항해서 어떻게 나아가야하는지 말씀을 해주셨는데, 사실 전세계적으로 대안운동의 방법론이라던지 이념이라던지... 해답은 다 나와 있는 것 아닙니까?

강 : 그 해답이 크게 두 가지로 수렴되죠. 하나는 막강한 정치세력화를 통해서 국가권력을 장악해서 볼리비아 쿠바 베네수엘라가 보여주는 모델이 있잖습니까? 내용적으로 그런 것들을 극복해가면서 최근에 보이는 새로워진 사회주의 모습으로 가자하는 담론이 있는 반면, 두 번째가 풀뿌리 자율로 분권화된 형태, 소규모 공동체, 땀과 함께가까이 하는 경제, 작은 담론으로 수렴되고 있어요. 저는 방점을 후자에 두고 싶어요. 과도기적으로는 전자의 국가권력화의 민주화가 필요하다고 보지만, 근본적으로는 그것마저도 풀뿌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합의할 수 있을 때 성공하는 것이지 안그러면 국가권력체가 자체가 독립해버려서 궁극적으로 풀뿌리를 다시 억압해버린다는 거죠. 그게 기존 소련, 동구사회의 사회 사례의 결정체라고 봐요.

황 : 국가사회주의 모델이라고도 하고, 심하게는 국가자본주의 모델이라고도 하죠. 소련의 경험에 대해서 학자들의 논쟁이 끊이질 않지만.. 애초부터 그것은 국가자본주의였다는 얘기부터 시작해서 말이죠.. 결국은 얘기나온 대로 그것대로 극복대상일 뿐이다. 국가가 이런 파괴적인 자본주의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과도기적으로 그런 형태를 취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 결국 궁극적으로 소규모 공동체 속에 사는 개개인의 자율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가야하는데, 소련이 일단 그 과정에서 국가공동체가 무너지고, 소규모 공동체 방향으로 가지 않고, 천민자본주의로 가고 있단 말이에요. 중국도 마찬가지로..

강 : 자본주의 시장체제에 천박하게 재편되고 있죠.

황 : 중국이나 현재 러시아에서 이런 소규모 공동체를 지향하는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진다는 소식은 별로 들리지 않고 있어요. 그렇게 본다면 세계적으로 볼 때, 상당한 기간은 서구나 미국을 중시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의 격랑속에서 상당 기간은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 있는데요.

강 : 최근에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의 엠마 알트파트 교수가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책을 써냈거든요. 그 책 속에서 그런 얘기를 하죠. 구야마식의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자본주의 종말을 이야기해야 한다. 오일피크 피크오일 이야기와 더불어서 자원이나 생태적인 한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이윤, 잉여가치를 추구할 토대가 많지 않다는 것이죠. 쉽게 생각해보면, 자동차를 이렇게 급속하게 많이 생산해서 세계시장에 쫙 깔렸다고 했을 때, 새로운 시장이 더 이상 개척되지 않을 때, 이것을 그 다음에 만들어지는 잉여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는 맑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더불어 더욱 극명하게 나오고 있는거죠. 그랬을때 알트파트 교수의 이야기는 페르낭 브로델이 편 논리를 따라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세계사회 곳곳에서 신빙성 있는 대안, 싹들이 이리저리 터져 나와야 된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런 생태적인 자립경제형의 공동체 이런 것이거든요. 저는 그것만이 대안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태초부터 시장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태초부터 국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저는 태초에 마을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거든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가족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 커지면 마을이 되는 것이데, 그 잃어버린 것. 그게 그야말로 오래된 미래인 것이죠. 그게 장구한 역사적 과정 속에서 잃어버린 것. 어쩌면 자본주의 이전에 노예제나 봉건제 때도 경우에 따라서는 잃어버린 부분도 있을 거에요. 크게 보면 자본주의가 결정적으로 망가뜨렸지요. 그런 것을 찾아나가는 전형적인 답은 없지만, 공동체적인 관계망을 만들어내고, 땅과 가까이 하고, 자립순환형으로 만들어가고, 타인의 기생 위에 나의 웰빙이 보장되는 그런 경제가 아닌, 자기 땀과 자기 노력에 기초해서 나를 복되게 하고 타자를 복되게 할 수 있는.. 그런 건강한 경제를 만들어내는 것. 구체적으로 말하면 오일에 기초한 경제가 아니라 자연에너지라던지 아니면 에너지를 극소로 이용하는 그런 경제. 밥이 똥이 되고, 똥이 밥이 되는 생명살림의 순환의 경제. 간소하면서도 검소하고, 만족을 알고, 충분함을 알고, 삶의 결을 느끼고, 무늬를 만들고, 향유할 수 있는, 삶의 여백과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그런 살림살이 그런 것을 찾아내는 것이 과제라 할 수 있죠.

황 : 결국은 대안운동을 하는 사람이나 땅에 뿌리를 박고 살려는 사람들의 의견들이 그렇게 모아지는데, 이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봅시다. 파괴적인, 스스로 파괴적이기도 하고 다른 모든 것을 파괴하는, 자본주의에서 우리가 말하는 대안적인 세상으로 이행의 문제. 정치경제학에서 보면 이행의 문제가 포괄적인 논란거리 중 하나인데, 이게 자연스럽게 이행이 될 수 있는가, 그런 방향으로 이행이 객관적으로 가능한가? 이런 것을 얘기해보고고 싶네요. 강연 같은 곳에 나가면 그런 얘기를 하거든요. 사람들이 ‘너무 꿈같은 얘기 아니냐? 그래서 어떻게 사람들을 먹여살리냐? 소규모공동체에서 손을 일해서 어떻게 사람들을 먹여 살리냐?’ 이런 반론들을 많이 해요. 그러면 저도 궁해지죠. 이게 뭐 말을 그렇게 해도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은 분명히 아니고, 굉장히 장구한 시간이 걸려 이행이 되어야 하는 건데, 많은 사람들이 현체제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떨어져 나올 것이라는 거지. 또 하나는 극악한 자본주의를 견디다 못한 지구생태계가 뭔가 작동할거라는 거지. 이것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가 없는 것이라서 당해봐야 아는 것 아니냐 뭐 학자들이 예측은 많이 하지만... 앞으로 신자유주의가 상당 시간 더 갈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무한정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무한정 가지 못하는 것이 결국 지구생태계의 파괴적인 몸부림하고 대충 중복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싫더라도 우리가 말하는 이런 속으로의 재앙에 분산적인 경제로 나가지 않을 것인가하는.. 저는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그런 얘기하는데, 강 교수님은 이 이행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합니까?

강 : 저는 삶의 질 중심의 구조조정이라는 용어를 쓰죠. 현재 말하는 구조조정은 경쟁력 중심의 구조조정이잖아요. 자연과 인간을 다 파괴하고 갈구는 구조조정인데, 삶의 질 중심의 구조조정은 기존의 기업이나 국가의 역할이나 기능을 사회 생태적으로 변모시켜 나가자 그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민주적인 정책에 맡겨야 할 분야와 민중자율에 맡겨야할 분야, 시장에 맡겨도 좋은 분야를 좀 분류하고, 특히 주거문제 교육 육아문제, 의료문제, 농업, 에너지와 같은 분야는 민주적인 결정 내지 민중자율의 영역으로 가면 갈수록 많이 줘야하고, 시장영역은 소비재 영역,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것. 그런 분야는 갈수록 줄여나가는 커다란 차원의 방향성의 설정이 1번이구요. 2번은 1차, 2차, 3차산업 모든 분야를 떠나서 하루에 목표치로 4시간 정도의 과감한 노동시간 단축. 목표치죠. 헬렌 스코트 니어링처럼 하루에 12시간 활동을 한다면, 먹고 살기 위한 그야말로 subsistence를 위한, 생존을 위한 노동으로 한 4시간 정도 일하고, 농업이든 글쓰기든, 연극이든. 4시간은 자기계발이나 수양이나 사회활동에 쓰고, 나머지 4시간은 이웃이나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친교활동. 이렇게 삶의 시간을 재구성하는. 그 다음 세 번째는 일정하게 과도기적이니까 국가의 자원 재분배 측면에서 노동시간 단축을 하더라도 사람들이 먹고는 살아야 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정말로 현관계에서 누진세를 좀 더 가파르게 해서, 가파르게 해도 부자들이 굶어 죽지는 안하잖아요. 그 부분의 국방비로 줄이고, 탈세든 누세든 잡아내고 이러는 자원 재분배 기능을 좀 더 해서 결국은 민주적인 정책이나 민중자율로 맡기는 부분에 투자를 하고, 그것이 자원의 재분배가 되죠. 그러면서 개별기업이나 경제 분야에서 삶의 질을 더 높이데 필요한 부분은 살려나가고, 삶의 질을 망가뜨리고 환경을 오염시키고, 퇴폐향락적이고, 필요없이 과잉투자 되는 분야는 축소시켜나가고 없애나가야지요. 그런 식의 구조조정을 저는 삶의 질 중심의 구조조정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황 : 문제는 그것을 누가 집행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죠?

강 : 그것을 집핼시킬 수 있는 밑바탕은 풀뿌리에 우리가 이런 마인드를 공유하고 확산해서 그야말로 선거국면이나 선거국면이 아니더라도 이런 것을 공론화해서 나의 삶의 가치로 공유하는 정도만큼 희망이 나오는 것이고, 끊임없이 나의 개별적인 것에 집착하고, 기득권층이 그어놓은 스탠다드에 따라가려한다면 변화는 안오는 것이죠.

황 : 결국은 그렇게 변해가야되는데, 국가기구를 장악하는 사람들이 그런 마인드를 가져야 되고, 그 사람들이 그런 마인드를 갖고 정책을 펼려면, 국민들, 풀뿌리 차원에서 거기에 대한 강력한 지지이 있어야 되고...

강 : 지지뿐만 아니라 견인해낼 수 있는 정도의 파워가 커져야하는 것이지요. 셀프 임파워먼트 그게 정말로 풀뿌리가 선거를 통해서 똑똑한 사람들 보고 좋은 정치를 해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 힘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이런 요구를 하는데, 너희 하는 것 보니까 안되겠어. 우리 말 안들을래. 예를 들면 세금도 안내고.

황 : 그 지점에 다다르게 되면 갈등이 나올 수 있어요. 국가가 이것을 통제해서 그렇게 나가야 된다고 하는, 국가권력중심적인 그룹이 있을 것이고, 조금은 아나키적인... 우리는 그런 중심권력이 필요없다 우리는 자체적으로 해결하니까하는 그룹. 이행의 과정에서 그런 마찰이 나올 것 같다.

강 : 충분히 그럴 것 같다.

황 : 미국으로 치면 예전의 연방파와 자유주의파(민병대)들간의 갈등이 아직도 있잖아요.

강 : 그런 현상이 분명히 나타날 수 있겠지요. 저는 중앙집권화된 권력을 지양해야 된다고 보면서도.. 아나키즘, 자율권력, 셀프 오토노미죠. 자율성.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차원에서 마을이나 지역을 스스로 다스려 나가고, 옆마을이나 이웃과 항상 협의하고 조정해나가면서 같이 나가겠다고 하는 연대의식, 그것이 작은 대안인것 같지만 그런 원리가 세계화될 적에 세상에 평화도 오는 것이고, 기존의 인종적으로, 국가경쟁적, 기업별, 성별로 나뉘어져 있는 분열의 경계선들을 넘어갈 수 있는 새로운 원리가 바로 자율과 연대의 원리.

황 : 현대의 제국의 논리나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개인이나 집단의 자율성 내면..?? 이미 지난 일대기 동안 대중들을 철저히 쇄뇌시킨거 아닙니까 학습시키고.. 너희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강 :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아까 어머니나 할머니의 말처럼 ‘그 사람이 경제를 살린대잖아’ 이런 이야기 인데, 그런 의미에서 또 5년간의 학습과정에서 또 환상이 깨질 수 있다는 저는 그런 말씀을 드렸는데. 결국은 삶을 살아가면서 경험 속에서 실천 속에서 나오거든요. 문제는 기득권층들이 가리고자하는 노력들. 이데올로기적인, 말의 눈가리개처럼 분명히 문제가 싹터져나오고 대안의 싹들이 올라오는데 문제도 못 보게하고, 대안도 못보게 하고 저희들이 끌고 가는 곳으로 따라가게 만드는.. 거기에 속지 않는 지혜와 통찰력. 그리고 그것의 공유. 이런 것들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대안적인 운도의 요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황 : 크게 말하면 제국의 논리. 거기에 대항하는 거대한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일상적인 차원에서부터 국가적, 세계적인 차원까지. 그래서 우리가 늘 그런 얘기하잖아요. 영성을 얘기할 때 내 개인이 가족과 공동체와 경제, 우주와 하나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이런 얘기를 하지만은 지금 얘기하는 대안세계를 넘어가고자 하는 사회운동조차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되는 것 같다. 내 내면에서부터 국제적인 차원까지. 결국 하나라는 것이죠. 자율대 제국의 논리. 싸움에 있어서. 그렇다고 본다면 우리가 운동선상에서 나오는 분파나 노선 차이 때문에 서로 사움질 하는 것들을 지양할 수도 있지 않으냐 설득시킬 수 있지 않느냐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지난 70년대 80년대 어떤 운동의 관성들이 여전히 시민운동권에서도 뿌리 깊게 남아있어서 이번 선거가 이분들한테 상당한 철퇴를 내리면서 그런 예전 방식에. 전체를 보지 못하는 운동방식에 대한 일정한 정도의 반대의 시각을 마련해줬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반성을 하고 서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 주어질런지..

강 : 그런 것이 일종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이겠지요. 우리 하나가 세상을 다 구제하겠다는 욕심을 가지는 것은 좀 무모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실천은 고집스럽게 해나가는, 비록 한꺼번에 못 바꾼다 할지라도 내가 그 속에 신념을 걸고 순수한 마음으로 이것이 진리고 답이지 않겠느냐 하는 답이 있다면 일관되게 밀고 나가면 그게 울림으로 공명이 생기거든요. 기존의 사회운동 혹은 정치운동이 가졌던 부분을 저 나름대로 보면요. 김영삼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조차도 그 당시 운동하던 때의 이론적인 지평이나 철학적인 배경. 그게 그 당시에는 유효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가지고 세상을 바꾸는 이론적인 차원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볼 적에는. 정말로 지금 우리가 얘기나눈 바와 같은 인간문명 사회문명 시스템 깊숙이 스며들어있는 이런 문제들에 터치하고 고민하고 토론하고 이런 부분들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어떤 시스템을 구축하고 정책을 만들고 해도 될까말까인데, 국제적인 관계도 있고 저항세력도 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없이 표면적인 정도의 개혁성 이런 것을 가지고...

황 : 정권을 계속 잡아도 뭐 우측이 한푠데..

강 : 차라리 그럴 때는 넘겨주는 것이 속편하죠. 그리고 까발려보는 것. 이것을 매개로 해서, 또 타인의 까발림을 통해서 나도 까발려 볼 수 있는 것. 그런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적인 학습이 될 수 있는 것. 저는 그런 차원에서 좀 길게 보면 될 것 같고요. 그리고 갈라지고 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이중성이 있는 것 같애요. 운동에서 보면, 아니다 싶으면 끝가지 붙들고 울고불고 같이 가자고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조용하게 별도로 집을 새로 짓는게 낫지 않냐하는 이런 노선에 있고, 통큰 당별의 입장에서 보면, 그래도 우리가 제국의 세력이나 자본의 세력에 맞서 갈려면 함께 가야되지 않느냐, 저는 둘 다 맞다고 보거든요.

황 : 상황에 따라, 바람에 따라

강 : 싸워야할 때는 같이 싸워야하고 하지만 내부의 차이가 존재하고 하니까. 영원히 적대적 관계로 돌아서기 보다는 항상 열어놓는, 갈라설 수도 있지만, 따로 이면서도 같이. 같이 가면서도 또 따로 갈 수 있는 그런 열린 자세로 운동을 할 때 전망이 있다. 그야말로 적처럼 담을 쌓아버리면, 결국은 자기 고립을 자초하게 된다.

황 : 하나 덧붙이자면 무엇보다도 열린 마음. 또 어떤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어떤 진영을 만들어가고 확대하고..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구체적인 작은 사례들이 무수하게 여기 저기 만들어지는 것이 가장 큰 핵심이라고 봐요.

강 : 역설적이게도 그런 작은 시도들이 자본주의를 넘어가겠다고 하는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별로 없어요. 오히려 덩어리화 되어서 블록으로 존재할 뿐이에요. 최근 대안이라고 하는 볼리비아, 쿠바, 베네수엘라에서도 국가라는 덩어리 안에서 보이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자본주의적인 미국사회에 안에 암시 공동체라든지, 오크 공동체라든지, 유럽의 브로드호크라든지, 핀드혼이라든지. 이런 다양한 사례들이 오히려 자본주의 속에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자본주의가 절망적이기도 하지만 또 희망적인 부분을 보여주기도 하지요. 어쩌면 자본주의 자체가 만들냈다기 보다는 빈틈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죠. 완벽한 것 같지만 자본주의가 스스로 완벽하지 못해요. 예를 들어 인간 노동력을 산 노동을 죽은 노동으로 전환시켜야지 자기가 배불린다고 표현하잖아요. 근데 죽은 노동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라도 죽여서는 안되거든요. 살려두고 부려먹어야 되거든요. 바로 살려둔다는 그 점에 저항할 수 있는 토대도 같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확실히 잡을려면 죽여야 하는데, 죽이면 자신이 죽으니까. 그러기 때문에 빈틈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황 : 미국이 지금 빚더미 경제가 빚을 왕창 져가지고 내가 망하고 니들 다 망하더건가. 미국과의 관계를 끊을 수가 없어. 중국이나 일본이, 미국에 돈을 엄청나게 빌려준 나라들이 다들 공동운명체 아닙니까? 결국은 크게 보면 두 가지로 정리가 되지 않을까 싶으네요.  하나는 운동의 연대와 소통이라는 측면. 신자유주의 혹은 제국의 논리에 대항하기 위해서. 또 하나는 구체적인 실현지를 만들어가는 작업. 이 두 가지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요. 이 실현지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 지금 볼리비아나 쿠바라던지 이런 얘기를 했지만, 이런 나라는 만약 정치 지도자가 바뀌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지요.

강 :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정치사회적인 억압이 존재할 수도 있어요. 대외적으로는 민중무역이니, 미국에 대항하는 모습이니 하는 것을 보면 아름답게 보일 수 있지만, 내부적인 사정은 또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황 : 중국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첨예한 사례 아닙니까?

강 : 그래서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모순적인 현실에 저항하는 노력을 하면서도 그들을 닮아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나름의 고유한 대안을 만들어내고, 저항과 대안의 변증법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대안을 많이 만들수록 그 속에 새로운 길을 발견하기 때문에, No라고 말할 수 있는 저항의 토대가 더 커지거든요. 그리고 저항을 거세게 하면서도 정말로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해서라도 그 대안의 실험과 ?들을 많이 만들어내야지요.

김 : 아까 초반에 말씀하신 내용 중에서, 성장이라는 것이 거의 모든 자본주의의 속성의 핵심적인 내용처럼, 끊임없는, 멈출 수없는. 과연 성장이 유럽같은 경우 제로성장이 되고 마이너스성장까지도 성장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서 제로성장 혹은 마이너스로 가야하는 것 아니냐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은.... 그것을 깨야만.... 여러 가지 한계들을 봐서는... 우리나라는 아직 토목을 중심으로 하는 성장. 이명박이 중심으로 내세우는 지금 이렇게 가고 있단 말이죠. 성장이라는 것을 짚어보는 것...

강 : 소위 말하는 성장 중독증이 가동되고 있다. 우리의 사회경제 시스템에. 그래서 오죽하면 마이너스가 되어도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표현하지요.

강 : 성장이라고 표현을 해야하는 거지요. 그래야 사람들에게 먹히니까. 간소화라든지 축소라든지. 그야말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 할 때의 ‘작아진다’라던지. 이렇게 표현해도 될 것을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정말 흥미롭게도 성장 중독증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쩌면 삶을 간소화 하고, 작아지고, 그 속에서 자율적으로 조절해나가고,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때, 행복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로부터 심어진 성장 강박증, 나 스스로도 외형적으로 드러난 부분에 집착해서 끊임없이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더 커져야 된다하는 의식, 집단적인 성장 강박증이 사회경제적인 토대로 깔리고 세계전체적으로 보편화되었다고 봐야. 그리고 선진국은 이런 성장의 과실로서의 일종의 기득권이랄까 많은 소비 많은 소유의 중독되어서 그것을 떨쳐내지 못하고, 아래쪽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후진국 사람들은 선진국 모델에 환상에, 누구나 다 될 수 있는 것 처럼, 허리띠 졸라매기만 하면 할 수 있을 것처럼 환상에 젖어, 그런 모델에 대한 집착증으로부터 탈피하지 못하고. 상하가 다 얽매여 있다는 것이지요. 한 나라 안에서 계층적으로도 그렇고 전세계적으로 선진국, 중진국, 후진국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선진국으로 가야하는 것을 전제한 개념이지요. 성장도 굳이 마이너스 성장으로 표현하는 것이 모두 하나로 꿰뚫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라고 보구요.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경제나 사회의 외적인 성장 내지는 강한 국가, 세상에서 최고로 좋은 국가라고 하는 외적인 성장을 우리가 염원하는 것만큼 부실한 것이 우리의 내면적인 성장인 것 같다. 내면적인 성장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만큼 외적인 성장에 집착하는 것 같다. 중독 이야기와 같은 맥락. 황선생님이 말씀하셨지만 자기 삶과 우주적인 삶과의 영성적인 관계 연관성, 그물망 이런 것에 대한 생각 보다는 끊임없이 타자를 제치고, 나를 키워야 되겠다고 하는 존재론적인 발상이 사실은 세상을 망가뜨리는 길이다.

황 : 지금 문제는 전 세계 190여 개국의 나라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모든 학교에서 성장중독 교육을 시키거든. 모든 나라에서 선거할 때 마다 ‘성장하지 말아야한다. 계속 성장하면 다 죽는다’고 이런 말하는 사람들은 매국노가 되거나 또라이가 되거나 정치지도자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성장중독에 걸린 이 지구공동체 혹은 인간공동체가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성장중독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모든 나라 정치판을 보면 한국과 똑같은 상황이니까. 정도의 차이만 있지. 여기서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또라이 취급을 받는 거야. 성장하지 말자 얘기하면,

강 :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맥락하에서 대화하니까 대화가 되지. 다른 곳에 가서 말하면 미친놈이라고 그래요.

황 : 난 동창회 나가면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이 성장중독에서 과연 어떻게 깨어나고, 국가를 저성장이나 마이너스성장으로 축소하는 것으로 끌고 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인데, 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을 대중들이 거부하는 것 아니냐 지금. 비관적인 얘기지만 망할 수밖에 더 있느냐 우리가. 그래서 요즘 이렇게 말하고 다닌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망할 수밖에 없다. 여러분의 사고방식, 생활방식, 세계의 흐름 등 모든 것이. 나같이 이런 얘기 하는 사람이 또라이 취급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될 것이 뭐냐. 난 요새 여러분들은 지금 죽음에 대한 철학을 가질 때다.’

강 : 죽음에 대한 철학이 진짜 필요하지요.

황 : 왜 참 없이 망하는데, 이 망하는 시간을 알 수 없다는 거죠. 언제 어디서 한꺼번에 망할지, 하나씩 망할지, 집단적으로 망할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죠. 그래서 늘 이 생태위기의 시대에, 경제 위기의 시대에는 죽음의 철학을 가져야된다는 거지요.

강 : 좋은 말씀이지요. 이런 위기의 시대가 아닐지라도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만큼 삶을 진지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생명공학자에게 어거지로 바라는게 하나 있다면 제발 생명연장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누구나 공평하게 80 정도 되면 삶을 마감할 수 있게 칩을 장착한다거나 하는 그런 연구나 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억울하게 교통사고로 죽는 이도 없고, 의미 없이 100살 200살 살 필요도 없이 70세 정도 되면 내가 이제 10년 정도 남았으니까 가지 전에 이런 일 이런 일은 꼭 하고 싶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잖아요. 그런 뜻에서.. 세상이 망하는 것이 가까워졌으니까 준비하자는 의미도 있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필요하다고 보구요. 아까 토목국가 얘기했는데, 개발하고 발전하고 성장하기 위해서 토목국가 논리를 펴는 것이 현재의 단계라면, 토목국가라는 용어를 써서 토목국가를 넘어가자는 얘기인데요. 토목국가 좋다 이거에요. 이것을 사회생태적으로 건강한 모습으로 돌리기 위한 토목을 해야 된다는 거지요. 예를 들자면, 아파트를 허물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시멘트 건물을 허물고, 흙집이나 돌집이나 주변의 소재로부터 쉽게 구할 수 있는. 그런 의미의 질적으로 다른 토목. 그것을 통해서 일자리가 정말 많이 나와요. 토목공사를 통한 일자리 창출인데. 질적으로 다른. 그래서 우리가 전세계가 사회생태적인 혁신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지금 우리가 이루어놓은 에너지로부터 자연소재, 이런 집이나 옷이나 온갖 살림살이 경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건강한 것으로 되돌리는 노력. 그것이야말로 지금 절실히 필요한 살림살이 경제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황 : 토목이니, 성장이니 하는 모든 것들이 살림살이를 살리는, 보강하는 이런 쪽으로 맞춰줘야 하지만 정반대로 가고 있으니까.

황 : 얼마 전에 난 태안 앞바다 원유유출사건. 그것을 좀 저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노무현 정권이 이명박 대통령 될 사람이 정책을 펴나가기 쉽게 잘 기초를 만들어 줬다는 말을 했는데. 이 정권교체기에 나타난 오일사건이 상징적으로 볼거리를 주는 것 같아. 왜 오일이 그 앞에서 엎어졌냐는 이거지. 오일로 대변되는 석유산업. 극단적으로 밀어붙인게 신자유주의 정책 아녀? 계속 밀어붙이면 터진다 이거지. 그것을 태안 앞바다에서 딱 보여준거지. 하필 동해안도 아니고 새만금 바로 위에서. 더 극대화해서 보여줄려고. 해안생태계가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그 짐은 이제 이명박씨가 진다는 것이지요. 이명박씨는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앞으로 우리가 봐할 사항이지만. 이 사람도 말끝마다 환경을 얘기해요. 틀림없이 경부운하 건설하면서 플랭카드가 이미 다 나와있어요. 환경친화적인 운하를 건설하겠습니다. 생태계를 살리는 운하를 건설하겠습니다. 고속도로에 그렇게 걸려있거든요. 환경친화적인 유조선을 만들겠습니다. 환경적인 석유산업을 건설하겠습니다. 전부 정치적인 레토링만 있고, 내용은 하나도 없고, 이런식으로 가게 된다는 말이지요. 석유츄출사건이 내가 보기에는 상징적다고 생각해요, 경제정책의 연속선상에서. 축복이 아니고 영어로 말하면 오맥이라는 거지. 신자유주의 정책의 오맨으로서 이 석유츄출사건을 봐야한다는 말이지요.

강 : 저도 태안사건을 보면서, 오늘 4명인가 구속되고 그랬지요. 삼성중공업이 주 회사고, 삼성물산 소속의 삼성중공업기계인가 그렇고, 보험은 삼성화재에 들어있고, 언론에 돈을 뿌렸는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더라고요. 그 네 명이 직접적인 책임이 있어서 구속하고 했지만, 단순히 부주의해서 재수없이 발생한 사건이라고 바라보기 보다는 우리가 오일문명에 기초해서 우리의 소비생활과 산업생산과, 농업, 1, 2, 3차산업, 그리고 우리의 전면적인 소비생활이라는 것이 오일문명에 기초해있고, 이렇게 대량으로 생산해서 대량으로 소비하는 시스템 자체가 말씀대로 상징적인 의미로 새만금에서 가까운 태안에서 터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좀 더 사고를 조심하고, 예방하고, 초동대처를 잘하고, 이런 사태로 해결책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근본적으로 우리의 생활문명과 생활세계와 경제세계를 좀 더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고, 대안적인 어떤 삶의 방식을 생각하고 토론하는 계기.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황 : 그런 점에서 지식인들이 활발하고 글도 쓰고, 방송에 나가서 대담도 하고, 직접적으로 작업했느니 그런 것이 아니라..

김 : 좀 더 구체적으로 생태적 경제라고 했을 때, 개념적으로 설명은 많이 하셨는데, 그것이 나타는 구체적으로 와닿는... 경제라는 영역과 생태라는 영역이 많이 다른데, 완전히 별개인 것처럼 ,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가능한가? 아까도 토목을 해체하는 방안을 얘기할 때도.. 지금 당장 가능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 후세대가 그 짐을 다 떠안을..

강 : 담장허물기가 시행되고 있잖아요.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잖아요.

김 : 그것을 좀 더 생태와 경제라는.. 접목대상으로... 서로가 피부에 와닿는.. 생태와 경제라는 것이 접목해서 실제로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가는구나 하는 것을 피부에 와닿게 하는 것이 가능하지..?

강 : 가능하다고 보고요. 우선 경제라는 말에, 아까 황선생님과 초두에 이야기했지만, 오이코스 노모스트에서 왔다면, 살림살이의 원칙 혹은 살림살이의 관리라는 어원을 갖고 있다면, 경제 자체가 살림의 과정이기 때문에, 굳이 생태적 혹은 살림살이 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원래 의미가 온전하게 산다면, 그것을 모두 담아내고 있다... 자본주의 돈벌이 경제가 원래적인 의미로부터 이탈되어 나와서, 그것이 자체적으로 독립하고, 인간의 내면의 건강한 욕구로부터 분리되서, 오히려 인간의 욕구를 조장하고, 부풀리고, 끊임없이 확장시켜나가는 과정에서 변질되어갔기 때문에, 이것을 좀 더 원래적인 의미로 돌리고자 하는 의미에서, 살림살이 또는 생태적 또는 생명 이런 수식어를 붙일 수 밖에서 없다. 안타깝지만..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생태적인 경제가 무엇이냐? 저는 흔히들 사람과 자연의 조화를 생태적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거기에 더해서 사람과 사람의 조화도 같이 들어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유기농생산물을 생산하는 농민과 그것을 소비하는 소비자들이 직거래를 통해서 서로 생명살림을 해나가는 과정. 그것이 공동체적인 관계망의 복원에 가장 상징적인 예라고 생각해요. 유기농법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직접 보여주고, 또 그것을 직거래를 통해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만나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생태성, 공동체성을 복원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런 의미에서 직거래나 유기농산물의 거래라고 하는 독립된 자본으로 동떨어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관계망 속에서 다양하게 활성화 될 수 있을 때, 건강한 생태경제가 된다고 생각하고요. 그 다음에 집이나 옷이도 마찬가지요. 숨 쉬는 집, 숨쉬는 옷, 건강한 먹거리. 이것이 가장 기본빵 아니겠어요? 그리고 문화를 즐긴다라고 할 때도 그런 문화의 내용도 우리의 정신세계나 잃어버린 감성이나 생태적인 감수성을 예민하게 다듬어주기도 하고, 눈물도 한 번 흘려보고, 정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쁨을 느껴보기도 하는 그런 문화를 만들고 향유하는 것. 저는 이런 것들 모두가 생태적인 경제라고 보는 것이죠.

황 : 요새 외국에서는 그린비지니스라는 것이 유행하고, 네츄럴 캐피탈리즘 이런 책들도 많이 읽히고 하는데, 지금 얘기하는 것들은 소규모의 옛날에는 비공식 부문으로 치부해왔던 도농공동체라던지, 작은 마을에서 주고 받던 것들을 확대해나가자고 하는 것인데, 외국에서 지금 나오는 산업주의를 어떻게 이것을 생태적 원리에 의해서 재구축하느냐? 어떻게보면 그것이 과연 가능한 개념인가? 산업화라는 것 자체가 생태주의를 파괴하고 들어선 것인데, 산업화라는 것을 어떻게 생태적 원리에 의해서 재구성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 논란이 꾀 있어요. 예를 들면 포르켈이 말하는것. 산업화 대공장에서 생산하는 물품이 다음에 재활용될 것을 미리 예상하고 생산해야된다는 것이지. 이것을 법적으로 비전을 해야한다는 것이지. 전체 산업시스템이 순환될 수 있게, 그런데 설사 이렇게 만들어 놓는다고 할지라도, 결코 순환되지 않는 자원들이 혹은 생산물들이 너무나 많다는 거지, 현대 문명 자체가 자연상태에서 절대 용해되지않고, 순화되지 않는 물질을 너무 많이 쓰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 생태경제로 나가기 위해서는 그런 물질들의 생산을 금지시켜야 된다는 것이지. 그것을 금지 시켰을 때 현대사회가 유지가 되냐는 말이지. 다른 종류의 사회인거지. 그리고 금지시킨다면 현재 우리가 누리는 여러 가지 문명의 이기와 편리한 시스템이 작동이 안될 수 있다는 것이지.

김 : 근데 실제로 기후변화협약이라든지, 이후에 교토의정서체제로 가잖아요. 향후 몇 년 내에 CO2 의무감축대상국이 되고, 그런 체제가 되면, 이런 것들이 이행이 되지 않으면 수출이 되지 않는것잖아요. 우리나라의 물건들이 FTA의 체제에도 그런 것들을 전제로 깔고 있는데, 실제로 오염물질이 아예 접근 조차도 안되게 하는.. 그런 것들이 전제가 되는 산업이.. CO2거래, 감축이 안된 나라들은 사야되는 거잖아요. 선진국은 이미 감축했으니까 그만큼 안된 나라에 권리를 팔고..

강 : 새로운 국제 논리로 남용되는 그런 위험성이 있고, 그것이 부분적인 땜방이지 근본적인 처방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지연의 효과는 있을지 모르지만, 아까 말한 말씀하신.. 지금 망해가고 있는데, 소용이 있느냐 이런 차원이거든요. 그래서 사실 그런 논의도 분명히 이런 관점에서 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그럴 때 핵심은 이런 것 같애요. 과연 지금 현대, 근대인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방식, 누리고 있는 것. 크게 보면 기득권이죠. 문명적인 기득권을 포기할 수 있느냐? 포기에 대한 두려움. 그 부분을 직면해서 우리가 토론하고 넘어갈 수 있을 때, 새로운 대안이 가능해요. 진정으로 지구생명계 전체가 망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둔감하고 무감하면서도, 눈앞에 보이고 있는 문명적인 기득권이 상실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 강한, 이 이중의 모순. 이것을 넘어가야지만 다른 이야기가 가능한 거에요. 그 속에 갇혀서는, 예를 들어 지금 위기가 오고 있다는 것을 모험 기술로 넘어갈 수 있고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일부의 과장이야 이런 식으로 말하는 부분들은 기존의 것을 계속 가겠다는 거 아니에요? 또 지금 두려움에 떨고, 지금 놓치기를 포기하는 것은 강박증과 집착증과 중독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크게 보면 그 두 가지가 같은 동전의 양면을 보여주는 것인데, 진정한 위기는 못 느끼고, 눈앞에 보이는 혜택은 놓지 못하는. 이 현상이 어찌보면 우리가 토론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이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그 부분을 관통해서 ‘도대체 이것이 뭔데?’라고 헤쳐서 그렇게 살아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새로운 차원을 열어낼 수 있다면, 그 때 비로소 새로운 희망의 싹이 나올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맨날 그 수준에서 맴돌고 만다 그렇게 생각해요.

황 : 결국 어떻게 보면, 개인의 각성, 깨달음. 그것을 중심에 둔 얘기로 볼 수 있는데, 근데 이 개인의 각성에 개인적 취향이나 개인이 공부하고 깨닫는게 아니고, 내가 노력을 안해도 사회전체의 사회적 압력이라고... 그 원인이 누가 지적을 했거나 내가 공부해서 깨달은게 아니고, 사회적 생태적 압력으로 인해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사고를 하는거에요. 그런데 이 생태적 압력, 사회적 압력이라는 것이 인간들이 만들어 나가는 측면이 있고, 자연이 스스로, 자연이 자체가 살아 있는 유기체니까, 스스로 만들어서 그런 압력을 넣기도 하기 때문에...

강 : 지구온난화가 대표적인 것이죠.

황 : 지금 갑작스레 들이닥친 집중호우라든지, 제주도에 천 년에 한 번 날까말까한 호우를 맞았는데, 여기서 사람들이 ‘천 년에 한 번 올까말까한 것이니까 앞으로 천 년 뒤에 다시 오겠지’ 이게 아니거든. 지금 상황이

강 : 근데 그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라고 ‘천년에 한 번 오겠지’, ‘재수 없어서 이번에 터졌지’, ‘그렇게 심각한 거 아닐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거지요. 무감성, 둔감성

황 : 이것을 정점으로 놓고 볼 때 이런 일이 사방에서 터지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의 생태적 압력으로 개인에게 느껴진다는 것이지, 관행적으로 생각을 하더라도, 그래서 결국은 개인들의 깨달음이 옛날과 비교해서 상당히 전면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지. 비과학적인 얘기인지 몰라도 이게 일어나면은... 빨리 깨중 일어난다는 것은 그 만큼 위험하다는 거지. 왜 사람이 죽기 직전에 ‘아 내가 잘못했구나’하고 깨우치는 거와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지 않는가 하는 느낌이 들어요. 사회적 생태적 압력이 뒤로 갈수록 거세지니까. 그렇지 않고, 서구 일각에서 일고 있는, 이 산업자본주의 시스템을 좀 바꿔서 면피해 보려고 하는 것들은 결국은 기득권을 놓지 않겠다는 몸부림으로 봐야 할거에요.

강 : 지연의 효과와 더불어 새로운 제국 지배 효과.

황 : CO2감축한다고 하더라도, 전부 공장은 현지화 해서 제3세계는 법률이 허술하잖아.

김 : 지금 현재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미국이나 유럽이나 모두 중국으로 집중해 있잖아요. 중국은 의무감축대상국가에서 유예된 상태라서.. 결국은 그런 이해관계를...

황 : 그런 것이 국제적으로 통용 될수록 제3세계는 죽어나가는거지. 이번에 인도를 다녀왔는데, 내가 거기서 한 마디로 뭐라했냐면, 내연기관은 인류의 재앙이라고. 내연기관 어떤놈이 발명했는지, 물론 나도 타고 다니지만, 제3세계 도시 한 복판에 있으면 숨을 못 쉰다. 인류의 재앙도 이런 재앙이 없다. 선진국이 주도가 되어서 기후협약을 하든, 경제협약을 하든지 뭐든 하면, 제3세계는 죽어난다는 거지. 우리는 그것은 그것대로 거부할 명분은 없으니 철저하게 우리는 풀뿌리 차원에서 이런 운동을 적극적으로 해나가는 것 외에는.. 이 일을 제껴두고,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떠들 필요가 없다는 거지. 물론 외국에서 공부해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하게 내버려두고, 그렇게 박사학위 딴 사람들이 많잖아. 그런 사람들은 그걸 해야지 돈벌이가 되니까. 내가 외국에 있을 때, 한국에서 환경운동 하다가 유학 온 친구들이 이 친구들이 대부분 이런 식의 전문가의 길로 가더라고. 환경운동하던 사람들도 저렇게 되나? 저거 좀 문제가 있다. 환경운동해서 키워 놓았더니, 외국에서 학위따서 그런 곳에 쳐박혀 있으니까. 인력이 필요한데 현장에서 길러진 사람들 까지 다 기어들어가서... 이건 아니라고 보거든. 점점 우리도 서구사회처럼 전문화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너무 닮아가는 것이 아닌가? 너무 기회주의적인 접근으로 환경문제도...

김 : 어쨌든 우리가 주류로 다 가고 있는 흐름은 사실 너무나도 ??? 깨닫게 되는 시점이 올 수도 있겠지만, 큰 흐름 자체는 여전히 큰 힘을 갖고, 밀고나갈 것이 보이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갈대로 가라. 그렇게 얘기하면 너무 큰 흐름을 지켜만 보는 것은..

황 : 지켜만 보는 것은 아니지. 아까 소통, 연대 이런 얘기가 다 그런 국가의 책임있는 사람들에 대해 견제하고, 이쪽 방향으로 견인해 내는 노력을 함께 해야지

강 : 정항과 문제제기를 하면서도 거기에 에너지를 다 소진할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대안을 꾸준히 실현하고 개발하고 창조해야지요.

황 : 아까 내가 환경운동하다가 연구소 들어간 사람들 이야기를 잠깐 했지만, 사실 이런 사람들이 중간에서 그런 역할들을 잘 해야되. 왜냐면 이 사람들은 권력 내부에서 본 사람들이 때문에 직격탄을 날릴 수 있는 위치에 있거든.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욕하면, ‘니들이 여기 들어와봐라’ 하거든. 그러나 권력 내부에서 그런 숫자를 만들어주고 하는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단 말이에요. 근데 거기 들어가면 얘기를 못해요. 월급을 받기 때문에. 그래도 이런 사람들을 끌어안고, 권력을 자꾸 이쪽으로 견인해내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 쉬운 일은 아닌데, 일단 권력쪽으로 들어가면 대화가 잘 안돼.

김 : 정치적 결정과정에서도 발언권이 없고, 그런 것들을 담아내는 열려있는 정치구조도 마련되어져 있지 않은 것이지요.

황 : 저 사람들은 답답한게 있더라고. 자기들은 이런 쪽에 몸을 담아서 생각은 있는데, 이것을 권력자한테 솔직하게 전하지를 못하는 것이지. 그리고 전해도 이것이 내키지가 않은 것이지. 그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으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월급받아먹고 계속 속에 불만 만들어 놓는거지

김 : 이번 토목성장, 돈벌이 경제.. 이런 것들의 흐름들 속에서 생태와 경제를 접목해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매력적인 제안. 그 사람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법제도는 없겠냐는 말이지요.

강 : 저는 오히려 지난 3년 동안 마을의 고층 아파트 반대를 하면서 느낀 것이, 결국은 권력의 결정과정에 관한 문제인데, 어느 행정 단위든 기본적으로 이런 중독사회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개발과 돈과 성장이 같이 간다. 그 마인드로 추진하기 때문에 중간에 좀 더 눈이 뜨인 학자나 전문가가 제안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한편으로 씨알도 안먹히는, 따로 노는.. 더 심하게는 구색맞추기에 아주 도움을 주는 것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이런 이런 훌륭한 사람들의 자문을 듣고 다 걸러낸 것이다라는 말에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것이 되버린다. 그 역할이 더 나쁘다.

황 ; 노무현 정권 들어서 제일 변화된 것이 자문위원단을 엄청나게 만든 것

김 : 민주, 노동운동했던 사람들을 모두,,

강 : 기본 패러다임이 개발과 성장이나 중독 이런 패러다임이 아니라, 생명살림이고, 생태고, 더불어 단위이고, 무소유 등 그런 차원에서 건강한 살림살이 경제를 하겠다는 차원이라면 이 분들도 힘들 싣고, 뭔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할거란 거에요. 오히려 그런 속에서 개발 논리를 배척할 수도 있는데, 기본 가락이 개발과 성장으로 가다보니까 알리바이 역할밖에 할 수 없는 것이 눈앞에 보이더라구요. 자리를 차고 나오는 것이 답이에요. 그럴 때는 내가 공범역할을 안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유일하게 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먹고사는 부분이 달려있기 때문에 그런데, 진정한 의미의 생태경제는 아니죠. 자본종속적이고 권력의존적이고.. 저도 크게 보면 대학자본에 종속되어 있지만 내가 할 말은 다 한다. 아무래도 대학은 자율적인 분위기가 있어서.. 민주화의 효과

황 : 노무현 정권 들어서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것이 만들어져서 진보세력이라든지 환경학자나 많이 들어갔거든 실질적으로 한 일은 거의 없다는 말이에요. 철저하게 구색맞추기밖에 못한 거지. 작년인가 얼마 전에 지구의 날에 쓰레기 앞에서 지속가능한 개발을 하겠다는 선언문을 낭독했는데, 그 선언문을 그 위원 중에 아는 친구가 작성했는데, 그 친구가 상당히 오랫동안 고심해서 작성했어, 마지막에 나한테 검토해달라고 해서 쭉 읽어봤는데, 서구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내용들을 좋은 것만 취합해서 만든 거여. 우리 현실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 낸것 아니라. 이것을 어떻게 썼냐? 노무현이 그냥 티비 앞에서 읽고 끝이야. 이것이 어떤 산업이나 경제 전반에 걸쳐서 이렇게 될 수가 없었어. 위원회에서 반영할 수 없는 구조니까. 결국 그런 위원회 활동들이 특히 예민한 부분 일수록 구색맞추기가 될 수밖에 없다. 나도 개인적으로 제작년인가 영어마을 종합개발사업 평가위원 자격으로 1년 정도 활동을 했는데, 거기 전부 대학교수야. 박사 아닌 사람은 나밖에 없어. 그런데 활동을 하다보니, 나 혼자 또라이 같은 소리만 하는 거여. 같이 다니기 불편하고 해서 1년 하다가 그만 두었는데, 결국은 경제개발 박정희 이래로 해오던 방식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점점 더 세련되게 구색맞추기 식으로 계속 하고 있는 것이지, 지식인들이.

강 : 나오셨어요?

황 : 나왔지. 농림부에서도 도움이 안되지. 계속 개발하지 말자. 왜 관광을 하려고 하냐 이런 소리

강 : 전남 장흥인가 거기는 ‘손대지 말자’

황 : 슬로우 퀵퀵 한 곳이 세 곡이 있어

강 : 그래도 우리 군은 향후 10년만 개발 안하면 경쟁력이 있어요. 밑에 참모들이 그래도 괜찮은 사람들이. 진안군인가 그곳에서는 구자인 박사가 많은 역할을 많이 했다고.. 그나마 건강한 활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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